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 [한] 金宗漢

김종한(?~1816).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본명은 한현(漢鉉). 김진후(金震厚)의 셋째 아들로 성녀 김데레사의 부친이며 김대건(金大建)신부의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충남 면천 솔뫼(현 唐津郡 午江面 松山里)에서 태어나 친척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부친 김진후가 박해로 인하여 다년간 옥중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신앙을 굳건히 하는 동시, 세상의 허무함을 느껴 경상도 안동(安東) 가까이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 17년 동안 숨어 살면서 오직 기도와 고신극기(苦身克己)로 덕행을 쌓으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을해(乙亥)박해가 일어나 1815년 4월 23일(음) 안동 포졸들에게 잡혀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수감되어 배교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 때 마침 배교하고 석방되는 김윤덕을 만나자 그의 잘못을 꾸짖어 다시 개심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무수한 고문과 감언이설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그의 굳은 신앙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사형집행이 무기 연기되자, 그는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없을까 내심 걱정하면서 약 20개월을 옥중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형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하는 여러 통의 편지를 쓴 귀중한 기록을 남겼는데 1816년 12월 26일(음 11월 8일) 드디어 대구 감영에서 참수되어 영광의 순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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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륜 [한] 金宗倫 [관련] 진목정

김종륜(?~1868). 순교자. 세례명 루가. 경주 김씨 계림군파 17대손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얼릴 적에 영세, 입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를 피해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駕項里]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언양을 거쳐 울산 죽령(竹嶺, 대나무고개)에 들어가 이양등(李陽登, 베드로)회장을 만났고 얼마 후 김해에서 온 허인백(許仁伯, 야고보)을 만났다. 이들 셋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경주땅 산내(현재 경북 월성군 산내면)에 있는 소래동 단수골이란 석굴(石窟)을 발견, 그 곳을 피난처로 삼고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868년 5월 ‘덕산묘지 도굴사건’의 여파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이들 셋은 이 때 경주아문의 포졸들에게 잡혔다. 경주아문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8월 울산 감영으로 이송되어 이틀 후인 8월 14일(음 7월 28일) 장대벌 형장에서 효수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조애에 의해 수습되어 사형장 근처의 다리밑에 가매장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3인의 유해는 월성군 산내면 진목정 안산에 합장되었다. 1932년 5월 29일 대구 감천리 공원묘지로 이장되었고, 1962년 10월 25일 석곽에 모셔져 공원묘지 산 위에 있는 성모석상 앞으로 옮겨졌으며 1974년 10월초 다시 신천동 복자성당 구내로 옮겨졌다. (⇒) 진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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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교 [한] 金宗敎

김종교(1753~1801).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일명 치회. 의원(醫員) 집안에서 출생하여 1784년 김범우(金範禹)의 권유로 천주교 서적을 빌어 읽고 18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영세, 이 해 을묘(乙卯)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 후 배교한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독실한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다시 체포되어 포청에서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10월 4일(음 8월 27일)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하여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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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준 [한] 金濟俊

김제준(1796~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이냐시오. 일명 시명.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의 아버지.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조부(祖父) 김진후(金震厚)와 백부(伯父)의 권면으로 입교한 후,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던 중 서양신부들이 입국하자 모방(Maubant, 羅)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15세 된 큰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그 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8월 사위 곽(郭)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들을 외국에 내보낸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 한때 배교했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지켜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1979 / 柳洪烈,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出版社,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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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본당 [한] 金堤本堂

1920년에 수류(水流)본당 뤼카(L. Lucas, 柳嘉鴻) 신부가 사목 목표로 부인 전도회장의 필요를 느껴 정읍군 사외면 구장리 공소회장 김정엽(金正燁)의 부인인 김 아가다를 선임, 전교활동을 개시하여, 얼마 뒤 금산리(金山里) 공소를 신축하였다. 1930년에 와서 200여명의 예비자 영세를 계기로 본당 승격의 기틀이 마련됨에 따라 당시 수류 본당주임인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주선하여 1931년 김제에다 성당을 세워 15년간의 공소시대를 청산하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주보로 하여 1935년 12월 8일 김제본당으로 승격 발족하여 오늘에는 요촌(堯村) 등 5개 구역을 관장하는 전주교구 관하의 유력한 본당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대충 역대 주임신부별로 연혁을 살피자면, 1대(1935~1938년) 이상화 신부가 주춧돌을 놓은 뒤, 5대(1948~1950년)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신부가 1948년 요촌리에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51년 7대(1951~1955년) 허일록(許日錄, 다두) 신부가 대지 4,758평을 매입했는가 하면, 8대(1944~1958년)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는 본당 124평, 사제관 2층의 신축과 더불어 용지, 백자동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어 9대(1958~1960년)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신부 때부터 19대(1980~현재)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 신부 때까지 계속 공소 설립사업을 추진하여 소속 공소수는 8개소로 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이미 매입한 김제읍 신풍리 163의 1 소재 대지 833평 위에다 건평 210평 규모의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성당 건립을 착공한 바도 있다.

예로부터 이 지대야말로 우리나라 곡창(穀倉)으로 불리는 만경(萬頃)들에 위치하여, 고찰 금산사(金山寺) 주위에는 불교와 유사불교가 뿌리를 박고는 있지만, 김제본당의 전교활동 상황은 매우 전망이 밝다. 김제읍 요촌리 172번지 소재 대지 4,758평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김제본당은 주보로 ‘성모성심’을 모시고, 1984년 현재 신자수 3,088명에 8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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