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게트 [원] Deguette, Victor Marie

Deguette, Victor Marie(1848~1889).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최동진(崔東鎭). 그의 동료 신부였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에 의하면,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는 수년 동안 자기 교구 내에서 봉사하다가 1875년에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후, 평소의 소원이던 한국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것은 순교를 하라는 부름이나 다름없었는데, 1876년 2월 27일 프랑스를 떠나 만주에 도착하자, 때마침 3명의 신부를 거느리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려는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를 만나 짐을 풀 사이도 없이 그 이튿날 주교와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세 사람이 함께 입국하기란 더욱 어렵다는 조선교우의 말에 따라, 주교를 중국으로 다시 가게 한 다음, 남은 두 사람만이 항해를 계속하여 5월 10일 밤에는 서울에서 약 4㎞쯤 떨어진 곳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병석에 눕게 되어 그 이듬해에 건강을 되찾아 용인(龍仁)지방으로 내려가 성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거처가 관현에게 알려져, 그는 충청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는 동안, 리델 주교가 두세(Doucet, 丁加彌),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를 데리고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과 곧 이어 다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연이어 듣게 되었다.

1878년 6월에 주교가 풀려나 중국으로 추방됨을 계기로 박해가 일시 멈추는 듯하자, 그는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전교활동을 계속하였는데, 곧 체포되는 몸이 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3개월 동안 감옥에서 신음하다가 9월에 중국으로 추방당하였다. 만주에서 리델주교와 다시 만나 한나자전(韓羅字典)에 착수하다가 1881년에 일본 나가사끼(長崎)로 건너가, 한국 선교에 필요한 교회서적 인쇄에 종사하였다. 1883년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다시 한국에 들어가, 강원도지방의 전교를 맡아 1889년까지 6년간 이천(伊川), 원산(元山)을 근거지로 하여 교세 확장에 힘썼다. 한때 호조(護照)를 핑계로 박해를 받아, 원산을 떠날 뻔 하기도 했으며, 1889년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올라온 그는, 그 동안 쇠약해진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겹쳐, 끝내 치유치 못하고 4월 29일 선종하였다.

[참고문헌] Relation de la Captivite et de la delivrance de M. Deguette, Paris 1880 / Compte Rendu,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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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퐁 [원] Dupont, Rene [관련] 안동교구

Dupont, Rene(1929~ ). 파리외방전교회원, 주교, 초대 안동(安東)교구장. 한국명은 두봉(杜峰). 프랑스에서 출생. 프랑스 오를레앙(Orleans) 대신학교 재학 중이던 1949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원에 진학, 1953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대학원을 졸업한 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입국 후 한국어와 풍습을 익히고 1955년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신부, 1965년 대전교구 상서국장을 역임했고 1966년 5월부터 1년 동안 충남대에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1967년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을 거쳐 1969년 안동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7월 5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현재 안동교구장으로서 안동교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 밖에 주교회 산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장 및 평신도사도직 전국단체인 한국 가톨릭 성령쇄신봉사자 위원회와 한국 M.B.W. 추진회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 안동교구

[참고 : 뒤퐁 주교는 1990년 12월 2일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직을 퇴임하였다. 같은 날 제2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는 2000년 10월 9일 선종하였고, 이어 제3대 교구장으로 2001년 12월 4일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가 착좌하여 사목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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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페 [원] Dufay, Guillauaume

Dufay, Guillauaume(1400?~1474). 플랑드르 악파(樂派)의 작곡가. 시메이(Chimay, 현재 벨기에령)에서 태어나, 1428~1437년 로마교황청 합창대원으로 있었다. 그 뒤 파리에 가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442~1449년 대립교황 펠릭스 5세의 합창대에 근무했고 그 후 종신토록 캄브레이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으로 있었다. 작품으로는 8개의 완전한 미사곡, 20여개의 미사부분곡, 59개의 음악곡 등 약 150곡이 있다. 그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분야에도 정통 했으며, 교회법 학자로도 일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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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셴 [원] Duchesne, Louis

Duchesne, Louis(1843~1922). 역사학자요 성인전 작가이며 고고학자이자 고위성직자. 프랑스 생세르방(Saint-Servan)에서 출생하여 로마에서 별세.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로시(G.B. de Rossi)의 지도 아래 고고학과 초대 교회사에 관한 예리한 안목을 길렀다. 1867년에 사제가 되어 Ecole S. -Charles de S. -Brieuc(1867~1871년)에서 가르친 뒤 공부를 더욱 하려고 Ecole des Carmes와 Ecole des Hautes Etudes(1871~1873년)에 갔다. Ecole archeologique francaise de Rome의 구성원이 되어 에피루스(Epirus)와 소아시아 등지에서(1874~1876년) 선교와 연구를 하였고 파리의 Institut catholique에서(1877~1885년) 교회사의 교수를, Ecole superieure des lettres(1885~1895년)의 교장을 역임하였고 1895년에 별세하기까지 Ecole archeologique francaise de Rome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의 첫 저작은 5세기의 호교론자 마카리우스 마뉴스(Macarius Magnes)의 연구였고 뒤이어 교황 전기(Liber pontificalis)에 관한 연구를 내었으며, ≪Histoire ancienne de 1’Eglise chretienne≫(1906~1910)는 첫 5세기의 교회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입문서이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Martyrologium Hieronymianum≫(1894), ≪Les Fastes episcopqux de 1’ancienne Gaule≫(3v. 1894~1915), ≪”Liber Censuum” de 1’Eglise romaine≫(1905), ≪Les premiers temps de 1’Etat pontifical 757~1073≫(Paris 1898), ≪Autonomies ecclesiastiques Eglises separees≫(1905), ≪Les origines du culte chretien≫(188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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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 [원] Durer, Albrecht

Durer, Albrecht(1471~1528). 독일의 화가요 판화가로서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시킨 거장. 목판과 동판의 판화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15세기에 시작된 유럽의 판화예술은 그의 노력에 의하여 요람기로부터 일약 완성기에 도달하였다. 판화 가운데 <묵시록>, <대수난> 등은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탈리아에서도 모각(模刻)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뉘른베르크에서 조금사(彫金師)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평생을 건실한 직인(職人) 기질로 끊임없이 작품을 창작하는데 정진하였다.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투시법)와 인체표현을 터득하고, 이것을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 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격한 구성과 원근법(遠近法)의 결합이다. 놀랄 만큼 다면적인 재질을 타고난 그는, 기교와 형식뿐만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깊이를 가진 예술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그는 독일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예술의 모든 성과를 자기의 내부에 침투시켜, 이것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이 내적(內的) 통일을 깨뜨리지 않는 동안에 이것을 당시 아직 통일성을 잃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독일문화의 최고의 성과로서 독일민족에게 남겨 주는 역사적인 과업을 달성하였다.

이 점에서 독일에서의 그의 존재는 마치 이탈리아에서의 단테와 같이, 전 세계의 보배로운 예술가로 평가된다. 가톨릭의 종교적 깊이는 그의 작품에 독특한 힘과 내적 진실성을 나타냈다. 그의 주요한 관심은 1505년 까지는 판화였으며 이탈리아에 다녀온 11년까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마리아전 등을 목판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1509년부터 12년까지는 동판으로 수난화를 새겼다. 뒤러는 전 생애에 걸쳐 거의 유화로 초상화를 그렸으며, 주요한 작품은 <자화상>, <막시밀리누스 황제> 등이고, 1511년에 그린 <빈의 성인들의 제단>은 대단히 큰 규모의 구도로 선과 색채도 분명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요한, 베드로, 바울로와 마르코를 그린 것으로서 뉘른베르크시에 기증한 작품들이다. 이들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 · 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하고 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그리고 900점에 이르는 데상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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