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지처참 [한] 凌遲處斬

대역죄(大逆罪)를 지은 사람에게 과하던 최대의 형벌. 머리, 양 팔, 양 다리, 몸뚱이의 순으로 여섯 부분으로 찢어서 각지에 보내어 여러 사람에게 구경시킴으로써 대역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조(高麗朝) 공민왕(恭愍王) 이후 조선조(朝鮮朝) 초기에 시행됐으나 고종(高宗) 31년(1894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한국 교회는 창설 당시부터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이들 순교자들은 천주교를 신봉하고 외국 성직자를 영입한 것이 국헌을 문란케 한 대역죄를 범한 것이라 하여 능지처참형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유항검(柳恒儉), 황사영(黃嗣永)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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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서 [한] ~書 [라] Liber Nehemiae

1. 예비지식 : 느헤미야서는 본시 에즈라서와 한 책을 이루고 있었는데,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의 영향이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주로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 타역의 영향을 받아 차츰 따로 떼어 취급하게 되었고 이름도 제2 에즈라라고 하는 경우가 생겼다. 불가타 구분에 따른 제1 및 제2 에즈라서란 히브리 성경인 마소라 텍스트의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희랍어 역본에는 이 두 책을 합하여 제2 에즈라라고 하였다. 희랍어역본의 제1 에즈라서는 불가타역의 제3 에즈라서에 해당한다. 불가타역의 제4 에즈라는 희랍어역본에는 ‘에즈라 예언자’ 또는 ‘에즈라 묵시록’으로 불린다. 제3 에즈라는 외경으로, 제4 에즈라는 묵시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소라 텍스트에는 물론 현대어 번역본에는 없다 –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아 역대기와 함께 소위 역대기 역사서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데 구약의 정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역대기와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역대기는 고유의 신학적 시작을 갖고 있긴 하나, 역시 이스라엘의 바빌론 귀양(기원전 587년) 전까지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사실 신명기학파 역사서와 중복되는데 반해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귀양 후 기원전(538년)의 역사를 취급하기 때문에, 귀향전후의 역사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역대기보다 먼저 그 필요성을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많고, 따라서 보다 일찍이 정경으로 인정됐다고 본다.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역대기 앞에 놓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2. 내용-구성 및 신학 : 에즈라서와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는 느헤미야서를 따로 떼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느헤 1~7장 아르닥사싸의 헌작 시종관인 느헤미아는 하갈랴의 아들로서 기원전 445년에 페르시아의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다시 세운다. 1:1~2:10은 도입 부분이랄 수 있다. 고향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가 휴가를 얻어 귀향하니 사마리아인들은 비웃는다. 2:11~6:19는 성벽을 쌓고 예루살렘의 외형을 재정돈한다. 산발랏과 토비아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내적 외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은 완성된다. 그러는 가운데 백성들의 불평을 보고 느헤미야는 자기 수입을 포기한다.

7장은 귀향자들에 대한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8~13장은 느헤미야의 12년간 통치 : 에즈라가 갖고 온 규범의 낭독과 초막절의 축제(8장), 보속기도(9장), 백성들의 규범에 대한 약속(10장), 여러 종류의 목록과 명단(11:3~12:26). 예루살렘 성곽의 축성(12:27-43), 공동체 안에 있던 여러 폐단의 시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느헤 8~10장은 에즈라 7~10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즉 에즈라 7장, 느헤 8장, 에즈 9~10장 느헤 9~10장 순서로 보는 것이 무리없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느해 8~10장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일인칭 주어가 강조되는 독특한 문체로 되어 있고, 역사 기록으로 상당히 신빙할 만하다. 역대기 역사서가 기본 방향, 표현 방식 및 문체에서 비교적 흡사한데 비해 느헤미아서는 8~10장을 제외하고는 그 독특한 일인칭표현 방식이 지배적이어서 학자들은 이 문헌의 양식을 일반적으로 ‘회상록’(Memore / Denkschrift)이라고 한다. 성전에 보전할 목적으로 이 책이 씌어졌다면 ‘기념문’(Gedenkschrift)이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문헌의 기본 성격은 주인공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위인인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사건의 묘사나 다른 인물에 대한 언급은 이차적인 요소밖에 안된다고 할 수 있다. 1~2:11에는 느헤미야의 파견이 이야기체로 꾸며져 있는데 이 뒤에는 하느님이 오묘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역대기 역사서 전반에 걸쳐 이해돼야 하는 느헤미야서의 신학적 의미는 예루살렘의 복구로 유다의 정통성을 드러내고 유다 공동체의 복구는 예언의 이행이며 이것은 바로 하느님이 당신의 약속 말씀에 충실하시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더구나 법을 선포하므로 새 세대가 열린다는 것을 일러 주고 있고 이로써 하느님의 약속은 미래를 향해 효과가 있음을 말해준다.

3. 저자와 저술의 때 : 느헤미야서는 에즈라서와 함께 기원전 4세기 중반 또는 후반에 씌여졌다고 볼 수 있다. 더 후대에 첨삭이 되었을 가능성은 고려해 두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꼭 느헤미야라고 할 수는 없고 그가 어떤 서기에게 쓰라고 위탁했을 법하다. (沈勇燮)

[참고문헌] G. Holscher, Die Biicher Esra und Nehemia, in : HSAT II, Tubingen 1923(4) / S. Mowinckel, Erwagungen zum chronistichen Geschichtswerk, ThLZ 85, 1960; Die Nehemia-Denkschrift, SNVAO II. NS II 5, Oslo 1964 / G von Rad, Die Nehemia-Denkschrift, ZAW 76, 1964 u. Kellermann, Nehemia. Quellen, Uerliefernng und Geschichte, BZAW 102, Berlin 1967 / 야곱 M. 마이어스, 에즈라 느헤미아, 뉴욕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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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원] New Zealand

오세아니아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나라로서 면적 26만 8,676㎢에 인구 약 316만 3,000명(1982년 추계)에 이른다. 뉴질랜드는 네덜란드 출신 탐험가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1642년에 발견, 명명하였으며, 제임스 쿡 선장이 1769년부터 이 지역을 방문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1840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지금은 자치독립국으로서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836년에 창설된 서부 오세아니아의 감목대리구에 뉴질랜드가 포함되었으며, 잔 폼팔리어(Jean Pompallier)주교를 최초의 감목대리로 하여 마리아회(Marist Fathers)에 위임되었다. 뉴질랜드는 당시 약 10만명의 마오리족과 1,000여명의 유럽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유럽인의 대부분은 영국출신이었으며, 1814년 이래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마오리족들 사이에 포교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폼팔리어와 마리아회 사이에 불화가 생겨 로마교황청은 1848년 뉴질랜드를 웰링턴교구와 오클랜드교구로 분할하게 되었고 1896년 이래 뉴질랜드는 웰링턴주교구를 수도 주교좌로 하여 하나의 교회 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는 약 49만 8,000명(1982년 현재)에 280여 본당을 거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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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먼 [원] Newman, John Henry

Newman, John Henry(1801~1890). 영국의 추기경이며 옥스퍼드운동의 주창자. 영국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나 1817년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개신교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1822년 오리엘대학의 평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그곳에서 교회의 신성한 사명을 인식시켜 준 와틀리(Whateley)와 전승의 가치를 가르쳐 준 호킨즈(Hawkins)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신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케블(John Keble)과 특히 프라우드(Richard Horreli Froude)가 그로 하여금 구(舊)교회적 신앙을 돈독히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24년 부제서품, 1828년 옥스퍼드대학 교회인 성 마리아 교회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뉴먼과 그의 동료들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리시즘 간의 중용을 취하려고 노력했고,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의 설교와 ‘Parochial and Plain Sermons’라는 제목 하의 가르침의 확산과 라는 소책자의 발간으로 그의 이러한 견해들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책자의 발간은 ‘39개조’와 가톨리시즘 간의 화해를 시도한 90호가 널리 비판을 받게 되자 곧 폐간되었다. 그 뒤 초기 교회에 대한 연구 논문집 <4세기의 아리우스파>를 냈으며, 그리스도 단성(單性)논쟁을 연구하던 중 1839년에 재건된 영국 교회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1843년 그는 성 마리아 교회에서 물러나왔으며 1845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에 소속되게 되었다. 로마 교회 내에서 그의 역할은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더블린에 새로 설립된 가톨릭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여 《대학의 사상》(Idea of University)이라는 책을 펴냈으나 별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한때 자유주의 신학파의 기관지인 지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고 옥스퍼드대학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려는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1864년에 찰스 킹즐리에 의한 인신공격에 답변하여 자서전적 스케치로서 《Apologia Pro Vita Sua》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다시 한 번 유명해지게 되었다. 1870년 그는 그의 신앙을 옹호하는 ‘Grammar of Assent’를 발표하였으며 1879년에는 추기경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신학자이자 설교가이며 또 시인 철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고, 사상적으로 오성(悟性)에서 직관을 존중하는 신토마스주의에 반대하였다. 이로써 그는 근대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사상과 문장으로도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미친 그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영국 교회에 대해서는 영국의 가톨릭 전승에 대해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교리의 발전에 대한 신학이론에 특히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신학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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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수 [관련] 루도비코

⇒ 루도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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