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벤투라 [라] Bonaventura

Bonaventura(1221-1274). 성인. 축일은 7월 14일. 이탈리아의 스콜라 신학자. 교회학자. 주교. 추기경. 이탈리아 비테르보 지방에서 태어나 20세 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파리 대학을 마치오 동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였다(1248-1255년). 이 때 동료교수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친교를 맺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회 총장으로(1257-1273년), 동회의 조직을 강화하는 등 혁신에 진력, 동회 제2의 건설자로 일컬어졌다. 첼라노(Celano)의 토마스(Thomas)의 저서를 바탕삼고 그것을 보족(補足)해서 공간(公刊)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Legendamajor S. Francisci)는 그 후 동회의 공인된 전기(傳記)가 되었다.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의 교황선거 때(1271년) 그를 강력히 지지, 그 공으로 알바노의 주교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1273년). 제 2차 리용 공의회(1274년)에 신학 고문으로 초빙되어, 회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성 토마스 이후 최대의 스콜라 학자로서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학파를 지도하였다. 당시는 스콜라학의 전환기여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부흥과 아울러 새로운 신학사상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그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점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대립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창조는 우리들의 이성(理性)의 빛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적 추상설을 주장하였고,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이 신앙깊은 그리스도교도에게 분배하는 신비적 조명(照明)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신비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베르나르두스(Bernardus, 1090?-1153)를 중시, 거기서 중요한 요소를 흡수했고. 또한 이른바 ≪가짜 디오니시오 문서≫를 애호하여 신비적 사색에 몰입하였다. 그의 소설(所說)에서 다소 모순과 불철저함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롬바르도(Petrus Lombardus)의 ≪명제집≫에 대한 주석(註釋)으로 명저(名著)를 남겼다. 그밖에도 ≪전집≫이 있고, 또한 ≪Doctoris Seraphici S. B. Opera omnia, Ad Claras Aquas≫(10권, 1882-1902), ≪Commentarii in IV libros Senteniarum Petri Lombardi≫, ≪Breviloquium≫, ≪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 ≪Itinerarium mentis in Deum≫, ≪Collationes in Hexaemeron≫, ≪De mysterio S. Trinitatis≫. ≪Quaestiones dipputatae≫ 등의 저서가 있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諡聖).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보고밀파 [한] ∼派 [영] Bogomiles

카타리파(Catharists)의 한 분파로 이원론(二元論)을 제창한 이단. 10세기 초 불가리아 지방에서 생겨나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에 영향을 미치다가 이슬람교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들에 의하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타나엘(Satanael)이었다. 이 사타나엘이 세계와 아담을 창조하였고, 그의 아버지인 신이 아담에게 영혼을 주었다. 그런데 사타나엘이 신에게 반역하여 천국에서 쫓겨나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사타나엘은 선한 인간을 타락시켜 벌을 받아 고통 속에 살게 하였다. 인간이 사타나엘의 영향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신은 그의 둘째 아들 예수를 인간들에게 파견하였다. 예수는 사타나엘을 정복한 후 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지상에다 성령을 남겨두고 갔으며, 유일하고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인 보고밀파에게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보고밀파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아세례, 수세, 결혼, 성체 속에 그리스도가 있음, 성화상, 주의 기도를 인정한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보감 [한] 寶鑑 [관련] 경향잡지

구한말 주간(週刊) <경향신문>의 부록으로 발간된 잡지.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과 같은 날 창간되어 1910년 12월 30일 220호로 <경향신문>과 함께 폐간되었다가 제호를 <경향잡지>로 바꾸어 그 체재대로 속간되었다. <경향신문>과는 달리 국판으로 8면씩 발간되어 읽은 뒤 책으로 제본하기 쉽게 되어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보감>은 모두 책 모양으로 제본되어 있다. 1년 동안의 것을 책 한 권으로 제본할 수 있도록 연말에는 반드시 목록을 작성하였고, <경향잡지>로 바뀌기 전 1910년까지 모두 4권 4책의 1,759면이 발간되었다. 창간호 논설에 ‘요긴한지식이라’에서 한 번 읽어 버릴 것이 아니라 책 모양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하니 이 요긴한 도리(道理)를 항상 익혀 생활토록 권장하고 있다. 법률문답과 대한성교사기(大韓聖敎史記)를 고정란으로 하여 불문(佛文)으로 된 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번역하여 연재하고. 법률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순 한글로 씌어져 한글 보급운동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 <경향잡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병자성사 [영] sacrament of anointing of the sick [한] 病者聖事 [라] Sacramentum unctionis i

교회가 고통당하시고 영광받으신 주님께 죽음의 위험에 처한 환자를 맡겨 드려, 주께서 그를 구원해 주시도록 하는 성사. 사제가 전례서에 규정된 기도문을 봉송하면서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예절로 집전한다.

성서에서 열두 제자는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고(마르 6:13),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앓는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야고 5:14)고 하였는데, 전자는 병자성사를 암시하고 후자는 그 보급을 시킨 증거라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해석하였다(Denz. 1695).

초대 교회에서 병자성사는 환자 자신이나 그의 친척이 축성된 기름을 바르는 사적(私的) 도유와 사제에 의한 전례적 도유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집전되었다. 전자는 가벼운 질환을 앓는 자가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후자는 중환자가 사제로부터 영적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인데 성사이론이 발전하지 못한 때여서 양자의 차이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9세기 이래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에 처한 자에게 마지막으로 영적 도움 즉 은총을 주기 위한 성사로 이해되었다. 이때부터 성사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마지막 도유 즉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13·14세기에 칠성사의 이론이 발전하였을 때 병자성사의 주요 효과는 질병을 영적으로 극복하는 성사은총을 주는 것이라 하였고 질병의 치유를 부수효과로 보았으며 병자성사를 받는 자의 자격 즉, 죽을 위험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조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병자성사를 칠성사의 하나로 규정하고(Denz. 1716) 성사의 효과로서 영적인 도움과 이에 부수하여 일어날 수 있는 육신의 질병 치유를 조화시켜 명시하였고(Denz. 1696), 성사받는 자의 자격을 죽음에 임박하지 않는 자도 가능하게 하였다(Denz. 1698).

그러므로 병자성사는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전례헌장 73) 신자에게 먼저 영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다음으로 육신적인 건강을 위하여 베푸는 성사라 할 수 있다. 병이나 노쇠로 죽음의 위험에 처한 자는 사망하거나 건강을 회복하게 되므로 병자성사도 이 두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지만 병자성사의 은총은 그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항상 질병에 대한 초자연적인 승리를 준다. 성사 은총은 환자 개인의 영신 생명에 영적 능력을 주어 신앙과 용기를 증진시킨다(Denz. 1969). 이는 병자성사를 통하여 치유자이신 그리스도와 만난 덕분이다. 그 결과 환자가 선종하면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 참여한 것이므로 질병을 영적으로 극복하여 승리를 거둔 셈이 된다. 그렇지 않고 환자가 육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상관적인 단일체이므로 성사은총으로 인한 영적 위안이 육신 치유의 결과를 낳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병자성사는 치유를 계속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성사이며, 그 결과 성사 은총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건강을 주거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케 해 주는 성사인 것이다.

[참고문헌] Prudent De Letter, Anointing of the sick, Sacramentum Mundi, vol. I, Burns & Oates, 1968.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병인양요 [한] 丙寅洋擾

1866년(고종 3년, 丙寅年)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江華島)를 침범한 사건. 프랑스 함대의 군사적 위협은 이미 1846년(헌종 12년)에 시작되었는데,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Cecille) 해군 소령은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기해(己亥)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회답을 받기 위해 그 이듬해에 다시 올 것을 통고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프랑스 군함은 이듬해에 다시 서해안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세실이 아니고 라피에르(Lapierre, 拉別耳) 해군대령이 군함 2척을 거느리고 왔었다. 그러나 강풍으로 군함 2척이 모두 파선됨으로써, 영선(英船)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56년에는 군함 비르지니(Virginie)호가 조선 해안을 약 1개월간 정찰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1860년에 영 · 불군(英佛軍)이 중국 북경을 점령한 사건이 전해지자, 불국 군함에 대한 공포가 커졌고 러시아의 남침 위협까지 겹치게 되니 조정은 천주교 측의 협력을 얻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홍봉주(洪鳳周), 남종삼(南鍾三) 등 지도급 교회 인물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방아책(防俄策)으로 한불동맹(韓佛同盟)의 체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로 이 때 북경에서 양인(洋人)을 학살한 사건이 전해져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이 대원군에게 천주교와의 교섭을 비난하고 나아가서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의 체포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병인(1866년) 박해가 시작되어, 주교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와 남종삼 등 저명한 교회지도자들이 모두 잡히어 처형되는 참사가 계속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들은 6월 중순(음)에 회합하고, 중국으로 박해소식을 알려, 구원을 청하기 위해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파견키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리델 신부는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선편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7월 7일(음) 중국 치푸(芝罘)에 도착하는 즉시 천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을 만나, 조선에서의 박해소식을 알리는 한편, 살아남은 두 신부를 구출하고, 또한 가능한 한 조선 교회를 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로즈 제독은 보복을 위해 곧 출동하려 했으나, 때마침 인도차이나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키 위해 조선으로의 출동이 자연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치푸에서 돌아온 로즈 제독은 우선 정찰을 목적으로 1866왼 9월 18일(음) 기함(旗艦) 프리모게(Primauguet), 통보함(通報艦) 데룰레드(Deroulede), 포함(砲艦) 타르디터프(Tardif) 호를 거느리고 치푸항을 출항하였다. 22일(음) 물치도(勿淄島, 오늘의 芍藥島)에 정박한 다음 군함 두 척만을 거느리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26일(음)에는 양화진(楊花津)을 거쳐서 서강(西江)에까지 다다랐다.

대원군은 프랑스 군함이 쳐들어올 것을 청국으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으나, 크게 믿지 않았으므로 해안경비를 별로 강화하지 않았던 터이라 군함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서강에서 만 하루를 정박한 프랑스 군함은 그 이튿날 하강하여 물치도에서 통보함과 합류하여 10월 1일(음) 물치도를 떠나 치푸로 되돌아갔다.

10월 6일(음) 로즈 제독은 조선 해안에 대한 정찰이 성공적이었음을 본국에 알리고, 그의 병력만으로도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에서의 박해를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므로 곧 휘하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러 가겠다고 보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로즈 제독은 10월 11일(음) 모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출발, 물치도에 정박하고서, 14일(음)에는 강화도 갑곶(甲串)에 육전대를 상륙시키는 한편, 한강 입구를 봉쇄하여 16일(음)에는 강화부(江華府)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프랑스 함대의 재침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이경하(李景夏), 이기조(李基祖), 이용희(李容熙), 이원희(李元熙), 신관호(申觀浩) 등 무장(武將)들로 하여금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부평(富平), 제물포(濟物浦) 등의 요소와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통진에 입성한 이용희는 19일(음) 로즈 제독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조선 침공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곧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로즈제독은 동일자로 회답하면서 선교사 살해를 문책하는 한편, 그 주모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사를 보내어 조약의 초안을 작성케 할 것을 요구하였다.

26일(음) 문수산성을 수비하던 한성근(韓聖根)은 마침 정찰 중이던 70명 가량이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가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군은 5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전등사(傳燈寺)에 집결 중이라는 정보에 접한 로즈 제독은 약 150명의 정찰대를 그 곳으로 파견하였는데, 정족산성을 수비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와 잠복해 있던 500여명의 군사가 이를 기습하여, 프랑스군은 30명의 부상자를 내고 간신히 갑곶으로 도주하였다. 이렇듯 연이은 패전과 곧 닥쳐올 추위로 염하(鹽河)가 얼어붙어 보급이 끊길 우려가 있었으므로 로즈 제독은 마침내 철군을 결심하게 되어 21일(음) 완전히 조선 해안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병인양요는 끝을 맺었다. 프랑스는 위신은 추락되었으나, 그들은 재차의 침략을 도모하지 못하고, 통상의 요구 등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향으로 조선과의 접촉 협상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의 국제적 지위와 청국과의 관계에서 조선의 독자성이 뚜렷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병인양요로 인해 종래의 쇄국양이(鎖國洋夷) 정책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고,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까지 침범하였다 하여 그 곳을 새로운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그 부근 절두산에서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李光麟, 韓國史講座 5卷, 一潮閣, 1981 / 崔奭祐, 丙寅洋擾小考, 歷史學報 30, 歷史學會, 1996.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