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본당 [한] 北靑本堂

1935년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서리(咸鏡南道 北靑郡 北靑邑 西里)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함흥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녀 오딜리아. 히머(C. Hiemer, 林) 신부에 의해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히머 신부는 1년간 주임으로 재직하면서 성당을 건축하고 교세 신장에 주력, 본당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어 1936년 2대 주임 파렌코프(Farrenkopf, 朴) 신부와 보좌 푹스(A. Fuchs, 陳) 신부가 부임, 1937년 해성(海星)학교를 개설하였다. 그 후 파렌코프 신부가 회령본당으로 전임되자 보좌이던 푹스 신부가 3대 주임으로 1945년까지 사목하였다. 그러나 8.15광복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1949년 5월 9일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 주교가 체포되고 교회에 대한 탄압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어 결국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폐쇄되기 전까지 북청본당 관내에는 5개의 공소가 있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북동본당 [한] 北洞本堂

1933년 전라남도 광주시(光州市)에 창설된 광주 대교구 소속 본당. 전(前) 광주대교구 주교좌 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 광주지역은 1920년대까지 천주교의 불모지였으나 1926년 박재춘(朴在春, 요한)을 비롯한 3가구 10여명의 교우가 생기게 되어 이해 12월 3일 노안(老安)본당 주임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에 의한 노력과 당시 대구 교구 당가 무세(G. Mousset, 文濟萬) 신부, 그리고 목포(木浦)본당 주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등의 노력으로 1930년 북동에 300여평의 성당부지가 매입되었고, 이어 공소강당의 건립과 함께 1932년 가을 100여명의 영세자가 나오게 되자 이듬해 5월 25일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민정호(閔正鎬, 마르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하던 중 1933년 10월 아일랜드의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 전라남도 지방을 관할하게 되고 이듬해 4월 전라남도가 대구교구로부터 분할되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자 마리난(G. Marinan, 梅) 신부가 부임, 이후 성골룸바노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건평 37평의 성당이 신축되고 1935년 빈민아동을 위한 학교가 개설되었으며, 1937년 전라남도 지방이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북동본당은 광주지목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때 현 성당이 건축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광주교구 내의 외국인 골룸바노회 신부들이 일제에 체포 구금되고 결국은 추방당하게 되어 북동본당은 전라남도의 다른 본당들과 함께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49년 광주 시내에 남동(南洞)본당을 분할, 창설시켰고, 6.25전쟁 뒤 다시 성 골룸바노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광주교구를 맡게 되자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4년 힐리(M. Healy, 許) 신부가 부임, 6.25 전쟁으로 흩어졌던 교우들을 모아 본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1957년 1월 21일 광주교구가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었을 때 북동본당은 주교좌 본당이 되었다. 그 후 1958년 모란(T. Moran, 安) 신부가 부임, 1961년까지 사목했고, 매귀어(D.F, Maguire, 梅) 신부가 1961년에서 1962년까지, 티어니(P. Tierney) 신부가 1962년에서 1964년까지, 1964년 모란신부가 재부임하여 1968년까지, 1968년 마과이어 신부가 재부임하여 1969년까지, 오닐(N. O’Neil, 千) 신부가 1969년에서 1974년까지, 모리시(M. Morrisey, 牟) 신부가 1974년에서 1978년까지, 정규완(鄭圭完, 토마스) 신부가 1978년에서 1981년까지 사목했으며, 김종남(金鐘南, 로마노) 신부가 1981년 부임하여 현재까지 사목하고 있다. 1983년 광주 시내의 임동(林洞)본당이 새로이 광주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축성되어 현재 북동본당은 대성당의 지위만 갖고 있다. 1983년 말 교우수는 2,860명이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본당사목을 돕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북당 [한] 北堂

북경(北京)에 있던 4개의 성당(聖堂) 가운데 하나. 파리 외방전교회원 퐁트니(Fontency, 중국명 洪若)가 청(淸) 성조(聖祖)의 학질을 고친 공로로 서안문(西安門) 밖의 땅을 하사받아 1701년 건축을 시작, 1703년 완공하였다. 1601년 리치(M. Ricci, 중국명 利瑪竇)의 북경 선교 이후 북경에는 4개의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각 성당들은 건립된 위치에 따라 동당(東堂), 서당(西堂), 남당(南堂), 북당(北堂) 등으로 불렸다. 그 중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남당으로 1601년 리치가 명(明)의 신종(神宗)에게 선무문(宣武門, 일명 南門) 안의 땅을 하사받아 건립한 후 1644년 샬(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 湯若望)이 이를 개축하였다. 남당 다음으로 1628년 샬이 거처하던 동안문(東安門)밖에 동당이 건립되었고, 1703년 북당이 건립되었으며, 이어 1723년 라자리스트회원 페들리니(Pedlini, 중국명 德理格)에 의해 서직문(西直門) 대로에 서당이 건립되었다. 이들 4개의 성당은 북경의 명소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들었는데 특히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을 가져 서구문명을 배우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조선에는 서학(西學)이 전래되었다. 1644년 샬과 만난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1631년 정두원(鄭斗原), 1720년 이이명(李-命), 1766년 홍대용(洪大容) 등은 모두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 서구문명, 서학 등을 조선에 전래한 인물들이다.

남당과 동당이 조선 사신들과 서양선교사들이 접촉한 곳이었음에 비해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직접적 계기가 된 곳으로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이곳에서 그라몽(J.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신부에게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귀국, 교회창설을 주도함으로써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와 매우 밀접한 곳이 되었고, 이후 조선 교회의 밀사들은 북당을 통해 조선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북당을 제외한 3개의 성당은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 때 파괴되었다가 남당과 동당은 새로 건립되었다. 현재는 북당만이 남아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북경교회 [한] 北京敎會 [관련] 북경교구

⇒ 북경교구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북경교구 [한] 北京敎區

1946년이래 수도 대교구(首都大敎區). 북경은 이미 7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us), 즉 경교(景敎)와 접촉을 가졌었다. 북경의 최초의 선교사는 교황사절을 겸한 프란치스코회원 요한 몬테 코르비노(Monte Corvino)였는데, 그는 1294년 당시 캄발레크(Kambalek)로 불리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북경은 1307년 두 개의 속교구(屬敎區)를 가진 대교구로 설정되었고, 이듬해 요한 자신이 대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선교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 북경에 복음이 다시 전래된 것은 마테오 리치(M. Ricci, 李瑪竇)에 의해서였다. 그는 1601년에 북경에 도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즉 1610년까지 북경에 체류하였다. 1650년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의 성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1690년 북경이 남경과 함께 포르투갈 보초권 교구로 설정되면서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그 뒤 또 세 개의 성당이 북경에 세워졌다. 박해 후 북경주교좌는 공석이 되었고, 그래서 남경교구에 의해 관할되었다(1747-1778년). 1835년 북경교구의 관할은 라자리스트로 넘어갔다. 1924년 미국의 베네딕토회원에 의해 북경에 보인대학(輔仁大學)이 세워졌다. 1946년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북경은 수도관구 대교구로 승격되는 동시에 전경화(田耕華) 교구장이 동양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50년 북경교구의 교세는 본당 75개, 교구사제 80명, 남자수도회 12개, 수사 400명, 여자수도회 8개, 수녀가 300명, 교회 운영의 남녀학교 118개교, 학생수는 5,361명, 자선단체 9개, 병실 2,00개, 그리고 북경 총인구 500만명 중 교우수는 21만 5,900명이었다.

북경교구는 한국 교회의 창설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경을 내왕한 조선사신(朝鮮使臣)들이 북경의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아울러 그들이 저술한 서학서를 갖고 들어와 결국 조선에 자생적인 교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북경 선교사들은 조선 전도에 관심을 갖고 비록 실패에 그쳤을지라도 여러 번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교황청도 조선 전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다. 1702년 조선지역은 처음으로 당시 북경교구장 프란치스코회원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della Chiesa) 주교에게 위임되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구 예수회원으로부터 영세한 이래 북당과 계속 연락을 취하였고, 1785년 라자리스트회원이 북당을 맡게 된 이후에도 조선 교회와의 접촉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785년 북경에서 부임한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함에 따라 이후 조선 교회는 주교좌 성당인 남당(南堂)하고만 접촉을 하게 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비록 1791년 선교사의 파견에는 실패하였으나 1795년에는 선교사를 파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1792년 교황청에서 조선 교회의 관리를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한 이래 구베아 주교는 물론 그의 후임수자 사라이바(Souza Saraiva)주교도 선교사 파견 등 조선 교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1831년 조선 교회는 북경교구에서 독립, 고유한 대목구(代牧區)가 되었고 또한 조선 선교사 파리 외방전교회원의 조선 입국을 용이하게 하고자 1838년에는 만주지방이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만주교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참고문헌]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Paris 1923.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