밀라노칙령 [한] ∼勅令 [라]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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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전례 [한] ∼典禮 [라] ritus mediolanensis [영] milanese rite [관련] 암브로시오전례

이탈리아 밀라노 교회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sius, 240-297)가 처음 사용한 전례로서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였기 때문에 밀라노 전례라고 불린다. 그러나 밀라노 전례는 밀라노 교회에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교회에서도 사용하였다. (⇒) 암브로시오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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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관련] 신앙

⇒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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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첸티 [원] Mindszenty, Jozsef

Mindszenty, Jozsef(1892-1975). 헝가리의 추기경. 솜보트헤이(Szombathely) 부근에서 태어나 빈에서 죽었다. 헝가리에서 20세기 초부터 50여년간이나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항거한 가톨릭 성직자였다. 1915년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정치활동을 시작, 1919년 전체주의 베라쿤왕 정권의 적(敵)으로 낙인찍혀 투옥되었다. 1944년 베스프렘(Veszprem)의 주교로 임명된 직후에 국가사회주의당 정권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다. 1945년 헝가리의 수좌 대주교로 지명되는 동시에 에시터르곰(Esztergom)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946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헝가리의 가톨릭계 학교의 국유화를 거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8년 공산주의정권에 의해 체포, 1949년 반역죄가 적용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반공봉기 때 출옥하였다. 공산주의 정권이 다시 지배하게 되자, 그는 부다페스트의 미국 대사관에 망명할 것을 모색하였다.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헝가리를 떠나라는 제의를 받고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탄원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었다. 교황청의 빈객자격으로 빈에 거주하면서 그는 바오로 6세 교황의 헝가리 공산정권과 외교관계를 가지려는 시도를 비난했으며, 1974년에는 대주교 및 수좌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에 그의 ≪회고록≫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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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한] 民主主義 [영] democracy [독] Demokratie [프] democratie

민주주의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에서 생겼다. 즉 그것은 ‘민중의 지배’(Demos+Kratia)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권력이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서 장악되고 행사되는 군주제와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해서 행사되는 귀족제와 구별되어 사용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원리 또는 정치형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목적 또는 내용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의미는 다른 것이 된다. 링컨은 민주주의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라고 말하였는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정치라는 말은 민주주의의 수단성 또는 과정성을 말하는 것이고, 인민을 위한 정치라는 점은 민주주의의 목적과 내용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켈젠(H. Kelsen)은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단이고 과정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잘 설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인민을 위한다는 목적만을 강조할 때 인민의 정치적 참여가 없이 지배자의 자의적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인민을 위한 정치도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의 참여없는 정치는 아무리 인민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대로 인민에게 당장에 큰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책결정 과정이 인민의 참정권을 바탕으로 인민의 다수의사를 공정하게 반영하였을 때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실천원리로서 민주주의를 파악할 때 민주주의는 이론적 개념이라기보다 역사적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순수한 사유(思惟)의 작용으로 추상적으로 구성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생긴 것으로 영국의 청교도(淸敎徒) 혁명과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등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서 성장한 것이지 어떤 이념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민주주의는 특수적 개념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고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원리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민주주의는 인간이 그 창조주인 하느님에 의해서 부여받은 본성에 따라 자유를 누리고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창출된 이념이며 제도로서 어떠한 나라에서나 공통으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민주주의는 자기 결정의 원리, 자기 각성, 자기 완성의 원리인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자율적인 의사결정, 행위에 있어서의 자기결정성, 행위결과에 대한 자기책임성을 가지는 사회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권력의 신화화는 민주주의와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대주의 세계관이다. 모든 사람은 창조주에 의해서 각각 다른 은총 또는 재능을 부여받았다. 비록 성별이나 능력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召命)의 가치는 똑같은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인격이나 존엄성 못지않게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타인의 의사나 행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가장 비(非)민주적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존 로크가 모든 사람의 의사는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등수학만 알면 민주주의는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정치원리는 원래 어떠한 특정한 정치체제를 지지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단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치체제라면 그것을 찬양하고 그렇지 않은 체제는 그것을 배격할 뿐이다. 즉 교회는 인간 인격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체제라면 모두 지지하고 찬양한다.

교회의 문헌들(비오 12세, J. 마리탱, J H. 하로웰)은 민주주의는 인민을 신뢰하는 정치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야만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인민을 강제한다는 것은 위선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평등 및 정의와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감각을 자기 안에서 계속 성숙시켜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지와 의지를 갖춘 인간상호간의 기본적 합의를 내포하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그 자신 속에 공동의 인간적 신조 즉 자유의 신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부르즈와 민주주의의 과오는 민주주의 사회를 하나의 경기장 또는 투기장처럼 생각하는 데 있었다.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기본 요소는 정부의 권력과 기능을 피지배의 합의에서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설득과 토의에 의한 정치다. 그러나 피지배의 합의를 얻은 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합의라는 것은 하나의 계속적인 과정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합의란 소극적인 승복,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적극적인 찬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성실한 반대가 인정되고 용인되어야 한다. 합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합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타협은 진정한 합의가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타협을 위한 타협이라면 이것은 인간을 보다 인격화하는데 있어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자유로운 토론은 가장 본질적 요소다. 입법과정에서 토론은 때로는 어리석고 비능률적으로 진행되고 과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토론의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에서 토론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수결의 원리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다수결의 원리를 채택하는 이유는 아무리 무지하고 전문가가 아닌 대중이라 하더라고 그들이 많이 참여하는 결정이 한 사람이나 소수자에 의한 결정보다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신념 위에 서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哲人政治)는 그 결과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정신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이 지적이며 도덕적인 성격을 함양해야 하며 민주적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다수결의 원리를 보다 잘 적응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정치론은 어떠한 특정한 정부 형태를 고집하지는 않지만, 가급적 국가권력이 분립되어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반대한다. 권력이 한 기관이나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권력이 남용되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권력의 강대화는 인민의 기본권분만 아니라 중간 단체들의 고유한 영역까지를 간섭하거나 독점하기 쉽기 때문에 ‘약한 정부’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권력의 악용과 노예화는 권력의 본질을 전도시킨다. 국가권력은 때때로 현세적 문제뿐만 아니라 영적 문체, 지성의 문제, 양심까지도 침범하게 되기 때문에 그 고유의 한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자유는 그만큼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만큼 문제점이 많은 제도도 없다. 민주주의는 자주 무질서하게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인민의 책임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이념자체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인민의 잘못이다. 민주주의를 분석해 보면, 민주주의는 자유를 가진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가능성을 얻는 신앙적 모험인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대표 또는 대리의 관념에서 나온다. 권력자는 인민의 대표자 또는 대리자로서 어떤 특정범위 안에서 인민의 권위에 참여하고 인민의 모상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권력자 또는 통치자는 인민의 살아있는 모상으로서 이성, 자유의지 및 책임을 가지는 인격적 모상이다. 권력자는 양심의 명령과 덕의 판단 또는 공동선(共同善)의 요청에 따라 일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며, 인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인민에 의해서 감시되어야 한다. 참다운 권력자는 봉사자로서 인민의 종이 될 때 참다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예언자적 선구자적 소수파의 문제다. 흔히 예언자적 소수파는 인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으나 사실은 인민을 경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분이 전체의 이름으로 말할 때 언제나 그 부분은 자기가 전체라는 것을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 결과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려고 하거나 자기들의 생각대로 전체를 만들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인민을 기만하기 쉽다. 예언자적 소수파는 반드시 인민으로부터 선출된 대표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그것을 구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민주주의에서 예언자의 출현은 때로는 필요하면서 동시에 위험하다. 왜냐하면 영감이나 예언이 있는 곳에는 가짜 예언자로 보이나 진짜 예언자가 있다. 인민을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야심가와 인민을 해방하려는 봉사자가 있으며 어두운 본능에서 나오는 영감과 참다운 사랑에서 나오는 영감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성(靈性) 식별의 어려움이 있다.

민주주의에서 여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론은 올바른 동의와 토의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하여 절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비오 12세는 여론이 드러나지 못하고 여론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는 반드시 어떠한 사회적 병폐가 있다고 말하였다. 국민의 의견을 질식시키고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천부적 인권의 박탈이고 하느님이 세운 세계질서의 유린이다.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야말로 참된 민주주의다. 비록 정부가 민주주의를 표방할망정 그것이 자연법적 원리에 서있지 않는 한 그것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인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생활의 유일한 합리화 즉 윤리적 합리화의 길에 들어온 것이다. 즉 이성적 동물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현재적 희망을 깨지기 쉬운 그릇에 넣어서 운반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다루기 힘들고 결점이 많으며 폭력에 의해서 패배하기 쉽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가 진보적으로 발전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약점이나 결점에 대해서 관용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민주주의는 무서운 시련에 부딪치고 결정적 기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민주주의에 위기를 극복할 희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 감정과 철학은 복음 속에 그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단순한 기술만능주의로 환원하고 복음의 정신을 민주주의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마치 민주주의에서 그 피를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가 그 무서운 시련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복음의 정신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는 정의를 실현하도록 노력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만이 인간 사회의 조직에 훌륭한 조화를 이루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개개인의 선과 공동의 선을 위하여 공헌시키는 것이다. (韓庸熙)

[참고문헌] J. Maritain, 한용희 역, 인간과 국가, 가톨릭출판사, 1953 / J.H. Hallowell, 김창수 역, 민주주의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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