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신부의 한국명. ⇒ 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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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1786).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84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李檗)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입교한 후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坊, 현재의 明洞)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李承薰),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등과 함께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관리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교우들은 모두 명문의 양반들이라 형조로부터 훈방되었으나 김범우만은 그대로 갇혀 온갖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끝에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년 가을 형조에서 받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현 을지로 2가 명동성당 부근)은 한국 천주교회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장소가 되었다. 김범우가 체포된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 (⇒) 을사추조적발사건
김백순(?~1801). 순교자. 세례명 미상. 김건순(金健淳)의 종형(從兄).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입신출세를 위해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는 가운데 선열(先烈)들의 철학서(哲學書)를 탐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책 속에 모순된 점이 많음을 깨닫고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새로운 논리(論理)를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學說)로 친구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서교(西敎)에서 따온 것이 아니냐는 친구들의 평을 듣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천주교를 연구하여 마침내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입교한 사실을 알자 그의 외숙(外叔)은 그의 마음을 돌려 배교케 하려고 의절을 선언했으나, 그는 외숙과 의절은 할지언정 배교는 하지 못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1801년 3월 26일 배교자의 밀고로 의금부에 수감되어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지 못하고 한때 배교했으나 곧 전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1801년 5월 11일(음 3월 29일) 순교하였다.
김바르바라(1805~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가난한 시골가정에서 태어나 13세경 상경하여 황 마리아라는 교우집의 식모로 들어가 이 때 교리를 배워 성세성사를 받았다. 수정(守貞)을 결심했으나 혼기에 이르러 부모의 강요로 외교인과 결혼, 남매를 두었고,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3월 몸붙여 살고 있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견뎌냈고 그 뒤 3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으로 인해 옥사(獄死),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면호(1820~1866).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면호(冕浩), 혹은 ‘계호’라고도 한다. 안동(安東)김씨이며 경상북도 안동의 박골 출신으로 병인(丙寅)박해 때의 순교자. 일찍이 서울 주동(鑄洞)으로 이사해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와 맏형 익례(翼禮), 둘째형 응례(應禮)가 먼저 입교하였고, 그는 19세 때 형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원래 성격이 활달하여 놀기를 좋아했으므로 18년 동안이나 냉담하였다가 1866년 초에야 회개하였다. 그는 냉담했던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열심히 신앙을 지켜 나갔으며, 자기잘못을 보상하는 길은 오직 순교하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런데 당시 제정 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자주 우리나라 국경을 침범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협했으므로, 김면호는 교인인 남종삼(南鍾三), 홍복주(洪鳳周) 등과 상의하여 방아책(防俄策)으로 이 나라에 와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서 프랑스의 힘을 빌어 나라를 구함이 가하다는 내용의 편지로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되어 1866년 7월 18일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審問)에서 자기의 냉담했던 사실을 크게 뉘우친다고 스스로 답변하여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고 그해 9월 10일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니 그의 나이 47세였다.
[참고문헌] 치명일긔, 1895 / 崔奭祐, 丙寅迫害資料硏究, 韓國敎會史硏究所,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