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지도서 [한] ∼敎區指導書 [라] 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1922년 9월 21일 서울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공포한 교구 지도서. 1887년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한국 교회지도서(Coutumier de la Missio de Coree)가 공포된 이래 1911년 대구교구, 1920년 원산교구가 설정되자 각 교구의 실정과 한국의 전통 · 관습 · 제도 등 한국 교회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지도서의 출현이 필요하게 되어 1914년 대구교구지도서가 간행된 후, 1920년 서울교구에서는 보좌주교 드브레(Devered, 兪世俊) 주교에 의해 지도서의 원칙이 작성되어 1921년 서울교구 내 전신부들에 의해 그 내용이 검토되었고 1922년 사제피정, 서울교구공의회를 거쳐 서울교구재판소에서 지도서의 원문이 완성되어 이해 9월 21일 뮈텔 주교가 이를 공포하였으며 이듬해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라틴어로 간행되었다.

지도서의 구성은 서언(序言) · 본문 · 부록 등 세 부분으로 어우러져 있고 총 658개의 조목을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은 서언에서는 한국 교회의 주보(主保)와 제사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본문은 4편으로 나누어져 제1편에서는 사제 자신에 대해, 제2편에서는 성사집전에 대해, 제3편에서는 교회재산의 관리규정에 대해, 제4편에서는 사제에게 부여된 특권과 심신단체들에 대해 각각 언급하고 있으며, 끝으로 부록에서는 각종 교회문서의 서식(書式)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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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약슬 [한] 徐若瑟 [관련] 마라발

마라발(Maraval) 신부의 한국명. ⇒ 마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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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한] 西小門∼

44인의 성인과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기념지. 남소문(南小門, 현 光熙門)과 함께 서울 도성의 유해를 운반하는 곳으로 지정된 서소문(西小門)이 순교자의 피로 물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년)부터의 일이다. 이 땅의 교회를 이끌어가던 정약종(丁若鍾, 요한), 강완숙(姜完淑, 콜롬바), 최창현(崔昌顯, 요한) 등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로 처형된 이곳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되었다. 즉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김아기(金阿只, 아가다), 박아기(朴阿只, 안나), 이아가다(李,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한아기(韓阿只, 바르바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이광렬(李光烈, 요한), 김노사(金老沙, 로사),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장금(金長金, 안나),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누시아(金累時阿, 루시아),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박후재(朴厚載, 요한), 박큰아기(朴大阿只,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김유리대(金琉璃代,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최창흡(崔昌洽, 베드로),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토),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 등 41명의 성인들이 순교하였고, 병인박해 때에는 남종삼(南鍾三, 요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등 3명의 성인과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교우들이 처형되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피어린 순교지인 서소문밖 네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다만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아현 고가도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부근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하여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순교자현양탑’을 서소문공원 내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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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봉 [한] 徐碩奉

徐碩奉(?-1815).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경상도 청송(靑松) 노래산(老萊山)에서 1815년 2월 22일,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많은 신자들과 함께 잡혀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어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1815년 10월 18일(음) 옥사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다만 사형언도가 내려졌으나, 집행되기 전에 옥사하였다는 기록밖엔 없다. 그의 아내도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언제 집행되었는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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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한] 徐相燉

徐相燉(?-1913). 대구교구의 초대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그는 조부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일찍이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다시 제천에서 경상도 상주(尙州)로 피신하였다가, 그가 10세 때 대구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대구에는 가톨릭 신자라고는 몇 집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여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고, 더구나 그의 독실한 신덕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면으로 교인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자선사업에 헌신하여 봄과 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백 석의 식량을 희사하였는데, 그의 이런 자선에 감읍하여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그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처음으로 대구본당을 개척하자,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대구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1911년 조선교구가 둘로 나뉘게 되자, 그는 남조선교구의 주교 소재지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하여 맹렬히 운동하여 뜻을 이루었다. 드망즈 주교가 대구로 부임하자, 그는 대성당 앞의 매씨(妹氏)의 집을 주교의 사택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자기 소유인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화원 전부를 교구사업에 희사하였다. 여기에 대구교구의 중추기관인 주교관 · 신학교 · 수녀원 · 고아원 · 성모의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등이 들어서니 대구교구는 반석같은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의 소원이던 성모의 루르드동굴이 이 화원 언덕에 건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3년에 선종하였다.

한편 그는 교회와 관계된 활동 이외에도 1907년 1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창, 각종 신문의 보도를 통해 전국에 확산되고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전개시킨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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