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한] 盧天命

노천명(1912~1957). 여류시인. 초명은 기선(基善), 세례명은 베로니카.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黃海道 長淵郡 蓴澤面 碑石浦里)에서 장연본당 회장 노계일(盧啓一)의 차녀로 출생, 1930년 진명여고보(進明女高普), 1934년 이화여전(梨花女專)문과(文科)를 졸업하고 잠시 <중외일보>(中外日報), <여성>(女性)지의 기자로 있다가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1935년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동지(同誌) 창간호에 시(詩) ‘내 청춘의 배’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고 그 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부녀신문> 등의 기자를 역임하였다. 작품의 대부분은 서정시(抒情詩)로, 초기에는 감상적이고 여성적인 서정성을, 김동명(金東鳴)과의 실연(失戀) 이후에는 비현실적인 내면세계의 고독을, 1954년 입교를 전후한 말기에는 승화된 사랑, 종교적 참회 등을 표현하였다. 비교적 초기의 작품에 속하는 대표작 ‘사슴’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珊瑚林≫, ≪窓邊≫, ≪盧天命詩集≫, ≪별을 쳐다보며≫, ≪사슴의 노래≫(遺稿集)와 수필집 ≪산딸기≫, ≪生活의 白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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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성체 [한] 路資聖體 [라] Viaticum

라틴어 어원은 ‘긴 여행을 위한 준비’라는 뜻으로 이 말은 일찍부터 삶과 죽음 의 두 가지 대(大)여행을 위한 영적인 준비, 즉 세례와 마지막 영성체를 의미하였다. 또한 초기 교회에서는 임종하는 이를 위한 다른 종교적 의식과 기도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 신자에게 마지막으로 영해 주는 성체만을 뜻한다. 노자 성체의 분배는 특히 사제와 부제의 의무이다. 그 밖에 합법적으로 시종직을 받은 사람도 비통상 성체 분배자가 된다. 교구장은 사제나 부제나 시종이 없을 때 신자들의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체 분배의 특권을 부여할 수 있다.

노자성체에 사용되는 성체는 미사 후에 남겨 두었던 성체이며, 병자의 가족들은 병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노자성체를 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노자성체의 경우에는 공복재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죽을 위험이 임박한 병자에게는 먼저 고백성사를 주고 임종 전 대사를 베풀고 필요하면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병자성사를 준 후 노자성체를 영해 준다. 노자성체는 병자성사처럼 한 번 이상 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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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문답 [한] 老人問答

노인용(用) 교리문답. 크기는 가로 12.4㎝ 세로 18.7㎝, 면수는 43면, 편집 겸 발행인은 라리보(Larribeau, 元亭根) 신부. 1934년 서울 성서활판소에서 간행되었다. 11가지의 주요 기도문과 76개 조목의 교리문답이 수록되어 있는데 76개 조목의 교리문답은 같은 해 간행된 ≪천주교요리문답≫에서 발췌한 것으로, ≪천주교요리문답≫의 어느 부분에서 발췌했는가를 표(表)로 만들어 밝혀 주고 있다. ≪노인문답≫은 ≪천주교요리문답≫과 함께 1964년 ≪가톨릭교리서≫가 나올 때까지 한국 교회의 공식교리서로 널리 사용되었다. ≪노인문답≫ 이전의 노인용 교리서로는 ≪성교요리문답≫을 간추린 ≪진교절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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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약망 [한] 盧若望 [관련] 로1

로(Rault) 신부의 한국명. ⇒ 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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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본당 [한] 老安本堂

광주교구 관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 중의 하나인 노안본당은 전남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良川里)에 소재한다. 복음의 씨앗은 병인(丙寅)박해 탓으로 1894년 서울에서 함평군 나산면으로 이주해온 정낙(鄭洛, 요한)이 이곳에 전교한 것을 효시로, 1903년 목포의 드뇌(Deneux, 全學俊) 신부가 1년간 왕래하면서 전교함으로써 차차 발전해 갔다. 1904년 투르뇌(Tourneux, 呂東宣) 신부가 대지 약 3,000평, 임야 약간 평을 매입하여 십자형 초가 성당(약 40여평)을 건축하여 비로소 양천본당(良川本堂)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노안본당의 전신이다. 뒤를 이은 카다르(Cadars, 姜) 신부는 벽돌을 구워 사제관을 신축하는 도중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어, 카다르 신부가 종군했다 개선하기까지의 3~4년간은 임자없는 본당으로, 목포의 임신부가 내왕 전교하며 사제관의 완공을 보았다. 이 당시 신자수는 300여명이었고, 장성, 영광, 함평, 나산, 나주, 봉황 등 6개의 공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1918년 이경만(李景滿, 요한) 신부가 본당 중흥에 힘을 기울이다가 선종, 1918~1925년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는 농촌계몽에 주력한 뒤, 1925~1934년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 때 양천본당은 굳건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즉 1927년 사제관의 확장과 함께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 주보를 성모 무염시태로 정하여 노안본당으로서 재출범하게 되었는데, 당시 신자수 650여명, 신설 공소로는 송정리, 광주 북동 등이 있었다. 1934~1935년 헨리(Harold Henry, 玄) 신부를 거쳐 1935~1944년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 때는 금북중학교와 논밭 수천 평을 매수하여, 4년제 졸업생을 내게 하였다. 1944~1945년 올리버 (Kennedy Oliver, 尹) 신부가 2차 대전으로 인하여 귀국함으로써 본당신부 부재기간이 있었고, 1945~1952년 사이에도 전북 대리감목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거쳐 이민두(李敏斗, 다두) 신부 때인 6.25동란 중 약 1년간 본당신부 부재시기를 맞았다.

다시 전쟁 피해 복구기라고 볼 수 있는 1952~1955년 김정용(金正容, 안토니오) 신부 때를 거쳐 1955~1958년 리처즈(David, Richers 方) 신부 때는 사제관수리 신축과 금암, 평동, 삼도 등 공소도 신축하였다. 1958~1959년 디바인(Donald, Devine 文) 신부, 1959~1960년 라이언(Eugene Ryan, 成) 신부, 1960~1963년 히키(Gordan Hickey, 石) 신부, 1963~1965년 홀레첵(Francis Holecek, 許) 신부, 1965~1966년 배봉룡(裵鳳龍, 바오로) 신부, 1966~1968년 올레리(Andrew O’Leary, 吳) 신부, 1968~1972년 놀란(James Nolan, 盧) 신부, 1972~1977년 스위니(Robert Sweeney, 徐) 신부, 1977~1982년 모리시(Michael Morrissey, 毛) 신부, 1982~현재 강길웅(姜吉雄, 요한) 신부로 주임신부가 이어져 온다. 1984년 6월 현재 신자수는 2,5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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