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를 노래하며 장엄한 행렬로써 거행하던 기원제(祈願祭). 새 교회력(1970년 개혁)에서는 이것이 폐지되었다. 같은 종류의 기원제로 예수승천 축일전 3일간에 걸쳐 거행되던 것을 소기도(litaniae minores)라고 하였는데 이 소기도를 한국교회에서는 삼천기도(三天祈禱)로 불렀다. (⇒) 삼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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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를 노래하며 장엄한 행렬로써 거행하던 기원제(祈願祭). 새 교회력(1970년 개혁)에서는 이것이 폐지되었다. 같은 종류의 기원제로 예수승천 축일전 3일간에 걸쳐 거행되던 것을 소기도(litaniae minores)라고 하였는데 이 소기도를 한국교회에서는 삼천기도(三天祈禱)로 불렀다. (⇒) 삼천기도
옛 교우들이 하느님의 별칭(別稱)으로 사용하던 말로 가장 높은 임금이며 가장 높은 아버지라는 뜻. 조선왕조가 천주교를 말살하려고 한 윤리적인 이유로서 천주교인들을 소위 ‘무부무군(無父無君)하다’ 즉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하여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박해자들의 용어에 대응하여 순교자들은 ‘대군대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이는 바로 하느님이 천지의 창조자이므로 ‘대군’이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대부’가 된다는 뜻이며,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대군대부’를 배반하는 것이 될 때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던 터이다.
대구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 1946년 3월 1일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이라는 제호로 창간된 후, 1950년 8월 1일 <대구매일신문>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해 10월 1일 대구교구 유지재단에서 매일신문사를 인수하여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1960년 7월 7일 지역성을 탈피하고 전국적 일간신문으로 발돋움하려는 목적으로 제호에서 ‘대구’라는 두 자를 빼고 <매일신문>으로 개칭하였다가 1980년 12월 1일 지령 11,198호를 기해 <영남일보>(嶺南日報)를 병합하면서 제호가 다시 <대구매일신문>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구매일신문>은 천주교 교리에 근거한 사회참여와 강한 재야기질의 논조로 인해 여러 차례 필화사건을 당하기도 했는데, 자유당 정권 때인 1955년 9월 13일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하의 사설로 인해 이튿날 신문사가 백주에 테러를 당하고 주필 최석채(崔錫采)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소위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과 1965년 간첩관계 기사의 게재로 인해 편집국장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필화사건을 당했으나 두 사건 모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안동(安東) 교구 관할 일부지방을 제외한 경상북도 일대를 관할하는 교구.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자, 1911년 4월 8일 조선 대목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 대목구로 설정,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당시 경향신문 사장이던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를 초대 대목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드망즈 신부는 그 해 6월 11일 서울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6월 26일 대구에 부임함으로써 새 교구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① 전사(前史) :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등을 중심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는, 권일신의 제자인 유항검(柳恒儉)이 스승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전라도의 처음 신자가 되었고, 그의 전교로 전라도 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되었었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 닥친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는 한편, 경기 · 충청 · 전라도의 살아남은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의 산협지대, 즉 태백산과 소백산중으로 피신하여, 화전(火田)을 일구며 연명하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을 귀화케 함으로써 경상도에도 비로소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파된 천주교는 신자들의 근거지가 심산유곡(深山幽谷)인 까닭으로 별다른 박해를 받음이 없이 늘어나 차차 상주(尙州), 청송(靑松), 영양(英陽), 진보(珍寶) 등지에 교우촌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의 손길은 이곳까지 찾아와 1815년에 청송의 포졸들이 모래산의 교우촌을 습격하여 많은 교우들을 체포해서 경주(慶州)옥으로 압송하였다가 6~7인은 대구감영으로 인도되어 처형되니 경상도에서도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어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에도 몇몇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1849년에 신부가 되어 입국한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숨어 다니며 전교에 힘썼고 1857년에 보좌주교로 성성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는 경상도 지방의 전교를 담당하여 교우촌이 여러 곳에 생겨났는데, 특히 양산(梁山), 동래(東萊) 지방의 교세가 그 중 가장 번성하였다. 따라서 1866년 병인년(丙寅年)의 대박해령이 내려지자 예천(醴泉), 밀양(密陽), 진주(晋州) 등 각처에서 많은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렇듯 천주교가 경상도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음은 병인년을 전후해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경상도 전교에 힘써, 멀리 거제도(巨濟島)까지도 찾아가 전교한 데도 기인한다.
병인박해 이후 지하에서나마 꾸준히 신앙을 지켜 내려온 삼남(三南)지방은, 한불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1886년 경상도 지방은 로베로(Robert, 金保祿) 신부가, 전라도 지방은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각각 전교를 담당하여, 1889년에 대구본당을 창설한 것을 비롯해서 조조(Jozeau, 趙得夏), 보두네(Beaudounet, 尹沙勿),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연이어 각 지방으로 진출하여 성당을 건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교사업을 전개함으로써 교세는 급격히 늘어나 거제도와 제주도에까지도 뻗게 되었다.
② 교구 설정 후 : 이렇게 해서 대구 대목구가 마침내 독립되기에 이르렀고, 초대 대목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우선 1913년에 대구에 주교관 건물을 비롯해서, 유스티노 교구 신학교와 성 바오로수녀원 등을 차례로 설립하여 모든 조직을 갖추고, “신뢰하고, 일하자”라는 표어 아래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31년과 1934년에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각각 감목대리구로 하여 교구 설정을 준비케 했고, 이어 1937년 4월 13일에 전라북도 지방을 전주 지목구로 승격시켜, 벌써부터 이곳에 진출하여 선교하던 아일랜드계 골룸바노회 신부들에게 그 전교사업을 위임하였다.
교구창설 이후 27년 동안 대구교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긴 드망즈 교구가 1938년에 별세하자, 그 뒤를 이어 무세(Mousset, 文) 신부가 제2대 대목으로 임명되어, 1939년 5월 7일 대구 주교좌 성당에서 성성식을 갖고 주교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종교활동마저 통제하기에 이르러, 무세 주교는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하고, 1942년 8월 30일 일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신부가 대목으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1945년 민족해방과 함께 하야사까 주교가 별세하자 1946년 1월 16일 주재용(朱在用) 신부가 대구 대목구의 임시 관리자로 임명되어, 교육사업을 통한 전교에 힘쓰고자 대건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세확장에 노력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노기남(盧基南) 서울대목이 약 8개월 동안 대구대목을 겸임하게 되었다.
1948년 12월 9일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가 주교위에 서임되어 대목에 취임하자 그는 가톨릭청년연합회에서 간행하던 <천주교회보>를 <가톨릭시보>로 개제(改題)하여 속간하는 한편, 1950년 12월에는 <대구매일신문>을 인수 경영하였고, 효성(曉星)여자대학의 설립 인가를 받아 교육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한편 덕원(德源)에 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관내인 왜관(倭館)에 수도원을 재건하자 대구대목구의 감목대리구의 성격으로, 왜관을 중심으로 몇몇 군(郡)의 전교사업을 전담케 하였다. 이어 1954년 6월 18일에는 경상남도 지방을 교구로 독립시킬 준비로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였다.
1954년 12월 14일 최덕홍 주교가 별세하고, 그 후임으로 서정길(俆正吉, 요한) 주교가 취임하였다. 한편 경남 감목대리구는 1957년 1월 21일 대목구로 독립되어 분할되었고, 대구 대목구는 경상북도 일원만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1958년 6월 2일에 다시 안동 감목대리구를 설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촉하여 교구를 준비케 한 결과 1969년에 교구로 승격되었다. 1962년 3월 10일 한국 가톨릭 교계제도의 설정에 따라 대구 대목구는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 서 주교는 대주교로 승격되었다. 대구 대교구 관구는 관하에 부산, 청주, 마산, 안동 등 4개의 속교구(屬敎區)를 갖게 되었다.
1972년 11월 30일에 이문희(李文熙, 바오로) 신부가 성성되어 보좌주교로 취임하였는데 1983년 말 현재 교세를 살펴보면 신자 수 16만 6,414명, 본당 수 72개소, 공소 134개소, 한국인 신부 144명, 외국인 신부 18명, 한국인 수사 78명, 외국인 수사 6명, 한국인 수녀 581명, 외국인 수녀 12명, 남녀 수도단체 17개, 양로원 3개소, 병원 3개소, 초등학교 1개교, 중 · 고등학교 16개교, 특수학교 2개교, 대학교 2개교, 주일학교 72개소 등이다.
[참고문헌] 崔正福, 大邱天主敎會史 / 한국천주교주소록 1983~1984, 1984 / 敎區年報. 釜山敎區史編纂委員會編,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천주교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편, 교구사연대표, 1984.
1980년 천주교 대구 대교구에서 발행한 대구교구의 총람. 원 제목은 ≪교구총람≫이지만 서울 대교구 교구총람과 구별하기 위해 보통 ≪대구교구총람≫이라고 한다. 책의 체제는 양장본 4 · 6배판, 면수는 1,152면이다. 내용은 전체가 12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에는 15면에 걸쳐 현역교구장 사진, 교구사제들의 사진, 교구행사 사진 등 종합화보가 실려 있고, 둘째 부분에는 1979년 한 해 동안의 교구일지가 실려 있으며, 셋째 부분에는 대구교구 고유의 사업과 운동이 소개되어 있다. 이어서 넷째 부분에는 교구의 현황이, 다섯째 부분에는 교구사목계획 추진현황이, 여섯째 부분에는 교구산하 본당들의 현황이, 일곱째 부분에는 사도직단체들의 현황이, 여덟째 부분에는 신심운동단체들의 현황이, 아홉째 부분에는 각 교회기관들에 대한 현황이, 열 번째 부분에는 수도단체들에 대한 현황이, 열한 번째 부분에는 교구재단에 대한 현황이 각각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열두 번째 부분은 부록으로 교구 소속 사제 · 신학생의 명단과 수도단체 회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대구교구총람≫은 오늘날의 교회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나 각 본당, 교회단체, 수도단체 등의 약사와 각종 도표 및 통계표들은 빠져 있고 현황만이 서술되어 있어 실제로 연감의 구실만 할 뿐 총람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구교구에서도 이러한 단점을 파악하고 이의 보완을 위해 1982년 ≪대구대교구연감≫을, 1984년 ≪교구사연대표≫와 ≪교구사화보≫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