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라] Moses [영] Moses [히] Moseh

모세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뿐이다. 나아가 성서는 모세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펴려는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세의 역사적 인물상을 그리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이집트 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히브리인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약을 기초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종교를 확립하였다. 구약에서 모세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곳은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4권의 성서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모세가 어떤 인물인가라는 사실보다 모세가 무슨 역할 수행했느냐에 있다. ①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대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②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교 확립에 기여하였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은 야훼 하느님 한 분뿐임을 선포하였다. ③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민족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신명기를 비롯한 4권의 성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유지에 관한 광대한 법전이다. 십계명, 율법, 제도 등은 모세를 통해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억하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생활규범이었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기억함으로써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억하며, 그 일에 동참하게 되며, 현세적 고통과 환난을 극복할 힘을 갖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모세는 낡은 종교를 대표하며, 그의 계약과 율법이 종종 대비되긴 하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세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었다는 것이 신약의 정신이다(마태 5:18). 그리고 신약의 이러한 정신은 민족종교로서의 유태교에서 세계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 이행과 완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의 이름은 대개 신의 이름에 존경이나 신앙, 종속을 나타내는 말을 결합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투트(文神), 라(태양신), 아(월신) 등은 신의 이름이다. 이러한 신의 이름에 “…에게 사랑받은”, “…에게 선택박은”, “…에게서 태어난”이라는 말을 결합해서 왕족의 이름으로 정했다. 이집트 왕들 중에는 메스(..에게서 태어난), 또는 므세스(아들 또는 아이)라는 이름이 붙은 파라오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투트모세는 “투트(신)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투트메스는 “투트에게서 태어났다” 또는 “투트가 태어났다”는 뜻이다. 람세스는 라(태양신)와 므세스(아들)가 결합되어 “태양신의 아들” 또는 “빛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원래 모세의 이름도 신의 이름 다음에 메스나 므세스라는 말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신을 가리키는 부분이 없어지고 오늘과 같이 모세라는 뒷부분만 남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으나 파라오의 딸의 양자가 된 모세는 이집트 왕족의 이름을 따랐을 것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어로 “머서우(아들)”를 뜻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 당시에 친숙한 사이에서 널리 사용된 호칭이다. 따라서 모세가 궁중에서 살았을 때부터 그렇게 짧은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고, 히브리인들 사회로 복귀하였을 때 히브리인들이 “물에서 건져졌다”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로 “모세”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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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학교 [한] 慕聖學校

황해도 재령(載寧) 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 교육기관. 재령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르각(Le Gac, 郭元良) 신부는 선교의 전 단계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한문서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모성학교의 전신이었다. 그 후 2대 주임 멜리장(Melizan, 梅覆霜) 신부가 부임하면서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식학교의 설립, 운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 때까지 운영해 오던 한문서당을 개화된 신식학교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1909년 멜리장 신부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라 하였다. 모성학교는 그 후 10여년간 운영되다가 재정난에 부딪혀 1918년 자진 폐교하였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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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상 [한] 模像 [라] imago Dei [영] image of God [관련] 창조론 하느님의 모상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창세 1:26).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 모상을, 원죄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성세성사로 복원된 하느님의 모양(similitudo Dei)과 비교하여 원죄의 타락으로 인해 상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모상의 내용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이 발전되어 왔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of Nyssa) 등 그리스 교부들은 모상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동일시하였다. 어떤 이들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수성 속에서 모상을 발견했고, 불멸하는 영혼의 특성 속에서, 인간의 이성(理性) 속에서 발견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은 지적인 본성 속에서 삼위일체의 모상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즉 지적인 세 가지 능력인 기억(성부), 지력(성자), 의지(성령) 등이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인 능력에 있어 하느님의 모상이며 어느 일부에서가 아니라 전 존재로서 하느님의 모상이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생명을 받았으며 시편 작가가 다음에서 말하는 신적인 것을 받았다.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다”(시편 5:6-7). 인간은 초자연적인 덕을 기름으로써 하느님의 모상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벽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상이기에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인간은 결코 본성에 있어 하느님과 동등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벽한 하느님의 모상이며 본성에 있어 동등하다(2고린 4:4, 골로 1:15).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 아들의 모상(로마 8:29) 즉 하느님의 모상으로 더욱 발전되어야 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소망이며 다소는 현재적 실재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제 4:13)을 향한 노력과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변형의 노력에 근거가 된다. ⇒ 하느님의 모상 (⇒) 창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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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병습관 [한] 毛病習慣 [관련] 칠죄종

칠죄종(七罪宗)과 같이 아주 고치기 어려운 습관. 털과 같이 깎아도 다시 나오는 그러한 습관을 이르는 예 말.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에 따르면, ‘모병’은 ① 과실, 잘못(defaut), ② 악덕, 방탕(vice), ③ 나쁜 습관(mauvaise habitude)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 칠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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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원] Maubant, Pierre Philibert

Maubant, Pierre Philibert(1803-1839).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이다. 프랑스 바시(Vassy)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 신부가 되었다. 잠시 교구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한 후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3월 중국 사천(四川) 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고 조선에 입국하고자 복건성(福建省), 북경(北京) 등을 거쳐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이르렀다.

그곳의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공부를 하였고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이미 그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바 있는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한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렀다. 조선국경에 이르러 조선 교우들을 만나 1836년초 입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말을 공부하면서 성사를 집전해야 했고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00여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서두르고 이미 이 해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 그와 함께 남은 공소들을 방문하였다. 새 공소를 세우고 공소회장을 세우는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지침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1837년 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게 되어 조선교회는 이제 필요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또 교세도 급속히 신장되어 그의 입국 당시 4천 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37년 말 8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1839년 큰 박해, 즉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두 신부는 자헌을 결심하고 9월 6일 홍주(洪州) 근처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모방 신부는 여러 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고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관(榮冠)을 차지하였다.

그의 시체는 20여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것을 교우들이 거두어 노고산(老姑山)에 안장하였고, 1843년에는 과천(果川)땅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졌고 시복수속이 진행됨에 따라 1901년 명동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 등과 함께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되었고, 1925년에는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2위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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