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에르 [원] La Pierre 또는 Lapierre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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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르카드 [원] Lafourcade, Arnaldus

Lafourcade, Arnaldus(1860~1888). 조선 교구 선교사. 한국성(姓)은 나(羅).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의 랑드르(Landres) 지방과의 경계인 유르퀴(Urcuit)에서 태어난 그는 강인한 성격에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가장 어려운 포교지인 한국으로 가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1883년 2월 19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6년 9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1일에는 한국으로 떠났다. 그 이듬해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동료인 두세(Doucet) 신부를 도우며 한국말을 배워, 가을에는 독자적으로 한 구역을 전담할 수 있었다. 34개의 공소를 돌아다니며 1,170명의 신자들로부터 고해를 듣고, 52명에게 영세를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험한 산길을 찾아 헤매며 불편한 잠자리와 맞지 않은 음식은 그토록 건강했던 몸을 점차로 잠식하여, 임지에 내려온 지 1년도 못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외딴 이역땅에서 홀로 숨을 거두는가 싶었으나 우연히도 동료신부와 젊은 베르모렐(Vermorel) 신부가 그를 도우려고 찾아왔다가 그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에 입국한지 불과 1년 반도 못되는 1888년 7월 1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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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원] Raffaello, Sanzio

Raffaello, Sanzio(1483~1520). 이탈리아의 화가 · 건축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사람. 라파엘로는 11세 때, 화가로 우르비노에서 활동을 하던 아버지, 산치오(G. Sanzio)를 잃고, 1499년 페루지아로 가서 페루지노의 문하생으로 그림을 배웠다. 거기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스승의 구도(構圖)를 개조하였다. 공간에 교차하는 화음(和音)의 물결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음악적인 감각은 루브르 미술관의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예술적인 일관된 기조를 이루고 있다.

페루지아에 온 후로는 급속히 페루지노의 최고기법을 익혔으며, <성모대관(聖母戴冠)>(바티칸 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磔刑)>(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 밀라노) 등을 페루지노의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인데 공간의 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은 그의 스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여 준다. 그는 1504년 피렌체로 가서 4년간 체재하는 동안, 현실감에 넘친 예술 감각에 감동하여 그 곳의 예술적 전통에 도취되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明暗法) 등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도니 부처상(夫妻像)>등 초상화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며, 이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성모자상에 있어서도 성모의 자태나 피라밋형의 구도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다분히 나타나 있고 <그리스도의 매장>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 모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선인(先人)의 기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구성에 있어서의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의 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 등에는 언제나 독자적인 매력을 나타내었다. 1509년에는 교황 율리오 2세를 위하여 바티칸 궁전 장식에 종사하여 천장화(天障畵)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파르나소스> 등을 그렸다. 14년 동안 그는 건축에도 손을 대었는데 선배인 브라만테가 죽은 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의 감독을 맡았다. 미켈란젤로가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작품으로 미의 표현에 있어 미를 이차적인 가치로 밖에 인정하지 않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면, 라파엘로는 고전예술의 미의 이상을 불변의 기준으로 보는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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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라] Raphael [영] Raphael [관련] 천사

대천사(大天使), 대축일 9월 29일. 토비트의 이야기에서 주요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 ‘하느님이 낫게 하였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인 라파엘은 성서 중 토비트서에만 나온다. 여기서 라파엘은 토비트와 사라의 기도를 들어주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사라의 결혼을 주선해 주고 토비트의 눈을 뜨게 한다(토비 3:16-17, 11:13). 하늘로 돌아가기 전에 라파엘은 자신이 영광스러운 주님을 시중드는 일곱 천사 중의 하나(토비 13:15)라고 밝힌다. 토비트서의 저자가 사라에게 붙은 귀신과 라파엘을(토비 8:3) 기술하는 접근방법은 천사론이 발전되기 시작했던 당시의 문화와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라파엘의 공경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베네치아 교회의 주보가 된 것은 7세기의 일이며 그의 축일 미사는 17세기에 와서 많이 지내게 되었다.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라파엘의 축일을 전세계적으로 지내도록 하였다. 라파엘은 소재로 한 예술은 16세기 이래 다양해졌으며 여행자의 주보로 널리 묘사 되고 있다. (⇒)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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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제국 [한] ~帝國 [라] Imperium Latinum [영] Latin empire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발드윈(Baldwin von Flandern)을 황제로 하여 가톨릭이 세운 제국인데 1261년 멸망하였다. 초대 황제 발드윈은 그리스를 4분하여 데살로니카는 그의 지배하에 두고 나머지는 베네치아인과 십자군 참가자들에게 봉토로 분할해 주었다. 2년 뒤 발드윈은 불가리아 저항군의 손에 잡혀 죽고, 그의 동생 하인리히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재위기간 10년 동안이 라틴제국의 황금기로, 그 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쇠퇴, 1261년 발드윈 2세가 니체아의 군주 미카엘 8세에 의해 몰락함으로써 멸망하게 된다. 라틴제국의 건설은 효과면에서 완전히 부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파괴적이기도 하였다. 제4차 십자군 원장과 라틴제국의 건설을 통해 수행된 교황청의 정책, 즉 동로마제국에서 라틴주교의 승인과 지지, 비잔틴 교회의 라틴의식 강요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직자와 신도의 반발과 항쟁을 유발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에게 정교회란 개념은 그리스 민족주의와 반(反)라틴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리는 더욱 가속화된다. 또 베네치아 상인들의 활동, 즉 그리스에서 그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한 활동은 그리스인들의 독립의지를 부채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라틴제국은 멸망했지만 동로마제국의 힘도 약화되어, 이슬람교엣 대한 전초기지로서의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 터기에 의해 붕괴되고 가톨릭 제국은 이슬람 세력과의 직접 충돌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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