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라] romanticismus [영] romanticism [독] Romantik [프] romanticisme [한] 浪漫主義

18세기 후반에 발생하여 19세기 전반 사이의 유럽을 지배한 모든 문화영역의 시조이며, 정신적인 태도이다. 이것은 감정을 억압하여 이성(理性) 중심의 보편적 인간성을 존중하다는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에 반대하고, 자아의 감정을 해방하되 인간과 공동체와 문화의 성장에 알맞는 전체성을 추구했으며, 넓은 의미로는 자연으로 돌아가 현실을 도피한 주관적 공상적인 세계로의 비약을 강조하였던 탓으로, 민족정신 또는 민족문화에 대하여 자신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관철하는 현실감과 실행력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낭만주의라는 말은 고대와 분명히 한 금을 긋는 라틴계 여러 민족의 문학인 ‘로맨스’(Romance), 혹은 영국에서부터 사용된 말인데, 18세기 초기부터는 ‘소설에 나타난 것’, ‘중세적인 것’, ‘공상이 풍부한 것’ 등의 의미를 얻게 된 이 경향이 독일로 건너가서, 낭만주의 하면 독일이 고향인 것처럼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른바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그리고 자유주의사상의 발달로 문명 개화, 진보, 번영 추구의 사상이 번창하자, 그때까지 팽배해 있던 인간의 감정을 누르고 이성의 우위만을 긍정하는 고전주의의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문화적인 유행이 대조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啓蒙主義)와도 대립관계를 이루어, 빈켈만(J.J. Winckelmann)이나 레싱(G.E. Lessing)같이 정적(靜的)이고도 유행적인 것을 따랐던 것과는 달리 개성적인 직관에 의거한 감정과 공상을 존중하였다. 낭만주의는 또한 사유나 오성(悟性)에 의한 세계인식보다는 비합리적인 위력, 즉 생명의 실감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에 반대되는 낙천적이며 자기도취적인 시대 사조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칸트를 그 출발점으로 하여, 실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계시와 이성 두 가지를 다 부정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주관적이며 직관적인 경험에 의지하였다. 그들은 자연은 가시화(可視化)한 정신이며, 인간의식 속에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창조적 힘인 절대정신(絶對精神)이, 자연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었다. 헤겔은 인간 역사 속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정(正) · 반(反) · 합(合)의 변증법 위에서 이 절대정신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절대정신은 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예술적인 것이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낭만주의는 중세로부터 가톨릭적인 세계 즉 ① 그 보편주의, ② 국가나 교회에 대한 총괄적인 사고방식, ③ 가톨릭 문학과 예술 등을 섭취하였다. 루소, 비코(G. Vico, 1668~1744), 레싱, 그리고 디드로(Diderot)의 사상은, 후기 낭만주의자들의 밑바탕을 이루어 주었다. 더구나 실레겔(A.W. Schlegel, 1767~1845), 노발리스(Novalis, 1772~1801), 실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 등과 같은 중요한 낭만주의자들 중에서도 셀링(F.W.J. Schelling, 1775~1854)이 아마도 가장 대표적이고 심오한 철학을 말한 인물로 들 수 있겠다. 낭만주의는 사상으로는 관념론을, 윤리와 정치에서는 개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상징이라든지 신비사상에 의거하여 세계 해석을 시도하는, 즉 어떤 보편적인 형식보다는 자유로운 약동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이상향을 상상의 세계에서 추구하였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 낭만주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는가 하면, 칸트, 괴테, 헤겔의 관념론 철학은 철학적으로 심화된 낭만적인 개념을 발달시켰는데, 특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피안적 염세적인 낭만주의가 당시의 유럽을 휩쓸었다.

낭만주의가 종교상에 끼친 영향 가운데 두드러진 업적은, 중세의 양식인 로마네스크 또는 고딕을 모방하면서, 일부는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LudwigⅠ, 1825~1848)나 ‘옥좌의 낭만주의자’인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Ⅳ, 1840~1861)의 보호로, 새 교회건축물이 건조되고, 쾰른 대성당 같은 낡은 건물이 수리되었다는 점과, 나자레(Nazare)파가 종교적 및 그리스도교적인 회화의 혁신을 꾀했다는 점 등이다. 실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를 종교사상 위에서 전개하여, 종교의 본질은 사유라든지 합리적 행위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고, 유한 가운데서 무한을 포착하는 직관과, 우주만유의 인간심정, 즉 절대귀의(絶對歸依)의 감정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횔덜린(J.C.F. Holderlin, 1770~1843)은 “꿈꾸는 인간은 사유하는 인간보다 신에게 더 가깝다”고 갈파하여 인간의 고독을 슬퍼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찬양하였다.

[참고문헌] M. Joachimi, Die Weltanschauung der deutschen Romantik, 1905 / L. Avercrombie, Romanticism, London 1926 / L.A. Willoughby, The Romantic Movement in Germany, Oxford 1930 / M. Brion, Genie et destinee: Schuman et l’ame romantique, Paris 1954 / B. Brink 편, Deutsche Gedichte der Romantik, Heidelberg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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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회인 [한] 南懷仁 [관련] 페르비스트

페르비스트(Verbiest)의 한국명. ⇒ 페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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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 [한] 南鍾三

남종삼(1817~1866).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자(字)는 증오(曾五). 호(號)는 연파(煙波). 중재(重齋)로 쓰기도 한다. 1984년 5월 한국 현지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거행된 시성식(諡聖式) 때 시성된 103위 성인(聖人)의 한분.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요한. 통덕랑(通德郞) 이우(履佑)의 아들인 탄교(坦敎)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장성하여 큰댁인 상교(尙敎)의 아들로 입양(入養)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학통을 이은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부사(忠州府使)를 지낸 부친 상교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2세 때인 1838년(憲宗 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哲宗) 때에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친근에서 보필하였다. 고종(高宗) 초에는 그의 학덕(學德)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부친의 영향이었으나 그 자신도 서학서(西學書)를 읽어 마침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남종삼이 심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여 나서게 된 것은 러시아제국[露西亞帝國] 남침의 강화에 따라 야기된 조선왕국이 위기(危機)에 직면하게 됨으로써였다. 1860년(哲宗 11년) 영불군(英佛軍)의 청국(淸國) 공격으로 벌어졌던 애로우호 사건(Arow號事件)[제2차 阿片戰爭]의 전쟁 상태를 거중조정(居中調停)하여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성립시킨 대가로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조선왕국에 접경(接境)하게 된 러시아제국이 1864년(高宗 1년) 이후 거듭 통상(通商)을 요구하며 월경(越境)해 오게 됨으로써 조선왕국 북변(北邊)에 국제적 긴장이 감돌게 되었다. 강대한 침략세력의 접근에 당시 국사(國事)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위기에 대처하기에 부심하게 된다. 이때에 국내에 잠입하여 전교활동을 펴고 있던 프랑스 성직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 세계대세에 선견적 식견을 가졌던 천주교인 홍봉주(洪鳳周) · 김면호(金勉浩) 등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이라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난국 타개의 건의를 대원군에게 올렸다. 이들의 건의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자 흥선대원군과 면식(面識)이 있고, 또 정계에도 안면이 있는 남종삼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결의와 신앙자유(信仰自由)의 구현을 위해 결연(決然)히 나서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이이제이의 방아책’ 실현의 방안을 설명하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에서 전교활동하던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회동하여 협의토록 내락(內諾)을 얻었다. 남종삼의 의도는 이들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긴급 연락을 취하여 프랑스 · 영국 등과 조선왕국이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정책을 제어하는 동시에, 쇄국조선의 문호를 개방케 하여 세계사 대세에 발맞추어 신앙생활의 자유를 구현케 하려는 데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세계적 경륜과 역사적 식견은 프랑스 성직자와의 잦은 접촉을 통하여 얻어졌던 그의 애국과 호교(護敎)의 신념이었다. 당시 공교롭게도 두 주교가 지방 사목여행(司牧旅行) 중이어서 주교와의 긴급 연락이 여의치 않아 그들이 서울에 귀착할 대까지는 수개월이라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음 1865년 12월 9일과 13일에 상경). 이 동안에 흥선대원군의 초조와 교회에 대한 의혹도 문제려니와 러시아의 월경이 잠잠해져 북변의 긴장이 완화되었고 한편으로 반대원군 정객(政客=趙斗淳, 鄭元容, 金在根, 金炳學 등)들이 대원군의 천주교 접근책을 탐지하고 압력을 가하며 정치적 공세를 취하였다. 때마침 청국에서 천주교 박해가 강행되고 있다는 와전된 정보가 동지사(冬至使) 이흥교(李興敎)에 의해 전해졌다. 이에 정치적 생명의 불안을 느끼게 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접근에서 표변하여 천주교 박해로 급전하게 되어 1866년 구정(舊正)을 전후하여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벌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남종삼은 흥선대원군을 운현궁(雲峴宮)으로 찾아 주교의 입경(入京) 사실을 전하고 교회 측과의 회담을 요청하였으나 냉대(冷待) 받았고, 오히려 하향(下鄕)을 권유받았다. 사태의 급전을 예기할 수 있었던 남종삼은 전후책을 협의하기 위해서 천주 신앙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충청북도 제천(堤川) 땅 묘재[山尺]에 은거 중이던 부친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를 찾아 하향하였다. 국가와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 남종삼은 부친의 격려를 받고 다시 상경하기에 앞서 묘재에서 10리 상거인 배론[舟論]의 신학교(神學校)를 찾아 성사(聖事)를 본 후 서울로 향해 떠났다. 이무렵 이미 대표적 교인이었고 통외(通外)의 공작을 추진한 장본인이라 하여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남종삼은 상경 도중 체포령의 하달을 알고 일시 시세(時勢)를 관망하기 위해서 피신하였었으나 결국 서울을 가까이 한 고양군(高陽郡) 축베더리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로 연행되었다(음 정월 15일). 의금부에 국청(鞫廳)이 마련되고 다음 날부터 6차에 걸쳐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최형(崔炯), 정의배(丁義培), 전장운(全長雲) 및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엄중 문초당하였다.

남종삼은 국사(國事)가 어려울 때 일신상의 안전만을 위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앞에 나서서 국가의 안정과 새역사의 추진을 위해 러시아 남침의 위험을 경고하였고, 그리하여 방아책(防俄策)을 제시하고 개방(開放)을 추진하였음을 거듭 밝혔다. 또한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요언(妖言)으로 세인을 현혹(眩惑)케 하고, 초구지도(招寇之圖)를 꾸몄다 하여 모배잠종(謀背潛從)의 죄로 모반부도(謀叛不道)로 결안(結案)되었고, 다음 날인 정월 21일(양력 3월 7일)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와 같이 참수형(斬首刑)을 받고 순교(殉敎)하였다. 향년(享年) 50세. 남종삼의 처형 후 가족을 노륙지전(孥戮之典)에 처하라는 상소가 거듭되었으나 왕명으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결국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南尙敎)는 공주진영(公州鎭營)으로, 장자인 남규희(南揆熙)는 전주진영(全州鎭營)으로 잡혀가 마침내 공주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처 이소사(李召史)와 차남 남명희(南明熙)와 두 딸은 응좌죄인(應坐罪人)으로 경상도 창녕(昌寧)으로 유배되어 노비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그 자신을 포함하여 4명이 천주신앙에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월 24위 병인순교자(丙寅殉敎者) 시복(諡福)으로 복자(福者)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103위 한국복자의 시성(諡聖)으로 성인(聖人)의 위에 올라 세계 가톨릭 교회의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모반부도(謀叛不道)의 그의 죄명은 1885년에 취해진 조선 왕국의 복권조치(復權措置)로 탕척(蕩滌)되었다.

[참고문헌] 李元淳, 한국 성인의 천주신앙, 분도출판사, 1984 / 日省錄 / 南鍾三鞫案 / 丙寅殉敎者證言錄 /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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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량 [한] 南一良 [관련] 퀴를리에

퀴를리에(Curlier) 신부의 한국명. ⇒ 퀴를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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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한] 南人

조선시대 사색당파 중의 하나. 16세기 말인 선조(宣祖) 때, 중견 선비들 중에서도 조정에서 벼슬하는 선비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싸웠는데 처음에는 동인 · 서인으로 분열되었으나 후에 동인이 다시 남인 · 북인으로 갈라졌다. 동인이 갈라지게 된 동기는 서인인 정철(鄭澈)을 배척하는 데 있어 강경파를 북인이라 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한 데서 비롯된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 유성룡(柳成龍) 등이었으며, 북인은 이발(李潑) · 정인홍(鄭仁弘) 등이었다. 남인 · 북인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우성권의 집이 서울의 남산 밑에 있었고, 이발의 집은 북악(北岳)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인은 선조 때 조정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광해군 때에는 북인에게 밀려났으며 17세기 중엽인 효종(孝宗) · 현종(顯宗) 때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숙종(肅宗) 때에는 한때 득세(得世)도 했지만, 그 후 서인의 분파인 노론(老論) · 소론(少論)에게 밀려, 숙종의 후대인 경종(景宗) 이후에는 거의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오직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는 남인 출신이 많았다. 남인의 학풍도 영남(嶺南) 남인과 기호(畿湖) 남인으로 구분된다. 영남남인은 퇴계(退溪)의 학풍을 계승하는 전통적 주자학파요, 기호남인은 퇴계의 학풍을 존중하면서도 정치적 현실문제와 새로운 지식의 이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에 관한 지식, 즉 서학(西學)이 들어왔을 때, 가장 진지한 관심과 적극적 수용태세를 보인 유교 지식층은 바로 기호남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노론이 정권을 쥐고 보수적인 정치를 하던 시대에 청조 문물을 받아들이는 실학파 속에 북학파(北學派)도 있으나 천주교 신앙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서양과 천주교의 교리에 관한 지식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도 남인에 속하는 실학파의 선구자 이수광(李晬光)이었다. 기호남인이 서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실학파의 거장 이익(李瀷)에서 비롯된다. 이익은 서양과학의 합리성과 천주교 교리의 윤리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익의 서학에 관한 관심은 그의 문하에서 양극적(兩極的) 형태로 나타났다. 신후담(愼後聃) · 안정복(安鼎福)의 경우는 천주교의 교리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권철신(權哲身) · 이가환(李家煥) 등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였다. 정조(正祖)시대에 최초의 천주교 신앙운동을 일으켰던 이벽(李檗) · 이승훈(李承薰)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등은 바로 이익 문하의 이른바 신서파(信西派)에 속하는 기호남인들이었다. 이들 신서파 남인이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몰입하게 된 것은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개혁정신이 그들에게 깊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분도출판사, 1980 / 黃嗣永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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