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호(?~1802). 순교자. 일명 경서. 서울 출신으로 애오개(현재의 아현동)에서 염색업(染色業)을 하며 살았다. 1791년경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에게 문교(聞敎)하여 입교했고 아들 희달(喜澾)을 황사영에게 맡겨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최설애(催雪愛), 송재기(宋再紀) 등과 함께 황사영에게 상복(喪服)을 만들어 줘 피신하게 한 죄로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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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호(?~1802). 순교자. 일명 경서. 서울 출신으로 애오개(현재의 아현동)에서 염색업(染色業)을 하며 살았다. 1791년경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에게 문교(聞敎)하여 입교했고 아들 희달(喜澾)을 황사영에게 맡겨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최설애(催雪愛), 송재기(宋再紀) 등과 함께 황사영에게 상복(喪服)을 만들어 줘 피신하게 한 죄로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에 순교하였다.
김윤덕(?~1815). 순교자. 세례명 아가다 막달레나. 경상북도 상주의 은재(慶州郡 利安面 猪音里)에서 태어났다. 입교 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으로 피난하여 살던 중 1815년 부활축일을 지내다가 30여명의 마을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경주진영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내고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나 1815년 5월경(음) 그곳에서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하였다.
김육(1580~1658). 호는 잠곡(潛谷)으로 1624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자 학자. 1636년(인조14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43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1649년(효종 1년)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1655년 영의정이 되었다. 경제에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백성수탈의 법적 근거였던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케 하였고, 상평통보를 주조케 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미 역법(曆法)개정, 교통수단 개선, 활자 주조 등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한편 동지사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보양관(輔養官)등으로 청나라에 드나들면서 서학(西學)을 비롯, 서양문물 수입에 기여하고 그의 경제학은 실학(實學)의 원조인 유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학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김유재(1925~1984). 부산교구 소속신부. 세례명 그레고리오. 복관은 경주(慶州). 경상남도 진양군 문산면 상문리(慶尙南道 晋陽郡 文山面 象文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문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를 거쳐 1945년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聖神大學의 전신, 성신대학은 후에 다시 가톨릭 대학으로 바뀜]에 진학, 1953년 3월 동(同)대학을 졸업하고 이해 4월 11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경북 상주(尙州)본당 주임으로 사목한 후, 부산 청학동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1957년 부산교구가 신설되자 대구교구에서 부산교구로 이적됨과 동시에 부산교구 참사위원에 피임되었으며, 1962년에는 부산교구 재판소 변호사, 부산교구유지재단 이사에 선임 되었다. 그 후 1963년 해운대본당 주임, 1969년 광안 본당 주임, 1972년 2월 태종대본당 주임, 1972년 12월 부산 중앙본당 주임, 1976년 초장본당 주임, 1981년 구포본당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부산교구의 신심운동에 헌신하여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레지오 마리에 부산코미시움 지도신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부산교구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지도신부,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레지오 마리에 제7쿠리아(초장본당 소재) 지도신부, 198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지오 마리에 제34쿠리아(구포본당소개) 지도신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5년에는 부산교구 사제평의회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구포본당 재임 중 1984년 7월 13일 부산 성 베네딕토 병원에서 사망, 유해는 양산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유산(1760~1801).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남 보령(寶齡)의 역촌(驛村)에서 천민으로 출생. 한때 승려(僧侶)생활을 하였으나 이존창(李存昌)의 권면으로 입교, 그 후로는 역졸(驛卒)의 명색으로 유력교우들 사이에 소식을 전해 주었고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1798년과 1799년 두 번에 걸쳐 북경(北京)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전주(全州)에서 유항검(柳恒儉), 윤지헌(尹持憲), 이우집(李宇集)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 포청, 형조에서 차례로 신문을 받은 후 10월 18일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24일 전주에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과 함께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