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한] 金南洙

김남수(1922~2002). 주교. 제2대 수원(水原) 교구장. 세례명 안젤로. 만주 간도성 연길현 다조구 대령동(滿洲 間島省 延吉縣 茶條溝 大領洞)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가족을 따라 수원으로 이주, 수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 덕원(德源)신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 · 고등과 · 철학과를 차례로 마치고 1948년 10월 17일 신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1년 동안 혜화동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다가 1949년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에 유학, 1952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어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1년 동안 사회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하여 왜관 순심고교, 경북대, 효성여대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고 1955년 순심고교 교장, 1957년 부산 양정동본당 주임신부, 1960년 대양중 · 공고 교장 겸 부산 서면본당 주임신부, 1966년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총장, 1973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지도신부를 거쳐 1974년 10월 5일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1월 2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후 주교회의 부의장을 비롯하여 주교회의의 각 주교 위원회와 전국위원회의 위원과 위원장을 역임하는 한편 1976년 시성시복추진 책임주교, 1977년 군종신부단 총재, 1979년 한국외방선교회 총재 등을 겸임했고, 1980년부터 현재까지는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시성시복 추진운동 · 교회사 자료정리 · 200주년 성서번역 · 통일성가집 발간 · 맹인 개안 무료수술 · 북한 선교사업 등 6개 분야에 걸친 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참고 : 김남수 주교는 2002년 6월 1일 선종하였다. 현재 수원교구 교구장은 1997년 6월 4일 제3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최덕기 바오로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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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 [한] 金起浩

김기호(1824~1903). 전교회장. 명도회장. 세례명 요한. 황해도 수안군 남면 무송동에서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났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에의 뜻을 버리고 글방을 세워 학동을 가르치며 경향(京鄕) 각지의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25세 경 중병을 잃고 난 뒤부터 사상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여 인생(人生) 본질과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끝에 1854년 이마두(李瑪竇)와 홍봉주(洪鳳周)에게 ≪성세추요≫(盛世芻堯)와 성서(聖書)를 빌어 읽고 이 해 8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 후 10여년 동안 베르뇌 주교를 보좌하며 전국으로 전교여행을 다녔고, 1866년 병인(丙寅) 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경기도 청계산의 하우현(下牛峴)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강원도 금강산, 양양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1876년 블랑(Blanc, 李福明) 주교,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 등을 맞아들였고 1881년부터 평안도에서 전교하였다. 1883년 일본 나가사끼(長崎)에서 거행된 블랑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귀국길에 중국 상해(上海), 남경(南京), 차쿠(岔溝) 등지의 천주교회를 시찰했고, 귀국해서는 명동성당 건립 준비에 관계하는 한편 1886년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자 차남 상구(相九)를 일본에 보낸 인쇄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1891년 일선 전교활동에서 은퇴하고 하우현에 거주하면서 하우현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을 창설한 후 1903년 12월 28일 사망하여 청계산에 안장되었다.

김기호가 남긴 저술로는 1903년 명동성당 준공의 기쁨을 노래한 <성당가>(聖堂歌) 등 천주가사와 ≪구령 요의≫(救靈要義), ≪소원신종≫(溯源愼終), 그리고 40여년간의 전교활동을 회고한 ≪봉교자술≫(奉敎自述) 등이 있다.

[참고문헌] 金起浩 原著, 趙聖熙 譯, 奉敎自述, 교회와 역사(78호~100호), 1982. 1~1983. 10 / 金雲會, 金起浩 硏究, 韓國敎會史論文集, I,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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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동 [한] 金貴同

김귀동(?~1802).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의 순교자. 충청도 청양(靑陽) 고산(高山) 출신. 1801년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舟論] 산중으로 들어가 옹기장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때 황사영(黃嗣永)이 서울 사는 이상주(李喪主)라고 신분을 속이고 이곳을 찾아왔을 때, 김한빈(金漢彬)과 힘을 합쳐 굴을 파서 그를 숨게 하였다. 황사영은 이 굴에서 중국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를 썼으며, 11월 2일 김귀동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김귀동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과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홍주감영(洪州監營)으로 이송되어 1840년 2월 2일(음) 끝내 참수(斬首)되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出版社, 1980 / 邪學懲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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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정 [한] 金九鼎

김구정(1898~1984). 한국 천주교회사가. 세례명 이냐시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지원(志園). 필명으로는 달성산인(達城山人)을 쓰고 있다. 김상연(金湘連, 바오로)의 셋째 아들로 대구시 신암동 715에서 출생, 서울 용산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 1919년 대구 만세시위에 신학생들이 합세하는 데 주동적인 준비를 하였으나 학교 당국에 발각, 퇴교당하였다. 프랑스인 교수들이 독립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 뒤 1923년 조선일보 대구지국장. 1925년 간도(間島) 용정(龍井) 해성(海星)학교 부교장. 1927년 간도 연길(延吉) 팔도구(八道溝) 조양(朝陽)학교 부교장을 거쳐 1929년 대구(大邱) 노동(勞動)학원 설립을 경영하였고 1932년 평양교구장 비서, 월간 <가톨릭조선> 주간 및 <가톨릭연구>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1938년 만주 흥안남성(興安南省) 성길사한(成吉思汗) 효성(曉星)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효성국민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나 1940년 만주정부에 농장이 압수되어 폐교되었다. 1941년부터 만선(滿鮮)일보 치치하얼(齊齊哈爾) 지국장으로 근무하다가 1945년 11월 해방을 맞아 귀국하여 1946년 군산여자고등학교 교감, 1948년 군산대학교수를 역임하였다. 1951년 귀향하여 1956년 대구 대건고등학교 강사생활을 한 바 있다. 1960년경부터 주재용(朱在用) 신부와 특별한 관계를 갖고 교회사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였다. 그의 신앙은 아버지의 영향이 바탕이 되었고 사상적으로는 대구지방에서 민족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여 온 백씨 김하정(金夏鼎)의 영향을 입었다. 그는 순교자 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단순한 순교정신의 탐구보다 민족사의 맥락에서 그 가치를 밝히려 노력하였다. 그는 <가톨릭연구>지에서 <양제궁(良娣宮)의 가을>과 <동방의 새벽>이라는 역사소설을 연재하였다. 저서로는 ≪가톨릭유년독본≫, ≪어린이 미사≫, ≪칠성사풀이≫, ≪호남발전사≫, ≪영남순교사≫, ≪경남천주교발전사≫, ≪순교사화 전4권≫, ≪대구의 순교자들≫이 있으며 역서로 ≪영혼의 성약(聖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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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옥 [한] 金廣玉

김광옥(1741~1801). 세례명 안드레아. 순교자. 충청도 예산(禮山) 출신. 1751년 내포(內浦)의 사도라 일컫는 이존창(李存昌)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어려서 매우 거친 성격을 지녔었으나 입교한 후로는 그런 성격은 없어지고 겸손하고 온순해져 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구나 신자의 본분을 열심히 지킬 뿐만 아니라 집안사람과 동네 친지들에게 전교하니 그에게 감회되어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다. 1801년 박해가 심해지자 공주 무성산(公州 茂城山)으로 피신하였으나 밀고로 인해 예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배교치 않자, 관장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7개월의 옥중생활 끝에 1801년 8월 25일(음 7월 17일) 60세를 일기로 예산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上 / 邪學懲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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