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옥 [한] 金廣玉

김광옥(1741~1801). 세례명 안드레아. 순교자. 충청도 예산(禮山) 출신. 1751년 내포(內浦)의 사도라 일컫는 이존창(李存昌)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어려서 매우 거친 성격을 지녔었으나 입교한 후로는 그런 성격은 없어지고 겸손하고 온순해져 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구나 신자의 본분을 열심히 지킬 뿐만 아니라 집안사람과 동네 친지들에게 전교하니 그에게 감회되어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다. 1801년 박해가 심해지자 공주 무성산(公州 茂城山)으로 피신하였으나 밀고로 인해 예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배교치 않자, 관장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7개월의 옥중생활 끝에 1801년 8월 25일(음 7월 17일) 60세를 일기로 예산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上 / 邪學懲義.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관택 [한] 金觀澤

김관택(1909~1975). 전교회장. 교육자. 세례명 요셉. 평남 강서군 성대면 현곡리(平南 江西郡 星臺面 硯谷里) 출생. 1929년 평양고보(平壤高普)를 졸업하고 1932년 평남 마산(馬山)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7년 교직을 사임하고 가톨릭조선사(朝鮮社)에 입사하였다. 1938년 <가톨릭조선>이 폐간된 후로는 평양교구 전교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각지를 순회하며 전교하였고, 1943년에는 평남 정주(定州)의 해성보통학교(海星普通高校) 교장으로 임명되어 교육사업에 투신하는 한편 정주본당의 총회장직도 맡아 여러 지역을 전교하였다. 이 무렵 독립운동가들과 은밀히 관계를 맺어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 메리놀 외방전교회 미국인 신부들과도 교분을 맺어 그로 인해 1944년 투옥되었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석방되어 건국준비위원회 정주군 부위원장, 1946년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창당한 조선민주당 정주군 당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反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남하여 N.C.W.C. 한국지부에서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하였다. 1955년 종로본당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로 평양교구 신우회 서울지고 회장, 서강대학교 후원회 부이사장,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선종할 때까지 교회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서울대교구 소속 김몽은(金蒙恩) 신부는 바로 그의 장남이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건순 [한] 金健淳

김건순(1776~1801). 세례명 요사팟. 여주(驪州) 출신. 1797년 6월 6일(음)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원래 본성이 영특하여 14세 때에 이미 천주교 입문서를 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경서(經書), 불서(佛書), 음양서(陰陽書), 병서(兵書) 등 각 방면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의 집안은 노론(老論)의 대가 가계로 그는 어려서 종가(宗家)에 입양하였으나, 후에 천주교를 신봉한 탓으로 파양(破養) 되었다. 그는 천주교리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당시 당파적으로 적대시되는 남인(南人)의 권철신(權哲身)을 몰래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후에 이희영(李喜英), 이중배(李中培), 원경도(元景道) 등에게 전교하여, 여주고을을 천주교의 중심지로 하는 데 큰 공을 남겼다. 그는 또한 정약종(丁若鍾)을 도와 천주교리를 순서 있고 체계있게, 그리고 쉽게 설명한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저술하다가 박해로 중단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는 1801년 6월 1일(음 4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26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한 것으로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와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에 기록되어 있으나 관변측 자료에 의하면 배교한 것이 확실하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강이 [한] 金綱伊

김강이(1755~1815). 순교자. 세례명 시몬. 충청도 서산(瑞山) 출신. 그의 입교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전에 이미 입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동생 김창귀(金昌貴)와 함께 고향을 떠나 고산(高山)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여기서 주문모 신부를 알게 되어 더욱 믿음이 강해졌고, 1801년 박해 때에는 고산지방 신자들의 유력한 지도자가 되었으므로 포졸들은 제일 먼저 그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는 이를 피해 경상도 머루산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이곳도 안전치 못하여 울진(蔚珍)으로 다시 피신하였다. 그러나 하인으로 있던 자의 밀고로 1815년 4월 동생과 함께 잡혀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수감되었다. 이어 5월에 원주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이곳에서 아우 김창귀는 혹독한 형벌에 못 이겨 배교하였으므로 전라도 보성(寶成)으로 유배되었으나, 형은 이를 통탄하게 여겨 더욱 신앙을 굳게 하여 굴하지 않음으로써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형집행에 앞서 쇠약해진 몸에 이질이 겹쳐 참수치명을 기다리지 못하고 1815년 11월 5일(음) 50세를 일기로 옥사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기해일기 [한] 己亥日記

현석문(玄錫文)이 지은 1839년 기해년(己亥年) 박해 때의 순교자전(殉敎者傳).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곧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교 자신도 조만간에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정하상(丁夏祥), 현석문 등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과연 주교는 그해 7월 5일에 잡히는 몸이 되었고, 9월 21일에는 모방(Mau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등 두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으므로, 현석문은 주교의 뜻을 받들어, 관헌의 눈을 피해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순교자의 거룩한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3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기해일기》를 완성하였다. 그 후 한때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기해년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를 보충하였고, 페레올(Ferreol, 高) 주교도 입국하자마자 현석문과 함께 이 《기해일기》를 재검토하여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순교자의 자료를 열심히 모으던 중 우연히도 한글로 된 《긔해일긔》한 벌을 1904년 전후에 입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과연 현석문이 지은 원본인지는 알 길이 없고, 더구나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던 탓으로 첫 장과 끝의 몇 장이 다 썩어 버려 알아 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외에 다른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자, 1905년에 이 책을 그대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246페이지에 달하는 큰 책으로 뮈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원문대로의 내용을 그래도 실렸는데, 총론과 순교자의 일기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현석문이 조사한 순교자의 수는 사형으로 순교한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 60여명으로 도합 114명이 넘었으나, 그의 《기해일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들어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기해년에 순교한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 남자가 28명, 여자가 50명으로 그들은 거의 전부가 서울에서 치명(致命)한 것으로 되어있다. 《기해일기》에 올라 있는 78명의 순교자 중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른 순교자의 수가 69명에 이르고 있음으로 보아, 《기해일기》가 순교자의 사적을 기록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정확을 기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