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한] ∼大聖殿 [이] Santa Maria Maggiore

로마의 4대 바실리카의 하나. 일명 눈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한국식 옛 명칭은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 하였다. 교황 리베리오(Liberius, 재위 : 352-366)가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창건, 교황 식스토 3세(재위 : 432-440)가 재건하였다. 리베리오 교황의 성당 착공에 앞서, 성모마리아는 로마의 한 귀족에 대한 발현(發顯)에서 교황이 성당을 세우려고 원하던 에스퀼리노 언덕에, 한 여름철인데 눈이 내리게 해서 장소를 정해 주셨다는 전설이 있다. 식스토 3세의 재건 때(432년) 이 성당은 성모에게 봉헌되었다. 봉헌축일은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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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동본당 [한] 山亭洞本堂 [관련] 목포본당

⇒ 목포본당

전라북도 여기저기 여러 본당이 설립되었던 1896년 가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호남지방 순회 때 목포에 될 수 있는 한 신자들을 이주시키도록 당시 수류 본당(水流本堂) 라크루(Lacrouts, 具)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한편 1897년 봄 뮈텔 주교로부터 책임을 부여받 드예(Deshayes, 曺) 신부는 목포시 산정동 90번지에 20여 평 규모의 성당 겸 신부사택용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898년 봄에 목포 본당을 설립, 1909년 봄까지 초대 주임신부로서 전교사업을 벌였는데, 당시 교우수는 약 300명이었다.

2대(1909-1912년) 투르뇌(Tourneux, 呂) 신부, 3대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 신부 때인 1913년에는 목포시 산정동 94번지에 현재의 성당을 벽돌조 건물로 100여평 대지 위에 신축하여 성 십자가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4대(1914-1915년) 카넬(Canelle, 簡)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1차 세계대전으로 소집되어 전사함으로써 1년 동안 본당신부 없이 제주읍의 라크루 신부가 대신 관리하였다. 5대(1915-1922년) 타케(Taguet, 嚴) 신부 때는 교우수가 400명, 6대(1922-1932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교우수 700명, 7대(1932-1934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 때는 교우수 800명으로 차차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8대(1934-1942년)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인 모나간(Monaghan, 矣) 신부 때는 1,800명, 9대(1942년 봄-여름)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 때는 1,950명, 10대(1942년 여름-1944년)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 때는 2,050명, 11대(1944-1949년)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때는 2,500명, 12대(1949. 2-1949년 가을) 김재석 신부 재부임 때는 2,600명, 13대(1949년 가을-1950. 7. 24) 쿠삭(Cusack, 高) 신부 때는 2,750명이었다. 그런데 쿠삭 신부는 6.25 동란으로 인하여 캐롤(Caroll, 安) 몬시뇰, 보좌신부인 오브라이언(Obrien, 吳)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에는 목포 본당이 경동 본당(京洞本堂)을 분리시키면서 산정동 본당으로 이름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쿠삭 신부의 뒤를 이어 모란(Moran, 安) 신부가 14대(1950-1953년)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교우수는 3,000명이었다. 그 뒤 15대(1953-1953. 6) 도슨(Dawson, 孫) 신부, 16대(1953. 6-1956년) 새비지(Savage, 元) 신부 때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성심유치원을 창립, 운영하였다. 17대(1956-1960년) Dunne(都) 신부 때인 1958년에는 목포시 북교동 본당(北橋洞本堂)의 신설로 본당 관할구역이 분리되었다. 18대(1960-1962년) 휴스(Hughes, 柳) 신부 때는 교우수가 4,594명, 19대(1962-1964년) 모리시(Morrisey, 矣) 신부 때는 교우수가 4,650명이었다. 20대(1964-1969년) 브라질(Brazil, 陳) 신부 때인 1966년 5월 29일에는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에 166평의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 슬레이트 성당, 45평의 사제관을 건립하고 성 미카엘 대천사를 본당주보로 정하고 성 미카엘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1969년 9월 3일에는 목포시 연동 본당의 신설로 본당 및 공소 관할구역을 재조정하였다. 21대 캐얼란(Carelan, 車) 신부 때는 교우수가 3,000명이었고, 목포시 대성동 본당의 신설로 다시 본당 및 공소 관할구역을 재조정하였다. 22대(1972-1974년) 모리시 신부 때는 교우수 2,000명, 23대(1974-1978년) 놀란(Nolan, 盧) 신부 때도 2,000명, 24대(1978-1983년) 이재흥(李載興, 힐라리오) 신부 때도 2,000명이었다. 1978년 10월 27일에는 6.25때 피랍된 성직자(캐롤 몬시뇰, 쿠삭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 순교비를 본당 내 성모상 옆에 세워 제막하였다. 25대(1983-현재) 주임신부는 박영웅(朴英雄, 가브리엘) 신부이다. 1984년 현재 신자수는 1,937명이고, 3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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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한] 産業化 [영] industrialization [독] Industrialisierung

오늘날 산업화란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현대 산업이 그 경제적 사회적 여건과 환경이 동시에 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지난 30여년간 꾸준히 발전하여 온 산업을 보다 명료하게 구별짓기 위하여 쓰이는 말이 ‘산업화’이며, 최신형의 제조 산업을 주요 역할로 삼는 사회의 성장을 ‘산업화한 사회’라고 부른다. 또한 제조업을 주요 역할로 하기 위하여 발전소나 공장건물 같은 곳에 고정자본을 투자하거나 중장비를 설치하고, 산업기술에 과학을 응용하며 대규모이면서 일정한 규격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 내는 사회가 ‘산업화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산업화라는 말은 현재 산업혁명과정에 있는 지역의 사회와 산업화가 시작은 되었으나 이 지역의 경제생활은 아직 완전히 변형되지 않은 채 있는 그런 사회들과 구별하여 쓰여지기도 한다.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그밖의 각 분야에 영향을 주어 변화를 일으키게 하며, 국가 규모의 생활에 어느 정도의 산업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데에는 그 국가의 도시들의 성장도(成長度)와 성장의 특성을 봄으로써 결정되어진다. 그러나 ‘산업화’라는 용어는 그 모체가 되는 산업혁명이란 것보다는 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주장에 대한 비판 이후에 와서는 산업혁명이란 고작 “어떤 모양의 기술 혁신을 배경으로 하여, 생산의 진행속도가 빨라지는 시기” 정도의 의미밖에는 내포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산업혁명이란 말은 차차 내용이 공허한 것으로 남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경제 성장 이론이나 후진국개발 이론의 전개와 발맞춰, 전에 산업혁명이 뜻하고 있던 한 측면으로서의 ‘농업지배적인 경제로부터 공업화로 가는 과정’을 강조하여 이를 ‘공업화’ 내지는 ‘테이크오프'(takeoff)라고 부르는 경향도 눈에 뛴다. 이 경우 산업화라는 말은 공업화라는 말로 대신 쓰여지기도 한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증기기관의 사용은 산업화를 재촉하는 지역의 특색으로 나타났다. 협의의 산업화는 제조산업의 성장도만 가지고 규정짓는 경우를 말하며, 따라서 이것은 경제발전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견해이며, 앞서 지적한 ‘공업화’와 동격으로 쓰이는 산업화라는 말도 아주 협의적인 사용법임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상 열거한 산업화의 여러 개념들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소개·전파·확대 또는 그 연장선 위에서 조성된 것이며, 그 개념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은 사실이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산업화는 농경사회나 수공업사회에서 농경의 기계화 및 수공업의 기계화와 다량 생산화에의 과정의 성장도로써 산업화 과정을 측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개념으로서는 현대 산업의 경제 · 사회적인 여건과 그 도시 · 농촌에 걸친 경제 · 사회적인 환경이 동시에 성장해 가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산업화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숙련도의 지속적인 향상과, 전문화된 기능에 주목하여 이에 비례하여 자본과 노동의 거대한 집중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는 전통적인 사회규범이나 패턴을 파괴 또는 수정해 나가면서 조직적인 생산이 수요에 맞도록 온전한 사회조직을 조절해 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경제적 효율의 집중은, 결국에 가서는 생산능력의 과대팽창을 주도하게 되고, 사회가 주로 경제적 성공만 바라는 경향이 있어 그런 경향에 생산을 맞춰 가기 때문에, 현대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국민은, 증대하는 비인격적인 조직의 지속에 묵묵히 헌신하고 있는 동안에 조절 생산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사회화’라는 말속에는 성장을 위한 집중화와 더불어 성장에 알맞은 조절이 뒤따르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더구나 사회정의의 입장에 각 사람에게 적합하고 넉넉한 일터의 제공과, 적절한 기술 습득의 가능성의 제공, 특히 질병과 연령관계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생계와 인간의 품위를 안전하게 보장해 주고, 경제 및 산업화라는 것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라야만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1967. 3. 26. 교황 바오로 6세 회칙).

[참고문헌] W. Ashworth, A Short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Economy, 1850-1950, London 1952 /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Europe, Cambridge Univ. Press, v. 2, 1952 / Proceses and Problems of Industrialization in underdeveloped Countries, United Nations, New York 1955 / R.J.D. Braibanti and J.J. Spengler, eds, Traditions, Values, and Socio-Economic Development, Duham, N.C. 1961 / B.F. Hoseltz and W.E. Moore, eds, Industrialization and Society, Paris 1963 / J.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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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문제연구소 [한] 産業問題硏究所 [영] Institute for Labor and Management

현대 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노동문제, 즉 노동자의 소외와 빈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 각종 산업재해 등을 조사 · 연구 · 교육함으로써 공동선(共同善)이 구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1966년 6월 서강대학교에서 설립한 연구·교육기관·주요 활동은 산업·노동관계 각종 자료조사, 조사결과의 출판, 노동조합지도자 및 사용자들의 교육 등이 있다. 그 중 노동조합지도자와 사용자에 대한 교육이 중점사업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소는 180시간의 정기 야간과정과 지방노동조합 지도자 교육과정 등 2개의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교육내용은 연설, 회의진행법, 노동법, 노동조합의 조직과 운영, 국제노동운동, 노동경제, 회계학, 공산주의비판, 노동조합과 민주주의, 사회원리, 경영인의 사회적 책임, 사회 지도자론, 협동조합론, 신용조합론, 사회보장론 등이다. 서강대학교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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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제한 [한] 産兒制限 [관련] 가족계획

⇒ 가족계획

1. 개념 : 부부 또는 부모가 원만한 결혼생활, 적당한 수의 자녀, 가족의 건강 등을 계획하는 일. 그러므로 가족계획의 목표는 가족의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향상에 있다. 생활향상을 기하자면 결국 적당한 수의 자녀만을 가져야 하므로 수태조절을 하게 된다. 여기에 부모는 양육할 수 있을 만큼의 자녀를 가질 윤리적 내지 사회적 책임이 강조된다. 출산간격이나 수태를 조절하여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자녀를 가지는 것이다. 수태조절은 그 방법으로 피임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임신이 되지 않는 부부에게 수태할 수 있도록 치료하는 적극적 의미도 포함한다.

가족계획이란 말은 신 맬더스(1766~1834)주의에서 시작하여 미국의 마가렛 생거(1883~1966)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산아제한’이라는 용어로 일컬어져 오다가 조절을 하는 대상은 산아나 출산이 아니고 수태이므로 ‘수태조절’로 표현이 바뀌었고 근래에 ‘가족계획’으로 되었다.

2. 수태조절의 수단 : 수태조절에 등용되는 피임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각기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 피임법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크게 고전적 피임법과 현대적 피임법, 임시적 피임과 영구적 피임법, 자연적 피임법과 비자연적 피임법으로 분류한다. 여기서는 마지막 분류에 따라 각기 어떤 방법들이 있는가 그 종류만 제시한다.

① 자연적 방법 : 여성의 월경주기를 이용하여 가임기에 금욕함으로써 임신을 피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주기 금욕법이다. 1930년대에 와서야 일본의 오기노와 오스트리아의 크다우스가 배란기와 월경과의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수태시기를 예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까지 월경주기가 계속되는 동안(초경에서 폐경까지) 어느 때나 배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다음 월경주기의 시작과 배란과의 관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연적 가족계획이 탄생되었다. 이 발견 이래 지금까지 자연적 방법에 대한 지식은 괄목하게 발전해 왔다. 오기노 학설에 의한 달력 주기법의 날짜 계산으로부터 최근에 등장한 기초체온법과 증상체온법 또한 1970년대에 들어서 배란법(점액관찰법 또는 빌링스법)이 발견되었다. 1970년대에 배란이 되는 시간, 배란 후 난자의 생존시간, 그리고 정충이 살 수 있는 일수에 대해서 실제적인 연구결과 개념이 많이 변하였다. 호주의 빌링스박사 부부팀에 의한 점액 관찰법으로 배란시기를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적인 개념의 생식생리학에 발맞춘 자연피임법은 정확히 사용한다면 어느 방법보다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한 피임효과를 얻을 수 있고 여기에 더 한층 부부애를 증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으면서 자기행위의 주인공으로서 부부가 가족계획을 실현할 수 있기에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랄 수 있다.

② 비자연적인 방법 : 이 방법들은 생식기관을 형태적으로 변화시켜 버리거나 이들 각 기관의 임신을 위한 생리기능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임신을 피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들은 임신이 언제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 생리기능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임신은 아무 때나 가능해도 무방하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비자연적 방법들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구용 피임제와 주사용 피임제, 자궁내 장치, 국소 물리적 및 화학적 장애법(콘돔, 질내격막, 살정충제)이 있다. 그런데 인공 임신중절술은 원래 가족계획의 방법이 아니다. 또한 불임수술은 단종을 뜻하므로 윤리와 종교적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방법이다. 수태조절에 있어 약물이나 어떤 기구를 이용하든 인공적으로 수정을 저지하는 것이나 수태를 저지하는 것은 다 같이 살생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방법들은 의학적으로 수많은 부작용을 발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찬성할 수 없는 방법들이다.

3. 피임의 역사 : 피임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에서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 비의도적으로 출산의 억제가 특정지역에서 되어졌음을 포함시켜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원시집단에서 특정기간에 성교를 금하는 터부에 의해서 임신이 비의도적으로 감소되기도 하렸고 중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회에 들어가 독신으로 수도생활을 하였으므로 의심 없이 구라파의 출산율이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도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가족의 크기를 제한한 사실도 오래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시인들과 고대 민족들 가운데 성교중절, 낙태, 영아살해로 제한이 시도된 것을 볼 수 있다. 기원전 2750년에 중굴 의서에 인공유산법이 실려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풀뿌리를 짓이겨 넣거나 솜을 틀어넣는 민간요법이 전해오고 있다. 이집트인, 희랍인, 로마인들도 마력이 있다는 약을 먹거나 또는 풀, 꿀, 고무, 기름 등으로 혼합된 물질을 질내에 삽입함으로써 피임을 시도하였고 이슬람인들은 다소간 희랍으로부터 전해 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피임술을 발전시켰다. 그리스도교 유럽국가들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된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인 해부학 의사인 팔로피우스(1523~1562)가 ≪프랑스인의 병≫(1564)이라는 저서에서 성병 치료에 린네르로 만든 콘돔을 사용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하고 있다. 소위‘현대’라 일컫는 1800년대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인위적인 조절과 관계없이 다른 요인들에 의하여 인구가 조절되어 왔다.

현대적 피임운동의 기원과 발전을 보면, 초기단계는 확실치 않으나, 조직적이 아니지만 가족의 크기를 억제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18세기에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 진다. 1875년 이후 서구의 전지역(아일랜드 제외)에 출산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은 확실하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효과적인 피임의 방법 특히 동물의 얇은 막으로 만든 콘돔[1844년 이전에는 고무를 유황처리해서 만드는 방법]의 발견과 이후의 질내격막의 발견에 의함일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대한 지식이 신속하게 전파된 도시지역과 상류계층에 출산율의 감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낙태와 성교중절의시행도 병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아제한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지적 인물들은 프랑스의 수학자, 철학자, 정치가인 콩도르세(1741~1794)로서 그는 인간성의 완전가능성을 주창하였고 영국의 실리주의자인 벤담(1748~1832)은 영국의 빈민율을 줄이려면 그 방법으로 스펀지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797). 소위≪인구론≫(人口論, 익명으로 1798년 출판)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성직자이며 경제학인 맬더스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한없는 희망은 공허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인구는 식량의 증가한계를 항상 초과하려 하며 생계의 수단은 다만 산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비해 인구의 증가는 억제되지 않는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겠기 때문이다. 인구는 항상 생계의 한계를 넘어 팽창하게 되며 기근, 전쟁, 병고가 발생하여 추가 인구를 죽여 없애게 될 것이다(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더라도)”. 그는 1803년 그 책의 재판에서 결혼을 늦추는 것과 결혼 전에 엄격히 자제를 하는 윤리적 자제가 추가적인 억제책이 될 것임을 제시하였고 생식에 간섭하는 어떤 류의 파괴적인 수단이나 인공적인 피임에 의한 제한은 비윤리적인 것으로 배척하였다.

4. 신 맬더스주의자, 이상향주의자, 우생학자들 : 플레이스(1771~1854)는 급진적 혁신주의자, 정치인, 노동운동의 지도자로서 영국에 있어 산아제한 운동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인구이론에 관한 증명과 예제≫라는 저서를 냈으며 산아제한에 대한 광고지를 노동자들에게 4년간(1823~1826)배포하였으며 윤리적인 자제는 바보스런 짓이라 부르고 인공적인 피임방법을 찬양하며 이를 ‘신맬더스주의’ 라고 불렀다. 미국의 이상향주의자인 험프리(1811~1826)는 성교 유보로 임신조절을 하면서 자유연애와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사람끼리 짝지우기를 주창하고 이러한 이상으로 모인 공동생활 단체를 처음으로 설립하였다.(1842~1847). 영국의 브래들러(1833~1891)는 맬더스협회를 조직하려다 실패로 끝나고 그 당시 ‘신 맬더스주의’의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잡지 <민족 개혁자>를 1860년부터 1893년까지 런던에서 발간하였다. 이 동안에 ‘신 맬더스주의’의 주장은 점점 지성층의 지지를 얻게 되어1865년 이후 지혜롭고 바람직한 성분계층은 윤리적 자제를 실행하고 반면에 천한 하층 군중은 출산을 계속함으로써 이른바 ‘비 우생학적인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신 맬더스주의는 더욱 세력을 펴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우생학의 창시자인 걸턴(1822~1911)경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졌다.

1878년에 마침내 영국에 맬더스협회가 창설되었고 이어 협회의 의학지부도 설립되어 신 맬더스주의의 주제들을 강의, 팸플렛, 잡지들을 통하여 전파시켜갔다. 이 협회는 1913년에 선보인 산아제한의 기술에 관한 소책자를 공공연히 배포하였고,1972년에 협회의 사업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여 해산하였다. 1921년에 마리 스텁스(1880~1958)는 고전적인 경제적 이유 보다는 의학적이며 우생학적인 이유들을 강조하게 되자 여러 도시로부터 후원을 받아 런던에 처음으로 산아제한을 위한 의원을 개설하였고, 그후 1930년에 창립된 가족계획협회에 통합되어 영국에서 제일가는 산아제한 기구가 되었다.

한편 미국에 있어서는 헤이우드(1829~1893), 잉거솔(1879~1942), 골드만(1869~1940) 같은 자유사상가들이 여성의 투표권, 금주, 이혼법 완화, 자유연애, 무정부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이와 관련하여 피임을 주창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생거 여사는 간호원으로서 뉴욕의 빈민가에서 보건사업에 종사하면서 신 맬더스운동에 조금은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의 실제의 체험을 통하여 가정의 빈곤 퇴치와 모자보건에 주안점을 두고 피임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중국, 하와이, 인도 등 저개발지역을 찾아다니며 운동을 폈고 전세계적인 기구로 확장되어야 함을 역설, 1952년 봄베이에 국제 가족계획협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에 센터를 설치하여 피임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며 결혼상담도 하였다. 이리하여 이 기관들은 유엔의 경제사회이사회의 자문기관이 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저개발 국가들에서 사망률은 저하되고 인구는 소위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많은 국가들이 효과적으로 인구정책을 추진키 위하여 가족계획 사업을 국가정책으로 펴게 되었다.

5. 한국의 가족계획 : 민간요법이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극수수이긴 하겠으나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피임이 행하여졌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최근에 이르러서 인구 억제라는 세계적인 조류는 완고한 봉건사상과 인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침입하였다. 1931년에 독신녀인 로젠버그가 태화사회사업관에 와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농촌부인들에게 피임을 권하였으며 원주 기독병원에서 머리 의사가 가난한 부인들에게 피임방법을 가르쳤다. 1960년까지 가족계획 계몽운동을 하였으며, 1957년에 레어드 여사가 대전에 있는 기독사회관 관장을 폈다. 1958년부터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산부인과가 이 대학의 사회사업과의 지원을 받아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60년부터는 대한 어머니회가 자체사업의 하나로 가족계획 사업을 시작하여 의원과 상담소를 개설하였다(윤동주 저, 인구학, 한얼문고, 1973).

우리나라에 가족계획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61년 6월 ‘국제가족계획협회’에 가입한 이후 같은 11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제59차 상임위원 회의에서 인구팽창은 국가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저해된다는 점에서 인구정책의 한 방편으로 가족계획 사업을 채택하고서부터이다. 1962년에 가족계획 사업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끝날 때까지 인구증가율을 2.5%로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년)이 끝날 때까지 2.0%로 내리겠다는 목표를 세워(경제 기획원, 보건사회부 모자 보건과) 전국에 가족계획 상담소를 설치하여 1,432개 면마다 가족계획 요원을 배치하였다. 1973년엔 법률 제2514호로 전문 14개조로 부칙으로 된 모자보건법을 제정 공포하여 실시하기에 이르러 가족계획이랄 수 없는 인공 임신중절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리하여 제3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76년에는 1.7%까지 낮추는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 1.75%의 평균 증가율에 도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개발도상국가들 중 가족계획 사업에 성공한 모범국가로 인정받고 있으나 이러한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반드시 가족계획 사업에 의한 것 만은 아니고 여러 가지 요인 중 인공 임신중절(약 100만건 추정)에 의한 요인이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6. 가족계획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 : 가톨릭 교회가 가족계획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이나 목표를 달성하는데 사용하는 인공적 피임방법을 반대한다.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자연 자체에 내재하는 법칙 즉 생식생리에 내재하는 가임기와 불법을 권장하고 주장한다. 인공적 피임술이 이미 4,000년 전에 인류죄악사에 나타난[아브라함의 현손 오난이 레위법에 따라 형수를 아내로 삼았으나 임신되는 것이 두려워 성교중절(오나니즘)을 하여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 즉석에서 죽음을 당함] 이래 그리스도교 초기에서부터 혼인과 성에 관련된 여러 가지의 이단들에 대하여 교회는 가차없이 단죄하였으며(고인 5:1-8,갈라 5:1-26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혼인과 가정을 수호해 왔다.

1930년 이전까지는 인공적 피임에 대한 제반 종교들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실제로 일치하였다. 그러나 1930년 1930년 이후 세계 대종교 및 프로케스탄 교파들은 인공적 피임법을 특정 상황하에서 인정하는 공식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제는 오직 가툴릭 교회만이 인공적 피임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30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순결한 혼인>은 인공적 피임은 하느님의 법과 자연을 거스리는 중죄로 단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는 출산간격이나 가족의 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주기 금욕법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1951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산파들에게 행한 담화문’(A.A.S. 43, 859)에서 심각한 경제적 · 의학적 및 사회적인 이유로 자녀를 갖지 않기 위하여 부부들이 불임기를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후 의학계에서 여성용 경구피임악을 개발하게 되자, 독일의 러이츠, 네덜란드의 반 델 마르크, 벨기에의 장센 같은 신학자들은 수태조절을 위하여 이 약의 사용은 이론적 정당성이 있다고 주창하였으나 1958년에 비오 12세는 이를 배척하였다(A.A.S. 50, 735). 그러나 이 문제가 계속 논란되자 1964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비오 12세의 규범을 바꿀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교황 요한 23세가 설치한 출생, 인구, 가정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에 경구용 피임제의 사용문제를 연구토록 위임하였다. 1965년 역사상 처음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부부행위의 목적은 인간 대 인간의 부부애임을 밝혔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50). 마침내 부부들이 어떻게 수태조절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회가 가르친 것은 1968년에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의 생명>에서이다. 또한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11월 22일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바오로 6세의 규범을 더욱 강경하게 재천명하고 있다. (方永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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