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셴 [원] Duchesne, Louis

Duchesne, Louis(1843~1922). 역사학자요 성인전 작가이며 고고학자이자 고위성직자. 프랑스 생세르방(Saint-Servan)에서 출생하여 로마에서 별세.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로시(G.B. de Rossi)의 지도 아래 고고학과 초대 교회사에 관한 예리한 안목을 길렀다. 1867년에 사제가 되어 Ecole S. -Charles de S. -Brieuc(1867~1871년)에서 가르친 뒤 공부를 더욱 하려고 Ecole des Carmes와 Ecole des Hautes Etudes(1871~1873년)에 갔다. Ecole archeologique francaise de Rome의 구성원이 되어 에피루스(Epirus)와 소아시아 등지에서(1874~1876년) 선교와 연구를 하였고 파리의 Institut catholique에서(1877~1885년) 교회사의 교수를, Ecole superieure des lettres(1885~1895년)의 교장을 역임하였고 1895년에 별세하기까지 Ecole archeologique francaise de Rome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의 첫 저작은 5세기의 호교론자 마카리우스 마뉴스(Macarius Magnes)의 연구였고 뒤이어 교황 전기(Liber pontificalis)에 관한 연구를 내었으며, ≪Histoire ancienne de 1’Eglise chretienne≫(1906~1910)는 첫 5세기의 교회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입문서이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Martyrologium Hieronymianum≫(1894), ≪Les Fastes episcopqux de 1’ancienne Gaule≫(3v. 1894~1915), ≪”Liber Censuum” de 1’Eglise romaine≫(1905), ≪Les premiers temps de 1’Etat pontifical 757~1073≫(Paris 1898), ≪Autonomies ecclesiastiques Eglises separees≫(1905), ≪Les origines du culte chretien≫(188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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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 [원] Durer, Albrecht

Durer, Albrecht(1471~1528). 독일의 화가요 판화가로서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시킨 거장. 목판과 동판의 판화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15세기에 시작된 유럽의 판화예술은 그의 노력에 의하여 요람기로부터 일약 완성기에 도달하였다. 판화 가운데 <묵시록>, <대수난> 등은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탈리아에서도 모각(模刻)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뉘른베르크에서 조금사(彫金師)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평생을 건실한 직인(職人) 기질로 끊임없이 작품을 창작하는데 정진하였다.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투시법)와 인체표현을 터득하고, 이것을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 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격한 구성과 원근법(遠近法)의 결합이다. 놀랄 만큼 다면적인 재질을 타고난 그는, 기교와 형식뿐만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깊이를 가진 예술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그는 독일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예술의 모든 성과를 자기의 내부에 침투시켜, 이것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이 내적(內的) 통일을 깨뜨리지 않는 동안에 이것을 당시 아직 통일성을 잃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독일문화의 최고의 성과로서 독일민족에게 남겨 주는 역사적인 과업을 달성하였다.

이 점에서 독일에서의 그의 존재는 마치 이탈리아에서의 단테와 같이, 전 세계의 보배로운 예술가로 평가된다. 가톨릭의 종교적 깊이는 그의 작품에 독특한 힘과 내적 진실성을 나타냈다. 그의 주요한 관심은 1505년 까지는 판화였으며 이탈리아에 다녀온 11년까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마리아전 등을 목판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1509년부터 12년까지는 동판으로 수난화를 새겼다. 뒤러는 전 생애에 걸쳐 거의 유화로 초상화를 그렸으며, 주요한 작품은 <자화상>, <막시밀리누스 황제> 등이고, 1511년에 그린 <빈의 성인들의 제단>은 대단히 큰 규모의 구도로 선과 색채도 분명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요한, 베드로, 바울로와 마르코를 그린 것으로서 뉘른베르크시에 기증한 작품들이다. 이들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 · 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하고 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그리고 900점에 이르는 데상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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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리본당 [한] 屯田里本堂

6.25동란 직전인 1950년 4월 22일 혜화동공소로부터 분할된 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廣州郡 大旺面 屯田里)에 자리 잡은 이 본당은 초대 주임으로 박지환(요한) 신부가 부임하면서 설정되었다. 성당은 당시 공소강당으로 쓰던 30평 건물 부지에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관할구역은 대왕면을 비롯하여 낙생면, 돌마면, 오포면, 일부지역이었다. 2대 주임으로는 1962년 9월 17일 유진선(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하였고, 3대 주임인 이명기(베르나르도) 신부가 1968년 6월에 부임하여 재임중, 이 지역에 비행장이 들어섬으로써 성당은 부득이 철거되고, 본당도 폐쇄하게 되어, 그 대신 성남시 수진동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둔전동본당을 계승한 수진동본당의 창설 신부는 이명기 신부가 되었다. 이 본당은 주보로 ‘성요셉’을 모시고 현대식 연와조 성당과 사제관을 지어 봉헌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1976년 10월 12알 단대동성당을 분리하고, 1982년 2월 8일에는 성남동성당을 분리하였다. 현재 주임은 정주성(鄭主成, 요셉) 신부가 맡고 있으며, 신자수는 5,459명에 달한다(1983년 말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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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스 스코투스 [원] Duns Scotus, Johannes

Duns Scotus, Johannes(1265?~1308). 성기(盛期) 스콜라학의 마지막 인물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281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보나벤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수학적인 엄밀성과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함이 학문의 이상이라 하여 예리하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한 예견구제(豫見救濟)로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그의 주장은 신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스코투스는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논증을 개연적이고 불확실한 것으로 배척하고 아프리오리(a priori)한 논증만이 참된 논증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존재와 속성, 영혼불멸 등에 대한 참된 논증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에 대한 개연적인 논증밖에 할 수 없다고 하여 신을 논증하려는 시도의 무의미성을 비판하였다. 신이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고, 어떤 근거 없이도 존재하는 무한자(無限者)로 신은 그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가 선악의 최고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를 오성(悟性)보다 우위에 두었다. 인간에 있어서도 의지가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어떤 행위를 할 때 오성은 단지 이성의 보조원인(causa subserviens)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의해 선택된 행위이고, 이 행위의 선악도 신의 의지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도미니코회의 의해 채택되어 발전되었고,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채택되어 발전됨으로써 이 두 개의 수도회가 서로 대립된 입장을 갖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후에 유명론 자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고 이로 말미암아 둔스 스코투스는 스콜라학과 르네상스를 연결시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저서로는 ≪opus Oxoniense≫, ≪Reportatio Parisiensis≫, ≪Questiones Quodlibetales≫, ≪De primo rerumomnium principio≫, ≪Quaestiones Disputata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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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원] Doucet, Camille-Eugene

Doucet, Camille-Eugene(1853~1917).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정가미(丁加彌). 1917년 4월 19일, 1876년부터 40여 년간, 갖은 박해를 헤치며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인 부주교 두세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 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1853년 11월 16일 쉬브롱(Chevron)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76년 12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25일 한국으로 떠났다. 이 때 한국에는 1866년 병인박해로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가 순교한 뒤에도 계속 박해가 끊이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877년 3월에 만주에 도착한 그는 9월 11일 리델(Ridel) 주교와 로베르(Robert)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닻을 내리고, 배천으로 들어가 1878년 1월말에는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만나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였다.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니면서도 전교활동을 멍추지 않았고, 12월에는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도중,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간 병석에서 신음하는 고통도 겪었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 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1896년 코스트(Coste)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바쁜 봉사생활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몸이 노쇠해져 4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 봉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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