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동본당 [한] 南山洞本堂

대구 대교구 소속 본당. 현 소재지는 대구직할시 중구 남산 3동 225-1이며, 본당주보는 성 요셉이다. 1926년 5월 29일 당시 대구본당(현 계산동 주교좌) 관할이던 대명동과 남산동의 일부를 분할하여 주교관 구내에 있던 명동회관을 성당으로 개축하여 남산동본당을 신설하고 초대(1926~1928년) 주임신부로 석종관(石鍾寬,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1937년 2월 9일 대명동본당(大明洞本堂)으로 개칭하고 현 효성 여자중학교 자리에 2층으로 된 성당 건물을 신축, 이전하였다. 그 뒤 1952년 그 자리에 효성 여자대학이 설치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1953년 다시 남산동본당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2년 본당 관할 구역은 남산동 일부와 대명동 전역, 그리고 내당동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신자수는 1,641명으로서 이 중 180명이 공소 신자였다.

역대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다.

2대(1928~1933년) 델랑드(Deslandes, 南) 신부, 3대(1933~1940년) 파이예(Pailet, 方) 신부, 4대(1940~1941년) 코르데스(Cordesse, 孔) 신부, 5대(1941~1945년) 파이예 신부, 6대(1945~1948년) 장병화(張炳華, 요셉) 신부, 7대(1948~1953년) 이종필(李鍾弼, 마리아) 신부, 8대(1953~1955년) 강찬형(姜贊亨, 파스칼) 신부, 9대(1955~1960년) 이성만(李性萬, 이냐시오) 신부, 10대(1960~1962년) 서정도(徐廷道, 벨라도) 신부, 11대(1962~1966년)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 12대(1966~1967) 강찬형 신부, 13대(1967~1972년) 신현옥(申鉉玉) 신부, 14대(1972~1976년) 박원출(朴元出, 토마스) 신부, 15대(1976~1977년) 김규태(金圭泰, 디모데오) 신부, 16대(1977~1982년) 최병선(崔炳璇, 요한) 신부, 17대(1982~1983) 장병보(張炳補, 베드로) 신부, 18대(1983~현재) 박상태(朴相泰, 루도비코) 신부로서 현재 신자수는 4,19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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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혁 [한] 南明赫

남명혁(1802~1839). 성인(聖人). 회장. 세례명 다미아노. 일명 문화. 성녀 이연희(李連熙)의 남편. 축일은 9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려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경 입교한 후로는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고,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고는 더욱더 열심을 더해 이광헌(李光獻)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를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한편 ‘성의회’에 가입하여 신부를 보좌하며 신심운동을 일으키는 등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 초 한 예비교우의 밀고로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이 때 집에 숨겨둔 제의류(祭衣類) · 경본(經本) ·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서양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헌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모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냈고 아내 이연희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主)를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라는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후 5월 24일 이광헌을 포함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려지길 원했던 남명혁은 자신이 순교한지 86년 후인 1925년 11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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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본당 [한] 南洞本堂

1949년 광주 북동(北洞)본당 주임 모나간(Monaghan, 牟) 신부가 광주시 남동 55번지에 500여평 되는 구 한옥을 매입하여 개조 보수한 뒤 12월 8일 무염시태성모를 주보로 하여 남동본당이 창설되었다. 초대(1949~1961년) 주임신부인 박문규(朴文圭, 미카엘) 신부 재임 중 6.25동란이 일어나 성당이 괴뢰군에게 몰수당하고 박신부는 연금과 피난을 거듭하다 1951년 부활절에 도로 찾은 본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1952년에 들어와 부설 유치원(1학급)의 개원(開院)을 보았고, 1953년 11월 교우 증가로 본당 옆에다 L자형으로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7년에는 부설 공동묘지 7,740평을 매입했고, 1958년 3월 화순(和順) 공소를 준공함과 함께 본당 승격을 기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기고 박신부는 1961년 1월 12일 선종하였다.

2대(1960~1965년) 김정용(金正容, 안토니오) 신부 때인 1964년 봄 성당확대를 결의하고 옛 성당 철거와 새 성당 건축공사를 시작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12월 31일 성녀 오틸리아를 주보로 하여 축성을 보게 되었다. 그 동안 계림동(鷄林洞), 월산동(月山洞) 본당이 분리되었으며, 3대(1965~1969년)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 때에는 방림동(芳林洞), 호남동(湖南洞) 본당의 분리작업이 있었다. 4대(1969~1973년) 장옥석(張玉石, 루치오) 신부, 5대(1973~1977년) 박상수(朴常洙, 고스마) 신부를 거쳐 6대(1977~1983년) 김성용(金成鏞, 프란치스코) 신부 때에 와서 1980년 6월 광주사태 수습을 위해 활동중 계엄사에 연행,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리하여 본당 신부 서리를 박상수 교구청 관리국장이 겸직하게 되었고, 1981년 2월에 본당 사목 활성화를 위해 장세현(張世現, 미가엘) 신부가 보좌신부로 발령 부임하였다. 김정용 신부의 본당 귀임은 1981년 8월 15일 형집행 정지로 석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광주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본당 설립 뒤 불과 3~4년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주교관의 건립은 물론, 대건대신학교(大建大神學校)를 비롯하여 한국 레지오 마리에 군단 본부가 되어 왔다. 더구나 이 남동본당이 설립됨으로써 대교구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는데, 7대(1983~현재)인 강영식(姜永植, 안드레아) 신부가 주임신부로 활약하면서 교우수는 날로 늘어나 1983년 12월말 현재 남자 819명, 여자 1,522명, 도합 2,34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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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상업학교 [한] 南大門商業學校 [관련] 동성중고등학교

⇒ 동성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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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문 [한] 南景文

남경문(1796~1846). 성인(聖人). 회장. 세례명 베드로. 축일은 9월 20일. 서울의 중인(中人)집안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교우인 허 바르바라와 결혼, 이를 계기로 입교했고, 얼마 후 중병이 들어 대세(代洗)를 받고부터 열심히 수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열성으로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유신부를 보필하며 전교에 힘썼으나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 첩(妾)까지 거느리고 사는 방탕한 생활을 3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러나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입국하자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았고, 또 지난날의 생활을 뉘우치고 그 죄를 보속하기 위해 순교를 결심하고 다시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林成龍)의 밀고로 7월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의 신분이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관헌들에게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 그리고 달콤한 배교의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9월 20일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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