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관 [한] 南履灌

남이관(1780~1839). 성인(聖人). 회장. 세례명 세바스티아노. 성녀 조증이(趙曾伊)의 남편. 축일 9월 20일. 서울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18세 때 교우처녀인 조증이와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부친 남필용(南必容)이 체포되자 처가(妻家)로 피신했으나 자신도 곧 체포되어 부친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자신은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각각 유배되었고, 부친은 유배지에서 곧 사망하였다. 그 후 유배생활 30년만인 1832년 대사령(大赦令)으로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처가인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잠시 살다가 상경, 처가와 외척이 되는 정하상(丁夏祥)을 도와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고, 1833년 의주(義州) 변문에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맞아 들여 그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의 직무를 맡아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이천으로 피신했으나 9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형조를 거쳐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그 곳에서 정하상,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국문(鞠問)을 받은 후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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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본당 [한] 南原本堂

전북 남원시 쌍교동(雙橋洞) 4번지에 소재하는 남원본당은 전주교구의 관하 본당 중의 하나이다. 본당 설립 전 박해시대인 1885~1886년에 장수(長水), 진안(鎭安) 등지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이 산재하여 살아오다가 1934년 처음으로 남원 공소가 설치되었다. 이듬해 1935년 6월 12일 이 공소는 일약 남원본당으로 승격 설치되어, 초대(1935~1938년) 석윤학(石允學, 바오로) 신부는 학원설립, 교리야학 개최를 통해 전교를 시도하여 당시 신자 230명, 공소 3개소를 거느렸다. 2대(1938~1941년)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가 만 3년간 신설교회의 시설과 면목을 갖추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3대(1941~1944년) 김기봉(金基奉, 비리버) 신부를 거쳐 4대(1944~1947년)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신부 때에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광복 후인 5대(1947~1950년) 강윤식(姜允植, 분도) 신부 때 6.25동란을 만나 6대(1950~1955년) 이철연(李喆淵, 방지거) 신부, 7대(1955~1958년)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그 후 교구장) 신부 때는 점차 기반을 다져 오다가 8대(1958~1961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하자 남원읍내 쌍교리(雙橋里)에 성당터를 매입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착공, 9월 23일 예수 성심을 주보로 하여, 새 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9대(1961~1963년) 드쉬테(De Schutter, 도광석) 신부, 10대(1963~1965년) 오기순(吳基順, 알벨도) 신부, 11대(1965~1966년) 김환철(金丸喆, 스테파노) 신부, 12대(1966~1968년) 이수현(李守鉉, 요셉) 신부, 13대(1968~1971년)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 신부, 14대(1971~1973년) 이수현(李守鉉, 보나벤투라) 신부, 15대(1973~1976년) 김병엽(金炳燁, 베드로) 신부, 16대(1976~1980년) 이재후(李載厚, 토마) 신부, 17대(1980~현재) 서용복(徐龍福, 토마) 신부로 이어져 계속 공소설치 활동에 힘써 오고 있는 중이다. 1984년 현재 신자수는 총 2,29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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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한] 南~共和國 [영] Republic of South Africa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줄여서 남아프리카라고도 부른다. 면적 122만1,037㎢에 인구 약 3,101만명(1982년 추계)인 이 나라는 1961년 이래 공화국이 되었다. 1910년부터 1961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의 자치 식민지였다. 인구의 약 6할이 아프리카인, 네덜란드인 후손, 위그노 후손, 독일 출신 정착자들이고, 아프리카아어(Afrikaans)를 쓰고, 나머지 약 4할은 영어를 사용한다. 15세기 말엽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동방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른 것을 계기로 하여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돌로 된 십자가(padroes)를 세우고, 곶, 만, 항구 등에 가톨릭식 이름을 붙였는데, 아직까지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1951년에 남아프리카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으며, 4개의 관구, 18개의 주교구, 3개의 지목구 등 27개의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가톨릭 신자는 약 214만명(1982년 현재)에 이르고, 본당이 628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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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철 [한] 南相喆

남상철(1891~1978).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손자. 평신도. 세례명 프란치스코.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생후 1개월 만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외가(外家)에서 자랐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통신강의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후, 충북 장호원(현재의 감곡)본당에서 운영하던 매괴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1921년부터 충북 음성군 감곡면 면장 겸 도(道)의회 의원으로 20여년 동안 재직했으며 광복 후 1947년에는 영친왕(英親王) 환국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영친왕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교회사와 교회사적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주어사강학(走魚寺講學)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 주어사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잡지> 1962년 11월호에서 1963년 1월호까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5명의 순교 선조를 가진 순교자의 후손답게 항상 봉사하는 자세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자손들에게는 사심 없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따르라고 가르쳤다. 1978년 7월 13일 노환으로 서울 삼양동 자택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3남 5녀가 있는데 이들 중 3명은 현재 수녀로 있다. 주요저술로는 위에 언급한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 주어사의 발견>(경향잡지, 1962년 11월호~1963년 1월호)이 있다.

[참고문헌] 가톨릭시보, 제1111호, 1978.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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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교 [한] 南尙敎

남상교(1783~1866).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아버지. 충청북도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忠北 堤川郡 白雲面 花堂里) 출신.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충청목사(忠淸牧使),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역임한 그의 입교시기는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으나 일찍부터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켜온 것 같다. 그의 아들 남종삼이 이른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大院君)에 진언한 사실을 말했을 때, “너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네 사형선고 서명을 요구하면 천주교에 욕된 표현을 일체 지우도록 명심하라”고 하며 천주교 신앙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였다. 아들이 서소문 네거리에서 순교하자 그는 고향에서 잡혀 공주(公州)감옥에 수감되었다가 84세의 고령으로 아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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