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체슬라오 [라] Wenceslaus

Wenceslaus(?~929). 성인. 축일은 9월 28일. 보히미아공(公)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호성인. 프라하 부근 스토초프(Stochov)에서 태어나 스타라 볼레슬라프(Stara Boleslav)에서 별세하였다. 920년경 그리스도 교도인 부친 보히미아공 라티슬라프(Ratislav)가 서거하자 이교도인 모친 드라호미라(Drahomira)가 어린 벤체슬라오의 섭정(攝政)이 되었다. 그보다 앞서 벤체슬라오가 그리스도교인인 조모 루드밀라(Ludmilla, 성녀)에게 교육받고 자라난 관계로, 모친은 그녀가 벤체슬라오에게 준 종교적 영향을 미워하여 921년 그녀를 살해토록 하였다. 922년 벤체슬라오는 그리스도 교도와 이교도 사이의 내분을 종식시키고 바바리아공 아르눌프(Arnulf)의 보히미아 침입을 막기 위해 친정(親政)에 들어갔다.

929년 우세한 독일군의 맹공격을 받게 되자 벤체슬라오는 독일황제 하인리히 1세가 대군주(大君主)임을 확인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는 성 비토(St. Vitus)의 유해를 프라하로 옮겨갔다. 통치자로서 성공적일 뿐 아니라 대외정책에도 솜씨를 발휘했으나 보히미아 국내에서 이교도의 반항을 진압시킬 수는 없었다. 벤체슬라오에게 아들이 탄생되자 그의 동생 볼레슬라프(Boleslav)는 통치권을 계승받지 못하게 된 것을 분개하여 스타라톨레슬라프로 형을 초청해서 살해하였다. 후에 벤체슬라오는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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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 [원] Becket, Thomas

Becket, Thomas(1118?-1170). 성인. 축일은 12월 29일. 주교. 순교자. 런던에서 태어나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처형, 순교하였다. 노르만의 중산층 이주자의 아들인 그는 파리에 유학한 후 런던에서 도매상인의 서기로 잠시 있다가 캔터베리 대성당 대주교 테오볼드(Theobald)에게 고용되어 있으면서 볼로냐에 유학하기도 하였다. 테오볼드 대주교에 의해 캔터베리 부주교(副主敎)로 발탁되었다. 1154년 테오볼드의 추천으로 젊은 왕 헨리 2세를 알현하고 대장대신(大藏大臣)에 임명, 왕과의 친교가 깊어졌다. 베케트는 왕의 희망하는 바와 그에 대립되는 교회의 이익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1162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임되자, 장차 왕과의 충돌을 지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권고에 못 이겨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엄격한 태도로 왕을 대했으며, 처음에는 세제(稅制)에 관해, 이어서 죄를 범한 성직자에 대한 재판문제에 관해 왕과 대립하였다. 1164년 왕은 범죄성직자의 재판을 교회의 손에서 국가로 이관하기로 결정한 이른바 <클라런던 법>(Constitutions of Clarendon)의 시행, 성직자들이 로마교황에 대한 탄원의 금지 등 각종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교회권을 압박하였다. 베케트는 이에 반대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호소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며, 이로 인해 영국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그로부터 5년간 외국의 수도원을 떠돌아다니며 투쟁한 끝에 1170년 마침내 왕과의 화해가 성립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파 주교들이 로마교황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왕의 격분을 사게 되어, 그 해 12월 29일 왕이 파견한 4명의 기사(騎士)에 의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였다. 이 살해행위는 전체 유럽을 분격케 하였다. 그의 무덤에서 일어난 여러 기적들이 보도되었다. 1172년 왕은 그의 무덤 앞에서 공식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교황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하였다. 1173년 교황에 의해 시성(諡聖)되자 그의 무덤에는 순례자들이 밀물처럼 뒤를 잇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은 전적으로 교황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영국에서 교황 지상권은 존속한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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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지 [원] Besi(de Bezi)

Besi(de Bezi) (?~?). 주교. 중국 강남(江南) 교구장. 이탈리아에서 출생. 선교사로 중국에 입국하여 강남 교구장으로 재직하면서 김대건(金大建) 신부, 페레올(Ferreol) 주교, 다블뤼(Daveluy) 주교 등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上海)의 주교관에 들른 조선 선교사들을 도와주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김대건 신부가 최양업과 같이 1842년 9월 조선 입국 도중 상해에 들렀을 때와 1845년 6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맞아들이려고 상해에 왔을 때 등 두 번에 걸쳐 김대건 신부를 도와주었다.

[참고문헌] 李元渟 · 許寅 編著, 金大建의 편지, 정음사, 1975/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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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움커 [원] Baeumker, Clemens

Baeumker, Clemens(1853-1924). 독일의 중세철학사가. 파더본(Paderborn)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죽었다. 뮌스터(Munster) 대학을 마치고 1877년 모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뮌스터의 대학 예비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883년 브레슬라우 대학, 1900년 본 대학, 1903년 스트라스부르크 대학교수를 거쳐 뮌헨 대학 교수로서 1912년 헤르틀링(Georg von Hertling) 교수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는 수많은 저술과 강의를 통해 독일의 토마스 아퀴나스주의 부활에 있어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중세철학사가로서 아비세보른(Aviceborn), 알파라비(Alfarabi), 세어셸(Shareshel)의 알프레드(Alfred), 브라반트(Brabant)의 시제이(Siger) 등 철학자에 관한 연구 및 철학교본 편집의 선구자였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학술지 (Munster 1891~)의 창간이었으며, 평생 동안 이 잡지의 편집을 지도하면서 비텔로(Witelo)에 관한 그의 주요한 연구논문을 게재하였다. 가장 영향을 준 저술은 ≪Die chrisliche Philosophie des Mittelaltes≫(Berlin-Leipzig 1909, 1913, 1923)이다. 그의 장서는 쾰른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연구소(A1bertus Magnus Institut)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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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 [원] Weber, Norbert [관련] 조선

Weber, Norbert(1870-1956).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회 총원장(Erzabt). 독일에서 출생. 1895년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수도서원을 했으며 1902년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08년 유럽을 방문한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를 만나 그의 초청을 수락하고. 이듬해 이 회의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세우고 또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자신도 일본을 거쳐 조선에 입국, 4개월간 머무르며 조선의 전통문화를 두루 살피고 이에 심취하여 귀국한 뒤 조선방문 때의 사진, 그림, 메모 등을 모아 1915년 ≪조선≫(朝鮮, Im Lande der Morgenstille)이라는 저서를 간행하였다. 1925년에는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조선에 재입국하여 당시 베네딕토회 선교사들의 관할지역이었던 함경남북도와 북간도 및 수원 · 안성 · 공주 · 해주 · 청계동 · 평양 · 금강산 등을 여행, 이를 바탕으로 선교활동과 조선의 풍습 · 민속 · 토속신앙 · 불교 등을 소개한 기록영화를 제작했고. 귀국 후 2차 조선여행 때의 자료를 모아 금강산을 배경으로 조선의 불교와 예술을 소개하는 ≪금강산≫(金剛山, In der Diamantbergen Koreas)을 저술 1927년 간행하였다.

1931년 총원장직을 사임한 뒤 당시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회가 관할하던 동(東)아프리카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56년 사망하였다. (⇒) ≪조선≫

[참고문헌] 가톨릭시보, 제1151호, 1979. 4. 22 / 교회와 역사, 제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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