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루 [원] Danielou, jean

Danielou, jean(1905~).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 파리 가톨릭대학 교부신학 교수(1943년), 성서, 전례(典禮), 교부신학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 신학 재흥자의 한 사람. 그는 신 · 구약성서의 예형론적(豫型論的) 해석에 힘입어 역사의 신학적 의미를, 점진적으로 실현해 가는 구세질서에서 발견하였다. 암스테르담 세계 교회회의에 관한 바르트(Karl Barth), 니버(Reinhold Niebuhr)와의 공저인 《Amsterdamer Fragen u. Antworten》(1949)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 《Platonisme et theologie mystique》(1944, 1954(2)), 《Le Mystere de l’Avent》(1948), 《Sacramentum Futuri(origines de la typologie biblique)》(1950), 《Essai sur le Mystere de I’Histoire》(1953) 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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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 옵스탓 [라] nihil obstat

‘아무 것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이며,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저서의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에 아무 것도 위배됨이 없음을 확인한다는 뜻. 저서의 앞면에 확인일자와 확인관의 성명을 교구장의 임프리마투르와 나란히 인쇄하여 두는 것이 일반이다. 그 확인은 교구의 첸소르가 담당한다. 일반신자나 비신자는 특정 저서의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쉽게 식별할 수 없으므로 교회의 교도권은 니힐 옵스탓의 표시를 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에 그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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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2 [라] Nicolaus

① 미라의 ~ (N. Myrae, ?~345/352). 성인. 소아시아 뤼치아지방 미라의 주교. 이름은 동서 교회에 잘 알려져 있고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생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때(303년) 투옥되고, 후에 석방되어 니체아 공의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공의회 출석자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은 없고, 아타나시오(Athanasius)의 문헌에도 그 이름은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세운 교회 이름이 ‘성 프리스코스와 성 니콜라오의 교회’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이름이 공식으로 기록된 최초의 것이다. 서유럽에서 그는 선원(船員)의 수호성인으로 되어 있고, 12월 6일에 어린이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며 다니는 산타클로스 이야기와도 결부되고 있다. 축일은 12월 6일.

② 쿠사의 ~ (N. de Cusanus, 1401~1464). 중세 말기와 근세 초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추기경. 원명 Nikolaus Chryffs(Krebs). 브릭센(Brixen)의 주교. 독일의 모젤강변의 쿠에스 태생. 데벤터(Deventer)에 있는 ‘공주생활 형제회’에서 경건한 교육을 받고, 하이델베르크 및 파두아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법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자연과학 · 수학 · 철학도 열심히 연구하였다. 교회법학 학위를 취득한 후, 신학을 연구, 사제로 서품되었다(1430년). 교회 정치면에서도 실제적 활동을 했지만, 그의 본령은 오히려 관상(觀想)과 명상에 있었고, 또한 그의 목표는 교회의 일치에 있었다. 주저(主著)인 《학식 있는 무지》(De docta ignorantia, 1440)에서는 유명한 ‘무지의 지(知)’와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두 원리가 전개되고 있는데, 절대적인 진리는, 하나 · 단순 · 무한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으므로, ‘무지의 지’야말로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며, 우리가 ‘반대의 일치’인 신(神)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직관 즉 ‘무지의 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적 계보의 선구(先驅)가 되는 것은 스콜라학(學)과 신플라톤주의이며, 그가 특히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 프로클로스(Proklos), 디오니시오(Dionysius), 보나벤투라(Bonaventura), 에크하르트(M. Eckhart)등을 들 수 있다. 르네상스의 선구자이며 근세철학, 특히 브루노(Giordano Bruno), 라이프니츠(G.W. Leibniz)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 《De quaerendo Deum》(1445), 《Idiotae libri》(1450), 《De non aliud》(1462), ≪De Apice Theoriae≫(1463~146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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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1 [라] Nicolaus

Nicolaus 1세(800?~867). 교황(재위 : 858~867). 로마의 귀족 출신. 성 레오 4세 및 특히 베네딕토 3세 밑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황제 루드비히 2세의 비호 밑에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교황권의 절대 불가침성과 무제한적 우위를 주장하고, 뛰어난 재능에 의해 그 주장에 못지않은 실적을 남겼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시우스(Photius)의 취임에 간섭하여 그를 파문에 처하였다(863년). 이 행동에서 로마 교황의 우위가 동로마의 교회에까지 미친다는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황제의 지지를 기화로 교황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던 라벤나 대주교 요한을 교황권 밑에 굴복시켰고, 또한 주교를 파면시킨 랑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 de Reims)에 대해서는 대주교의 주교파면권을 인정치 않고 그 조치의 철회를 명하는 등으로 교회 내에서의 교황권의 강화에 힘썼다.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가짜 이시도로 교령집≫을 인용해서 교회국가주의를 주장하고, 프랑크왕 로타르 2세의 이혼을 승인치 않고, 왕을 교황의 뜻에 굴복케 하였다. 그 밖에 불가리아에 대한 포교(布敎)를 촉진하였다.

2세(?~1061). 교황(재위 : 1058~1061). 본명 Gerardus. 프랑스의 부르고뉘 태생. 리에즈(Liege)의 참사회원으로 있다가 피렌체 주교가 되었다(1045년). 그는 짧은 교황 재위기간에 교회 내부 개혁의 촉진과 교황권 지위의 강화라는 중요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 선거는 추기경들의 호선(互選)에 의할 것을 규정한 ‘교황 선거령’을 발표하여(1059년), 세속권력의 개입 · 간섭을 배제하고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그는 힐데브란드(Hildebrand, 후의 그레고리오 7세)의 보좌를 얻어 교회 개혁에 노력하였고, 노르만의 세력과 결탁하여 황제에 대항하는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가 ‘교황 선거령’에서 독일왕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치 않은 것과, 새로운 대(對) 노르만정책이 독일왕을 격분케 했으며, 1061년의 교회회의에서 독일의 여러 주교들은 교황의 폐위와 그가 내린 여러 규정의 무효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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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공의회 [한] ~公議會 [관련] 니체아공의회

⇒ 니체아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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