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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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삼(?~?).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의 밀고자(密告者). 4형제의 3남으로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형제가 모두 교우로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주한 후로는 형제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냉담, 불량배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같은 고향 출신 교우 이안정(李安正) 등 많은 교우들을 위협, 금품을 갈취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총회장 최창현(崔昌顯)을 비롯 많은 교우들을 밀고하였다.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김업이(177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막달레나. 어려서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항상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守貞)을 원했으나 모친의 반대로 교우청년과 결혼했고, 중년에 이르러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를 봉양하며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한아기(韓阿只) · 김아기(金阿只) 등과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3년을 옥살이하다가 마침내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의의 반열에 올랐다.
김양홍(1874~1945). 신부. 초대 전주(全州) 교구장. 세례명 스테파노. 1900년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전라도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전북 진안(鎭安)의 어은동을 근거로 전북 장수(長水), 남원(南原), 무주(茂侏), 용담(龍潭) 등지의 18개 공소를 맡아 사목과 전교에 힘썼다. 1931년 전라도 지역이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자 감목대리로 임명되었고, 이어 1937년 전남 지역이 광주(光州) 지목구로, 전북 지역이 전주(全州)지목구로 설정되자 전주지목구장에 임명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방인 교구장이 되었다. 전주지목구 설정 당시의 교세는 신부 14명, 교우수 1만 7,527명, 성당 36개, 공수 190개로 이는 모두 김양홍 신부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1941년 일제의 탄압과 노령으로 인해 벅찬 교무행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해 11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석동(石洞)본당에서 잠시 사목하다가 이듬해 광주교구로 이적되어 나주(羅州)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중 1945년 5월 3일 72세로 사망하였다.
김아기(1790~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가다.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결혼 후, 장년에 이르러 친정 언니의 권면으로 늦게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여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 ·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신문 중에 “나는 오직 예수 ·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는 한 마디로 신앙을 고백한 후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형조로 이송되자 형조 옥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 마리아밖에 모르는 아가다가 왔다고 반겨 맞아 주었다. 그 뒤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代洗)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