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애 [한] 金千愛

김천애(1760~1801).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유항검(柳恒儉)의 하인으로 1801년 봄 유항검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8월 27일이나 28일(음 7월 19일이나 20일)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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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본당 [한] 金泉本堂

왜관 대리구(倭館代理區) 소속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소재지는 경북 김천시 황금동(慶北 金泉市 黃金洞) 76의 18이다. 1901년 낙산(落山) 본당에 있던 김성학(金聖學, 알릭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한옥 기와집 1동을 매입해서 성당으로 사용케 되었다. 1928년에는 3대 이약슬(李若瑟, 요셉) 신부가 부임, 이듬해 지금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8대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는 1944년에 부임, 8.15와 6.25를 겪으며 사목하다가 1955년에 전임하였다. 1958년 김천읍 평화동(平和洞)본당이 분리 독립될 때 이 본당 명칭이 황금동 본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1968년 지례면(知禮面)의 지례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분할하면서 본당 관할이던 지례면, 부항면(釜項面), 대덕면(大德面), 증산면(甑山面)을 이양하였다. 1970년에는 김천시의 관할 지좌동(智佐洞)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독립시키면서 본당관할이던 지좌1동과 금릉군(金陵郡)의 농소면(農所面), 남면(南面) 전 지역을 이양하였다. 현재 주임은 베네딕토수도회의 이석진(李錫震, 그레고리오) 신부이고, 신자수는 782명(1984년 현재), 공소는 금릉군 감문면(甘文面)의 감문공소, 개령면(開寧面)의 개령공소 및 신룡(新龍) 공소, 구성면(龜城面)의 송죽(松竹) 공소 등 4개소이다. 본당 관할구역은 김천시의 황금동 1, 2동, 감호동(甘湖洞), 용두동(龍頭洞), 모암동(帽岩洞), 성내이동(城內二洞), 남산 1, 2동(南山 一, 二洞), 그리고 금릉군의 감문면, 개령면, 감천면(甘川面), 구성면, 조마면(助馬面)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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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렬 [한] 金昌烈

김창렬(1927~ ). 주교. 제3대 제주(濟州) 교구장. 세례명 바오로. 황해도 연백(延白)에서 출생.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와 성신대학(聖神大學, 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8월 22일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곧 군종신부로 입대했고 1956년 제대 후 성신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0년 로마에 유학, 1962년 라테란대학에서 윤리신학을 연구한 후 1962년 도미(渡美)하여 뉴욕대학에서 신문학을 수학하였다. 그 후 1963년 귀국하여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5년 가톨릭중앙의료원 원장, 가톨릭대학 의학부장, 성모병원장직을 겸임했고 1969년 가톨릭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73년 다시 가톨릭 중앙의료원원장으로 전임되어 1983년 11월 주교로 피명되기 전까지 재직했으며 이 때 한국 행복한 가정 운동 지도신부, 서울대교구 참사위원 및 인재양성위원 등을 겸임하였다. 1983년 11월 21일 공석 중이던 제주교구장에 임명되어 1984년 1월 6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고, 1월 26일 착좌하였다.

[참고 : 김창렬 주교는 2002년 9월 2일 제주교구 교구장직을 퇴임하고, 이어 제4대 교구장으로 강우일 베드로 주교가 2002년 10월 8일 착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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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후 [한] 金震厚

김진후(1738~1814). 순교자. 세례명 비오 성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증조부(曾祖父). 충남 면천 솔뫼(현 唐津郡 午江面 松山里)에서 살면서 입교 전에는 하급관직에 있으면서 미신을 믿고 속세의 재물과 권세를 탐내었다. 그러한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어떠한 동기에서 입교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입교 후에는 천주의 진리를 깨달아 모든 허영을 물리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심하였다. 그가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을 1791년부터이다. 그 후 4~5차례나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전주 · 홍주 · 공주 등 여러 감옥에서 무수한 고문으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켜 왔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辛酉) 대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 유배되었다. 1805년 다시 잡혀 해미(海美) 감옥에 압송되었을 때에는,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끝내 배교치 않았다. 그러나 사형언도는 내려지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옥중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지켜 그의 덕망과 고귀한 인품, 그리고 그의 굳은 신앙을 옥리들에게까지 감화를 주었다. 그는 1814년 10월 20일(음) 76세를 일기로 옥사 순교하였는데, 그 원인이 고문에서인지 병사 또는 아사(餓死)로 인한 것인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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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한] 金振聲

김진성(?~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를 비롯한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청송에서 경주진영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냈고 경주에서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의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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