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브리앙 [원] Chateaubriand, Francois Rene Vicomte de

Chateaubriand, Francois Rene Vicomte de(1768-1848). 프랑스의 소설가. 정치가로서도 알려졌고 특히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진수(眞髓≫(La genie du Christianisme), ≪아탈라≫(Atala), ≪르네≫(Rene)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문장은 화려하고 상상력에 넘쳐 있으며 웅대한 묘사력과 아울러 낭만주의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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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원] Chastan, Jacques Honore

Chastan, Jacques Honore(1803-1839). 모방(Maubant) 신부에 이어 서양인 선교사로서 두 번째로 입국하여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순교한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의 마르쿠(Marcoux)에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 1월 1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같은 해 4월 22일 우선 마카오로 보내졌다. 마카오에 상륙하자 그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수락되었다. 그는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는 자기도 평소에 원했던 조선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주교에게 청하였다. 그의 청은 받아들여져, 1833년 5월에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후 3년간을 중국대륙과 몽고 · 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그를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2년간 산동(山東)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동안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주 땅에서 잃었고, 동료 신부인 모방신부가 1836년 1월에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통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의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사를 집행하다가 부활축일을 양근(楊根)에 가 있던 모방신부에게로 가서 함께 보낸 다음, 손을 나누어 각도의 교우들을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상제옷을 입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37년 7월 중순에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모방 신부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져 서울로 이송되자, 샤스탕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도 모방 신부는 간병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샤스탕 신부는 남쪽지방으로 다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그 무렵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그 해 12월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로 도착하니, 샤스탕 신부는 1938년 5월에야 서울로 올라와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회 창설 52년만에, 그리고 교구 설정 7년만에 비로소 주교와 선교사를 함께 모시게 되어 명실공히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주교와 샤스탕, 모방 두 신부는 함께 서울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샤스탕 신부는 다시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한편 그는 회장 한 사람을 부산(釜山)에 내려 보내, 류우꾸(琉球)지방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비롯한 세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차차 퍼지게 되자 관헌에서는 당쟁의 여파까지 곁들여, 천주교의 탄압을 강화하여 1839년 기해년(己亥年) 봄에 많은 교인들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고, 외국인 선교사를 잡으려는 관헌의 추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에 수원(水原) 남쪽 서해안의 외딴 곳에 피신한 주교는 점점 심해지는 박해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불러 이에 대처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주교는 이 자리에서 혼자만이 남고 두 신부는 청국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두 신부는 끝까지 함께 남기를 결심하여 다시금 각각 맡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교는 배교자 김순성(金順成)의 간계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1839년 8월 10일 스스로 나아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주교가 잡히기 전에 쓴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받은 샤스탕 신부는 곧 모방 신부에게 달려가 함께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과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고별편지를 쓴 다음 9월 6일 홍주(洪州)로 나아가 관헌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주교와 함께 포도청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다가, 9월 21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라는 극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7세로 조선 입국이래 2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다른 두 성직자의 시체와 함께 교우들의 손으로 신촌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에 시흥(始興)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묻었으나, 1901년 11월 2일에는 명동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었다. 그의 거룩한 순교정신은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에서 장엄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기해박해의 순교자 및 병오년의 순교자 78명과 함께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Launay, Martyrs Fancais et Coreens 1838-1846, Paris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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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 [영] shamanism [독] Schamanismus [프] shamanisme

중앙아시아 또는 시베리아의 원주민 여러 부족사이의 원시종교였는데, 이것이 극동지방으로 옮겨와 무녀교(巫女敎) 또는 무교(巫敎)로 통용되었다. 이 종교현상은 모권적(母權的) 태음신화적(太陰神話的)인 문화권에서 일어난 심령 신앙 및 예배의 일종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샤먼’ 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구스(Tungus)족의 언어인 ‘saman'(薩滿)과 인도범어의 ‘사문'(沙門)의 원어인 ‘sramana'(산스크리트어) 나 ‘samana'(팔리어)와 동일계열의 어원으로 생각한다는 설, 페르시아어 ‘shemen'(우상)에서 전환된 말로 보는 설 등이 있다. 이 샤먼이라는 용어는, 19세기이래, 민족학자, 여행가들에 의하여 극북(極北) 또는 북아시아의 무술사(巫術師) 곧 종교적인 직능자 일반에게 적용해온 용어로서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뒤 더 나아가서 종교학 · 민족학 · 인류학 등에 있어서 세계각지의 이와 유사한 현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널리 쓰여져 왔다.

샤머니즘은, 자연 현상이나 인간사를 신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술사 즉, 무당을 통하여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지 성취되며, 선악 두 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샤머니즘의 분포를 보면, 전형적 제도적인 형태는 극북 · 동북 · 중앙 아시아지역,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족들, 인도의 아삼 및 중동부지역 여러 민족에게 퍼져 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주로 시베리아, 중국, 만주, 한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에는 조직적인 형태가 존재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아프리카에 걸쳐서는 영매(靈媒)현상이 눈에 띈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계하는 방식에 있어서 직접적인 성격을 띤다는데 있다. 즉 열광상태에서 채택하는 접촉 · 교통의 방식으로서 탈혼(脫魂, ecstasy, soulloss)이나 빙의(憑依, possession)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밖에 샤먼의 역할상에서 영혼, 정령(精靈), 타계(他界) 관념 등이 큰 뜻을 지닌다. 샤머니즘 성립의 기초에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은 형체가 있는 것들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정령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샤먼이 가야 할 장소로서의 세계 또는 타계(즉 천상, 지상, 지하)의 관념이 수반하고 있다.

샤먼은 무술을 행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이 무술사는 비교적 신경이 예민하고 우울하면서도 몽상적인 성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무병(巫病)현상을 초래하기 일쑤이며, 그것이 흔히 세습적이기는 했지만 이에 합당한 성격의 소유자가 없을 경우에는 반드시 세습적인 것은 아니었다. 샤먼이 되는 데는 엄격한 수행과 훈련을 거쳐야만 했고 특히 정령과의 교통경험을 가져야만 한다. 샤먼은 신화적인 표상에 입각한 의복을 입고서 북을 울리며 열광상태로 심령과 교통한다.

선신(善神)에게 제사하고 악령을 추방하며, 황홀경에서 탈혼기술을 구사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저 세상으로 보내거나 불러오거나 하고, 점을 쳐 길흉을 예언하고, 주의(呪醫, medicine man)로서 병마를 몰아내며, 신령의 의지를 직접 전달하는 탁선자(託宣者, oracle)의 능력을 발휘한다. 일설에는 여계(女系) 정치시대의 종교적인 유산이라고 보지만 한국에서도 흔히 무당은 여자인 경우가 많으나, ‘판수’ 라고 하여 남자 무당도 있다. 어쨌든 샤먼의 직분은 인간과 최고자와의 중개를 하는 사제(司祭)와는 다르다. 하지만 문명에 접하지 못한 사회에서 그들이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샤머니즘에 있어서의 무술의 목적이 주로 신령의 힘을 빌어 병마를 추방하고 불행과 재난을 예방하는데 있으므로, 이른바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신앙형태이며, 특히 악령과 교통하는 ‘흑 샤먼’, 선령과 교통하는 ‘백 샤먼’을 구분하는 사례도 있다.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은 세계각지의 문명에 접하지 않은 사회 즉 저(低)문화지대에 성행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위로의 역할을 해온 종교의 현상 · 형태였다.

[참고문헌] Radloff, Der Schamanismus und sein Kultus, 1885 / M. Czaplicka, Aboriginal Siveria, Oxford 1914 / K. Rasmussen, Intellectual Culture of the Iglulik Eskimos, Report of the Fifth Thule Expedition, 1921-1924, VII-1, 1929 / S.M. Shirokogorov, Psychomental Complex of the Tungus, London 1935 / I.M., Lewis, Ecstatic Religion: An Anthropological study of Spirit Possession and Shamanism, Baltimore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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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드 푸코 [원] Charles de Foucauld [관련] 푸코

⇒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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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한] ∼修女會 [영] Sisters of St. Paul de Chartres [프] Soeurs de Saint P

1. 창립 : 1696년 프랑스의 르베빌라셰나르(Levesville-la-Chenard) 교구성당 사제인 루이 쇼베(Louis Chauvet) 신부가 창립한 자선수녀회. 1708년 샤르트르의 주교 고데(Paul Godet des Marais)가 자기 관구 내에 이 수녀회를 설치함으로써 주교관구수녀회가 되었다. 1722년에는 이 수녀회의 회원들이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Guyane francaise)에 파견됨으로써 이 수녀회의 외방전도 및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1802년에는 샤르트르의 주교요청으로 본부를 샤르트르로 옮겼다. 프랑스혁명(1789-1799년) 후 이 수녀회는 개편(改編)되고, 1861년 교황 비오 9세의 인가를 얻었다. 1949년 비오 12세에 의해 최종인가가 내렸을 무렵에는 프랑스를 위시해서 한국, 베트남, 중국, 일본, 태국, 라오스, 필리핀, 아프리카,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서인도제도, 캐나다 등에서 충실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62년에는 본부를 이 수녀회 주보인 바울로 사도가 잠든 이탈리아의 로마로 다시 옮겨 현재까지 17개국에서 4,000여명의 회원들이 열심히 복음을 생활로 증거하고 있다.

2. 한국진출 :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888년 7월 22일이었다. 당시 조선교구 7대 교구장 블랑(M.J.G.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5년 서울 곤당골에 영해원(孀孩院)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해 오던 중 어려움이 많아서 이 수녀회에 그 운영을 맡기기로 결심, 프랑스 본부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 마침내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해 6월 마르세이유 항구를 떠난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테르 수녀는 도중에 사이공에서 같은 수녀회의 중국인 수녀 두 사람과 합류, 1개월 반 만에 입국한 것이다. 당시 영해원에는 고아 2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네 수녀는 우선 약 40일간 우리말을 익힌 후 종현(鐘峴, 현 明洞)에 거처를 정하고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가며 영해원 운영에 헌신하였다. 한편 1890년에는 수련원(修鍊院)이 정식 발족되어, 4년 후 7명의 첫 수련자를 배출하였다. 초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는 과로가 겹쳐 이국땅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 수녀회 활동이 한국 진출 후 정상궤도에 오른 것은 3대 원장 가밀 수녀 때부터였다. 가밀 원장수녀는 수녀회 공동묘지 매입, 인사카드 작성, 성당 및 보육원분원 신축, 수녀들의 지방분원 파견 등을 추진, 실행하였고, 본당 부설 소학교의 설립 등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1909년 평양(平壤), 황해도 안악(安岳)의 매화동(玫花洞), 제주도의 각 본당에 수녀들을 파견한 데 이어, 1912년에는 대구(大邱), 진남포(鎭南浦), 장연(長淵), 안성(安城), 장호원(長湖院) 등의 본당에도 파견했으며, 일반학교에도 수녀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의 혼란으로 고아들을 위해 보내오던 성영회(聖孀會, Sainte Enfance)의 원조가 두절되자 수녀원과 고아원은 극도의 가난에 허덕였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해 당시 경향잡지사 주필 겸 편집자이면서 수녀원 지도신부였던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는 강론이나 글 등의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에 호응한 각 본당신부들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150여명 고아들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정이 다시 어려워졌다. 수녀들과 고아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으며, 전쟁 말기에 가까워지자 외국인 성직자들에 대한 일제(日帝)의 추방과 연금사태 때문에 그들 밑에서 일하던 수녀들은 모두 본원(本院)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대에 의해 용산(龍山) 보육원 건물이 징발당해 그곳 고아들이 명동으로 합류케 되자 가중된 식량난 때문에 수녀원을 분산시키고, 수련자들은 귀가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고아원 건물마저 징발당하여 고아들은 양평(楊平), 서산(瑞山) 등지로 소개(疏開)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장티푸스가 창궐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8.15광복 후 그간 흩어져 있던 수련자들도 다시 모여들고 징발당했던 건물도 되찾아 수녀원은 다시 질서가 잡혀갔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서울을 중심으로 일에 종사하던 수녀들은 대구, 부산, 제주도 등 사방으로 다시 흩어졌으며, 고아들도 안양(安養)과 대구에서 4년간 피난시켜야 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1952년 4월부터는 일부 수녀들이 서울로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수련원이 서울에 완전 복귀한 것은 1955년이었다. 베아트릭스 관구장(管區長)과 으제니 수련원장은 6.25전쟁 초기에 얼마든지 외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는데도 계속 남아 있다가 그해 7월 18일 공산당에게 피랍되어, 베아트릭스 관구장 수녀는 평양, 만포진(滿浦鎭)을 거쳐 ‘죽음의 행진’ 도중 11월 3일에 총살당함으로써 순교하였고, 으제니 수련원장 수녀는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휴전 후인 1953년 3월 본국 프랑스로 송환되었으나, 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황해도 안악 매화동본당에 남아 학교와 본당을 지키던 김 안젤라 수녀와 김 마리안나 수녀는 1950년 10월 공산당에게 피살, 순교하였다. 이렇듯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는 1888년 이 땅에 정착한 한국 최초의 수녀회로서 한국인 수도회 창설이나 외국 수녀회의 입국을 도왔다. 1960년 4월에는 최초의 한국인 관구장이 탄생하여 모든 행정권이 한국인 수녀들에게 이관(移管)되는 등 획기적인 개혁이 있었다. 1967년 한국관구는 효과적 운영을 위해 서울과 대구의 2개 관구로 나뉘고, 중북부 지역은 서울관구가, 남부지역은 대구관구가 통할하게 되고 총회원수는 700명이 넘게 되었다. 1978년에는 수녀회 회헌(會憲)인 <생명의 책>을 교황청 인준을 받아 발간, 회원들의 삶의 지표역할을 하게 되었다.

① 교육분야 : 1979년부터 첫 서원반 전원에게 의무적으로 교리신학을 이수케 해서 일단 졸업한 후에야 전교수녀로 파견키로 했으며, 일반대학의 사회사업과, 보육과, 간호학과, 신학과 등에도 다수의 수녀들을 진출시키고 있다. 1976년에는 수녀회의 구성당을 보수하여 교육관으로 개방, 평신도들에게 3명의 전담수녀를 배치, 베델 성서 연구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밖에 젊은 여신도들을 위한 정기적인 성서연구회, 청년신도들을 위한 생활성서연구회, 근로여성들을 위한 교양강좌 등 평신도 재교육을 위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② 의료분야 : 아산재단(娥山財團)이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강원도 인제(麟蹄)와 충남 보령(保寧)에 건립한 병원에 수녀들을 파견, 환자들에게 희생적으로 봉사케 하고 있다. 또한 성 바오로병원의 구매부 수익금 총액을 유치, 병원의 일반직원들의 자녀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입게 하고 있다.

③ 특수사목분야 :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기 위해 육군통합병원, 교도소, 시립병원 등에 전담 수녀를 파견, 그들의 영적인 건강을 돌보게 하고, 큰 축일 때나 영세 때 등에는 규칙상 외출이 규제되어 있는 수녀들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방문, 위안과 격려를 해주도록 하고 있다.

④ 사회복지사업분야 : 양로원 · 고아원 등 기존봉사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특히 1980년도에는 심신장애자의 해를 맞아 교구청 가톨릭사회복지사업회 ‘농아 · 맹아 선교부’에 전담 수녀를 파견, 농아 · 맹아를 위시한 지체부자유아들에 대한 봉사에 투신케 하고 있다. 또한 바자회, 숨은 애긍 등으로 가난한 무명단체 등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⑤ 본당사목분야 : 각 본당별 사목지침에 따라야 하는 제한성 때문에 수도회 고유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삭 줍는 역할을 하자는 창립정신을 살리기 위해 1978년 신천리 무허가 판자촌에 수녀들을 투입, 생활조건 향상을 위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본원의 보조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공소(公所)를 설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영적,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관구 소재지는 서울 중구 명동 2가 1의 6, 관구장은 서정렬(徐廷烈, 마리 레몽) 수녀, 대구관구 소재지는 대구시 중구 남산 3동 190의 1, 관구장은 박종묵(朴鐘默, 마리 루시) 수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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