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느 [원] Racine, Jean Baptiste

Racine, Jean Baptiste(1633~1699). 프랑스의 비극작가. 깊은 종교적 도덕적 감수성을 가지고 예리한 심리적 해석으로써 인간의 감정과 격정(激情)을 그렸다. 코르네이유는 “확실히 파국(破局)으로 치닫는 행동이 그 인물의 성격에 의해서 뒷받침된다”고 평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아탈릭≫(Athalic), ≪에스텔≫(Esther), ≪미트리다트≫(Mithrid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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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카사스 [원] Las Casas, Bartolome de

Las Casas, Bartolome de(1474~1566).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회원.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언에 대한 위대한 보호자. 역사가. 세빌랴 태생. 법률을 공부한 후 콜룸부스(C. Columbus)의 1498년과 1502년의 항해에 그 비서로서 동행. 카리브해의 아이티섬에 식민자로 있을 때 인디언이 스페인인들로부터 잔혹하게 취급받고 있음을 알고, 인디언을 구하기 위해 스페인에 귀국, 신학공부를 한 후 사제가 되어 미 대륙에 도착하였다(1510년). 인디언의 노예적 취급의 완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스페인인으로부터 박해당하자 귀국(1515년), 인디언 문제에 대해 변호하였다. 후에 인디언 보호관에 임명되어 다시 미 대륙에 건너가, 선교사 이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베네수엘라에서의 인디언 식민계획은 인디언의 반란으로 실패하였다(1520~1521년). 산토 도밍고에서 도미니코회에 입회(1522년), 그 후 본국에 돌아가 인디언 보호법 통과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 후에 멕시코 치하파스의 주교로 있다가(1544~1547년), 스페인에 돌아가 발라덜리드(Valladolid)에 은퇴(1551년), 문서로써 인디언의 권리를 변호하였다. 그의 저서 ≪Brief Relation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1552),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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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살의 요한 [관련] 라살

⇒ 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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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살 [원] La Salle, Jean Baptiste de

La Salle, Jean Baptiste de(1651~1719). 사제. 성인. 축일 4월 7일. 그리스도교 교직(敎職) 수도회(라살회, Fratres Scholarum Christianarum)의 창시자. 프랑스의 랑스에서 출생. 수도사였으나 파리의 상 주르피스 신학교와 소르본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1670~1672년), 뒤에 성직자로 임명되었다(1678년). 이듬해 랑스에서 빈민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전념했으며, 기근이 들자 재산을 팔아 어린이들 구호에 힘썼다. 1684년에는 그리스도교 교직 수도회를 창립,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등록금 없는 국민학교를 세워 개인 교육에서 학급 교육으로 고쳤고, 라틴어 대신 모국어롤 가르쳤다. 또 체형을 폐지하고, 기숙사 교육을 채택하였으며 프랑스 최초로 공업학교와 사범학교를 설립하는 등 프랑스 학제(學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때때로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그가 죽은 뒤 수도회는 교황에 의해 승인되고 재조직되어 전 세계로 뻗어났다. 이 수도회 회원은 보통 수도자와 같은 서원을 하지만 주교는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의 페스탈로치’라 부른다. 주요 저서로는 ≪Regles de la bineseance et de la cilvilite chretienne≫(1703), ≪Regles communes des Freres des ecoles chretiennes≫(172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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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므네 [원] Lamennais, Hugo Felicite Robert de

Lamennais, Hugo Felicite Robert de(1782~1854). 프랑스의 종교철학자, 주교. 소년 시절에 루소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때 무신론자가 되었으나 22세 때 교회로 복귀, 이후 가톨릭 사상가로 활동하였다. 울트라몬타니즘(ultramontanism)을 기조로 하는 일련의 저작을 발표(1808년), ‘유럽을 몰락으로 이끄는 종교에의 무관심’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개인 이성(理性)에 대한 과신(過信), 무신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비난하는 한편, 사회의 구원은 ‘보편 이성’(普遍理性)의 구현인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에 의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요청하였다. 이어서 1820년대 후반에는 민주적 혁명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교회와 교육의 국가로부터의 분리와 출판의 자유화를 제안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 신문 <미래>(L’Avenir)를 창간(1830년), 사회주의적 사상 보급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비난을 당하자 교회를 떠났다(1834년). 이후의 저작은 이신론적(理神論的)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7월 혁명 때는 국회의원으로서 국정에 참가하였다. 교회정책, 신학, 철학, 사회사상 등에 관한 저서가 많으며, 그이 사상과 활동은 당대 및 이후 시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로 ≪Essai sur l’indifference en matiere de religion≫(4권, 1818~1823), ≪Paroles d’un croyant≫(1834), ≪Le livere du peuple≫(1837), ≪Es qisse d’une philosophie≫(4권, 1841~184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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