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호 [한] 金日浩

김일호(?~1802).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출생. 1799년 서울로 이주, 약국을 경영하던 정인혁(鄭仁赫)으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빌려 읽은 후 입교, 그 후 명도회(明道會)에 가입하여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정인혁 등과 모임을 갖고 명도회의 활성화를 위해 지방의 교우들을 방문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이튿날 그 곳에서 권상문(勸相問)과 함께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익진 [한] 金益鎭

김익진(1906~1970). 교육자. 문필가. 세례명 프란치스코. 호는 야인(也人). 본관은 안동(安東). 전남 목포(木浦)에서 한말(韓末) 장성 군수(長城郡守)를 지낸 김성규(金星圭)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전(大田)중학, 서울 중앙고보(中央高普), 일본 와세다(早稻田)중학을 거쳐 중국 뻬이징(北京)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고, 이 때 학생운동과 독립 운동에 관계하였다. 한때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부모의 만류로 중국에서 귀국하여 불교에 심취하다가 오기선(吳基先) 신부와 교분을 맺은 뒤로는 천주교에 심취, 오기선 신부의 권면과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감동되어 1936년 영세 입교하고 이듬해 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하였다. 그 뒤 광주(光州)교구의 섭외 일을 돌보다가 1940년 선친의 유산이 있는 장성(長城)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장성성당을 건립했고 8.15광복이 되자 스스로 자신의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광주교구에 헌납하였다. 1948년 다시 대구(大邱)로 이주하여 교육계에 투신, 왜관 순심중학교 교장, 김천 성의 중학교 교감 등을 역임했고 6.24 전쟁 중에는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의 편집동인으로 활약하다가 종전이 되면서 다시 교육계로 돌아가 경주 근화여중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1955년부터는 문필생활에 전념, 이후 많은 저술을 남겼고 1967년 한쪽 눈을 실명한 후로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던 중 1970년 1월 6일 고혈압으로 사망, 대구 범어동본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이신영(李信榮)과 7남매가 있는데 3녀 화영은 현재 ‘예수의 작은 자매회’의 수녀이다.

주요 저서로는 《레지오 마리에 직무수첩》(번역, 光州, 1956), 《동서의 피안(彼岸)》(번역, 가톨릭出版社, 1961), 《동방문화와 공교(公敎)》(번역, 분도出版社, 1965), 《내심낙원》(번역, 聖바오로出版社, 1966), 《민속(民俗)과 서학》(유고집) 등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이우 [한] 金履禹

김이우(?~1801). 순교자.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동생. 서울의 역관(驛官) 집안에서 출생.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동생 현우(金顯禹, 마태오)와 함께 맏형 범우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때 체포되어 포청에서 장사(杖死), 순교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이쁜 [한] 金~ [관련] 이의송

김이쁜(1811~1866). 순교자. 이의송(李義松)의 처. 세례명 마리아. 황해도 출신으로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상경하여 입교했고, 그 후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자 경기도 시흥(始興)으로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10월말(음 9월 14일) 양화진(楊花津)에서 남편, 아들 이붕익(李鵬翼)등과 함께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 이의송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이기 [한] 金以器

김이기(1858~1895). 아명은 진구(鎭九), 자는 중성(重聲), 호는 어초자(漁樵子). 서울에서 출생하여 충청도 노성(盧城)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16세 때 김옥균(金玉均)의 개화당에 가입하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 동학을 배운 후 간도의 호천개[湖泉浦]에 정학하여 의원을 개업하다가 간도의 벽촌서학대(樓鶴臺)에 학원을 세워 동학(東學)을 가르치는 한편 동학과 다른 종교를 비교, 연구하여 한만국경 일대에 학문적 도인적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 후 동학교리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가 1894년 동학혁명 후 학원이 폐쇄되자 천주교에 귀의, 천주교 연구를 위해 상경하던 중, 함북 고로에서 동학당으로 체포되어 1895년 회령(會寧) 옥에서 장사(杖死)하였다. 죽기 전 수제자 김영렬(金英烈, 요한)에게 천주교를 믿을 것을 당부, 그로 하여금 ‘북간도의 12종도’를 형성케 하는 등 간도지방 천주교 수용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933년 연길교구에서 용정성당 내에 있는 묘소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