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례 [한] 補禮 [라] caeremonia supplementi

성세성사나 혼인성사 등 성사예식집행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그 한 예를 든다면 가톨릭 교회에서는 죽음이 임박했을 경우나 사제(司祭)가 없을 때 일반 사람들도 성세성사 예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물로써 이마를 씻으며 기도문을 욈으로써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을 대세 또는 ‘비상세례’(非常洗禮)라고 하여 정식 세례와 똑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에서 비상세례를 받은 자가 죽지 않고 살아났을 경우, 또 사제가 없어서 비상세례를 받았을 경우 신자 생활을 하려면 그 때 갖추지 못한 예식들을 보충하는 ‘보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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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네 [원] Baudounet, Francois Xavier

Baudounet, Francois Xavier(1859-1915).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대구교구 선교사.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고 동료신부 두 사람과 함께 그해 11월 19일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도중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도착한 세 사람은 블랑(Blanc) 주교로부터 두 사람만 들어오고 한 사람은 남아서 기다리라는 편지를 받고, 제비를 뽑은 결과 보두네 신부가 남게 되었다. 그 동안 인쇄일로 나가사끼에 건너온 코스트(Coste) 부주교를 만났고, 1885년 8월에야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곧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다음 6개월 뒤에는 경상도 신나무골로 갔고 거기서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여, 이듬해에 전라도 지방을 맡게 되었을 때에는 이젠 모국어만큼이나 한국말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박해가 사라져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全州) 시내에 정착하였는데, 그 때가 1891년이었다. 당시 전주에는 신자집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으나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을 때에는 몇 사람의 신부가 나누어 맡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신자수가 급격히 불어났었다.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신부는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임지로 내려가 폐허가 된 교회 재건에 전심하였다. 동학란으로 교세는 오히려 늘어나 이젠 더 큰 성당을 지어야만 했으므로 그는 모든 경비를 절약했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도 팔아 성당 건립을 위해 충당하였다. 이 때 건립한 전동(殿洞) 성당은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리하여 헌신적으로 한국인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1915년 5월 27일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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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학교 [한] 普德學校

평양교구 순천본당의 낙민면(樂民面) 교우들이 1909년 설립한 초등교육기관. 1911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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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2 [라] Bonifatius

Bonifatius(672-754). 성인. 주교. 순교자. 영국태생으로 독일 선교의 개척자. 축일은 6월 5일. 영국의 베네딕토회에서 로마 지향성, 선교활동 등에 대한 앵글로색슨 수도회의 이상을 흡수하고 717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양하고 719년 선교사목(宣敎司牧)에 대한 그레고리오 2세의 인가를 로마에서 직접 받았다. 그 뒤 유럽 대륙 게르만 민족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여 689년에 피핀(Pepin) 2세에 의해 정복되어 프랑크 왕국령이 된 프리시아(Frisia) 선교를, 721년 헤세(Hesse)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어 튀링지아와 마인츠 교회의 정비에 노력하여 740년 이 지역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교회회의를, 742년 쇠퇴일로에 있는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해 프랑크 교회 공의회를 개최(742-747년)하였다. 744년 그의 가장 유명한 수도회를 풀다(Fulda)에 설립하였는데 이곳은 독일 종교 및 정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754년 프리시아 선교 여행에서 53명의 일행과 함께 이교도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뒤 풀다는 순례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는 1874년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선교활동의 특색은 독일 교회를 로마와 긴밀히 연결시키고 철저하게 교황에 의탁, 여기서 권한을 위임받고 보호와 인도를 요청하였다는 데 있다. 또한 모 수도회와 분원사이의 관계를 긴밀히 하여 사업에 지속성을 부여하였으며 베네딕토 수녀원에 활동적인 교육사목을 소개, 그 분야에 있어서 다른 수녀들의 사업을 수세기나 앞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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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1 [라] Bonifatius

Bonifatius, 8세(1234?-1303). 교황(재위 : 1294-1303). 이탈리아 귀족 가에타니가(家) 출신. 볼로냐(Bologna)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을 공부한 후 교황청에서 근무하였고, 파리 공의회(1290년)에서 교황사절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추기경(1291년)을 거쳐 1294년 무능한 성 첼레스티노(Celestinus) 5세를 폐위시키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초기부터 많은 반대파를 갖게되었는데 그 중에는 연로한 전 교황의 강제퇴위 문제로 반목하던 ‘급진적 엄격주의파’와 그의 인척등용을 비난하는 콜로나가(家) 등이 있다. 재위 중 발생한 가장 큰 사건으로 프랑스 필립(Philip) 4세와의 교황권과 세속 왕권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교황청이 100년 전쟁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프랑스교회에 대한 과다한 과세를 징수하고, 교황의 동의없이 왕은 성직자에게 어떠한 세금도 부과할 수 없다는 교황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 필립 5세에 대해 교황은 파문으로 위협하였고, 필립 5세의 편에 콜로나가와 영성 프란치스코회가 합세, 교황 승직의 불법성과 이단 등을 이유로 교황을 단죄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교회가 사상 최초로 대사(大赦)의 해로 선포한 130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교황은 영적 권력과 속세의 권력에 대한 중세의 유명한 대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황이 세속 제왕을 임명하고 재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아냐니(Anagni)에서 콜로나가의 무리에게 유괴되어 목숨을 위협받고 난 뒤 곧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에 의해 절정에 다다랐던 교황권이 새로이 상승하는 국가주의 및 왕권과 적절한 세력균형을 이루지 못해 일어났다. 또한 교황 측의 실패에는 교황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가문의 세력 팽창에 대한 집착 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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