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흥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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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창설된 전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 전라북도 부안 지방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900년대 초 정복조(鄭福朝, 시몬) 회장에 의해서였다. 그는 부안군 주산면 덕산리(德山里)에서 전교를 시작하여 곧 덕산리와 인근 공작리(孔雀里), 만석동(萬石洞), 등용리(登用里) 등에 공소를 개설, 신성리(新城里) 본당[현 井州본당]주임 미알롱(A. Mialon, 孟錫浩)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26년 6월 등용리에 이기수(李己守, 야고보)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이 지역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35년 본당은 등용리에서 서외리(西外里)로 이전되었으며 본당 이전 후 교우자녀와 빈민아동을 위한 학교가 개설되었다. 1958년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현 성당터인 부안읍 서외리 90번지의 대지를 사들여 성당개축을 시작, 1963년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 재임 중 성당을 완공하여 이해 7월 7일 한공렬(韓王公烈, 베드로)의 주례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현재 주임신부는 서석기(徐錫基, 베드로) 신부이며 1983년 교세는 교우수 1,956명에 공소 12개소이다.
역대 주임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1926∼1937년) 이기수, 2대(1937∼1946년) 이기순(李基順, 도미니꼬), 3대(1946년∼1951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4대(1951∼1952년) 강윤식(姜允植, 베네딕토), 5대(1952∼1954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6대(1954∼1957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7대(1958∼1961년) 김종택, 8대(1961∼1963년) 세르스테반스(D. Serstevens, 池正煥), 9대(1963∼1969년) 김영구, 10대(1970∼1974년) 이상호(李祥浩, 아우구스티노), 11대(1974∼1977년) 이용기(李龍起, 가브리엘), 12대(1977∼1977년) 김정원(金正元, 토마스), 13대(1977∼1982년) 김종길(金鍾吉, 라파엘), 14대(1982∼현재) 서석기.
특별한 축일(祝日) 미사 때 제2독서 후, 즉 복음 전에 노래되거나 외워지는 찬미가. 원래 ‘sequentia’란 알렐루야(Alleluia)의 마지막 ‘a’가 노래되는 일련의 음조(melody)를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후대에 음절로 된 텍스트가 소개되었고 음조가 아니라 찬미가와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성시(聖詩)를 뜻하게 되어 알렐루야 앞에 놓여졌다. 성시는 미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세기에는 많은 수의 부속가가 정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도미니코회 등 여러 수도회 전례에 남아있다. 로마 전례서에는 부속가의 수가 5개로 축소되었다. 이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부활축일의 ‘victimae paschali’와 성신강림 축일의 ‘veni, sancte Spiritus’, 성체성혈 축일의 ‘Lauda Sion’, 위령의 날의 ‘Dies Irae’, 성모통고 축일의 ‘stabat Mater’ 등이다. 현재는 이 중 처음 두 가지만 사용되고 있다. 다른 것은 임의로 할 수 있다.
주보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모시는 이 본당의 설정은 188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 교구로부터 영도에 있는 김보윤(金甫允, 로무알도)에게, 부산지방에 본당을 설정하니 신부를 영접해 가라는 통보가 왔다. 당시 경상도에는 로베르 (Rovert, 金) 신부가 대구에서 약 30km 떨어진 ‘신나무골’에 은거하면서 대구는 물론, 경상도 북부와 남부지방을 두루 사목하였는데, 경상도지방을 신부 혼자서 전교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교구에서는 경남일대를 관할하는 부산본당을 독립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 때 경주에서 피난와 영도에 은거하고 있던 김보윤은 그 해에는 신부를 맞으러 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1890년에 대구 새방골 이장언(李章彦, 프란치스코)과 함께 김보윤은 조조(Mouse Jozeau, 趙得夏) 신부를 안내하여 부산에 부임케 하였다.
조조 신부는 현 청학동성당 수녀원 자리를 임시 본당으로 정하고, 여기에서 2년 가까이 부산지방과 경남일대를 전교한 뒤, 1891년 7월경 영도를 떠나 지금의 부산시 대청동(大廳洞) 2가 15번지에 임시 성당을 지어 옮겼다. 1900년 7월에는 초량(草梁) 3동 47번지(현 초량입구 정발장군 동상 근처)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여 10여년을 지낸 다음, 또 본당의 위치를 부산의 중심지인 범일동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교구장으로부터 허락받아, 대지(현 데레사 여자 중고등학교 자리)를 마련하여 목조건물의 성당을 짓고, 본당을 초량으로부터 이전함과 동시에 교회 이름도 ‘부산진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부산본당을 동래 지역에 정하여 활발한 전교를 하려던 창설당시의 꿈이 실현된 셈이었다.
당시 본당의 관할구역은 낙동강 동쪽지역인 양산 · 동래 · 김해를 비롯하여, 영도 · 경주 등 32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1932년 청학본당 등을 분할하였으나, 일제 말기의 종교탄압으로 신부는 감금당하고 본당은 징발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세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1948년 중앙본당의 분할을 시작으로, 1951년 초량본당과 동래본당을, 1952년에 동항본당을, 1956년에는 광안본당 등 많은 본당을 분가하였다. 1964년 10월 현 성당의 소재지인 범일동 1375번지에 새 본당 건축을 기공, 1965년 12월말 연건평 7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당을 완공, 1966년 9월 18일 ‘부산진본당’을 ‘범일본당’으로 개칭하고, 그 해 12월 8일 최재선(요한) 주교의 집전으로 범일본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1975년 1월 문현본당을 분할하고, 1978년 11월에는 본당설정 90주년 기념 성서의 밤을 성대히 올렸다. 현 본당 주임은 제 30대 장병룡(張丙龍, 요한) 신부가 맡고 있으며, 신자수는 5,803명(1983년말 현재)에 달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도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