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channel>
		<title>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기념 희년</title>
		<link>https://www.missa.or.kr</link>
		<description></description>
		
				<item>
			<title><![CDATA[포도밭 주인의 두 아들, 가해 연중 제 26주일]]></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34]]></link>
			<description><![CDATA[포도밭 주인의 두 아들
가해 연중 제 26주일
1. 말씀읽기:마태21,28-32  두 아들의 비유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주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아들은 처음에는 가기 싫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대답만 하고서 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회개한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회개하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을(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가리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아들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어 봅시다.

질문 1: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부모님께서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자녀들은 그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부모님을 오해하고, 부모님께 반항할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을 가진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과, 죄인이었지만 회개하고 의롭게 돌아서 의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청중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 2: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내 생각엔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을까요?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애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큰 아들은 그 일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싫습니다.”하고 거절합니다. 큰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그렇게 잘 해주셨는데, 나는 이게 뭔가?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 주셨는데, 나는 왜 아버지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는가? 나의 행동을 통해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저 내가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뿐인데. 그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일손을 도와 드려야겠다.”

질문 3: 오늘 두 아들의 비유에서 서로 바르게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아버지 - 하느님
② 큰아들- 회개한 죄인들(세리와 창녀들)
③ 작은아들 - 의롭다고 자처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④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는 것 -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
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 잘못한 사람들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 구원을 얻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자신들보다 못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질문 4: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어떤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경배를 드리기 위해 기도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여라.
② 부모님께는 사랑과 존경과 공경을 드리고, 친구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착하게 살아라.
③ 잘못을 하면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며, 고백성사를 잘 보고, 성체성사로 힘을 얻어라.
④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삶으로 실천하여라.
⑤ 친구가 시비를 걸면 ‘비난하고, 편을 갈라 소외시키고,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라.^*^

 철이 들기 전에는 부모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내가 내 일에 집중하다 보면, 내 것만 보고, 부모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나, 더 나아가 작은 심부름조차도 투덜거리게 됩니다. 부모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시지만 나를 사랑하시기에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는 부모 마음 알아주겠지!”하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부모님께서도 그러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기다리려 주십니다. 

질문 5: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누구를 말하고, 그의 행동은 어떠했습니까?
① 작은 아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다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몰랐습니다.
② 작은 아들의 행동은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예수님께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만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결코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 모르고 있고, 언제나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쉽게 남을 단죄하고, 비난하고 비평합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아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모습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질문 6: 대답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납니까?
① 나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겠다.
②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라도 시원하게 해야 한다.^*^
③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며 실천해야겠다.

 대답은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웃으면서 뭐든지 좋다고 합니다.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대답하고 행동으로 즉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대답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겠다고 말하고 결국은 안 해 놓고 이 다음에 이런 저런 핑계만 댑니다. 그것도 웃으면서. 그리고 말합니다. “다음에는 꼭 할게요.”라고. 마음에도 없지만 그저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서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 7: 가정에서 부모님의 말씀에 ‘예’하지만 속으로는 ‘싫어요. 안 할래요.’라고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① 게임 그만하고 공부하거라. 예
 왜 하필 지금 공부하라는 거야? 조금 이따가 하면 어디가 덧나나?
② 방 청소 좀 하거라. 예
 '이건 어지럽혀진 게 아니라 내 규칙대로 놔둔 거란 말이에요. 어차피 내일 또 어지러워질 텐데 왜 맨날 치우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③ 동생에게 양보하고 싸우지 말거라. 예
 왜 맨날 나한테만 양보하래? 동생만 예뻐하고 진짜 불공평해.
④ 어른들에게 인사하거라. 예
 어색하고 부끄러운데 자꾸 큰소리로 인사하라고 하니까 더 하기 싫어. 

질문 8: 예수님께서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이냐?”라는 질문에 왜 바리사이들은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했을까요?
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신들의 삶의 모습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작은 아들이 자신들의 모습임을 몰랐기에 ‘맏아들’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②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대답만 ‘예’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자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했지만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행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이들의 구원임을 몰랐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의로움과 경건의 가면을 썼기에 스스로도 의롭고 경건하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그들의 죄짓는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앞서 하늘나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갔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나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구원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결국 바리사이들이 간 길을 그대로 걷게 될 것입니다.

질문 9: 예수님께서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물으시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분명 대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를 물으셨을 때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들에게 관련된 곤란한 질문에 대답을 회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맏아들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자기들을 향한 질문인지를 모르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죄를 인정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큰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질문 10: 다음 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인은 누구입니까?
① 말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떠벌리면서 결국 행동으로는 하나도 옮기지 않는 친구.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해주면 화를 내는 친구 ^*^
② 다른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다가,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바꿔 나가는 친구
③ 친구들을 판단하고, 잘못을 지적하며,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꼬집지만, 정작 친구들에게는 관심 없는 친구.^*^
④ 열심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신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고,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친구. ^*^

질문 11: 예수님께서는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회개를 통해 의로운 길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회개를 선포하였습니다. 죄인들은 회개의 선포를 받아들이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② 참된 회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은 물론 세리들까지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데만 관심이 있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누가 죄인인지만 판단하고 단죄하며 자신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③ 엘리야의 사명을 수행한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았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닫혀있던 백성의 지도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끝내 믿지 않았습니다.

질문 12: 하느님 나라를 위해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을 존중하며, 그 말씀대로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
②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며,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
③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빠서 못해요.’ 또는 ‘하기 싫은데요.’ 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변화된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쁘게 노력하는 것.
④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경배를 드리며, 구원의 문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며, 단호하게 죄를 멀리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뀝니다. 행동이 바뀌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영생이 바뀝니다. 우리 모두 불신에서 믿음으로 생각을 바꿉시다. 그렇게 바뀌면 보이는 것들이 더욱 새롭게 보이고, 모든 것들이 나를 믿음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내 옆에서 신앙에로 초대하는 사람들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예’하고 응답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3. 정리해 봅시다.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나는 큰아들의 모습입니까? 작은 아들의 모습입니까?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 그 죄인의 모습이 혹시 내 안에는 없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4. 실천사항 정하기
내 생각을 내려놓고, 친구들을 존중하며 변화된 행동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 정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26 Sep 2026 05:42: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33]]></link>
			<description><![CDATA[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1. 말씀읽기: 루카9,23-26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순교자 대축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묘하신 섭리로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셨고, 그 씨앗을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으로써 증거하며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18세기 말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이들이 천주교가 학문이 아니라 신앙임을 알게 되고,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겪으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33위가 계십니다. 한국교회는 9월 20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며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순교자들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질문 1: 박해 당시, 신앙인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① 박해 당시에 신앙인들은 단 한 번의 성사를 받기 위해서 평생 동안 신부님들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했으며, 단 한 번의 미사참례를 하기 위해 수십 리의 밤길을 걸어야만 했고, 굶주림이나 헐벗음도 감수 인내해야 했습니다.
② 신앙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같은 동네 사람들이 행하는 미신행위에 참례하지 않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릎 쓰고 재산을 정리하여 깊은 산골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해가 크면 클수록 신자가 증가하는 놀라운 사실은 순교자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③ 순교할 때가 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할 원의 때문에 자진하여 체포되었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배교의 말을 뱉지 않았습니다. 
④ 순교자들이 박해를 받던 당시는 우리나라에 흉년과 기근이 심하였고,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심했던 때였습니다. 순교자들은 극도의 빈곤과 가난과 피난지의 배고픔을 겪었지만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이나 추호의 불평도 없었으며, 오히려 교우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갔습니다. 
⑤ 순교자들은 아무리 심한 고문 중에도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비록 자신이 심한 고문으로 죽게 되었어도 다른 교우들의 생명을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지 않았습니다.

질문 2: 성 정하상 바오로는 어떤 성인이십니까?
①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입니다. 
②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는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온 생애를 투신하셨으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하셨습니다. 
③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앵베르 범 주교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셨습니다.

질문 3: 성 정하상 바오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하신 후로 사제가 없는 조선 교회를 위해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어떻게 됩니까?
① 정하상 바오로는 현석문(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형제들의 힘을 모아 추진했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북경의 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했습니다.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②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 바오로는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인 교황에게 청원하게 되고, 성직자 청원 운동이 중국을 넘어 세계로 확대됩니다.
③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전교 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고, 1831년 9월9일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습니다.
④ 1834년 말 중국인 유방제 신부님을 비밀리에 영입했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땅(Chastan) 신부, 1837년에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님을 영입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는 교구장 주교와 사제들이 신자들과 하나 되어 동방의 훌륭한 교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질문 4: 성 정하상 바오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될 것을 예상하시고 상제상서(上宰相書)를 저술해 두었다가 1839년 7월에 관헌에 체포되자, 그 당시 재상이었던 이지연에게 이 글을 올렸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① 상재상서는 한자로 쓰인 2,000여자의 비교적 짧은 문장이지만, 천주존재 증명, 천주께 나아가는 길, 영혼과 내세, 천주교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였고, 천주는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심을, 천주교 신자들이 지키는 십계명에 대해서 명료하게 선포하였습니다. 
②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하느님을 “만물을 만드신 대부”이시라고 정의를 내리며,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기 때문에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선포하였습니다. 
③ 성 정하상 바오로는 상재상서를 통해서 천주교는 결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임금이신 하느님(大君)의 명령을 따르는 종교이므로 임금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無君無父) 종교가 아니라고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아울러 이 글을 통해서 국가의 탄압에 대하여 선처를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강화된 탄압을 하였습니다. 
④ 성 정하상 바오로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 호소하면서 천주교는 무해정도(無害定道)의 종교이니 박해 철회를 호소하였고, 덧붙여서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 제시하였습니다.

질문 5: 복자 강완숙 골롬바는 어떤 분이십니까?
①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으로, 1794년 12월 23일, 조선입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6년간 충실히 도우신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의 여성 회장이십니다. 
② 강완숙 골롬바는 ‘천주실의’를 통해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고 이렇게 확신하십니다.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다.”
③ 강완숙 골롬바는 신앙을 위해서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필립보와 딸을 데리고 한양으로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습니다.
④ 강완숙 골롬바는 여회장으로서 자상하고 재빠른 행동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도와 교회 일을 도맡아 처리했고, 당대의 일류 학자들과도 교류하여 교리를 토론했으며, 많은 처녀와 부녀자를 감화시켜, 당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자들까지도 입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⑤ 당시 서울의 첨례(미사) 보는 장소로는 김이우, 황사영, 정광수, 최필제, 손경태 등의 집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서 거행된 첨례가 횟수로 보거나 참석자의 수로 보아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⑥ 황사영 알렉시오는 “한국 교회를 위해 노력한 사람 중 남녀를 통틀어서 강완숙을 당할 사람이 없다.”, “강완숙 골롬바는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을 권유해서 감화시켜 조금도 편안하게 잘 때가 없었다. 이치에 통달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설명해 주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다. 또한 비상한 정력과 활동력을 타고났고, 하늘(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도움을 받은 골롬바는 모든 자선사업을 고무하고 지도하였다.” 고 말하였습니다.
⑦ 투옥된 지 3개월 만인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자신이 전교한 궁녀들과 함께 서소문에서 참형으로 순교하셨는데,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강완숙 골롬바는 아들 홍필주에게 “하늘의 복”에 대해서 설교할 정도로 자신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장인 서소문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 골롬바는 다른 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습니다. 그녀가 순교한 뒤, 홍필주(필립보)도 계모인 강완숙 골롬바를 따라 순교하셨습니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습니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 골롬바 성녀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셨습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즉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질문 6: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사셨는데 어떻게 하면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Ⅰ코린 10,31) 살아갈 때
②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때.
③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아갈 때.
④ 겸손하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킬 때.
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질문 7: 만일 지금 내가 붙잡혀서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교를 하라고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배교하면 살려주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 죽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① 박해자들 앞에서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고, 다시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② 끝까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한다. 
③ 엄마한테 물어보고 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신 분들이십니다.

질문 8: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만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생활태도를 말합니다. 다음 중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한 이는 누구입니까?
① 기동이는 늘 동생과 다투며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 양보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자주 기도했습니다.
② 글라라는 밤늦게 까지 공부하느라고 피곤했지만, 성당에서 복사를 서기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성당에 갔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잠을 자는 것이었지만, 맡은 전례 봉사 책임이 있기에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④ 동기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매일 게임방에서 살고, 공부도 포기하고 놀기만 합니다. ^*^

질문 9: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모든 시련을 참아 내며,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 세상에 얽매이는 마음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참된 생명(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음 중에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살아가는 이는 누구입니까?
① 바오로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을 때 꼭 성호경을 긋고 식사기도를 합니다. 식사 후 일어날 때는 앉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합니다. 
② 아녜스는 시험 때도 미사를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가족과 함께 기도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③ 데레사는 약속을 잘 지키고, 학교 과제나 학원 과제도 성실하게 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피하지 않고 기쁘게 봉사합니다.
④ 요셉은 동생과 잘 놀아주고, 동생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양보를 잘 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시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목숨을 잃는다 해도 박해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질문 10: 다음과 같이 말하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말해 줄 수 있을까요?
① “난 요즘 공부하기 바빠서 성당에 나갈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으로만 성당 다니면 되는 것 아닌가요?”하고 말하는 친구 
② “귀찮아요. 나온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세요. 성가 힘들어서 못 불러요. 기도문 힘들어서 못 바쳐요. 미사시간에 휴대폰 만지는 이유는 바쁜 중에 미사 왔기 때문이예요. 이해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친구 
③ “꼭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해요? 다른 친구들은 안 하던데요. 뭐 성경 모르는 우리 할머니도 성당 잘 다니시던데요.” 라고 말하는 친구 
④ 바쁜 일이 있어도 기도생활을 충실히 하고, 피곤하더라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웃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친구.
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끄실 수 있도록 맡겨 드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친구.
⑥ 언제나 짜증과 신경질을 내고,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늘 돌리며, 마지못해 성당에 나오는 친구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버린다면 심판 날 예수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심판자로서 우리 앞에 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버리고 욕심을 줄여가야 합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버릴 것은 무엇이고,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③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지금 나에게 순교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배교하시겠습니까? 순교하시겠습니까?
                                                                        
                                                                        
4. 공지사항
순교자들을 본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19 Sep 2026 04:00: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가해 연중 제 24주일]]></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32]]></link>
			<description><![CDATA[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가해 연중 제 24주일

1. 말씀읽기: 마태18,21-35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루카 17,4)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참된 용서를 하는 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질문 1: 동생이 언제나 까불고, 부모님께서 계시면 더 약을 올립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도 일러바치고,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일러바치기도 합니다. 이런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그런 동생이 밉기도 하지만 내 동생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다독거린다.
② 부모님 안 계실 때 철저하게 응징한다. ^*^
③ 기타(                                                                  )

질문 2: 누나는 부모님이 안 계시면 괴롭히고, 어려운 것들을 시킵니다. 이것을 부모님께 이르면 더 혼납니다. 누나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이런 누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잘못을 해도 늘 용서를 받고 싶고, 이해를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용서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용서받고 싶은 만큼,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질문 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게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① 일곱 번 용서해 주고 그 다음에는 한 대 때려 주거라. ^*^
②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일곱 번을 이야기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 사도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질문 4: 친구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견디기 어렵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또한 친구들에게 잘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나의 어떤 행동을 싫어하고 있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잘할 때도 있지만, 못할 때도 있습니다. 못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고, 용서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질문 5: 예수님께서는 내가 잘못을 하면 몇번 을 용서해 주실까요?
① 일곱 번 ^*^
② 용서를 청할 때마다 언제든지. 

질문 6: 나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많은 잘못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했을 때, 나는 몇 번을 용서받고 싶습니까?
① 1번만 ② 일곱 번까지. ③ 무수히 많이. 

질문 7: 내 친구나 가족들도 나에게 가끔 잘못을 합니다. 나는 몇 번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① 1번만 ② 일곱 번까지. ③ 무수히 많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한 것처럼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능력이 있고 뛰어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렇게 내 형제자매들에게, 친구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위해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왕과 종이 셈을 하는 이야기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용서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질문 8: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임금이 셈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습니다. 임금은 어떻게 판결했습니까?
① 먼저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②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습니다. 

 당시 일만 탈렌트는 커다란 액수입니다. 1데나리온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었고, 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5만원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5만원 * 6,000 * 10,000 =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9: 임금이 빚을 갚을 길이 없는 종을 용서하고, 부채도 탕감해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그 종의 가엾은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도, 심지어 아내와 자식과 자기 자신까지 종으로 팔아도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는 그 종을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용서해 주고, 빚도 탕감해 준 것입니다.
② 그 종이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 임금은 자비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애걸하는 종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질문 10: 애걸복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① 애걸(哀乞): 소원을 들어달라고 애처롭게 빎.
② 애걸복걸(哀乞伏乞): 소원이나 요구 따위를 들어 달라고 애처롭게 사정하며 간절히 빎. 

질문 11: 임금에게 탕감받은 그 종은 나가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① 성실하게 일을 해서 임금에게 진 빚을 갚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너그럽게 베풀었습니다. ^*^
②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고,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질문 12: 만일 내가 일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종이었다면 나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모님과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질문 13: 동료들은 그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러바쳤습니다. 그 동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①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임금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②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나였더라도 말리다가, 안 되면 그렇게 임금에게 그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나머지”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질문 14: 자비를 베푼 주인은 그 무자비한 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심판하였습니까?
①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습니다.
② 잘 지내고 있지? 다음에는 잘 해라 ^*^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악한 종아!” 이 말로 그 종의 죄가 드러나고, 이 말을 통해 임금이 그 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자비를 입었다면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까지 입은 자비까지도 빼앗겨 버릴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리면 그 끝은 멸망임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질문 15: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형제자매들에게,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과 자비는 무엇일까요? 가족과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또한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참된 용서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용서를 하는 내가 되어,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늘 용서받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참되게 용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 봅시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모습의 내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나는 어떤 면에서 무자비한 종과 비슷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③ 살아가면서 많은 잘못을 합니다. 내가 참된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어떻게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정하기
형제자매들에게 너그럽게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 주며, 내가 잘못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형제자매의 약점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장점들만을 바라보기 위한 실천사항을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12 Sep 2026 04:31: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31]]></link>
			<description><![CDATA[<b>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b>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오소산(해발791m) 바로 밑에 다락과 같이 위치했다 해서 다락골이라 불리며 한편 다래가 많이 나기도 해서 다래꼴로도 불렸다 합니다. 다락골이 박해시절 천주교 교우촌임이 발각되자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을 잡아가고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그리하여 교우들은 순교하거나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도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옛 어른들이 대대로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b>‘</b><b>천주교를 믿으면 멸문지화를 당하니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b><b>’</b>

다락골은 옛 지명인 홍주 다리골이며, 현재의 행정적인 소재지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입니다. 다락골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새터(新垈)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최인주씨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 정착한 마을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교우인 이씨 부인이 12세의 아들 최인주(최仁柱)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이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최경환 성인 집안은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최상진이 1787년경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우면서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최경환 성인의 조부인 최한일도 동생 최한기와 함께 1787년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본래 서울에 살았으나, 1791년 진산사건에 의해 시작된 신해박해가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최경환 성인의 부친 최인주와 할머니(이씨 부인, 최한일의 아내) 경주 이씨는 새터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씨부인은 경성 부인이므로 침선과 예법에 능통하였고 또한 경주최씨 집안인지라 경주최씨 마을인 이곳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으며 열심한 신앙생활로 많은 이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최인주는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 아드님이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1805-1839)이십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에 살면서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1821-1861)을 낳은 후 수계생활이 어렵게 되자 주교, 신부 밑에서 신앙생활 하려고 최양업 신부님이 12살 때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지금도 이들이 마시던 우물이 있고 소년 최양업이 뛰놀던 뒷동산과 천제바위 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는데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1838년에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 뒤뜸이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산 중턱을 개간하여 담배를 심고 새로 이주해 온 천주교 교인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데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그들은 혼심을 다해 십계명을 지켰으며 밤에는 교리를 공부했고 묵상과 기도에 몰두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너 집안만이 그 마을에 정착했는데, 점차 그 수가 늘어 스무 세대가 넘었습니다. 밤이 되면 최경환은 그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불러 모아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강의는 진지하고 간명했으며 설득력 있었습니다. 또한 가난 중에도 애긍희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들었습니다. 그의 언변이 널리 알려져, 멀리서도 천주교 교인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습니다.

<b>“</b><b>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b><b>, </b><b>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b><b>, </b><b>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b><b>.”</b>

ﾠ

1836년, 최경환이 31세가 되었을 때,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 사제 피에르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모방 신부는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외국인 사제가 조선에 들어와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조선인들을 해외로 보내 천주교 사제 수업을 받게 할 젊은이들을 뽑았습니다. 모방 신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비범한 총명함을 지닌 젊은 교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b>“</b><b>저는 최양업 토마스를 마카오로 보내 천주교 신부 수업을 받도록 하고 싶습니다</b><b>. </b><b>승낙해 주시겠습니까</b><b>?”</b>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신을 매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b>“</b><b>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b><b>?”</b>

 

그러자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b><b>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b><b>, </b><b>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b><b>? </b><b>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b><b>?”</b>

ﾠ

1839년 7월 31일 밤, 한양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습니다.

<b>“</b><b>어서오십시오</b><b>. </b><b>여러분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b><b>? </b><b>저희는 오래도록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b><b>. </b><b>우리는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b><b>. </b><b>들어오셔서 동틀 때까지 쉬시지요</b><b>. </b><b>우리 모두 새벽에 떠납시다</b><b>.” </b>

 

그리고 그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했습니다. 포졸들은 그의 태도에 놀라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b>“</b><b>사람들은 참으로 진실된 신자들이다</b><b>. </b><b>그들이 도망갈 염려는 없겠으니 여기서 쉬다 가자</b><b>.”</b>

 

포졸들이 쉬는 동안,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말했습니다.

<b>“</b><b>이 박해는 전국적이며 조정의 의도가 교회를 완전히 뿌리 뽑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b><b>. </b><b>새벽에 우리 같이 포졸들과 함께 갑시다</b><b>. </b><b>가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고 순교자가 됩시다</b><b>.”</b>

천주교인들은 모두 그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그의 자식들에게 말했습니다.

<b>“</b><b>네가 여기에 남는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b><b>. </b><b>집에서 죽기를 갈망하느니 차라리 한양에 있는 감옥에서 죽는 것이 낫다</b><b>. </b><b>감옥에서 증언하며 죽는 것이 진정한 순교이다</b><b>.”</b>

 

새벽이 되자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일어나 포도대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성인은 낡은 옷을 입고 있는 한 포졸에게 깨끗한 옷 한 벌을 입으라고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검거되어 차례차례 그들이 천주교인인지를 질문받았습니다. 배교한 사람들은 석방되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습니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습니다.

 

<b>이른 아침에 최경환 프란치스코 외에 어린이들이 포함된 </b><b>40 </b><b>여명이 모여 한양으로 향했다</b><b>. </b><b>그 수가 총 </b><b>100</b><b>여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b><b>. </b><b>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앞장서 가고 남성들이 뒤를 따랐으며 여성과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b><b>. </b><b>포도대가 맨 뒤에서 그들을 몰아갔다</b><b>. </b><b>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지친 교우들에게 한 천사가 황금 자로 그들의 보폭을 재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상기토록 격려했다</b><b>. </b><b>그때는 한여름이었으므로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b><b>.</b>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성인은 이렇게 격려하였습니다.

<b>“</b><b>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b><b>. </b><b>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b><b>!”</b>

 

그들이 서대문에 당도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b>“</b><b>이 사악한 년놈들아</b><b>. </b><b>너희들이 죽기를 바란다면 죽어라</b><b>. </b><b>그런데 어쩌자고 죄 없는 아이들마저 함께 죽게 만드느냐</b><b>?”</b>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습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습니다.

 

다음날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b>“</b><b>믿고 싶으면 혼자 믿어라</b><b>. </b><b>다른 사람들을 현혹하지 말아라</b><b>.”</b>

 

이 훈계에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답했습니다.

<b>“</b><b>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갑니다</b><b>. </b><b>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도록 권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지옥에서 구하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일입니다</b><b>.”</b>

 

화가 난 포장은 그가 그 말을 철회하고 배교할 때까지 그를 고문하라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상처로 뒤덮여도 용감하게 고문을 견뎠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곳곳의 뼈가 노출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확고부동했습니다. 다음은 다른 천주교인들이 부름을 받아 심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친척 중 이 에메렌시아 이렇게 단 세 명만 제외하고 모두 살기를 원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떠나가는 교우들을 보고 수리산 공동체에 단 세 명만이 남았다며 슬퍼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습니다. 그는 태형 340대와 곤장 110대를 맞았습니다.

 

포장이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들 중에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을 공부하러 마카오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형리들은 그가 하느님을 부인토록 만들기 위해 더욱더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격심하게 때렸고 그의 팔과 다리의 뼈는 모두 탈구되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b>“</b><b>당신들이 나를 먹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b><b>, </b>

<b>절대로 내가 하느님을 부인토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b><b>.”</b>

 

성인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b><b>어떻게 감히 당신들이 저더러 교회를 배신하라 명령하신단 말입니까</b><b>? </b><b>보통사람들 사이에서도 배신은 나쁜 것으로 여겨집니다</b><b>. </b><b>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느님을 배신해야겠습니까</b><b>?”</b>

 

증언들에 따르면,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두 달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고문을 받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기도하기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통 중에도 하느님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부탁받으면 기쁨에 가득 차 기꺼이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하루는 포장이 최경환의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한 흉포한 강도범과 그를 서로 가까이 묶어 놓았습니다. 그 죄수는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비웃으며 그의 상처를 발로 찼습니다. 그러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말 한마디 없이 폭행을 견뎠고, 그 죄수는 결국 그의 인내에 압도되어 폭행을 멈추고서는 큰 소리로 감탄했습니다.

<b>“</b><b>만일 누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면</b><b>, </b><b>그들은 이 사람과 같을 것이다</b><b>.”</b>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한 형졸이 자신에게 앵베르 주교님의 주교관과 제의를 입히려 하자, 그것을 물리쳤는데, 그 형졸은 그것들을 한 죄수에게 입혔습니다. 그것을 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공손히 엎드려 십자가에 절하였다고 합니다.

 

9월 11일, 최경환은 다시 법정에 불려 나가 치도곤 25대를 맞았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고문이었고, 마지막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칼 아래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만 옥으로 돌아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b>“</b><b>예수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b><b>.”</b>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b>신앙인들의 순교영성</b>

<b>첫째</b><b>, </b><b>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신심</b>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많이 배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묵상과 신심서적의 공부는 그의 마음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했으며, 그는 교회의 심오한 진리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하면서도 집에서도 밭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였습니다. 그는 결코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에 관련 없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b>자녀를 돌보는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b><b>. </b><b>하느님을 향한 삶의 자세를 어떻게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까요</b><b>?</b>

 

<b>둘째</b><b>, </b><b>늘 순교하기를 열망하심</b><b>.</b>

성인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족들에게 순교를 각오하도록 당부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성물은 외교인들의 손에 더럽히지 않도록 땅에 묻고, 교리 서적들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b>우리 가정은 성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b><b>? </b><b>우리 가정에 비치된 교리책과 영성서적은 무엇이 있을까요</b><b>? </b><b>아버지들이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b><b>? </b><b>어머니들은 무엇을 귀하게 여겨야 할까요</b><b>?</b>

 

<b>셋째</b><b>, </b><b>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삶</b>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아버지를 증언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b><b>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b><b>, </b><b>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b><b>, </b><b>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b><b>.”</b>

 

최경환 성인은 물건을 살 때, 장터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질이 떨어지거나 시들어 버린 물건을 마지막에 모두 사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하고 장사 솜씨가 없는 상인의 생계를 돕고, 스스로는 좋은 것을 탐하는 물욕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인은 이를 두 가지 신앙적 실천으로 여겼습니다.

 

<b>첫째</b><b>, </b><b>물건이 팔리지 않아 낙담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가난한 장사꾼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b><b>, </b><b>그들의 생계를 남몰래 도와주려는 따뜻한 배려를 통한 이웃 사랑의 실천</b><b>. </b>

 

<b>둘째</b><b>, </b><b>신앙 서적인 </b><b>‘</b><b>칠극</b><b>(</b><b>七克</b><b>)’</b><b>의 가르침에 따라 </b><b>‘</b><b>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탐욕</b><b>’</b><b>을 누르고 가장 보잘것없는 것을 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낮추는 고행을 실천한 자기 부정과 극기</b><b>(</b><b>克己</b><b>).</b>

 

‘칠극’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칠죄종, 七罪宗)를 일곱 가지 덕행으로써 극복(克己)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함께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 전래되어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한국 천주교회 초기 신앙 형성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b>복오</b><b>(</b><b>伏傲</b><b>, </b><b>교만</b><b>)</b>: 사나운 사자 같은 교만을 겸손으로 누름

<b>평투</b><b>(</b><b>平妬</b><b>, </b><b>질투</b><b>)</b>: 남의 복을 시기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가라앉힘

<b>해탐</b><b>(</b><b>解貪</b><b>, </b><b>탐욕</b><b>)</b>: 재물을 탐하는 마음을 베풂으로 풀어냄

<b>삭노</b><b>(</b><b>熄怒</b><b>, </b><b>분노</b><b>)</b>: 불같이 일어나는 화를 인내로 삭임

<b>세탄</b><b>(</b><b>塞饕</b><b>, </b><b>식탐</b><b>)</b>: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는 욕망을 절제로 막음

<b>방음</b><b>(</b><b>坊淫</b><b>, </b><b>음란</b><b>)</b>: 육체의 음란한 불길을 정결함으로 방어함

<b>책태</b><b>(</b><b>策怠</b><b>, </b><b>나태</b><b>)</b>: 게으르고 무기력한 마음을 근면함으로 채찍질함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에 숨어 살며 물리적으로 매우 굶주리고 피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칠극’을 매일 읽고 필사하며 철저한 자기반성과 도덕적 순결함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최경환 성인은 장터에서 마지막까지 안 팔리는 시든 나물을 사 오며 ‘해탐(탐욕을 누름)’과 ‘평투(이웃을 사랑함)’를 실천했고, 포도청의 잔혹한 주리틀기 속에서도 비명 대신 기도를 바치며 ‘삭노(분노를 식힘)’와 ‘인내’를 완성했습니다. ‘칠극’은 조선 신자들이 모진 고문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을 수 있었던 단단한 영적 뼈대가 되어주었습니다.

 

수리산에 머물 당시, 성인은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담배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수리산에서 재배한 담배나 농산물을 팔기 위해 인근 안양이나 과천의 장터로 향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물건을 다 팔고 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장터를 서성였습니다.시장이 끝날 무렵이 되면, 장터 한구석에는 물건의 질이 나쁘거나 시들어 버려 아무도 사지 않는 나물이나 채소를 앞에 두고 망연자실해 있는 가난한 노인이나 장사꾼들이 있었습니다. 성인은 그들에게 다가가 남은 물건이 얼마인지 묻고는, 남아 있는 볼품없는 물건들을 통째로 다 사들였습니다.

 

성인의 아내인 복녀 이성례 마리아 역시 남편 못지않게 신앙이 깊은 여성이었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남편이 가져온 시들고 상한 나물과 채소를 보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영감님이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담아 오셨구나’ 하며 기쁜 마음으로 그 나물들을 다듬고 정성껏 요리해 가족들과 교우촌 신자들에게 대접했습니다. 부부가 한마음으로 ‘보잘것없는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는 복음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갔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에 늘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성인 본인의 가정도 결코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먼저 생각했던 평신도 지도자(회장)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b>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에 대해서 말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b><b>? </b><b>일상을 살아가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삶</b><b>. </b><b>하느님의 부르심에 오롯하게 응답하도록 하는 삶</b><b>. </b><b>신앙을 삶으로 드러내며 모범을 보이는 삶</b><b>. </b><b>그 삶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순교영성이 아닐까요</b><b>?</b>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08 Sep 2026 09:40: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형제가 죄를 지으면,  가해 연중 제 23주일]]></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30]]></link>
			<description><![CDATA[형제가 죄를 지으면
가해 연중 제 23주일
1. 말씀읽기: 마태오 18,15-20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형제가 죄를 지으면 
 친구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내고 잘못을 깨우칠 때까지 외면하면 참 편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친구를 감싸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용서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쉬운 일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기도하며 용서할 힘을 청해 봅시다.

질문 1: 예수님께서는 친구가 나에게 잘못하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① 그가 반성할 때까지 외면하고, 소외시켜라.
②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③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한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제가 잘못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화해를 당부하십니다.
질문 2: 친구랑 싸웠습니다. 그 싸움의 원인은 나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나 또한 고집이 있어서 싸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화해를 하십니까?
① 내가 먼저 화해하자고 손을 내민다.
② 친구가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 때까지 그냥 참는다.
③ 화해하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④ 기타(                                                                  ) 

질문 3: 친구랑 싸운 후에는 어떤 방식으로 화해를 하십니까? 또 화해가 안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질문 4: 친구와 언제나 마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비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친구가 “미안하다.”라고 말하면 기쁘게 받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고, 그런 모습의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늘 잘못을 하고, 또 내 옆에는 늘 잘못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 줄 것은 받아준다면 더 많은 친구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 오게 됩니다.

질문 5: 자존감이 높은 하느님 자녀들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 이를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하느님 자녀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①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나는 완벽하다’가 아니라, ‘실수하더라도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단단한 내면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② 자존감이 높은 하느님 자녀들은 변명을 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 실수했어’, ‘내 잘못이야’라고 담백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③ 자존감이 높은 하느님 자녀들은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고 미안한 마음을 말로 명확하게 표현하며 실수를 통해서 배웁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제가 다시 치울게요’,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처럼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을 먼저 제시합니다.
④ 자존감이 높은 하느님 자녀들은 잘못을 심각한 실패나 낙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자 경험으로 받아들입니다. 과도하게 자책하지 않고, 실수를 했더라도 스스로를 ‘나는 나쁜 아이야’라며 비하하지 않으며 사과하고 용서를 청하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성장시키려고 합니다.

질문 6: 자존감이 높은 친구와 자존심이 강한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보이는 행동적 특징과 그에 따른 장단점을 비교해 봅시다.

구분
자존감이 높은 친구
자존심이 강한 친구 
핵심 마음가짐
실수해도 내 가치는 변하지 않아.
잘못을 인정하면 내가 지는거야.
잘못했을 때 행동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함
변명을 하거나 
남 탓을 하며 회피함
장점
① 빠른 관계 회복: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므로 갈등이 오래가지 않음② 지속적인 성장:실수를 배움의 기회로 삼아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함.③ 정서적 안정:과도한 죄책감이나 불안에 시달리지 않음.
① 강한 성취욕:타인에게 뒤처지거나 얕보이지 않으려는 에너지가 강함.② 치밀한 준비성:실수를 지적받는 상황 자체를 극도로 싫어해 애초에 완벽을 기하려 함.
단점 
(보완할 점)
① 낙천적인 태도:간혹 스스로를 너무 쉽게 용서하여 주변에서 ‘반성이 부족한가?’라고 오해할 수 있음.
① 인간관계 고립:사과를 어려워하여 주변 친구들과 갈등이 깊어지기 쉽다.② 높은 스트레스: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과 내면의 불안감이 큼.


질문 7: 기동이랑 싸운 동기는 나에게 기동이 흉을 봤습니다. 기동이가 전에 한 말들을 다 말해주며, 나와 기동이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동기에게 말해야 할까요?
① 기동이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동기의 말만 듣고 기동이를 함께 욕하고 기동이랑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겠다고 말해준다.
② 동기랑 기동이 욕을 실컷 하고, 기동이에게 가서는 ‘동기가 너 욕하더라.’라고 말해준다.
③ 동기의 마음 상한 말을 다 들어주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해 주며, 기동이와 동기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한다.

질문 8: 서로 화해하지 않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친구의 불목을 누가 가장 좋아할까요? 그리고 누가 가장 마음 아파하실까요?
① 두 친구의 불목을 좋아 하는 대상은?                                  
② 두 친구의 불목을 가슴 아파 하시는 분은?                             

 친구들과 다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 다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툰 다음에 화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구들이 서로 불편하게 지내고 있으면 그 친구들을 화해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중재해 주는 삶. 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시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삶입니다.

질문 9: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징벌이 아닌 화해와 회복입니다. 잘못한 친구를 궁지로 몰아넣어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한 친구를 설득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② 예수님께서는 갈등이 생겼을 때 처음부터 대중 앞에 폭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단둘이 만나 조용히 권면할 때, 친구의 자존심과 인격이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③ 권고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이유는 갈등의 확산을 막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에서는 판결할 때,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하도록 했습니다.(신명19,15)
④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맞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하며, 잘못을 지적당하는 친구가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질문 1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자녀들이 서로 잘못을 뉘우치고 화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개인적인 권고와 증인을 동반한 권고마저 거부한 완고한 죄인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최종적인 조치는 화해를 포기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려는 목적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사랑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② 당시 유다 사회에서 ‘다른 민족 사람(이방인)’과 ‘세리’는 하느님의 계약 밖에 있는 사람, 혹은 죄인으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순결성과 교회의 권위마저 무시하는 사람은 스스로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로 보지 말고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며 처음부터 다시 사랑과 인내로 전교하고 회개시켜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누룩 하나가 온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듯, 죄를 고집하는 한 사람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일시적으로 영적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느님 자녀들도 그들을 ‘처음부터 다시 복음을 전하고 구원해야 할 선교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신앙의 형제로 인정하기는 어렵더라도, 아예 저주하고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처음부터 다시 사랑과 인내로 전교하고 회개시켜야 할 대상’으로 대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야 합니다.

질문 11: 기동이가 동기를 괴롭혔습니다. 잘못은 기동이에게 있었지만 동기는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 화해를 할 수 있도록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나는 기동이에게 조심스럽고 친밀하게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기동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끔은 정말 “저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멸망을 원치 않으십니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회개를 위하여 인내와 친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내 주변의 친구들도 나에게 그렇게 다가올 것입니다.

질문 12: 예수님께서는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①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엄격하게 다스리거나 제재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결정을 인정하시고, 공동체가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의 문을 열어주면, 하느님께서도 하늘에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②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땅에서 내리는 결정은 하늘에서도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해 주시고,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고해성사를 볼 때, 용서해 주시겠다는 명확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통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화해와 친교의 삶을 교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④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개인적인 감정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교회가 지닌 지혜와 질서 안에서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⑤ 내가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면 그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나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질문 13: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이 확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② 함께 기도할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당연히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심을, 우리 공동체와 함께 계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나의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③ 다툰 사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온갖 고통을 당했는데 그런 사람들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할까요?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4. 실천사항 정하기
내가 용서받고 있음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05 Sep 2026 06:29: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item>
			<title><![CDATA[法國敎士保護指令&lt;프랑스 선교사 보호령&gt;,1894년]]></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9]]></link>
			<description><![CDATA[<b>法國敎士保護指令</b><b>&lt;</b><b>프랑스 선교사 보호령</b><b>&gt;</b>

 

□<b>이 문서는 </b><b>「</b><b>法國敎士保護指令</b><b>」</b><b>으로</b><b>, </b><b>개국 </b><b>503</b><b>년</b><b>(1894) 7</b><b>월 </b><b>10</b><b>일</b><b>, </b><b>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전라관찰사에게 보낸 프랑스 선교사 </b><b>2</b><b>명</b><b>(</b><b>비에모</b><b>, </b><b>보드네</b><b>)</b><b>의 보호</b><b>·</b><b>호송 명령서이다</b>

<b>이 문서는 단순한 </b><b>“</b><b>선교사 보호</b><b>” </b><b>문서라기보다</b><b>, 1894</b><b>년 </b><b>7</b><b>월 동학농민전쟁으로 </b><b>『</b><b>전주지방</b><b>』</b> <b>치안이 불안해진 상황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내지 활동을 중단시키고 해상으로 철수시키는 조선 정부의 외교적</b><b>·</b><b>치안적 조치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b><b>.</b>

 

<b>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同文移至 全羅道觀察使 當台開坼</b>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동 공문이 도착하면 전라도 관찰사는 마땅히 열어보라

<b>開國五百三年七月初十日</b>

개국 503년(1894년) 7월 초10일.

 

<b>關</b><b>(</b><b>관 </b><b>: </b><b>공문내용</b><b>)</b>

<b>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爲相考事照得</b>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살펴 처리할 일로 삼아 밝히건대,

-爲相考事(위상고사 ): 살펴 처리할 일로 삼아

-照得(조득) : 살펴보건대, 알아보건대

 

<b>現聞法國敎師一人在忠淸道地方遭難致命等情</b>

현재 듣건대, 프랑스인 선교사 한 사람이 충청도 지방에서 변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등의 사정이 있다.

-遭難(조난) : 난을 당하다, 변고를 당하다

-致命(치명) : 목숨을 잃다, 사망하다

-等情(등정) : 그러한 사정

 

<b>業由該公館迭次來詰</b>

이미 이 일로 해당 공관에서 여러 차례 와서 항의하고 추궁하였다.

-迭次(누차) : 거듭하여, 여러 차례

-來詰(내힐) : 와서 따져 묻다, 항의하다, 추궁하다

<b>歷經關飭該道觀察使査拿嚴懲</b>

이에 이미 여러 차례 관문을 보내 해당 도의 관찰사에게 조사하여 범인을 체포하고 엄중히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

-關飭(관칙) : 공문을 보내 지시·독촉하다

-査拿(조나) : 조사하여 체포하다

-嚴懲(엄징) : 엄중히 처벌하다

 

<b>另由本衙門啓派主事一員前往該營會同妥辦在案</b>

별도로 본 아문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주사(主事) 한 사람을 파견하여 해당 영(營)에 가서 함께 적절히 처리하도록 이미 조치한 바 있다.

-另由(령유) : 별도로 ~을 통하여

-啓派(계파) : 임금에게 아뢰어 파견하다

-主事一員(주사일원): 주사 한 사람

-該營(해영) : 해당 영(營), 여기서는 충청도관찰사가 있는 감영

-會同(회동) : 함께, 공동으로

-妥辦(타협) : 적절하게 처리하다

-在案(재안) : 이미 그렇게 조치한 바 있다

 

<b>査法國人遊歷內地 寔繁有徒 在在滋鬧 難保無虞</b>

살펴보건대 프랑스인들이 내지를 돌아다니는 일이 실로 매우 많고, 곳곳에서 소란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고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遊歷(유력) : 돌아다니다

-寔繁(식번) : 참으로 많다. 실로 매우 많다.

 

<b>貴省內所在法敎師兩人均應妥護送還以示友睦之誼 寔合允當</b>

귀 도 안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 두 사람(보드네, 비에모)도 모두 마땅히 잘 보호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우호와 친목의 뜻을 나타내는 일이므로, 실로 온당하다.

-貴省(귀성) : 귀 도(道), 여기서는 전라도

-所在法敎師兩人(소재법교사양인) : 현재 전라도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 두 사람

-妥護(타호) : 잘 보호하다

-送還: 돌려보내다

-友睦之誼(우목지의) : 우호·친목의 정

-允當(윤당) : 매우 온당하다. 타당하다

 

<b>除商准該公使派兵艦前往相送海面搭載回仁外</b>

이미 해당 공사와 협의하여, 그 공사가 군함을 보내 해상까지 와서 이들을 태워 인천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허락한 외에,

-商准(상준) : 협의하여 허락하다

-派兵艦파병함) : 군함을 파견하다

-前往相送海面(전왕상송해면) : 맞이하여 호송할 해상으로 보내다

-搭載回仁(탑재회인) : 배에 태워 인천(仁川)으로 돌아가게 하다

 

<b>玆庸關飭 仰貴觀察使査照</b>

이에 관문을 보내 지시하니, 귀 관찰사는 이를 살펴보도록 하라.

-査照(사조) : 조사하고 밝히다

 

<b>將該法人二名妥爲保護送搭該兵艦</b>

장차 해당 프랑스인 두 명을 잘 보호하여 그 군함에 태워 보내도록 하라.

 

<b>免致遭難 宜當者 合行移關 請照驗施行 須至關者 右關</b>

변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에 관문을 보내니 살펴 확인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이상 관문을 보낸다.

 

<b>全羅道觀察使</b>

전라도관찰사

<b>開國五百三年七月初十日</b>

개국5백3년(1894) 7월 10일

<b>統理衙門</b>

통리아문

 

----------------------------------------------------------

<b>【</b><b>지시공문의 전체내용</b><b>】</b>

별도로 본 아문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주사 한 사람을 파견하여 해당 영에 가서 함께 적절히 처리하도록 이미 조치한 바 있다.

살펴보건대 프랑스인들이 내지를 돌아다니는 일이 실로 매우 많고 곳곳에서 소란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아무런 사고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귀 도 안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 두<b>(</b><b>비에모</b><b>,</b><b>보드네</b>) 사람도 모두 잘 보호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히 우호와 친목의 뜻을 나타내는 일이므로 실로 온당하다.

이미 해당 프랑스 공사와 협의하여 그 공사가 군함을 파견하여 해상에서 이들을 맞아 태우고 인천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허락한 바 있으므로, 이에 관문을 보내 지시한다.

바라건대 귀 관찰사는 이를 살펴 해당 프랑스인 두 사람을 잘 보호하여 그 군함에 태워 보내고, 변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이 마땅하므로 이에 관문을 보내니, 살펴 확인하고 전라도관찰사는 시행하도록 하라.

<b>&lt;</b><b>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b><b>&gt;</b>

 

 

<b>&lt;</b><b>번역</b><b>/</b><b>정리 </b><b>: </b><b>서천향토문화연구회장 박 수 환</b><b>&gt;</b>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Mon, 24 Aug 2026 12:48: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자세, 가해 연중 제 22주일, 수난과 죽음과 부활 예고]]></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8]]></link>
			<description><![CDATA[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자세
가해 연중 제 22주일
1. 말씀읽기: 마태 16,21-27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마르 8,31-33 ; 루카 9,22-22)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마르 8,34 ; 루카 9,23-27)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자 베드로 사도위에 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제 제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믿음이 생겨났다고 생각하시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질문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제자들에게 ‘이제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시며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② 예루살렘으로 휴가 가자~ ^*^
질문 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②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시지만, 돌아가신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질문 3: 예수님의 수난의 장소는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왜 예루살렘입니까?
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겠다고 선택하신 거룩한 도성이자,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의 수난과 영광을 예언한 중심지입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입니다(참조:루카13,33).
② 구약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이나 소를 바쳐 죄를 씻는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히 지리적인 도시를 넘어,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로 완전하게 성취되는(참조:히브 9,11-12) 구원 역사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③ 당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파스카 축제 때는 온 세상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숨겨진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모든 이에게 완벽하게 드러난 구원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에게 들려온 것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②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예고. ^*^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부활은 귀에 들려오지 않고, 오로지 수난과 죽음만 들려왔습니다.

질문 5: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시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며 펄쩍 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① 베드로 사도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사랑하는 예수님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자신이 막겠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을 위하는 척’하는 접대성 멘트였습니다. 설마~^*^ 

질문 6: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잘 알고 계셨고, 베드로 사도의 인간적인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에 유혹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인간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제안이 얼마나 큰 유혹이었겠습니까?
② 베드로 사도가 진짜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이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마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을 때의 고통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을 앞두고 계셨기에 베드로 사도의 인간적 사랑은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인간적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셉 성인이 성모님을 받아들일 때도 그랬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질문 7: 유혹이란 무엇일까요?
① 처음의 마음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들
②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게 하는 것들
③ 양심에서 들려오는 올바른 소리에 귀를 막게 하는 것들
④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들을 합리화시키며 어기게 하는 것들

질문 8: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① 하나는 예수님처럼 단호하게 대처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의 아들 요셉처럼 냅다 튀는 것입니다. 포티파르 아내의 유혹에 요셉은 도망쳤습니다.
② 마치 유혹이 없는 것처럼, 이 유혹을 이겨내면 성숙해지는 것처럼 이겨내는 것입니다. ^*^

 인간은 유혹을 이겨내기 힘듭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단호하게 유혹을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질문 9: 베드로 사도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베드로 사도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① “예수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사탄은 이만 물러갑니다.” 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떠난다. ^*^
② “아!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구나. 내가 예수님의 사명을 잊고 있었구나!”를 깨닫고,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겠노라고 다짐한다.

 베드로 사도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예수님께 꾸지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베드로 사도의 사랑 안에서 나온 고백이었기에 마음이 더더욱 아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에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내 것을 버려야 함을 꼭 명심합시다.

질문 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그 길과 반대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움켜잡고,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②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나 박해까지도 감수해야 하고, 신앙에 반대된다면 자신의 이익마저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필요합니다.
③ 십자가는 짊어지기 싫은 것, 부담스러운 것, 짐처럼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하는 것, 옳은 것, 양심에 찔리는 것들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질문 11: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① 베드로 사도는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대하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② 베드로 사도의 기대 속에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③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메시아십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④ 베드로 사도는 박해자들 때문에 생기는 모든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선택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포기입니다. 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참조: 필리피2,6-8)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버린 만큼 채울 공간이 생깁니다.

질문 12: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① 이익이나 기회 앞에서 ‘저 예수님 안 믿어요.’라고 말하며 손해를 보지 않고, 기회를 붙잡았다 할지라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질문 13: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욕심을 부려야 합니까? 자기 목숨을 살리는 욕심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께 사랑받고자 하는 욕심
② 남들보다 더 기도하고자 하는 욕심
③ 남들보다 더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자 하는 욕심
④ 남들보다 더 의로운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욕심

질문 14: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① 내 생명과 하느님 나라
② 행복한 가정과 부모님의 건강
③ 좋은 성적과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④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질문 15: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상선벌악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상을 받게 될까요? 우리 가족은 어떤 상을 받게 될까요? 가족과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상과 벌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넌 안돼!”라는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주님께서 ‘너는 훌륭한 믿음을 지녔고, 의롭게 살았으며, 생각과 말과 행위로 선행을 실천했으니, 나는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구나.’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아갑시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아쉽겠습니까? 
                                                                        
                                                                        

4. 실천사항 정하기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 실천할 것과 버릴 것들을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22 Aug 2026 03:40: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item>
			<title><![CDATA[菊圃先生集卷之六 晉山姜樸子淳甫著 / 詩,남포현감 목시경 만사]]></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7]]></link>
			<description><![CDATA[<b>菊圃先生集卷之六 晉山姜樸子淳甫著</b> <b>/ </b><b>詩</b>

 

<b>挽睦藍浦</b> <b>남포현감 목시경 만사</b>

<b>국포 강박</b><b>(</b><b>姜樸</b><b>1690</b><b>∼</b><b>1742)</b>

 

西門楊柳正依依(서문양유정의의):서문(西門)의 버드나무가 한창 하들 한들거리고

猶記斜陽立馬時(유기사양입마시):오직 해 질 무렵 말 세워 서 있던 때가 기억나네.

數語交衢如昨日(수어교구여작일) :큰 길거리에서 몇 마디 나누었던 일 어제와 같거늘

一官窮海了男兒(일관궁해요남아):변방 바닷가 한 관리의 남자로 생애를 마쳤구나.

藍田玉死餘苗在(남전옥사여묘재):훌륭한 인재는 세상을 떠났지만 자손들은 남아있고

淸漢旐飛小帆遅(청한기비소범지):맑은 한강 기(旐)나부끼고, 작은 배 더디게 나아가네.

忍拂床頭曾惠硯(인불상두증혜연):침상머리 일찍 그대의 벼루 어루만지며 떨칠 수 없어

退毫濡淚寫哀詞(퇴모유누사애사):붓을 물려놓았다가 눈물에 적시며 슬픈 글을 쓰노라

 

旐(기) : 상여 깃발

遅(지) : 더디다, 지체하다, 遲의 俗字

忍拂(인불) : 떨침을 참다. 털어냄을 참다.

濡(유) : 적시다. 젖다

衢(구) : 네거리

藍田玉(남전옥) : 훌륭한 인물 표현

 

<b>【</b><b>강박</b><b>(</b><b>姜樸</b><b>1690</b><b>∼</b><b>1742)</b><b>】</b>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순(子淳), 호는 혜포(惠圃) 또는 국포(菊圃)이며, 1690년(숙종 16)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강석훈(姜碩勛), 어머니는 병조참의와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낸 이서우(李瑞雨)의 딸이다. 강석번(姜碩蕃)에게 입양되었다. 강박은 1715년(숙종 41) 3월 절일제(節日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5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윤증(尹拯)을 옹호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한 편지를 보낸 일로 인해 탄핵을 받고, 평안남도 안주(安州)에 유배되었다가 1719년(숙종 45) 8월에 해배(解配)되었다. 1722년(경종 2) 예조좌랑, 병조좌랑, 영양현감 등에 제수되었다. 1724년(영조 원년) 부수찬 ·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사직 상소를 올리며 나학천(羅學川), 김시빈(金始鑌) 등을 탄핵하였다. 1726년에는 오광운(吳光運) 등과 함께 당시 소론에 대한 엄단(嚴斷)을 요구하였던 임징하(任徵夏)를 비판하였다.

1728년 친외할아버지 이서우의 첩자(妾子) 이순관(李順觀)이 이인좌의 난에 연관되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진주목사 · 홍주목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북 계열의 후손으로서 남인 중에서도 청남(淸南)에 속하여 그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며 노론과 대립하였다. 강박은 시문으로 뛰어난 석북 신광수(신광수1712〜1755)와 학행과 시문으로 잘 알려진 이덕주(李德冑)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본시는 목시경(睦時敬1694〜1739)이 1739년 남포현감으로 재직 시 임소에서 사망하였을 때 운구를 떠나보내며 지은 만시이다.

 

<b>【</b><b>목시경</b><b>(</b><b>睦時敬</b><b>1694</b><b>〜</b><b>1739)</b><b>】</b>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헌(士憲), 호는 이계(伊溪).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목창명(睦昌明)이고, 아버지는 진사 목중광(睦重光)이며, 어머니는 부사 김봉지(金鳳至)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생원이 되고, 1727년(영조 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6년(영조 12) 승문원정자·성균관전적·예조좌랑을 거쳐, 예조정랑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고 예조좌랑으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는 정랑의 자격으로서 정자 이섭원(李燮元), 교리 윤급(尹級) 등과 함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뽑혔다.

부인은 연안이씨 이조참판을 역임한 이만원(李萬元)의 소녀이며, 성균 진사를 역임한 이지방(李之昉)의 딸이다. 1727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으로 1737년 중시에 부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조정랑을 거쳐 남포현감으로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다가 1739년 임지에서 사망했다. 묘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 산4번지에 있다.

 

 

 

 

 

 

 

<b>&lt;</b><b>菊圃先生集卷之六</b><b>/</b><b>詩</b><b>&gt;</b>

 

 

 

 

 

 

<b>&lt;</b><b>연안이씨 </b><b>李之昉 </b><b>가족관계 </b><b>萬家譜</b><b>&gt;</b>

- 이지방의 사위는 睦時敬이며, <b>尹持忠</b><b>(</b><b>바오로</b><b>)</b><b>는 </b><b>1791</b><b>년 진산사건의 천주교 박해 최초의 순교자로 이지방의 손녀사위이다</b><b>.</b> 또한 이지방의 딸은 석북 申光洙 장인 尹斗緖 손자 윤종(尹悰)의 부인으로, 윤종(尹悰)은 이시방 사위로 윤종과 목시경은 동서지간이다.

- 윤지충(윤지충)은 해남윤씨 윤두서(윤두서)의 손자, 또한 윤종(윤종)은 윤지충(윤지충 바오로)의 큰아버지이다. 또한 남포현감 목시경(목시경)은 윤지충의 처 고모부이다.

-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약전에서 밝힌 윤지충(윤지충 바오로)의 피신지는 광천(광천)이다. 족보에서 알 수 있듯이 혈연관계가 깊다 윤지충(윤지충)의 장인은 연안이씨 이종연(이종연)이며, 거듭 출계된 이관기(이관기)는 중주(충주)에서 살았다 이관기의 선대 조부 형제는 이세연(李世延), 이혜연(李蕙延). 이제연(李濟延), 이기연(李箕延), 이최연(李最延)이다. <b>이기연은 청주에서 살았다</b><b>.</b> 일찍이 <b>천주교인으로 </b><b>1791</b><b>년에 천주교서적을 지니고 관청에 자수를 하고 관청 뜰에서 불태우고 허물을 고치겠다는 공초를 바치고 풀려났다</b><b>. </b><b>달레의 </b><b>「</b><b>조선천주교교회사</b><b>」</b><b>에는 이기연은 배교하였다가 다시 신앙을 증거 하여 신유</b><b>1801</b><b>년 체포되고 고문을 못 이겨 </b><b>63</b><b>세의 고령으로 사형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b><b>. </b>이기연(李箕延)은 부친 제사 때만 되면 집을 나가니, 큰형 이세연(李世延)이 통곡했다는 「송담유록」에도 기록하고 있다.

- 이기연(李箕延)의 큰형 이세연 아들 이문덕(李聞德)은 이관기(李寬基),이완기(李完基),이헌기(李憲基)를 두었다. <b>이관기는 가까운 집안 </b><b>1791</b><b>년에 순교한 윤지충</b><b>(</b><b>尹持忠</b><b>)</b><b>의 처남 이행덕</b><b>(</b><b>李行德</b><b>)</b><b>에게 양자로 출계되었다</b><b>. </b>또한 <b>이관기</b><b>(</b><b>李寬基</b><b>)</b><b>도 천주교인으로 </b><b>1801</b><b>년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b> 국문을 받았으나 정범(正犯)으로 밝혀지지 않아 이에 참작되어 <b>장흥부</b><b>(</b><b>長興府</b><b>)</b><b>에 정배</b>하였다. 그 후 아들 이당구(李堂九))는 격쟁하여 부친을 풀어 줄 것을 청원하여 순조14년(1814) 9월30일 풀려났다.

 

- 따라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가 1791년 진산사건으로 광천(廣川)으로 피신한 것을 보면 광천지역에 살고 있던 연안이씨 이종연(李宗延)의 집안에 피신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윤지충이 피신한 마을은 어느 곳이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까? 아직 알 수 없다.

 

<b>연안이씨 이관기</b><b>(</b><b>李寬基</b><b>)</b><b>가족관계</b><b>(</b><b>萬家譜</b><b>)</b>

<b>延安李氏 </b><b>이기연</b><b>(</b><b>李箕延</b><b>,</b><b>)</b><b>의 </b><b>從孫 </b><b>이관기</b><b>(</b><b>李寬基</b><b>)---&gt;</b><b>出系 </b><b>이행덕</b><b>(</b><b>李行德</b><b>)</b>]]></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22 Aug 2026 03:08: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남포현 천주교도 학대 사건 프랑스 영사관 외교문서 자료,박의경(朴義敬)과 우성중(禹聖重)을 체포하여 엄히 징계하도록 지시하는 관문]]></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6]]></link>
			<description><![CDATA[<b>□ </b><b>이 문서는 프랑스 공사관의 고발</b><b>·</b><b>통보를 근거로 지방관이 박의경</b><b>(</b><b>朴義敬</b><b>)</b><b>과 우성중</b><b>(</b><b>禹聖重</b><b>)</b><b>을 체포하여 엄히 징계하도록 지시하는 관문</b><b>(</b><b>關文</b><b>)</b><b>이다</b><b>.</b>

 

<b>發信 </b><b>: </b><b>忠淸監營</b><b>&lt;</b>발신 : 충청감영&gt;

<b>受信 </b><b>: </b><b>藍浦縣</b><b>&lt;</b>수신 : 남포현&gt;

<b>辛卯五月二十四日</b><b>&lt;</b>1891년 05월 24일 (음)&gt;

 

<b>關藍浦</b>

남포현감에 공문을 보냄

 

<b>相考事</b><b>。</b>

“살펴보건대”

 

<b>去月二十二日</b><b>, </b><b>接准法國公館來椷內開云云</b><b>, </b><b>等因</b><b>。</b>

지난달 22일에 프랑스 공관에서 보내온 편지를 접수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니

사유는 다음과 같다

-去月(거월) : 지난달

-接准(접준) : 접수하여 받음

-法國公館(법국공관) : 프랑스 공관(공사관)

-來椷(래감) : 보내온 편지

-等因(등인) : 위와 같은 사유로

 

<b>據此査</b><b>, </b><b>該朴義敬</b><b>·</b><b>禹聖重兩漢</b><b>, </b><b>無故惹鬧</b><b>, </b><b>致玆事端</b><b>,</b>

이에 의거하여 조사해 보니, 해당 박의경(<b>朴義敬</b><b>)</b>과 우성중(<b>禹聖重</b><b>)</b>두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소란을 일으켜 이와 같은 사건을 초래하였고,

-據此査(거차조) : 이에 의거하여 조사해 보니

-該(해) : 해당

-兩漢(양한) : 두 사내, 두 사람

-無故(무고) : 까닭 없이

-惹鬧(야료) : 소란을 일으키다, 시비를 일으키다

-致玆事端(치자사단) : 이 사건을 야기하다

 

<b>究厥所把</b><b>, </b><b>確係土棍</b><b>,</b>

그 실상을 따져 보니, 확실히 토곤(土棍:토착세력)와 같은 불량배에 해당하므로,

-究厥所把(구궐소파) : 그들이 저지른 일의 실상을 끝까지 조사하다

-確係(확계) : 확실히 ~에 해당하다

-土棍(토곤) : 지방의 토착 불량배. 무뢰배

 

<b>玆特關飭</b><b>, </b><b>到卽該朴</b><b>·</b><b>禹兩漢</b><b>, </b><b>發校捉囚</b><b>, </b><b>別盤嚴繩</b><b>,</b>

이에 특별히 관문으로 명하여, 도착하는 즉시 해당 박씨와 우씨 두 사람을 포교(捕校)를 보내 체포하여 가두고, 따로 엄히 조사하고 엄중하게 다스려,

-玆特關飭(자특관칙) : 이에 특별히 관문을 보내 명령함

-到卽(도즉) : 문서가 도착하는 즉시

-發校(발교) : 포교·아전 등을 파견하다

-捉囚(착인) : 체포하여 가두다

-別盤(별반) : 별도로 자세히 조사하다

-嚴繩(엄승) : 엄히 다스리다, 엄중히 징벌함

 

<b>俾杜來弊</b><b>, </b><b>懲治形止</b><b>, </b><b>旋卽馳報宜當者</b><b>。</b>

앞으로 이와 같은 폐단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징계·처벌한 경과를 즉시 신속하게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俾杜來弊(비사래폐) : 장래의 폐단을 막게 하다 &lt;忠淸道關草:충청도관초&gt;

-懲治(징치) : 징계하고 처벌하다

-形止(형지) : 사건의 처리 경과·결과

-旋卽(선즉) : 곧바로

-馳報(치보) : 신속히 보고하다

-宜當(의당) : 마땅하다

 

 

 

 

 

 

 

 

 

 

<b>&lt;</b><b>번역</b><b>/</b><b>정리 </b><b>: </b><b>박수환</b><b>&gt;</b>

 

 

<b>【</b><b>남포현 천주교도 학대 사건 프랑스 영사관 외교문서 자료</b><b>】</b>

【38】 충청도 남포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대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처리

문서번호 정치국 제209호

발신일 1891년 7월 21일 ( 1891년 07월 21일 )

수신자 리보, 등등

 

【38】 충청도 남포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대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처리

서울(조선) 주재 프랑스 영사관

정치국 제209호

서울,

1891년 7월 21일

 

<b>주제</b><b>：</b><b>남포 지역의 종교 관련 소요</b>

 

첨부 1

 

장관님,

본인은 지난 5월, 충청도 남포(Nampoh)[藍浦] 지역에서 천주교도들과 비신자들 간에 충돌이 일어났고 그 후 천주교도들이 매우 학대를 받고 있으며 마을에서 쫓겨날 위협을 받고 있다고 각하께 보고한 바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고 원주민 사이의 분쟁에 개입할 필요는 없었지만 선교사들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이 지역 천주교도들을 고려해볼 때 본인은 과거 불미스러운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재량에 맞게 사안을 해결할 수 있도록 본인은 이 사건을 공식화하지 않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이 본인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비공식적으로 사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민종묵 각하는 관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천주교도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하지 않으며 특히 선교사들을 받아들인 집과 이웃으로 지내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한편 본인은 이런 커다란 반목은 조선인들이 많이 찾는 무당들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당들은 천주교도들이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약을 먹는다고 말하고 그 약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독판에게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집으로 친구와 여행객을 맞을 권리가 있고 이런 모임이 이웃과 공공질서에 해가 된다고 여길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모임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포교활동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독판과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각하께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독판은 남포 현감이 주동자들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천주교도들이 항상 조용히 참지는 않으며 선교사들의 정신적인 보호를 이용하여 이웃을 난처하게 만든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독판은 자신이 처리하겠다면서 본인에게 사건 내용에 대한 개요를 작성해달라고 했습니다.

면담 며칠 후 민종묵 각하는 남포 현감에게 보내는 공문을 본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공문에서 독판은 동요를 막지 못한 것을 질책하며 주동자들을 잡아들여 엄격히 처벌하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강경한 조치는 현재 우리가 원했던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뮈텔 각하는 감사의 서신을 보내면서 현감의 답신도 본인에게 동봉해 보내주었습니다. 각하께 번역본을 동봉해 보내드립니다. 뮈텔 각하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귀하가 천주교도들을 보호해주신 덕분에 이제 남포의 신자들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웃 지역의 천주교도들도 이 사건의 바람직한 결과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 합니다. 조선에서는 소문이 쉽게 퍼지고 또한 그 효과도 지역을 넘어서 훨씬 멀리 퍼져나갑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이 소심하고 권위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료들의 동의를 얻어 택한 조치와 그로 인한 바람직한 문제 해결은 종교문제에 관해서 관리들이 경계심을 풀었으며 마음을 놓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또한 본인은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많은 인내심을 갖는다면 조선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오래전부터 추구해왔던 목표 달성을 힘들게, 때로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편견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본인이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노선을 각하께서 승인해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경구.
<ol>
 	<li>로셰</li>
</ol>
파리의 외무부 장관 리보 각하께, 등등

--------------------------------------------------------------

<b>【</b><b>출전문헌</b><b>】</b> : 프랑스외무부문서 5 조선Ⅳ·1891~92 &gt; 정치공문 1888～1896 조선 1891～1892 권 4 콜랭 드 플랑시 씨, 로셰 씨, 프랑댕 씨 &gt;

◈ 별지

【번역】

신묘년 유월(1891년 7월) 남포 현감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 민종묵 씨에게 보낸 답장

 

1891년 7월 17일

수신

프랑스 공관의 서신 이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발송한 공문을 잘 받아보았습니다.

박의경(Pak Eui-kyeng)[朴義敬]과 우성중(Ou Seung-tchoung)[禹聖重]이 외국인들과 접촉을 갖은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마음대로 마을에서 쫓아내려한 것과 관련하여 본인은 이 행동은 천 번 만 번을 참을 수 없다고 여기며 이에 이들을 즉시 체포하여 투옥하고 심하게 곤장을 쳐서 타인에게 본보기가 되게 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귀하가 하달한 명령은 매우 엄격하여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귀하의 공문에 따라 본인은 박 가와 우 가를 다시 체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향후 다시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들을 엄벌에 처했습니다.

귀하가 이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아시도록 본 보고서를 보내드립니다.

-------------------------------------

원본과 동일함

번역자－서기관

모리스 쿠랑

---------------------------------------------------------------

 

제목 【38】 충청도 남포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대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처리

 

문서번호 N° 209

발신일 le 21 Juillet 1891 ( 1891년 07월 21일 )

수신자 Monsieur Ribot, Ministre des Affaires Etrangères, etc. etc. etc. etc.

【38】

Consulat de France à Séoul (Corée)

───◇───

Direction Politique

─────

N° 209

───

Séoul,

le 21 Juillet 1891

.

Objet : Troubles religieux dans le district de Nampoh.

1 p.j.

Monsieur le Ministre,

J'ai l'honneur d'informer Votre Excellence qu'à la suite de troubles qui ont eu lieu en Mai dernier dans le district de Nampoh, province du Tchyong-tcheng, entre chrétiens et païens, les premiers ont été très maltraités et menacés d'être expulsés de leur village.

Quoique nos compatriotes ne fussent pas directement en cause et que nous n'ayons pas à intervenir dans les difficultés entre indigènes, j'ai pensé, considérant le cas particulier des chrétiens de ce district qu'on tracassait par la seule raison qu'ils étaient en relation avec les missionnaires, qu'il était de mon devoir d'intervenir afin d'éviter un précédent fâcheux qui n'aurait pas manqué de se produire dans d'autres parties de la péninsule.

Ne voulant pas présenter l'affaire officiellement afin de laisser au gouvernement Coréen toute latitude pour régler la question, je profitai d'une visite que me fit le Président des Relations Extérieures pour l'entretenir officieusement de l'affaire. S. E. Min Tchong-mouk m'a franchement déclaré que le peuple, malgré les efforts des fonctionnaires, n'aime pas à être en contact avec les chrétiens et surtout ne peut supporter le voisinage des maisons où les missionnaires sont reçus.

Je sais d'autre part que ce grand antagonisme provient de ce que les sorcières, qui sont en grande faveur dans le pays, accusent les chrétiens de prendre une médecine que leur donnent les missionnaires, laquelle a le pouvoir de leur transformer le cœur.

Je fis remarquer au Président que tout Coréen ayant le droit de recevoir chez lui ses amis et les voyageurs, on ne saurait considérer ces réunions comme nuisibles aux voisins et à l'ordre public puisqu'elles sont entièrement libres et ne donnent lieu a aucune propagande.

Après une longue causerie sur ce sujet, dont je demande la permission de ne pas entretenir Votre Excellence le Président tout en reconnaissant que le magistrat du district de Nampoh avait manqué a ses devoirs en ne punissant pas les meneurs, s'est plaint de ce que les chrétiens n'ont pas toujours le calme et la patience voulue et abusent de la protection morale que leur donnent les missionnaires pour créer des ennuis à leur voisins. Il m'a néanmoins demandé une note sur l'affaire me promettant de s'en occuper.

Quelques jours après cet entretien S. E. Min Tchong-mouk m'envoyait en communication une dépêche officielle adressée au magistrat de Nampoh dans laquelle le ministre, en le blamant de n'avoir pas su prévenir l'effervescence, lui donnait l'ordre formel de faire incarcérer et punir sévèrement les auteurs du trouble.

Cette mesure énergique a produit l'effet désiré aujourd'hui, Monseigneur Mutel, en me transmettant ses remerciements et la réponse du magistrat dont Votre Excellence trouvera une traduction ci-incluse, s'exprime ainsi : « Grâce à la bonne protection que vous leur avez donnée, les chrétiens de Nampoh pourront désormais vivre en paix. J'espère aussi que les chrétiens des districts voisins profiteront également du bon résultat de cette affaire : en Corée pareilles nouvelles s'ébruiteront facilement et l'effet produit s'étend bien au-delà des limites du district... ».

Considérant le caractère pusillanime et sans autorité du Président des relations Extérieures, la mesure qu'il a prise, avec l'assentiment de ses collègues, et la solution favorable qui en est résultée paraît indiquer une grande détente et un appaisement dans l'esprit des fonctionnaires en ce qui concerne les questions religieuses et je ne doute pas qu'avec le temps, de la prudence et beaucoup de patience nous n'arrivions à vaincre le préjugé qui jusqu'ici a rendu difficile sinon impossible, le but que poursuivent, depuis si longtemps, nos missionnaires en Corée.

J'ose espérer que Votre Excellence voudra bien approuver la marche que j'ai cru devoir suivre dans cette circonstance.

Veuillez agréer l'hommage du respect avec lequel j'ai l'honneur d'être, Monsieur le Ministre, de Votre Excellence le très humble et très obéissant serviteur.
<ol>
 	<li>Rocher</li>
</ol>
Son Excellence Monsieur Ribot, Ministre des Affaires Etrangères, etc. etc. etc. etc.　Paris.

 

별지

◈

Traduction

Réponse du Magistrat du district de Nam-P'o, à M. Min Tchong-mouk, Président du Comité des Affaires Etrangères dans le courant du 6ème mois de l'année Sin-mio (= Juillet 1891).

Reçu, le 17 Juillet 1891.

Je viens de recevoir la communication que votre Ministère m'a adressée à la suite d'une lettre du Commissariat de France.

J'ai l'honneur de vous faire savoir que pour l'affaire des Sieurs Pak Eui-kyeng et Ou Seung-tchoung qui ont opprimé les gens en relations avec les étrangers et ont voulu les chasser du village de leur propre autorité, je trouve que cette conduite est mille fois détestable ; c'est pourquoi je les avais fait immédiatement arrêter, emprisonner et bâtonner très sévèrement pour donner un exemple aux autres.

Maintenant l'ordre que vous m'avez donné est si sévère qu'il m'est impossible de l'observer d’une façon négligente. Je me suis conformé à votre communication et j'ai fait arrêter de nouveau les deux individus Pak et Ou ; ils ont été châtiés pour prévenir les désagréments qui pourraient se produire à l'avenir.

Je vous adresse le présent rapport pour que vous en preniez connaissance.

──────────

Pour traduction conforme

L'Interprète - Chancelier

Maurice Courant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22 Aug 2026 03:02: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가해 연중 제 21주일,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link>
			<description><![CDATA[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가해 연중 제 21주일

1.말씀읽기:마태16,13-20: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습니까? 말로만 하고 행동은 없는 사람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말은 없더라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좋아합니까? 물론 말도 잘하고, 행동도 올바르게 하는 사람을 좋아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통해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질문 1: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떤 자세로 따르고 있는지를 물으시기 위함입니다.
②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의식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

질문 2: 그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① 어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② 어떤 사람들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예레미야 예언자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③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험담했습니다.
④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오셔야 했으니,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질문 3: 군중들의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믿는 이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나 공통된 생각은 ‘특별하신 분’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께서 분명 대단한 인물이심에는 틀림없다는 것을 고백했지만 메시아이심은 모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오기로 되어 있는데,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③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추측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보다 더 높은 명예를 거의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더 높은 명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메시아입니다. 

질문 4: 예레미야 예언자는 누구신가요?
① 출생: 예레미야는 기원전 645년경~640년경, 베냐민 땅 아나틍에서 사제 힐키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솔로몬 왕에 의해 추방당했던 사제 에브야타르의 후예로 추정됩니다.
② 소명: 기원전 627년,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그의 사명은 “뽑고 허물고 돌려세우고 부수며 세우고 심게 하려는 것”(예레 1,10)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알고 예언자로 선택하셨습니다.(예레1,4-5)
   주님: 내가 너를 모태에서 형성하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하였으며, 민족들의 예언자로 임명하였다.(예레1,5)
   예레미야: 아, 주 하느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1,6)
   주님: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너의 입에 담아 준다.’(예레1,7-9)
③ 활동 당시 상황: 예레미야 예언자는 근동의 패권이 아시리아에서 바빌론으로 넘어가는 대격변기 속에서 활동했습니다. 므나세 왕 시절 유다는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신명기 율법서에 기초해 강력한 종교 개혁을 단행했고(B.C. 640~609년) 예레미야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면적 회개 없이 외적 조치에만 만족했으며, 요시야가 전사한 후 유다의 영적 타락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들의 가짜 신앙을 꾸짖었고, 임금과 사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박해를 받았습니다. 
④ 죽음: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스 전투 "이집트를 두고 한 말씀이다. 유프라테스 강 가 카르케미스에 있던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의 군대를 두고 한 말씀이다. 이 군대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 제사년에 무찌른 군대이다." (예레 46,2)
 이후 바빌로니아의 위협이 커졌으나, 무모한 민족주의와 친이집트 정책으로 인해 유다는 자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네브카드네자르의 바빌로니아 제국이 쳐들어오자, 예레미야는 무모한 항전 대신 하느님의 징벌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항복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친이집트파 고관들에게 매국노로 몰려 진흙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예레 38장).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결국 무너진 후, 그는 유다에 남겨진 백성들과 함께하려 했으나, 친이집트파 유다인들에게 강제로 붙잡혀 이집트로 끌려가 그곳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질문 5: 우리 친구들이 성당 다니는 친구들이나 어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①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 멋지다.
② 성당에 다니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인자하고 너그럽다.
③ 저런 친구가 성당에 다닌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
④ 기타(            ).

질문 6: 가정에서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신앙적인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십니까?
① 우리 부모님께서는 열심한 신앙인이시기에 기도를 열심히 하시고, 너그러우시며, 삶의 모범으로 나에게 신앙교육을 시켜주십니다.
②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성경을 읽어 주시면서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③ 우리 부모님께서는 공부하라는 말보다는 기도하라는 말씀을 더 자주 하십니다.
④ 우리 부모님은 나의 신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집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⑥ 나의 부모님은(                                                        )

질문 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①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② 스승님은 저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시는 분이십니다. 주일날 성당 가야지요, 성경 공부해야지요. 너무 어렵습니다. ^*^

질문 8: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내 삶이 멋지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다르구나!”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삶이 그저 그렇다면 “성당 다녀도 별 수 없구나!”하면서 외면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내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친구들에게 한번 물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신앙인처럼 보이니?” 좋은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질문 9: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더 착해졌고, 양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② 이해심이 더 커지고, 예의를 더 잘 지키고 있다.
③ 친구들과 더 잘 지내고, 친구들에게 “멋진 친구, 양보하는 친구, 배려하는 친구”로 인정을 받는다.
④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되며, 부모님께로부터 더 많이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 같다.
⑤ 기타(                                                        )

질문 10: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에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칭찬하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행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베드로 사도가 행복한 이유는 자신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 전달하시는 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② 베드로 사도가 행복한 이유는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말했기 때문입니다. ^*^

질문 1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세력도 이 교회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② “용서할 수 있는 권한과 벌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권위(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아서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너는 베드로이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시몬이 이제 반석이 되어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것이며, 반석(게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은 주님께서 함께 머무시겠다는 것이며, 주님께서 붙들어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문에 의해 보호되는 도시나 현관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집에 비유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닫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가 갖게 되는데, 그 권한을 부여받은 이가 베드로 사도입니다. 그 권한을 가진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권한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위임된 권한입니다. “풀다와 매다”는 것은 ①“옳다, 그르다”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②누군가를 공동체에서 제외시키거나(파문)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무엇이 올바른 교리인가 하는 결정과 누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받아들여짐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받은 권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결코 한 개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이 시점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를 모두 바꾸어야 합니다. 

질문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이렇게 분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군중은 힘으로 세상을 뒤집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그런 사명을 지니신 메시아라고 착각할 수 있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②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당신이 바로 구세주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나의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③ 어떤 사람이 멋있는 신앙인 입니까?
                                                                        
                                                                        

4. 실천사항 정하기
부모님과 하루 30분 이상 대화하고, 친구들에게 신앙인의 모습 보여주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13 Aug 2026 09:04: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10과: 끝인사와 종결 찬송(읽어야 할 말씀: 로마15,14-16,27)]]></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link>
			<description><![CDATA[제 10과: 끝인사와 종결 찬송
(읽어야 할 말씀: 로마15,14-16,27)

1. 시작기도: 로마16,25-27 종결 찬송
25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26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7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끝인사와 종결 찬송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15,17)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사도직을 로마 공동체에 알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된 사도이고, 로마 공동체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여행 계획을 알리면서 예루살렘에 모금액을 전달하고 무사히 로마 공동체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공동체에 있는 이들에게 인사하며 공동체를 걱정하고 지켜야 할 것들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종결 찬송으로 로마서를 마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본받아 나 또한 내게는 오직 예수님만 머무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1. 바오로의 사도직
 바오로 사도는 로마 공동체를 칭찬하며 이 편지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로마14,15)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대담하게 썼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좋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로마 공동체를 신뢰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 자신도 선의로 가득하고 온갖 지식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서로 타이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로마15,14)

 바오로 사도는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로마15,16)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받은 사도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15,17)라는 말씀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자랑스럽게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을 밝힙니다. “사실 다른 민족들이 순종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룩하신 일 외에는, 내가 감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로마15,18-19)

 바오로 사도는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로마15,20)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이야기 하면서 아직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선포하려는 원의를 드러냅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그에 관하여 전해 들은 적 없는 자들이 보고 그의 소문을 들어 본 적 없는 자들이 깨달으리라.”(로마15,21)의 말씀을 자신을 통해서 이루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사도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사도직을 부여 받았기 때문입니다. 

2.2. 바오로의 여행 계획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여행 계획을 로마 공동체에게 알립니다. 로마에 가려고 하지만 아직 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려 했지만 여러 번이나 좌절되고 말았습니다.”(로마15,22)

 바오로 사도는 “이제 이 지역에는 더 이상 내가 일할 곳이 없고, 또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습니다.”(로마15,23)라는 말씀을 통해서 삼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선교사명은 완료되었고, 이제는 바오로 사도의 제자들이 뒤를 이어 그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로마로 가려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내가 에스파냐로 갈 때 지나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얼마 동안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나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로마15,24)라고 말씀하시면서 로마 방문 계획을 알립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로마로는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15,26-27) 

 모금한 것을 예루살렘 공동체에 전해 주어야 하기에 지금 당장은 로마로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이 일을 마치고 이 모금의 결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전한 다음,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에스파냐로 떠나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로마15,28-29)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여행 계획을 알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공동체에 자신의 여행 계획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로마15,30)

 내가 유다의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 예루살렘을 위한 나의 구제 활동이 성도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도록,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쉴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로마 15,31-32)
 
 바오로 사도는 로마 공동체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적대적인 유다인들로부터 위험을 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로마 공동체를 방문하여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로마15,33) 하고 인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기도를 청한 것입니다. 로마 공동체의 기도는 바오로 사도가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2.3. 끝인사와 권고
 로마서의 끝인사 부분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 중 가장 많은 인명이 등장합니다. 또한 유다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성과 여성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끝인사에서 여성의 이름이 9명 이상 등장하며, 사도 바오로는 이들을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일꾼(봉사자)’, ‘후원자’, ‘협력자’, ‘애를 많이 쓴 이’ 등으로 크게 격려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여성 신자들은 구원 역사와 복음 선포에 있어 본질적이고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켕크레애의 여교우 포이베를 로마교회에 추천합니다. 그녀는 바오로 사도를 포함한 많은 사람의 후원자였습니다. 포이베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아 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교회에 “성도들의 품위에 맞게 그를 주님 안에서 맞아들이고, 그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하는데, 아마도 포이베가 이 편지를 로마에 전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프리스카 프리스카는 원래 이름이고 프리스킬라는 작은 프리스카라는 뜻을 지닌 애칭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루카는 친숙한 표현인 프르시킬라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했고, 바오로 사도는 서간에서(로마서, 1코린토, 2티모테오) 항상 정식 이름인 프리스카로 불렀습니다. 
와 아퀼라 부부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오로 사도의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또한 복음선포 현장의 동반자로서 코린토, 에페소, 로마 등을 오가며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부부의 직업이 바오로 사도처럼 천막 만드는 일이었기에 코린토에서는 바오로를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하며 함께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거처를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로 내어 주어 선교 거점으로 삼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인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패네토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에패네토스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애를 많이 쓴 마리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인사하는데, 마리아는 로마 교회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노고를 아끼지 않은 여성 신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의 동포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뛰어난 사도로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는 부부인 듯합니다. 그들은 바오로의 친척이자 동포이며, 함께 감옥에 갇혔던 인물들입니다. 뛰어난 사도라고 칭찬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복음선포에 헌신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내가 사랑하는 스타키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펠레스, 아리스토불로스의 집안 식구들, 나의 동포 헤로디온, 주님 안에 있는 나르키소스의 집안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이들은 바오로 사도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인정받았다고 칭찬한 신자들입니다. 이 중 ‘암플리아투스’나 ‘우르바노’는 로마 제국 내 노예나 해방 노예들에게 흔했던 이름입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집안 식구들이나 나르키소스의 집안 식구들은 귀족이나 왕족의 가속들 중 신자가 된 무리들, 즉 노예나 하수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애쓴 트리패나와 트리포사, 주님 안에서 애를 많이 쓴, 사랑하는 페르시스, 주님 안에서 선택을 받은 루포스,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그의 어머니, 아싱크리토스, 플레곤, 헤르메스, 파트로바스, 헤르마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필롤로고스와 율리아, 네레우스와 그의 누이, 올림파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트리패나와 트리포사는 이름의 뜻은 각각 ‘화려함’과 ‘우아함’이지만, 주님 안에서 고된 노동과 봉사를 마다하지 않은 자매(또는 쌍둥이) 신자입니다. 페르시스는 주님 안에서 많은 애를 쓴, 바오로 사도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여성 신자입니다. 루포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인 듯합니다. 마르코 복음 15장 21절에 등장하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루포스’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루포스의 어머니이자, 바오로 사도가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 칭할 만큼 사도를 친아들처럼 돌봐준 영적 어머니입니다. 아싱크리토스, 플레곤, 헤르메스, 파트로바스, 헤르마스는  함께 모여 가정 교회를 이루었던 남성 신자 무리입니다. 필롤로고스, 올림파스 및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는 로마의 또 다른 가정 교회에 모이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로마16,16)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가르침을 거슬러 분열을 일으키고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그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섬기는 자들로서,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로 순박한 이들의 마음을 속입니다.(로마16,17-18) 사실 여러분의 순종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이 일로 기뻐하면서도, 여러분이 선에는 지혜롭고 악에는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로마16,19)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함께 머무는 협력자들의 인사를 전합니다.

	21 나의 협력자 티모테오, 그리고 나의 동포들인 루키오스와 야손과 소시파테르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22 이 편지를 받아쓴 저 테르티우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로마16,21-22) 

 바오로 사도는 함께 있던 동료들의 인사를 함께 전합니다. 이는 서간의 집필이 개인의 독단적 작업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연대와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티모테오, 루키오스, 야손, 소시파테르는 바오로 사도의 유다계 동포 협력자들입니다. 야손은 사도행전 17장의 데살로니카 야손으로 추정됩니다. 콰르투스 ‘넷째’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신자 형제입니다. 율리아, 네레우스의 누이는 로마 교회의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간 또 다른 여성 신자들입니다. 테르티우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받아쓴 대필자인데, 바오로 사도의 대필자가 자기 이름을 쓴 것은 여기뿐입니다. 또한 “이 도시의 재정관 에라스토스, 그리고 콰르투스 형제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라는 것은 공직자 출신도 초대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를 부르시어 당신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는 다는 것,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며,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로마16,25)

 바오로 사도의 이 선포를 통하여 듣는 이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되었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믿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손수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로마16,26)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2사무7,1-17)하였고, 예고된 메시아는 세상에 오시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들은 주님께 믿음의 순종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말씀대로 따라야 하고, 구원을 주셨으니,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질문 13:
바오로 사도는 알고 있는 이들, 충실한 협력자, 사랑하는 이들에게 편지로 인사를 했습니다. 내가 만일 이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공동체로 간다면 이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어떤 인사를 하고 떠나시겠습니까? 작별인사를 한 번 적어 보세요.
                                                                               
                                                                               

2.4. 종결 찬송
 바오로 사도는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16,27)하며 종결 찬송으로 끝을 맺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마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하느님의 지혜는 오묘한 방법으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 주심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이용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이들의 구원을 통하여 당신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는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영광만 드릴 뿐입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15장 14절부터 16장 27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를 보잘 것 없는 내가 헤아리려 하고, 불평하려 했던 적도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을까요? 내 생각이 보잘 것 없음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③ 바오로 사도는 로마 교우들에게 “선에는 지혜롭고, 악에는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로마16,19)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어떤 지혜와 의지가 필요할까요? 
                                                                               
                                                                               

④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배우게 된 것들을 정리해 봅시다. 로마서는 어떤 서간입니까?  이 서간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사상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정의와 의화, 성령은 바오로 사도를 어떻게 이끌고 있고, 율법과 구원과 믿음과 은총은 구원을 향하여 어떻게 달려가게 나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① 마음을 다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천하기 ② 온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에게 인사하기 ③ 언제나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참고 도서 목록

1. 단행본

이홍기. 「사도 바울로의 생애와 편지」. 왜관: 분도출판사. 1986.
James D. G. Dunn, Romans 1-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8A. Texas: Word Books. 1988.
박영식. 「로마서」. 왜관: 분도출판사. 1996.
안병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서울: 기쁜소식. 1995.
존 F. 오그래디. 「바오로의 편지-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박태식 역. 서울: 바오로딸. 1999.
정양모. 「바울로 친서 이야기」. 서울: 성서와 함께. 1997.
A. Descamps. "정의,“ X. 레옹-뒤푸르 편. 「성서신학사전」. 광주: 분도출판사. 1984.
J. A. 피츠마이어. 「바울로의 신학」. 김수복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73.
바클레이. 「사도 성 바오로의 사상」. 서기산 역. 서울: 성요셉출판사. 1992.
로마노 펜나. 「다르소의 바오로」. 성염 역. 서울: 성바오로. 1997.
허버트. J. 리챠즈. 「바울로와 그의 서간들」. 정승현 역. 광주: 생활성서사. 1989.
조정헌. 「창조론」. 왜관: 분도출판사. 1988.
J. 보르톨리니. 「로마서 읽기」. 김수복 역. 서울: 성바오로. 1999.
Roger Bowen. 「로마서」. 이희숙 역. 서울: 컨콜디아사. 1992.
염명수. 「바울 신학과 사상」. 서울: 한국문서선교회. 1995.]]></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31: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9과: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읽어야 할 말씀: 로마12,1-15,13)]]></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3]]></link>
			<description><![CDATA[제 9과: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읽어야 할 말씀: 로마12,1-15,13)

1.  시작기도: 로마 12,1-8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3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십시오. 
4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5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사람은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고, 서로가 서로를 따라주며,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이어야 합니다. 

2.1.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합당한 예배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셔야 할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입(말)으로가 아니라 내 삶으로, 마치 내가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바쳐지는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당신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롯이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산 제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합당한 예배)입니다. 

나눔 및 묵상 10:
내가 주님께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새 영세자들이 주일에 성당에 오는 것이 처음에는 힘든 것처럼,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예전 식습관을 버리기 힘든 것처럼, 내가 버린 예전의 생활은 언제나 나에게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기회만 되면 믿기 전의 예전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되면 기쁨도 있지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을 전할 때의 그 고통, 그 고통이 너무 힘들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의 고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어려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고 있고, 어떤 삶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인지를 알고 있고, 더 나아가 무엇이 나에게 참된 가치가 있는지를 알고 있기에 현세의 유혹을 과감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분별력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인지, 이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인지,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善)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여,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고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장애되는 것들을 버릴 때,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생활은 기쁨과 은총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버리지 못하면 ‘걱정과 타협과 죄의식’으로 얼룩져, 결코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온전히 지지 못하며, 주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분별을 하는 이유는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분별을 하는 이유는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별은 행위로 반드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에게 맞는 품위 있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자기를 버리는 삶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삶도 아닙니다. 그 삶은 결코 영원한 삶을 상으로 받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유혹과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반드시 합당한 상을 받게 됩니다. 반드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십시오.”(로마12,3)

서로서로 지체가 되려면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로마12,4)라고 말씀하십니다. 

2.2.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12,6-8)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지, 그 은사를 어떻게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늘 깨어 바라보며, 은사가 나 자신을 향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사랑’을 살아갈 수 있고, 그 사랑에 진실만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로마 12,9)

 거짓 없는 사랑, 진실한 사랑이 내 삶에서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다음의 것이 따라와야 합니다.
하나.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로마12,9)
둘,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12,10)
셋,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넷,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12,12)
다섯,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로마12,13)
여섯,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로마12,14)
일곱,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15) 
여덟,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로마12,16)
아홉,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로마12,17)
열,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로마12,18)
열하나.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2.3. 그리스도인의 권위
 바오로 사도는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13,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권위란 무엇을 말할까요? 그리고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권위를 나는 어떻게 인정해 주고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권력이나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 또는 기관들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①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로마13,2)
②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권위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13,3) 사실 지배자들이란 악행을 할 때에나 두렵지 선행을 할 때에는 두렵지 않습니다.
③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4-5) 
④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13,7) 그들은 바로 이러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마13,6) 

 신앙인들은 “사랑하는 누구나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4. 사랑은 율법의 완성
 바오로 사도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는 모든 이에게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이고, 몸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나를 통해 상대방에게 큰 기쁨과 위안 등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사랑하기에 그와 함께 있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갚을 수 없는 사랑은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빚으로 남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온전히 갚아야 한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갚을 수 없고, 그것이 채무라면 온전히 빚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갚을 수 없다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가 갚을 수 없지만, 나는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삶이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라는 말씀처럼, 율법의 목표는 이웃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해 주셨습니다(마태22,37-40).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는 이웃사랑으로 드러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은 나 자신과 이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되고, 그를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13,9)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1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먼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웃에게 쉽게 저지르는 악”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웃에게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저지르는 것들은 “저 사람도 나와 같으려니”하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잘못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지 않고, 더 나아가 말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갑자기 강도나 살인마로 변하여 이웃에게 다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부주의한 말”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파멸시키고, 더 나아가 생명까지도 빼앗아 버립니다. 
셋째, 용서하지 못함입니다. 그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는 그 고통으로 더 큰 죄에 빠질 수도 있게 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참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 말은 쉽지만 결코 행동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구원여정에서 힘의 원천’이고, 그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의 물줄기를 온 세상으로 끌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은 그저 말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눔 및 묵상 11:
참된 사랑이란 어떤 사랑을 말할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웃에게 저지르는 악, 이웃이 나에게 저지르는 악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고, 어떻게 용서를 청할 수 있을까요?
                                                                               
                                                                               

2.5. 그리스도인의 경각심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경각심을 다음과 같이 일깨우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당부하십니다.

	“또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로마13,11-12)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살아가기를 당부하십니까?

①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2)
②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로마13,13ㄱ)
③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13,13ㄴ)
④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13,14ㄱ)  
⑤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13,14ㄴ)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힘과 위로를 주는 이들이 대부 대모이지만, 힘을 빠지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들도 대부 대모입니다. 대모가 대녀를 부를 때, ‘대녀!’라고 부르면 그리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마리아!’라고 본명을 불러 주는 것이 훨씬 더 기뻐합니다. ‘대녀!’라는 말 안에는 거리감도 있지만, ‘너는 나의 대녀이니 내 말을 따라야 해!’라는 권위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명을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합니다.

 또한 ‘내가 세례받은 지 얼마 됐는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도 별것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숫자로 표현하고, 직책으로 표현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 보여 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며, 나도 모르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과장하지 않는 하느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2.6.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
 한 형제가 미사 후에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다가와 ‘성당 나오신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아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형제는 영세 받은지 얼마 안 됐고, 주일미사만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형제는 매일 미사에 참례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형제였습니다. 그 형제는 웃으면서 ‘예, 얼마 안 됩니다.’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예,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물어보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화가 났지만 화낼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얼굴을 붉힐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를 알고 있는 이들은 열을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열을 알고 있는 이들은 백을 모르고 있다고 인정을 합니다. 고수는 하수를 배려하지만, 하수는 결코 하수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이들을 배려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쉽게 판단하고 단죄 하는 데는 매우 익숙합니다. 그러므로 판단과 단죄에서 벗어나는 삶을 통해서 믿음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여러 견해를 두고 논쟁할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로마14,1)

 믿음이 있는 이들은 말로 상대방을 평가하지 않고, 삶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로마14,2-3)

 유다인들은 채소나, 고기나 술에 관한 규정, 안식을 규정 등을 세심하게 지켰습니다. 또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간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은 부정한 음식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셨고,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르코 7,19). 하지만 소심한 사람들은 개종한 뒤에도 이 규정들을 세심하게 지켰는데, 이들을 “믿음이 약한 이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이들”과 반대되는 이들은 이런 규정들에 자유로운 태도를 지닌 이들, 즉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음식 때문에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유다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쳤기에 그 전통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인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14,4)

 ‘남의 종’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자녀를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다.’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심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서 있든, 넘어지든’이라는 것은 ‘하느님께 충실한 것과 불충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고, 짐과 멍에를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 안에서 쉬며,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면 됩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규정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으니 음식 문제로 상대방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믿음이 약한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조롱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말하며, 모든 도덕적 의무나 관습을 벗어 던져도 안 됩니다. 또한 ‘믿음이 약한 이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율법의 규정을 모른다고 비난하거나 단죄해서도 안 됩니다. 따라서 의로운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며, 서로 사랑해야 함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이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어느 날이나 다 같다고 여깁니다.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로마14,5-6) 

 안식일이나 단식일이나 축일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는 주님을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니, 그날을 주님께 봉헌하며, 더욱 경건하게 지내면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루하루는 모두 주님께서 주신 날이니 감사하며 오늘 하루를 보내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면 그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생각하며 먹지 않는 것이고, 음식을 먹는 사람도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 위해 먹는 것이니 모두 하느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들은 서로의 행동을 탓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행동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절대로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니?”라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7-8)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고, 하루를 감사하며 보내는 것이며,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고, 모든 음식을 기쁘게 받아먹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았으니,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상대방을 단죄한다면,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잘난 체하며,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내가 주님의 소유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나는 반드시 예수님의 뜻을 따릅니다.” 다 버렸는데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나를 죽였는데, 어떻게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저 주님을 위해,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오직 주님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눈에는 나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14,9)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14,10) 

 나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를 멸망하도록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말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통하여, 강한 이들이나 약한 이들 모두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음식문제나 축일 규정으로 서로 심판하는 것은 주님을 온 세상의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형제자매를 심판하는 이들은 결코 주님을 온 세상의 임금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내 형제자매들을 판단한다면, 더 나아가 “나는 하는데, 너는 왜 이것을 안 하느냐?”라고 업신여긴다면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죄인으로 판명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남을 심판한다면 결국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죄짓는데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9 다만 여러분의 이 자유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다는 그대가 우상의 신전에 앉아 먹는 것을 누가 본다면, 그의 약한 양심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수 있게끔 용기를 얻지 않겠습니까? 11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1코린도8,9-12)

 더 나아가 바오로 사도는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1코린토8,1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형제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반드시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14,11)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로마14,1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14,12) “내가 살아 있는 한”이라는 말씀은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라고 말로 구약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맹세의 말투입니다.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영광을 말합니다. 나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 사랑에 응답하며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며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께, “형제자매들의 죄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판단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며 영광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것을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있는 그대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매일 매일 똑같은 죄를 짓고도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자매를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내가 한 것에 흔들어서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입니다.

나눔 및 묵상 12:
나는 형제자매들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형제자매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판단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심판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로마 공동체를 가르치십니다. 
첫째,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로마14,13) 
둘째, 나는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14,14) 
셋째, 그대의 형제가 음식 문제로 슬퍼한다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음식으로 형제를 파멸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그 좋은 것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로마14,15-16)
넷째,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14,17-19)
다섯째,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음식 때문에 그르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어 남에게 장애물이 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그 밖에 무엇을 하든, 그대의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로마14,20-21)
여섯째, 그대가 자기의 것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느님 앞에서도 그대로 지니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14,22-23) 

2.7. 공동체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기도록,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저마다 이웃이 좋을 대로 해야 합니다.”(로마15,1)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좋으실 대로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습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셨습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와 희망은 공동체를 일치시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1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면 공동체는 당연히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 공동체, 내가 속한 단체들은 어떻게 해야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해야 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로마15,5-6)

 바오로 사도는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15,13)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마음을 활짝 열어, 내 마음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고,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쳐나야 합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12장 1절부터 15장 13절 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까? 나의 은총생활은 어떠합니까?
                                                                               
                                                                               

③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쳐 주십니다. 내 사랑에 거짓이 담길 때는 언제입니까? 어떻게 해야 내 사랑에 거짓을 치울 수 있을까요?
                                                                               
                                                                               

④ 신앙인의 권위란 무엇일까요? 나는 신앙인으로서 권위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⑤ 내 옆에 있는 이를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내 형제자매들을 심판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은 다른 이들을 심판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⑥ 주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주님의 공동체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우리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실천사항 ① 나의 은총 생활을 점검해 보기 ②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다섯 사람에게 이야기 하기 ③ 형제자매들과 일치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31: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8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읽어야 할 말씀: 로마9,1-11,36)]]></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2]]></link>
			<description><![CDATA[제 8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읽어야 할 말씀: 로마9,1-11,36)
1. 시작기도: 로마10,5-21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5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 6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7 또 말합니다. “‘누가 지하로 내려가리오?’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8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19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우선 모세가 말합니다. “나는 민족도 아닌 무리를 너희가 시기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에게 너희가 분노하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에 관하여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를 드러내 보였다.” 21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임으로 구세주로 믿는 그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고,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얻게 됩니다. 구원은 “제가 이것을 했으니 당연히 주십시오.”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2.1. 바오로 사도와 이스라엘
 바오로 사도는 동족인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구원을 거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에 가슴 아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동족인 유다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주변의 비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9,1-2)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족의 구원 문제로 걱정하면서 슬픔하고 괴로워합니다. 동족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받을 하느님의 심판을 자신이 대신 받을 용의가 있을 만큼 유다인들을 걱정하였습니다. 그 걱정을 진심에 담아서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진심을 이야기하기 위해 두 분을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구약의 전통에 따라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으로 그것이 진실임을 확정짓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참조: 신명19,15).

 또한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하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기관입니다. 즉, 말하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신데, 그 성령께서 내 양심을 통하여 증언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또한 바오로 사도가 하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며,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안에 자리 잡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큰 슬픔이 되어 바오로 사도 안에 자리 잡혀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 불경을 저지른 동족들의 죄를 생각하니 더더욱 큰 고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라는 말로 동족에 대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고 바리사이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기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먼저 동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족들은 오히려 바오로 사도를“배반자”로 여기고 그를 박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지만 혈족인 동포들과는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포를 하여도 혈족인 동포들은 바오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유다인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파문당하여 교회 안에서 쫓겨나는 것뿐만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제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 안에서 바오로 사도는 동족(유다인들)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동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집트인을 죽이고 결국 왕자에서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였던 것을 기억해 본다면,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은 지극한 유다인에 대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염려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로마9,4)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은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름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32,29)
이고, 이스라엘 사람은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 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특권들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규정과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처음 부여받은 이들은 유다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맏아들 22 그러면 너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며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 (탈출기4,22)
이 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들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머무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심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당신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홍해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게 하시며, 광야에서의 삶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 계약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을 말합니다. 노아와 맺으신 계약 18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창세6,18)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창세9,9-11)
,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 참조: 창세기15,1-21; 17,1-27
, 이사악과 맺으신 계약 3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 주겠다(창세26장,3-5). 
   24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2,24). 
, 야곱과 맺으신 계약, 모세와 맺으신 계약 7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8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24,7-8) 
, 다윗과 맺으신 계약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의 매와 인간의 채찍으로 그를 징벌하겠다. 15 그러나 일찍이 사울에게서 내 자애를 거둔 것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2사무7,11-16)
    5 나의 집안이 하느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않은가! 그분께서는 나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어 모든 것을 갖추어 주시고 굳건히 하셨다. 그분께서는 나의 구원과 소망을 모두 이루어 주시지 않는가! (2사무23,5)

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신 규정입니다. 이 율법은 하느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받았을 때, 얼마나 큰 감동을 느꼈을까요? 다른 백성에게는 없는 것을 받았다는 그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리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백성들은 기쁘게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율법은 사랑과 믿음이 빠져나가고 형식과 규정들만 남아 있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완성하셔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배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경신례로서, 참된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헛된 것들에게 바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지만,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은 참된 경신례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공적인 예배를 전례라고 합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있는 이들로, 하느님을 참되게 섬기는 이들이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이들입니다.

 여러 약속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다윗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며, 당신이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로마9,5)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다인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약속 안에서 복을 받은 성조들의 후손들입니다. ‘조상들’은 영광스러운 호칭으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유다인들은 믿음을 간직한 이들의 후손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조상들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말이 안 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결국 하느님의 영광을 외면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해주신 약속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결정적으로 유다인들이 배척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아 뵈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수고와 모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을까요? 

나눔 및 묵상 8:
바오로 사도의 고뇌는 무엇입니까? 내가 만일 바오로 사도였다면 나를 박해하고 모욕하는 동족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 사랑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 놓고 있습니까?
                                                                               
                                                                               

2.2.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로마9,7)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로마9,8)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로마9,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은 유다인들로부터’라는 원칙을 지키셨습니다. 유다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모든 곳에 구원의 기쁜 소식이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려고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 곧 너에게서 내 힘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로마9,17)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당신을 계시하시고, 온 세상에 당신의 구원을 드러내셨습니다.

2.3. 하느님의 진노와 자비
 하느님의 진노와 자비에 대하여 인간이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9,20-21)

 인간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뜻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힘을 알리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큰 은혜로 참아 주셨다면, 그리고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다면(로마9,22-23), 인간은 그저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유다인 가운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불러 주셨습니다.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로마9,24-26) 그러므로 인간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주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반론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28 주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또 조속히 세상에 실현시키실 것이다.”(로마9,27-28)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구원은 주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로마9,29) 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주님의 구원이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가 내가 속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온전한 주권을 드려야 합니다.

2.4.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성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로마9,30) 왜 그렇게 되었냐면,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로마9,32) 바오로 사도가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에도 유다인들은 계속 율법을 지키는 공로로 구원(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를 놓는다.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로마9,33)라는 말씀처럼 유다인들은 살아있는 돌, 바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의 잘못된 열성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로마10,1-2)

 바오로 사도는 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10,3-4) 바오로 사도가 원하는 것은 바로 모든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의로움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서 의로움을 얻는 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소원입니다.

 모든 유다인들은 의로움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의롭게 됨을 몰랐습니다. 즉 의로움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의로움에 대해, 믿음이란 무엇인지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2.5.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로마10,5)

 모세는 율법을(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으로(율법을 지키는 것)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킴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로마10,6)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라는 말은 모세가 율법을 듣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한 말입니다.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기30,12ㄴ-14)
 하느님의 말씀을 그저 실천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니 생명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로움을 얻기 위해 하늘이나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믿으면 됩니다.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말씀하십니다.  

	“‘누가 지하로 내려가리오?’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로마10,7)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하’는 ‘바닥이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을 뜻하는데, 정관사와 함께 쓰이면 ‘심연’, 또는 ‘지하세계’를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은 우주가 천상과 지상과 지하로 되어 있는데, 지하에는 또 저승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이 지하에 마귀들이 최종 심판을 받을 때까지 갇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의로움에 이르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가서 모셔 올 필요가 없고, 그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에 이르는 말씀, 나를 구원하는 말씀은 내 가까이에 있고, 내 입에 있으며, 내 마음에 있습니다. 이것을 모세도 가르쳐 주었으니(참조: 신명기 30,14)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세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10,8-10)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응답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그대로 전할 뿐이기에(갈라1,11-12), 그것을 듣는 이들은 그 메시지를 있든 그대로, 곧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1테살2,13).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지혜, 또는 사도들의 명성이나 위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2,1-5;1테살1,5).

 믿음의 본래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시키시고, 모든 인간의 유일한 주님이시며 구원자로 삼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의 순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믿음은 순종인 것입니다. 인간은 굳은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사람을 의롭게 만드십니다. 의로움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은 자신의 공로나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내가 믿고 있는 그 자체마저도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믿음을 통한 의화는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약속의 완수입니다(로마4,1-25; 갈라3,6-18).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진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15,5)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민족이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받은 의로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바를 삶으로 드러냅니다. 
 믿음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을 향하여 달려가게 만들고, 현세에서 주어지는 어떤 환난도 인내하게 하며, 그 인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수양합니다. 그렇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위와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과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이사야28,16). 물러서다는 것은 ‘서두르다, 도망하다’등을 뜻하지만 “당황하지, 흔들리지, 두려워하지, 부끄러워하지”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결국 믿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로마10,11)

 주님께서 내 편이신데 누가 감히 나에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구원을 두고 헛된 것을 말하겠습니까? 내가 믿고 있는 구원에 대한 희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이 희망은 결코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12-13)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거부하는 유다인들을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하여 그들을 비판하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한 이유는 이사야 예언자가 이미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이사야53,1). 믿을 기회가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생각하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이방인들은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구원을 얻었는데, 유다인들은 이 구원을 거부한 것입니다(이사야65,1-2).  
 믿음은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총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제 삼자를 통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지만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주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 들은 적이 없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자신이 받은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마치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사람’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야52,7)
에 비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죄의 용서를 위하여 몸소 희생제사를 드렸으며, 믿는 이들에게는 누구나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것을 전하라고 사도들을 부르셨고, 바오로 사도는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로마10,16)

 바오로 사도는 기뻐하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처럼, 바오로 사도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유다인들의 굳은 마음을 경고합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이사야53,1). 들은 것은 알린 것으로 이해한다면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로마10,16)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없으면 들리지 않고,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들음은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듣는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들음에서 온다는 것은 듣는 말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입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님께로부터 들었기에 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내가 안다면, 나는 그들을 선포를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예언자로 대하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옆에 있는 이들을 예언자로 생각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의 길로 향하는 것이고, 주님의 빛 속을 거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들을 향하여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막고, 불신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듣지 않은 소리는 온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로마10,18) 

 위의 말씀은 시편 19,5를 인용한 것인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선포했기에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파되었고, 지금 나 또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우선 모세가 말합니다. ‘나는 민족도 아닌 무리를 너희가 시기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에게 너희가 분노하게 하리라.’”(로마10,19)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여 제물을 바치자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분노하시어 당신 백성을 물리치셨습니다(참조: 신명32,17-2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 또한 내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질투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분노하게 하리라.”(신명기32,21)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과 이사야(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고, 다른 민족들의 회심으로 유다인들의 그러한 불신과 불경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 이사야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에 관하여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를 드러내 보였다.” 21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로마10,20-21)

 이사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내린 벌에서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사야65,1)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민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선택된 백성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는 것은 다가오지 않는 백성을 향해서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고 계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향하여 변함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집 나간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렇게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굳은 믿음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이들이 주님께로 몰려야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눔 및 묵상 9:
믿음이란 무엇이고,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할까요?
                                                                               
                                                                               


2.6.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로마11,2)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예로 드십니다. 그들은 은총으로 선택된 남을 자들입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로마11,5)

 바오로 사도는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로마11,5-6)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하고, 선택된 이들만 그것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로마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마비시키는 영을, 보지 못하는 눈을, 듣지 못하는 귀를 주시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하셨다.”(로마10,8)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들 식탁이 그들에게 올가미와 덫이 되고 걸림돌과 응보가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늘 굽어 있게 하소서.”(로마11,9-10)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들은 볼 눈이 있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거부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2.7. 다른 민족들의 구원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어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불신과 불순종을 버린다면 세상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됨을 알고,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로마11,11)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됩니다. 또 자신도 관심 없으니 남도 관심 못 가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시기 질투는 다른 사람도 망가뜨리지만 자기 자신도 망가짐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완전한 역사를 당신의 완전한 역사로 꾸미십니다. 만일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더 늦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했기에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로마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유다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로마11,13-14)

 이방인들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유대인들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시니, 그것을 보고 마음을 돌려 주님께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주신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장하다.”라고 칭찬하시면서 그녀의 딸을 치유해 주셨을 때, 유다인들은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더 나아가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통해서 스스로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 보다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것입니다. ‘내 살붙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유다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동족에 대한 사랑을 본받아 나 또한 내 옆에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로마11,15)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하느님을 배척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구원(하느님과의 화해)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에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로부터의 삶은 이스라엘이 배척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는 큰 은혜가 세상에 베풀어졌다면, 선택된 이 백성이 다시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때의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삶은 이전의 삶이 죽음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것이 됩니다.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나머지 반죽도 거룩합니다.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거룩합니다.”(로마11,16)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나머지 반죽도 거룩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거룩해지면 온 인류에게도 그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올리브나무로 상징되는데(예레11,16-17), 나무의 뿌리인 성조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거룩하면, 뿌리에 붙어 있는 가지들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선택에 참여하여 거룩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올리브 나무 이야기를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 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다면,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로마11,17-18)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로마11,19-20)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11,21-22)

	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대가 본래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래와 달리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의 그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로마11,23-24)
 
2.8. 온 이스라엘의 구원
 바오로 사도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로마11,25-27)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로마11,28)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11,2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고, 그들의 조상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조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후손들에게도 혜택을 줍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을 걷지 않고,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파견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11,30-32)

 자비를 입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순종은 멸망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불순종과 죄를 통하여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처럼, 유다인들의 불순종도 하느님께서는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시지 않고, 자비를 베푸실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순종 안에 가두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구원 계획을 멈추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사람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을 온전히 알고 있는 이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판단할 수 있는 이도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방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삶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지만 영원히 벌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면 즉시 받아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즉시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감탄할 만한 것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감탄할 수 있고, 그것에 관심 있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감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볼 줄 모르면 결코 감탄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어, 세상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11,33)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신을 뽑아 세우시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더 나아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이용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이들의 구원을 통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 백성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 심오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들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시기나 질투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사하며, 찬미 찬양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주님! 저 사람은 구원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구원해야 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마태20,1-16)이 늦게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신 것에 불평하는 사람처럼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로마11,34-35)

 어느 누구도 주님께 “주님! 이런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베드로 사도가 지적인 이해와 추리를 통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마태16,15-17).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시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크신 사랑을 드러내셨고, 당신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랬다 저랬다.’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말씀을 통해서 이미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랑의 마음을 내가 알아차리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부어 주시어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더 확고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하느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먼저 창조하신 이유가 ‘여자가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할까봐.’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어떤 조언이나 도움을 드릴 방법은 없습니다. 나는 그저 주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예’하고 응답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나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당신 사랑 안에서 나오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행위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니, 하느님께 감사하며 굳은 믿음을 드리면 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11,36)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온전히 순명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예’하고 오롯한 마음으로 순명할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해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게 되고, 오롯한 마음으로 순명할 때,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교회 안에 머물며,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9장 1절부터 11장 36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우리 모두는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어야 합니다. 내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③ 하느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영광과 감사와 찬미는 무엇일까요?
                                                                               
                                                                               
④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⑤ 바오로 사도와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하느님 찬미가”를 써 봅시다. 나만의 찬미가로 하느님께 내 마음을 드려 봅시다.
                                                                               
                                                                               

4. 실천사항 ①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 당기는 삶을 살아가기 ② 완고한 마음을 버리려고 노력하기 ③ 나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30: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7과: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읽어야 할 말씀: 로마8,1-39)]]></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1]]></link>
			<description><![CDATA[제 7과: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읽어야 할 말씀: 로마8,1-39)

1. 시작기도: 로마 8,31-39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31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성령 안에서의 삶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은 기도하는 삶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드러내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고, 사랑으로 주님과 결합된 삶이며, 이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입니다. 이 삶을 우리 기쁘게 살아갑시다.

2.1.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셨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단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 단죄는 하느님의 심판인데,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단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8,1-2)

 죄와 죽음의 법은 바로 율법을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였고, 그 형식적인 행위가 자신들을 구원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식적 형식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 마음에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 없고, 오로지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은 지켰지만 그 안에 하느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고,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정결례를 지키며, 형식적으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삶은 결국 그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해 주셨고, 당신 백성의 어깨에 짊어진 짐들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율법의 규정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에 오로지 예수님께 나를 봉헌하고,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8,3-4)

 열심한 유다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열심히 지켜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규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고, 죄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지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고개를 숙일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이겨내시고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육에 대한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죄의 세력을 파괴하셨습니다.

 율법이 당연히 요구하는 것은 의로운 삶입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삶은 육이 인도하는 삶을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삶을 살아가던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 자체만을 바라보았지, 그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을 이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만이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8)

 육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육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죄의 종살이를 하는 자들로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즐거움과 안락함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끝이 죽음과 멸망임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계명을 지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자체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계명을 지킴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결코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육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볼 수 있고,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8,9)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생명과 평화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들의 영광과 희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의 요구에 응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을 등지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심’을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성령께서 나를 생명에로 이끌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빌라도에게서 유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가 있다고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죄인으로 보이고, 그들의 눈에는 멸망한 것으로 모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고, 그 죽음은 부활을 준비하고, 우리 또한 육신이 죽더라도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나눔 및 묵상 7: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8,10-1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 육적인 삶이 아니라 그 삶을 벗어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8,12-13)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낌없이 내어 주셨기에 이것을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없는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갚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에 빚을 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성령의 이끄심대로 의로운 삶으로 주님께 사랑을 갚아 드려야 합니다. 또한 이 삶(육적인 삶을 버리는 삶,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는 삶)이 나를 멸망에서 구원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 줍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8,14)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고, 변화된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나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가 되는 엄청난 은총을 주셨고, 그래서 내가 감히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육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육적인 삶에서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며, 성령 안에서 성령께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2. 고난과 희망과 영광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나는 옛 삶으로 돌아가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육신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두려움없이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5)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성령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며 살아는 하느님 자녀들은 기쁨이 넘칩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내가 기도할 때 기쁨에 넘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또록 해 주시고, 기쁘게 응답해 주십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렇게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빠! 아버지!”는 기쁨에 넘치는 자녀의 외침입니다. 또한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자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외치는 탄원과 탄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나를 이끄시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을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다시 기억해 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상속받을 유산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내가 걸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8,16-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내가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갈 때, 성령께서는 나를 이끄시어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게 만들어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하느님께로 향하는 나를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역경도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내 수고이기 때문이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만이 하고 있는 수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기쁘게 이겨내고도 남을 힘이 믿는 이들에게 있기에,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뻐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 맺는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은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하면서 새벽부터 논에 나가서 일을 합니다. 논을 갈고, 모를 심고, 물을 대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논에 나가 모들의 상태를 관리합니다. 만일 가을의 수확이 전혀 없다면 농부들의 이 수고는 괴로움이고 고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알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어 풍성한 수확을 할 것임을, 그래서 오늘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8,18)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에 해야 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것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엄청난 은총이 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어지는 어려움도 기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계시될 영광’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권능에 찬 현존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현존을 뵙는 영광은 모든 것을 이겨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시기 전에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게 될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지는 현세의 고난을 이겨내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 그 영광이 나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8,19-21)

 피조물은 인간과는 구분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단죄 받은 인간의 운명에 연루된 물질세계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현존 속에서 살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단죄에 연루되었듯이, 인간의 구원에 참여하여 ‘보시기 좋았던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서 진실한 믿음을 간직하고, 환난과 역경을 이겨낸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은 하느님 자녀들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8,22)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진통을 겪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담의 범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3,17-19)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다시 받아 주셨으며,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재림)을 통해 구원은 완성됩니다. 이때 하느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되고, 피조물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해방)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8,23)

 성령을 첫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구원을 통하여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탄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 영광을 차지하기 위하여 오늘도 성실하게 살아가며, 오직 주님만을 향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24-25)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환난을 겪으면서도 인내하고, 인내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수양을 키우며, 구원을 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헛된 것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시작된 구원을 살아가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자녀들은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희망(다시 오심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신앙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며, 충실한 종의 모습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삶이 바로 신앙인들의 삶이고, 그 삶이 바로 열매 맺는 삶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성령께서는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즉,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나를 대신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해 주십니다.”(로마8,26)

 성령께서는 나약한 신앙인들과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십니다. 나약하지만 기도하며 성령께 자신을 맡기고,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려는 이들을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굳은 믿음을 간직하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도록 언제나 보호하시며, 죄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심초사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것으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언이나 어떠한 인간적 탄식과도 무관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외아드님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신 아드님의 희생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8,27)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구원이 재림을 통하여 완성될 때까지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이들은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으로 믿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려 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장애되는 것들을 물리치려고 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자기 생명을 구하지 못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의로운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몇 명’ 만을 가리키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믿는 모든 이들을 향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그 문으로 들어올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이들이 구원을 향해 나아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사람 편에서의 불신과 헛된 욕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는 이들은 결국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8,29)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을 가지고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아셨고,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시어, 내가 외아들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이들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모범이시고, 모든 인간이 나아가야 할 대상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것을 “맏이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부활하여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받게 될 것임을 표현한 것이고, 예수님을 닮게 됨을 설명한 것입니다.  
가 되게 하셨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드러내시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순명하시고,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순종과 순명을 통한 구원의 길을 걸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이고, 그 길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따라서 그 길은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세상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하느님 자녀들이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와 의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을 가득 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믿는 이들이 영광스럽게 되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8,30)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른다고 하면서 다른 것들에 마음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나아가 헛된 것들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내 눈에는 참된 가치가 온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가치가 온전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나는 내가 소중한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선택의 삶은 결국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릴 것입니다.

2.3.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하느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는 이들은 굳은 믿음으로 확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었기에 아들 이사악마저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사도들이 주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기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 무엇도 믿는 이들에게서 확신을 빼앗아 갈 수 없고, 그 어떤 시련도 주님께 대한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굳은 믿음’으로 ‘확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해당 됩니다. 믿기는 하지만 확신이 없으면 결국 행동은 다르게 합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확신의 삶에서는 멀리 있습니다. 굳은 믿음으로 확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아끼지 않으시고”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며 자신의 모든 것(외아들 이사악)을 내어 놓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8,31-32)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보던 세상에 눈멀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기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언제나 죽음의 위협 속에 있고, 거짓 선교사들로부터는 많은 모함을 받아 가슴에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에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라는 고백은 굳은 믿음으로 확신의 삶을 살아가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하느님께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기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크시다면 나도 하느님을 위해서 아까워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릴 수 있어야 하며,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으니 시련이나 고통,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계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은총을 베푸셨던 것처럼(야훼이레) 나에게도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나눔 및 묵상 8: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계획하신 구원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기에 확신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살고 있기에 그 기쁨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또한 하느님께서 내 편이심을 고백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나의 아버지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로마8,33)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부르시어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사명은 복음을 선포하고, 의로운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하느님 안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죄가 있다고 고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고발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셨고, 그렇게 바오로를 사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또한 바르나바를 보내시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고,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를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기에 확신 있는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되는 것이고, 나의 행위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저 나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으로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로마8,34)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온전히 응답하며 선을 행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응답하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또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인간이 되셨고, 나의 구원을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수난을 당하셨으며, 돌아가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단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이 따르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들을 누가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죄인 취급하며,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구원받는지 알게 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을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셨고, 새로운 계명을 주셨으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주신 그분,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께서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확신 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 칼은 살해되는 것 또는 전쟁을 뜻한다.
입니까?”(로마8,35)

 믿는 이들은 어떠한 고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누구신지 알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몸에 위협을 가하면 흔들릴 수 있기에 더욱 굳은 믿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육신을 통제합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역경, 박해와 굶주림, 헐벗음이나 위험 속에서도, 칼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또한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며, 주님의 사랑에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자신의 육신의 고통까지도 주님께 맡겨 드리기에 당당하게 박해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겸손하게 주님께 의탁하지 않으면 결코 환난이나 역경, 박해나 굶주림 등의 고통 속에서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은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주님의 은총을 청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서 길을 가는 동안 조 베드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나는 천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조용삼 베드로는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 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관장 앞에 끌려갔는데, 첫 번 신문에서부터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은 자만과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 데 대하여 벌을 받아 슬프게도 굴복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너도 배교하라”고 말하니 조 베드로는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아니 네 아비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조 용삼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물어 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다른 말씀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나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였던지 하루나 이틀 후 2월 14일 옥중에서 성세를 받은 후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에 불과하였었다.(순교자 조용삼 베드로에 관한 기록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있고, 그 사랑을 받고 있기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이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 때문에 재산과 심지어는 생명까지 빼앗긴다 하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삶의 자리를 떠나 굶주림과 헐벗음에 처해졌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반대자들로부터 온갖 위협을 당하고,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위험을 겪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향한 마음을 접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칼은 죽음이나 전쟁을 의미하는데,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고 유다인들에게서는 배교자나 이단자로 판결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8,36-37)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라는 시편(44,23)의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죽음의 구렁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탄식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그 죽음의 구렁 속에서도 주님 때문이라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시며,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붙들어 보호하시기에,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이들은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라는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님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시편의 말씀(시편44,23)을 끌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44,23에서는 탄원이 섞인 청원입니다. 24절에는 “깨어나소서. 주님, 어찌하여 주무십니까? 잠을 깨소서, 저희를 영영 버리지 마소서.”라고 탄원을 합니다. 구원해 달라고 청을 합니다. 하지만 36절의 말씀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환난, 박해, 역경, 굶주림, 위험, 칼등의 모든 어려움을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 또한 주님께 대한 체험을 통한 확신이 있을 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오롯이 주님께 맡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나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마치 장터에서 좋은 물건을 그냥 준다고 했을 때, 아무리 줄을 서라 해도 들리지 않고, 모두에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막무가내로 밀려드는 사람들처럼, 그래서 마침내 그 물건을 움켜잡는 사람처럼, 그 무엇도 믿음을 가진 나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는 추운 겨울 얼려 죽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주님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 다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이름을 지닌 천신들을 놓고 갖가지 상상을 하였다. 이러한 이름을 가진 천상 존재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종교 세계 통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특히 모세의 율법과 그 체제의 수호자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의 직역은 “높이도, 깊이도”이다. 이 두 말은 고대 점성술에서도 쓰이던 용어로서, “높이”는 움직이는 어떤 천체가 가장 높이 다다르는 지점을, “깊이”는 별들이 솟는 지평선 아래의 하늘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두 용어는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이 두 우주 공간, 또는 그러한 두 공간에서 움직이는 천제들이나 신비로운 힘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힘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믿는 이들을 결코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믿는 이들의 확신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습니다. 확신을 가진 믿는 이들의 행동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은 확신이 없기에, 유혹이 밀려오면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서 ‘환난입니까?’라는 질문에 믿음이 약한 이들은 조심스럽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 더 나아가 모든 질문에 부끄럽게도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합시다.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은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님께 매달릴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유혹이 밀려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주님께 확신이 있는 나를 주님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어떤 것이 유혹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차지하고 있는데,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고급 승용차를 가진 사람이 덜컹거리며, 언제 폐차 될지 모르는 승용차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고급 승용차를 팔아서 아무 필요도 없는 고철을 사겠습니까? 결코 팔지도 않고, 결코 사지도 않습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있는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참으로 귀한 것을 가지고 있는 내가 무엇을 더 욕심내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확신 안에서 기뻐하고, 그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 확신과 기쁨은 어느 누구도, 어떤 상황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고,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③ 무엇이 나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거에 무엇이 나를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떼어 놓았습니까?
                                                                               
                                                                               

④ “믿는 이들의 확신”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어떠합니까? 내 안에서 어떤 느낌이 솟아나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① 나를 유혹하여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의 목록을 정해보기 ②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행동으로 드러낼 것들 3가지 정해보기 ③ 신앙생활 결의문 작성해 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9: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6과: 율법과 죄와 죽음(읽어야 할 말씀: 로마7,1-25)]]></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20]]></link>
			<description><![CDATA[제 6과: 율법과 죄와 죽음
(읽어야 할 말씀: 로마7,1-25)

1. 시작기도: 로마7,7-25 율법과 죄와 죽음
7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에서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8 이 계명을 빌미로 죄가 내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사실 율법과 상관이 없을 경우 죄는 죽은 것입니다. 9 전에는 내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1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13 그렇다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16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율법과 죄와 죽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때 그것을 버리고 다시 윗 단계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상황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면 결코 변화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그 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나는 은총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7,24)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과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께서 누구신지를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고, 나를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시다. 

2.1.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칠 때, 유다인이 아닌 다른 민족 출신들에게도 계속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모두 율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로마7,1)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율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관련된 율법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간통한 여자라고 불리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져,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겨도 간통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로마7,2-3)라고 단적인 예를 들면서 죄에서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종속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덕분에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로마7,4)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율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 전에 우리가 육에 갇혀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죄 많은 여러 욕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법전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로마7,5-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와 관련해서는 죽게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과 관련해서도 그 종속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에 따라 죄인에게 요구되는 사형 언도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이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게 되었으니, 율법의 규정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인들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눔 및 묵상 5: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와 관련해서는 죽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무엇입니까? 나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와 관련해서는 죽게 되었는데,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2.2. 율법과 죄와 죽음
 율법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은 죄를 몰랐을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고 계십니다.(로마7,7) 율법과 상관이 없는 경우, 사람의 행동은 그것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평가하는 율법 체계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죄냐 유죄를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로마7,9-10)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계명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계명을 빌미로 죄가 내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로마7,7-8) 사실 율법과 상관이 없을 경우 죄는 죽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 이전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오로 사도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에서 죽어 있었던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로마7,11)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법을 따름으로서, 하와가 뱀에게 속은 것처럼 인간도 속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데 인간은 죽음을 선택하고, 그것이 참되다고 착각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정결례를 행함으로써 자신이 깨끗해 진다고 생각하였습니까? 손을 씻음으로써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그렇게 믿으며 죄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로마7,12)라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이 죽음을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죽음을 가져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7,13)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죄의 종의 된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4-15)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로마7,16-17)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의 육 안에는 선이 아니라 죄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9)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기를 바라지만 자기 힘으로는 늘 실패합니다. 그래서 선을 바라면서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악을 행하고 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7,24)라고 탄식하십니다.

나눔 및 묵상 6: 
바오로 사도는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로마7,18)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선을 행하려는 마음들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자신의 인정을 통하여 로마의 교우들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7,24-25)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죄에서 죽고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결심도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7장 1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죄는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듭니까? 죄는 어떻게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까?
                                                                               
                                                                               

③ 내가 하고자 하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의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실천하기로  마음 먹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4. 실천사항 ① 죄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기 ② 죄에 떨어진 이들을 비난하지 말고 나 또한 죄에 떨어졌었음을 기억하기 ③ 주님의 은총에 힘을 입어 옳은 일들을 실천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8: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5과: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읽어야 할 말씀: 로마 6,1-23)]]></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19]]></link>
			<description><![CDATA[제 5과: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
(읽어야 할 말씀: 로마 6,1-23)

1. 시작기도: 로마6,15-23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
 ‘의로움의 종’이라는 표현과 ‘죄의 종’이라는 표현은 느낌이 현저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의로움의 종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나약한 의지는 의로움의 종의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라 죄의 종의 불순종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의로움의 종입니다. 의로움의 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순명’입니다. 주님께 순명하는 내가 되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의로움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2.1.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

 아담의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멸망을 바라시지 않고 구원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드러나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생각(로마6,1)을 결코 옳지 않습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겠습니까?(로마6,2)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3-4)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죽고 은총 안에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죄의 사함을 받았고, 죄에서는 죽어 예수님과 결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 죽음에서 부활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세례성사를 받을 때 죄를 끊어 버린다고 고백했고, 마귀를 끊어 버린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끊어 버림으로써 더 이상 죄의 종노릇(로마6,6)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죄와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림으로써 죄와 유혹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6,8)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로마6,1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기억시키면서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6,11)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 방식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이야기 해 주십니다.
첫째,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로마6,12)
둘째,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6,13)
셋째,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6,14) 그러므로 은총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실천적 성화를 통해 의로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의로움을 살아가고 있지만 죄를 짓기 쉬운 인간의 나약한 경향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 자녀들을 유혹하기에, 세례 이후에도 끊임없는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죄의 유혹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승리에 힘입어 그 죄의 욕망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자신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손, 발, 눈, 입 등 모든 신체 부위(지체)는 영적 전쟁터에서 죄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선을 세상에 실현하는 의로움의 무기이며, 찬양의 도구입니다. 

 죄가 하느님 자녀들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총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죄는 더 이상 절대적인 주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 제사로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이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지킬 수도 없는 법 조문에 얽매여 끊임없이 죄책감과 죽음의 공포 속에 사는 상태를 뜻합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는 알려주지만, 그것을 이길 힘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은총 아래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현존 안에 사는 상태입니다. 은총은 단순히 죄를 덮어주는 것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켜 죄의 유혹을 실제로 이겨내고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줍니다.

2.2.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나는 내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로마6,16)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서의 삶의 끝은 죽음이고,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삶의 끝은 영원한 생명이니 하느님의 종이 되어 성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로마6,23)임을 알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이 종”(로마6,18)이 된 로마 교회 공동체를 칭찬하십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로마6,17)

 성화(聖化)는 죄의 종이 된 사람이 빠져든 불법과 불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따로 선택하시어 당신과 밀접한 관계 속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주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의로움을 실천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속해 있음을 감사하며,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세례성사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간 사람들의 삶, 죄에서 죽고 은총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을 내가 살아가고 있고, 내 형제자매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하느님의 무상적 자비(은사)라는 말씀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없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세례 받음으로서 ‘나는 구원되었다. 내가 비록 지금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욱 잘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6장 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세례성사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내 형제자매들의 모습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 된 모습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③ 주님의 은총 아래에서 살아가는 나는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삶은 나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순종하기 힘들 때는 언제입니까? 그리고 그 순종의 삶을 가로막는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④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어떻습니까? 내가 느끼는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4. 실천사항 ① 세례성사의 삶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기 ② 나의 삶으로 의로움을 드러내려 노력해 보기  ③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해 주심에 주님께 감사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8: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4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읽어야 할 말씀: 로마3,21-5,21)]]></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18]]></link>
			<description><![CDATA[제 4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읽어야 할 말씀: 로마3,21-5,21)

1. 시작기도: 로마3,21-31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할례 받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는 신앙인들은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믿음 때문에 어떠한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며,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고, 마침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도 웃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을 주님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주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는 삶, 그 삶이 바로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아담을 통해서는 죄가 들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을 통해서는 구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인내하면서 구원을 희망하는 이들, 그들 중에 내가 있음을 주님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2.1.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3,21-2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킴을 통하여 의로움을 추구하던 옛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통해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새 시대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성취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은혜로 그분 앞에 의롭게 되고 구원 받게 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은 계약과 약속에 성실하심을 뜻합니다. 의화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의로우신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어겼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약속을 실현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오는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당신 약속의 실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로마3,23-25)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을 명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로마3,26-27)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3,28)라는 말씀을 통해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로마3,29)라는 말씀을 통해서 세상 모든 이들이 구원 대상임을 알려주십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할례 받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로마3,30)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이들이 구원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된다면 율법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3,31)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 조건 때문에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기에 믿는 이들은 예수님 안에서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또 율법을 완성하시어 그 본연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고,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며, 그 율법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2. 아브라함의 믿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로마4,2-3)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의롭게 해 주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로마4,4-5)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노래한 다윗의 노래를 인용하면서 의로움은 전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로마4,7-8) 
 또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기에 의로워짐을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4,11) 라고 알려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시편 31,1-2를 이용하여 신앙을 통한 의화를 증명하면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된 것이니 인간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3. 믿음을 통하여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롭게 해 주시기에 구원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 편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율법을 알기 전에 걸었던 그 길을 율법을 지키는 이들도 마땅히 걸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이들의 조상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취도 따라 걸었습니다. (로마4,12)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로마4,13)

 할례가 의화나 구원의 표지는 아닙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율법과는 상관없이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율법은 진노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기 때문입니다.(로마4,14-15)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하느님의 진노를 야기한다는 말은 율법에만 의존하는 자는 약속의 상속인이 되지 못하고 상속의 혜택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은 상황에서 죄인들을 의화 시키시는 하느님의 의해 신앙으로 의화하고 수많은 후손을 가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할례 받은 유다인뿐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모든 이방 민족도 율법과 상관없이 신앙을 통해 의화되고 약속의 상속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음으로써 의화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4,16-17)

 아브라함은 100살이 다 되도록 친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4,18)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로마4,19-20)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절망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로마4,21-22)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4,23-25)

 예수 그리스도께 참된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심일 굳게 믿음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나의 믿음을 의롭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나의 보잘 것 없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 앞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기도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당신 은총으로 나를 의롭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본받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배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나의 믿음을 의롭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2.4. 의롭게 된 이들의 삶과 희망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인데,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이제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생명, 구원)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로마5,1)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바로 죄와 벌과 그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5,2)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얻은 ‘죄의 용서와 구원’을 움켜잡게 만들고, 회개의 삶으로 드러나게 만들어 줍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품위를 누리며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오로지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속으로 들어갈 때 사도 바오로처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이들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영광을 다시 희망하게 됩니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두 눈으로 뵙는 것이고, 그 영광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그 영광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키워 나갈 때 나는 바오로 사도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을 간직한 이들은 이 영광을 희망하며, 기쁘게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박해나 순교마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3-5)
 
 환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이들은 자랑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눔 및 묵상 3: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했기에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나를 박해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불처럼 타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내 옆에 소화기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타오르려고 할 때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타오르려고 할 때 내가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싱싱한 달걀과 상한 달걀은 4.5%의 소금물에서 구분이 됩니다. 그 얼마 안 되는 소금물에서 상한 달걀은 위로 떠오르고, 싱싱한 달걀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겪는 환난은 견딜 수 없는 환난이 아니라 견딜 수 있는 환난입니다. 그 환난을 이겨낼 때 우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또 그 인내를 통해서 수양을 쌓고, 변화된 나의 모습은 희망을 자아내게 합니다. 인내를 통해 내 몸과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수양입니다. 그렇게 내가 주님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내가 꿈꾸는 헛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시고, 알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면서 환난을 인내하고, 그 인내를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된 나는 세상적인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결코 헛된 희망이 아님을 성령께서 보증해 주십니다.

나눔 및 묵상 4: 
순교자들은 굳은 믿음 안에서 환난을 이겨냈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인내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희망하며 기쁘게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 생명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손해가 아님”을 알게 하고, “내 모든 것을 내어 놓아도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러한 나의 확신과 믿음을 내 자녀들이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는 어떻게 내 자녀들의 신앙을 돌보아야 할까요? 내 가족의 신앙을 돌보아야 할까요?
                                                                               
                                                                               

 내가 믿는 것과 내가 희망하는 것이 내 삶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는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삶으로 인내와 수양을 통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나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와 신부님께서는 환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인내하셨고, 고통과 수난을 인내하시며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자신이 희망하고 있는 것을 당당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나 또한 이런 믿음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로마5,6-11) 

2.5. 아담과 그리스도
 바오로 사도는 죄와 죽음의 기원으로 아담의 범죄를 이야기하며 아담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과 대조시킵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한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한 구원은 그 모든 것들을 없애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아담은 그리스도를 예고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5,12)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죄 때문에 깨져 버린 조화를 다시 이룰 수 있도록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입니다. 아담은 그리스도를 예고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차이점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담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죽음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5,12)

 먼저 이것은 아담의 불순종을 말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죽음이라는 유산을 후손들에게 주었고,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아담의 불순종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의 위력이 죽음이라는 열매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아담에서 모세까지 이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이기는 하였지만, 율법이 없었으므로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는 어떤 법에 따라 죽음의 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 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모세 사이에 살았던 사람들이 저지른 죄 역시 죽음의 위력을 지니므로, 죽음은 순전히 외적인 벌이 아니라, 아담의 잘못으로 인류를 지배해 온 바로 그 죄가 지닌 본성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세 이전에도 죄가 모든 인류를 지배하였다면 이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죽음의 권세 안에 갇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죽음의 권세는 아담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는 날까지 죽음의 위력에 굴복 당한 죄 많은 인류 전체를 대표하고 또 그들을 내포합니다.

 죄는 인간을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이 분리가 영적이며 영원한 죽음이고, 육체의 죽음은 그러한 죽음의 표징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5,18)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로마5,19)입니다.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그런데 이것은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5,2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은사는 아담의 범죄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아담의 범죄는 죽음을 끌어들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은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사는 죄인들에게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3장 21절부터 5장 21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자랑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의 은총 안에서 내가 자랑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③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까? 절망에 빠졌을 때의 나의 모습과 그때 희망을 갖게 했던 계기는 무엇입니까?
                                                                               
                                                                               

④ 나 한 사람의 행위로 죄가 들어올 수도 있고, 나 한 사람의 행위로 구원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행위로 내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에 구원이 들어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실천사항 ① 아담이 받은 유혹을 기억해 보기 ② 의롭다고 생각하며,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라사이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아보기 ③ 나를 통해 기쁨과 행복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해 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7: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3과: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읽어야 할 말씀: 로마1,18-3,20)]]></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17]]></link>
			<description><![CDATA[제 3과: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
(읽어야 할 말씀: 로마1,18-3,20)

1. 시작기도: 로마2,1-11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
1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
 하느님은 찬양받으셔야 할 분이시고, 피조물들은 인간이 다스리고 보존하고 함께 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피조물을 놓고, 그것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교만은 하느님의 자리에 우상을 섬기고, 교만은 내 죄를 보지 못하고 남의 죄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무엇인지,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1.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
 바오로 사도는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로마1,18-19)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1,22)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하느님을 잊고 바보가 된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로마1,24)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로마1,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우상숭배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의 형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지배하라고 사람을 창조하셨고, 피조물의 모양을 만들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은 죄에 떨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권능에 찬 그분의 신적 본질이나 찬란한 현존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피조물 안에 드러났습니다. 땅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조물 안에 계시되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부인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피조물을 구분하지 못했고, 죄에 떨어졌습니다.

 거짓이라는 말은 진리와 반대되는 말로서 바오로 사도는 이 표현을 통하여 유다인들이 우상을 숭배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며,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로마1,23절)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을 저버려 윤리규범을 잃고 부도덕한 성생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범죄행위는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죄에 따라 벌하시고, 그들의 죄스러운 생활이 그분의 심판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진노는 미래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 죄인들의 타락한 인격 안에 내리고 있습니다. 26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7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30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고 모략꾼이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31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32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로마1,26-32) 

 
2.2.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은 심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사람이고, 남을 심판할 때 그것이 바로 자신을 단죄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로마2,1-2)

 남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로마2,3)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는 회개로 이끌기 위하심인데, 회개할 줄 모른다면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에서 진노를 끌어당기게 됩니다.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로마2,4-5) 
 하느님께서는 행실대로 갚으시니 꾸준히 선을 행하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해야 합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2,6-11)

2.3. 다른 민족들과 율법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됩니다.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로마2,14)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로마2,15)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사실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로마2,16)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방인들과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율법을 모른다 할지라도 선과 악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보다 잘살지 못하며 잘 산다고 착각하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 율법을 배워 하느님의 뜻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할 줄 안다고 합니다.”(로마2,17)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죄를 꼬집었습니다. 

첫째, 자신이 눈먼 이들의 인도자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빛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로마2,19)
둘째, 율법에서 지식과 진리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며 철없는 자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로마2,20)
셋째,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로마2,21)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로마2,21-23)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어기고 있는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할례받은 것이 아닙니다. 24 과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5 그대가 율법을 실천하면 할례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로마2,24-25)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율법의 규정을 지킨다면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26 그러니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27 그리하여 몸에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율법을 준수하는 이들이, 법전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심판할 것입니다. 28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유다인이 아니고, 살갗에 겉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유다인이고,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칭찬을 받습니다.(로마2,26-29)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과 ‘아! 사람아!’라는 말로 바오로 사도는 가상의 인물을 상정하고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다른 이들을 심판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인물을 17절부터는 이방인보다 우월하다고 자처하는 유다인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자랑하는 유다인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서도 이방인을 가르치려 한다고 유다인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합니다. 유다인들은 소경들의 인도자,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의 빛, 어리석은 자들의 교정자, 미성숙한 자들의 선생 등의 예를 들면서 그들의 모순된 생활을 비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 유다인이라는 말은 마카베오 시대부터 “히브리인”이나 “이스라엘인”이라는 옛 명칭 대신 사용한 것입니다.
이 율법을 지닌 선민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들이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2.4. 하느님의 진실성과 사람들의 죄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으로서 더 이로운 점, 할례의 이점에 대해서 우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들에게 맡기셨다는 것(로마3,2)과 유다인들의 불성실함도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로마3,3)는 것을 듭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 온전히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해야 하는 우리는 하느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오해해서도 안 되고, 오롯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오해를 받으며 비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더 나아가서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어떤 자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면서 우리를 비방하고 있습니다.(로마2,7-8) 3 그러면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불성실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불성실함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는 말입니까? 4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당신께 재판을 걸면 당신께서 이기실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지만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인간의 방식으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진노를 내리시므로 하느님을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로마3,3-5) 


 선의 결핍이 악입니다. 악을 통해 선이 무엇인지도 드러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없고, 믿음도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믿음으로 이어지고, 그 믿음은 다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2.5. 사람은 모두 죄인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로마3,9) 그리고 성경을 인용하여 모든 인간의 죄를 고발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인간의 죄를 이토록 가혹하게 파헤치는 이유는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느님의 구원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한 은총,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믿음과 세례 성사를 통해서만 비로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첫째,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3,10) 
 ‘의로움’이란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도덕성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유다인은 율법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방인은 자신들의 지혜로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서는 단 한 사람도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은총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시편14편과 53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악행을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2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3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시편14,1-3)

	“2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불의를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3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4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시편53,2-4)
 
둘째,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로마3,11-12)
 인간의 죄는 단지 행동의 오류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알아보는 지성(깨달음)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찾음) 자체를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빗나가다’는 원래 표적을 벗어난 화살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이탈했다는 뜻입니다. ‘쓸모없이 되었다’는 것은 썩어서 못 쓰게 된 음식이나 폐기물을 의미합니다. 은총을 잃어버린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아무런 이바지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떨어졌음을 가리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시편 5편과 140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10 그들 입에는 진실이 없고 그들 속에는 흉계만이 들어 있으며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들 혀는 아첨하기 때문입니다.”(시편5,10)

	“2 주님, 악한 사람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포악한 사내에게서 저를 보호하소서. 3 저들은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날마다 싸움을 일으킵니다. 4 뱀처럼 혀를 벼리고 살무사의 독을 입술 밑에 품습니다.(시편140,2-4)
 
셋째,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로마3,12-18)

 바오로 사도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 등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죄가 인간의 전 존재에 어떻게 침투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 존재 전체의 전면적 부패를 언급합니다. 인간의 몸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와 영광의 도구이지만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목구멍, 혀, 입술, 입은 열린 무덤이며 죽음과 부패의 냄새를 풍기는 장소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과 비방, 모욕의 말이 타인의 영혼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와 독설은 ‘살무사의 독’입니다. 언어가 타인을 해치고 파괴하는 이기심의 무기로 악용되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계명을 지킵니다. 제8계명인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는 험담, 비방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시편 10편, 36편, 59편과 이사야 59장을 인용하십니다.

	“5 그의 길은 언제나 성공에 이르고 당신의 심판은 높이 있어 그에게 미치지 않으니 그는 자기 반대자들을 모두 조롱하며 6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재앙을 모르는 그자 7 저주만을 퍼붓습니다. 그 입은 사기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혓바닥 밑에는 재앙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시편10,5-7)
 
	“7 그들은 저녁이면 돌아와 개처럼 짖어 대며 성안을 돌아다닙니다. 8 보소서, 그들은 입으로 거품을 내뿜고 입술에는 칼을 물고서 말합니다. “대관절 누가 듣는단 말이냐?”(시편59,7-8)

	“2 악인은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죄악을 즐긴다. 그의 눈에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빛이 없다. 3 그는 오히려 죄 거리를 찾아내고 미움을 일삼으려 자기 눈앞을 잘 닦아 놓았다.(시편36,2-3) 
 
	“7 그들의 발은 나쁜 짓 하러 달려가고 죄 없는 이의 피를 쏟으려고 서두른다. 그들의 생각들은 악한 생각일 뿐이고 그들의 행로에는 파멸과 파괴만이 있다. 8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길에 공정이란 없다. 그들이 자기네 길을 비뚤게 만들어 그 위를 걷는 자는 아무도 평화를 알지 못한다.”(이사59,7-8) 
 
 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한 거룩한 존경과 사랑입니다. 인간의 눈에서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질 때, 인간은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리에 앉게 되며, 그 결과 도덕적·영적 붕괴가 일어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의 부재는 모든 부패의 뿌리이자 최종 원인입니다.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른 발은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폭행과 폭력으로 타인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파멸과 비참은 하느님을 떠나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 인간 사회가 맞이하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데,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 전쟁, 비참함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눔 및 묵상 2:
 바오로 사도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로마3,12-1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삶과 다르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내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내 마음을 전할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을 잘못해서 상대방이 마음 아파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지만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법을 주신 분을 모독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주신 분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로움 때문에 감사하며 마땅히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하여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에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입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우리는 모두 계명을 지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임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에서 멀어질 때는 언제이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사랑에서 멀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③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비신자보다 나은 생활은 무엇이 있습니까? 내 삶이 비신자들보다 의롭거나 경건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봉사와 나눔과 이웃 사랑이 비신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어떻게 해야 비신자보다 더 나은 생활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4. 실천사항 ① 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 ② 참된 지혜를 추구하며 하느님만을 섬기기 ③ 호의를 베푸는 삶을 살아가며 사랑과 용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6: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2과: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16]]></link>
			<description><![CDATA[제 2과: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
(읽어야 할 말씀: 로마1,1-17)

1.  시작기도: 로마1,8-15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
8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9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10 나는 끊임없이 여러분 생각을 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 11 나는 여러분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 12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까지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작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서처럼 여러분에게서도 내가 어떤 성과를 거두려는 것이었습니다. 14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15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로마 방문을 하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바오로 사도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는데 얼마나 열정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무엇인지, 어떠한 힘이 있는지를, 믿는 이들이 어떻게 구원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데 더욱 열성을 다할 수 있도록 다짐하며, 복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음을 굳게 믿고 나 자신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① 인사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내며 첫 머리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로마1,1)라고 인사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노예를 뜻하기도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신분으로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았다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 보는 로마 신자들에게 자기가 ‘사도’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내세웁니다. 갈라티아 교회에 예루살렘 신자들이 와서 바오로 사도가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참 사도는 역사의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열두 사도만이 참된 사도라고 말하며 바오로가 사도가 아님을 퍼뜨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혹시 갈라티아나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이 로마인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니 미리 자신이 사도임을 밝혔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예수님에 의한 구원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도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고,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파견하였으므로 자신도 사도임을 밝혔습니다.

②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복음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로마1,2) 로마 공동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에 구약과 신약이 근본적으로 하나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미리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1,3-4)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로마1,5)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1,6)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이 모든 약속들이 성취되고 실현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바오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로마1,7)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교우들을 향하여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라는 말을 통해서 교우들이 누구이며, 사도인 바오로가 교우들을 누구로 보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하고 인사합니다. 나 또한 형제자매들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그들을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 바라보게 되고, 그들에게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이들(성도)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거룩하게 됩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하기에 거룩한 이들로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었기에 거룩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불리움을 받았으니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전제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로마1,8-9)라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의 믿음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까? 우리 공동체의 믿음을 통해 감사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③ 바오로 사도가 로마를 방문하려는 이유
바오로 사도는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를 이렇게 드러냅니다. 

	“나는 끊임없이 여러분 생각을 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로마1,10-11)

 바오로 사도가 로마를 방문하려는 이유는 첫째,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고, 둘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 12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로마1,11-12)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영광이나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선익과 신자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겸손하게 로마인들에게 다가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은사뿐만 아니라, 로마 신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신앙을 통해 자신 또한 격려를 받고 싶다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이는 전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게 믿음의 교류를 나누는 복음적 친교의 아름다운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작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서처럼 여러분에게서도 내가 어떤 성과를 거두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로마1,13-15)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 가려고 여러 번 노력했지만, 사목적 상황과 성령의 이끄심 등으로 인해 번번이 길이 막혔습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하느님의 더 큰 섭리가 있음을 믿고 기다리는 사도의 태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거두고자 하는 성과는 단순한 교세 확장이나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 신자들이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 맺게 될 성령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닥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이 아니라 다마스쿠스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거저 받은 은총과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무가 너무나 크기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그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뜨거운 부채 의식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도 물론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교 사명이 있지만, 은총에 대한 감사와 거룩한 부담감(빚)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④ 바오로 사도의 사명
 바오로 사도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스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다른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빚이 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이 구분을 여기서 밖에 쓰지 않는다. 그 외에 바오로 사도는 보통 유다인과 비유다인을 구분한다.
,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로마1,14)

 회개와 동시에 사도로서의 소명을 받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부르신 하느님의 뜻이 이방인 선교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사도22,21). 그때 주께서 ‘나는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낼 터이니 어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의 선교직무를 성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부여받은 것입니다(갈라1,3). 바오로 사도는 주저하지 않고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로마15,16)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부르셨기에 만일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9,16)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라고 해서 유대인을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해외 거주 유대인들은 항상 있었으며, 그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구분 없이 모두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9,19-23) 

 하느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 만인의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나눔 및 묵상 1: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할 빚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빚이 있습니까? 나는 누구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까?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는 누구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려고 하고 있습니까?
                                                                               
                                                                               

⑤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께로부터 오거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사람의 영이나 마음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사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또 그들의 몸 안에도 사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사시는 사람에게 단순히 외적인 존재로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을 자기 안에 모신 사람도 결코 성령과 혼돈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사람 몸만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교회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하느님의 영의 활동 영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성령께서 기적, 표징 속에 드러나십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서간 바오로 사도는 “영”이라는 낱말을 네 가지 주요 의미로 사용합니다. ⓐ 하느님의 영 또는 성령, ⓑ 사람의 영(창조된 모든 인간에게 들어 있는 영) ⓒ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세상이나 악의 영 ⓓ 주님의 파괴적인 입김(2테살2,8)입니다.
에서는 교회와 또 성령께서 온전하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십니다. 성령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시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에 응답해 주시어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해 주시며, 기쁨과 사랑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⑥ 복음은 하느님의 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1,16)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을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교는 “어디서나 박해받던 종파”(사도 28,22)였으며, 바오로 사도는 자신도 한때는 확신에 차서 박해에 앞장섰다는 사실로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시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지 못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시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 역시 세속의 눈으로는 “지혜로운 이도 많지 않으며 유력한 이도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이도 많지 않았습니다.”(1코린 1,26) 게다가 그들은 그들을 위협으로 여겼던 타 종교나 권력층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혹은 심한 박해를 당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 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표현입니다.(참조: 마르8,38; 루카12,8-9) 여기서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심리적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유다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셨기에 걸림돌이요,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구세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어리석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구원을 주시기에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힘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죽은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살려 주십니다. 그러한 큰 힘을 복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하느님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로마1,17)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인의 죄를 모두 용서한 것(예수의 십자가)은 하느님의 義입니다. 이 義가 복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복음 속에는 하느님의 현존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 복음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義를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오는 인간의 불행과 멸망, 죽음 그리고 인간의 죄악성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義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義는 정의의 계명이 밑바탕에 깔린 개념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은혜와 자비는 하느님이 전적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義가 담겨져 있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시편에서는 “산 이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시편 143,2).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눈앞에서 스스로 무죄의 상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1열왕 8,46; 욥기 9,2; 시편 130,3-4; 이사 64,6). 인간의 의화는 장차 오실 구세주께서 가져다주실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이사 59,15-20). 사도 바오로는 이 의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통하여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의 의화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강조할 뿐 아니라, 그 의화는 완전히 무상의 은총임을 역설합니다. 의화는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실상 모든 이가 죄를 범하였고,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빼앗겼으나(로마 3,23), 하느님께서 순전히 당신의 호의를 베푸시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의화의 결과로 그리스도 신자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의롭다고 인정받거나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참조: 로마 5,19).

 하느님의 의로움(정의)은 각자의 행실이나 업적에 따라 보상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무상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하느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로마서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복음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③ 열정이 있는 복음선포자는 어떻게 태어날까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열정이 있는 복음 선 포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④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라야 주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나를 어떻게 의롭게 만들고 있으며, 나의 의로움의 삶은 어떻게 믿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6: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1과 로마서 입문]]></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15]]></link>
			<description><![CDATA[제1과: 로마서 입문

1. 바오로 사도의 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로마서
 신약성경 중에서 바오로 사도의 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바오로 사도의 가장 긴 편지이며, 죄와 은총, 신앙, 율법, 구원 문제 등 많은 교리 분야에서 논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세기에 로마서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그 이후 오리게네스, 요한 크리소스토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누스 등에 의해 동․서방의 교부 전승에서 로마서의 사상이 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중세에는 스콜라 철학의 대가들이 로마서를 주석하기도 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접어들면서 로마서는 루터, 칼뱅, 멜랑히톤 등 개혁자들의 신학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칼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서」(1919)를 펴내면서 자유개혁 주의자들에게 쐐기를 박았으며, 현대 신학사조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 넣었습니다. 가톨릭 측에서는 종교 개혁 이래 개혁에 대한 반동 및 교회 자체의 자성 운동으로 교회의 교리 및 제도상의 재정비를 단행했는데, 이러한 쇄신 또한 로마서에 많은 근거를 두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의 교우들(1,7)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집필할 당시까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로마 교회의 설립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8)는 말씀으로 보아 이미 교회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에 언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한 사도행전의 기록을(참조:사도2,10-41)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2,7-11)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사도2,40-41)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세례받은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창립했거나 기존 공동체에 합세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도의 선교활동을 에우세비오는 로마 교회의 기원을 사도 베드로와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신약성경의 어떤 곳에서도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창설자라는 말을 하지 않으며,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베드로 사도에 관해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은 베드로 사도가 그때까지 로마에 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입니다.  
 통하여 교회가 설립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교류 속에서 복음이 선포되어 교회가 설립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서를 통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로마1,12)라는 말씀으로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를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인간의 보편적 죄와 하느님 은총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원죄와 개인적 죄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기에, 오직 하느님의 주권적이고 거저 주어지는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믿음, 성사를 통한 의화(義化)를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속량과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세례성사를 통해 실제로 새로워지고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이제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신앙인은 죄와 율법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아래 살아갑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영원한 영광의 상속자가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유다인을 넘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확장된 보편적 구원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앙인의 마땅한 응답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노력하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로마서는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은총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어, 사랑의 실천을 통해 완성에 이르는 역동적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로마서의 집필 시기와 장소; 가이오스의 집, 55년이나 56년 이후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서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의 집’에 머물며 서간을 집필하였습니다. 시기는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에서 모금한 헌금을 가지고(로마15,25-26)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쓴 저 테르티우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로마16,22)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직접 쓰지 않고 테르티우스로 하여금 대필하게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코린토에서 세례를 준 가이오스의 집(로마16,23ㄱ; 1코린 1,14)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저술했습니다. 로마서의 작성지가 코린토라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의 재정관인 에라스토스의(로마16,23ㄱ; 2티모 4,20) 인사를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했다는 점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집필 시기에 대해서 이견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이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코린토 1서에서는 모금 계획이 준비 중에 있었고, 코린토 2서에서는 모금을 시작하라고 지시했으며, 로마서에서는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의 작성연대는 55년이나 56년 이후이며,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를 떠나 트로아스와 마케도니아를 거쳐 코린토로 와서 삼 개월 동안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을 것입니다. 학자들이 편지의 작성 연대에 대한 추정을 달리하는 것은 코린토에서 지낸 시기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인데, 어떤 이는 55-56년으로 보고, 어떤 이는 57-58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3. 로마서의 집필 동기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 복음을 선포하려고 하는데(로마1,15)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 신자들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  '일리리쿰(Illyricum)'은 고대 로마 제국의 속주 중 하나로, 오늘날 유럽의 발칸반도 북서부 아드리아해 연안 지역. 오늘날 지도를 기준으로 보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북부, 세르비아 등이 위치한 지역.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이 그리스를 넘어 로마 제국의 동쪽 구역 최서단인 일리리쿰 변방까지 도달했음을 뜻함. 이 일리리쿰까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동방 지역 선교를 일단락 지은 바오로 사도는 이제 로마 교회를 거쳐 당시 땅끝으로 여겨지던 스페인(서방)으로 가고자 로마서를 집필하게 되었음.
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로마15,20)라는 말씀처럼 세상 모든 곳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원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 편지를 통해 로마 신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과 접촉을 가지려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로 가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대의 비신자들의 박해와 성도들이 헌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성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와 사목적 차원에서 편지를 빌어서 교리나 로마 교회의 문제점들, 유다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논쟁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집필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로마의 공동체에 설명하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로마서를 썼습니다.


4. 로마서 16장에 제기된 문제들
 로마서 16,25-27의 영광송은 그 주제나 문체가 콜로새서와 에페소서와 같은 옥중 서간을 닮았고, 많은 표현들이 바오로 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아닙니다. 일부 사본들은 이 영광송 부분을 15장 뒤에 위치시키고 있는데, 그래서 학자들은 이 부분을 후대에 바오로의 제자들이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집대성할 때 전례 전승에서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로마의 사람들을 알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로마에 가지는 않았지만, 다른 장소에서 로마에 살던 신도들을 만날 수도 있고, 이름은 알지만,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5. 로마서의 구성
 로마서는 바오로 사도의 다른 편지와는 달리 수신 교회의 상황이 크게 작용을 하지 않고, 교리적인 내용(1-11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전체적으로 그 어느 편지보다도 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① 서간의 서언(1.1-17)
 인사(1,1-7)와 감사(1,8-9)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려는 바오로 사도의 소망(1,10-15)
 교의 부분을 예고하는 주제(1,16-17)

② 교의부분(1,18-11,36)
 하느님의 의로움과 진노의 계시, 신앙을 통한 의화(1,18-4,25)
 신앙으로 의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5,1-8,39)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이방인들의 구원이 가지는 상관관계(9,1-11,36)

③ 교훈부분(12,1-15,13)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 노선(12,1-2)
 모든 신도들에게 적용되는 일반 교훈-사랑으로 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12,3-13,14)
 로마 신도들에게 적용되는 특수 교훈-그리스도를 본받는 강자와 약자의 공동체생활(14,1-15,13)

④ 서간의 결어(15,14-16,27)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사도직과 그의 계획(15,14-33)
 문안-바오로 사도의 추천과 개별적 인사(16,1-16)
 마지막 권고와 축복(16,17-23)
 마지막 찬양-영광송(16,25-27)
6. 로마서에 나타난 바오로 사도의 신학 사상
 로마서는 ‘복음의 힘’이라는 대주제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정의, 신앙을 통한 의화, 성령’으로 크게 3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로마서가 바오로 사도의 신학사상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받는 모든 선물의 원천인 하느님의 초월성,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 약속의 소산인 무상으로 주어진 구원, 은총과 죄, 신앙과 세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인간 성화에 끼치는 역할, 성령의 활동, 거룩한 역사의 가치와 옛 율법의 역할, 신앙을 통한 의화 등, 바오로 사도가 긴 선교여행 중에 행한 설교의 주요 테마를 대부분 제시하였으며, 다른 어느 편지에서도 이처럼 종합적으로 잘 피력한 곳이 없습니다. 

① 하느님의 정의
 구약성경에 하느님의 정의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이스라엘의 원수나 이스라엘 백성 중의 죄인들을 벌하시는 하느님을 ‘의로우신 주님’라고 표현하는데(탈출 9,27; 신명 33,21; 2역대 12,5; 이사 46,12; 56,1; 61,10), 이러한 하느님의 악에 대한 처벌은 처벌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의미는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나타내며(판관 5,11; 1사무 12,6-7; 미카 6,3-4; 토빗 13,7; 시편 36,6; 22,31; 이사 46,12; 56,1; 61,10), 이것은 계약에 충실한 그분의 구원행위를 내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성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느헤 9,7; 이사 42,21).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러한 구약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정의는 먼저 올바르지 못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내리는 분노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현재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적 표현으로서, 하느님을 거역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 역사에 이미 개입했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를 산 이방인들의 죄는 ‘불경’과 ‘불의’인데, 불경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이며(로마 1,19-23), 불의는 하느님을 거절함으로써 그분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를(로마 1,21-32) 뜻합니다. 즉 이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로마 1,21).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권능과 신성을 피조물 안에 계시하셨으므로 피조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가 보여지고 그분이 현존하는 곳이며 하느님을 알게 하는 도구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피조물을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성찰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지만, 이들은 이성과 사고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타락하여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종교적․윤리적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그들의 마음도 어두워져서 분별력을 상실하고 하느님을 모시지 않게 되며, 이렇게 해서 인간들 사이에 사악한 관계가 맺어져서 온갖 유형의 불의, 폭력, 억압을 낳게 되고, 이에 대해 하느님의 진노가 불경과 불의를 일삼는 이방인들에게 내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은 이방인들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내려지며,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하지도 않으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 2,6.11).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계시, 약속, 이방인들에 앞서 그리고 그 위에 있을 수 있는 믿음의 유산을 받았고 하느님의 한없는 어지심, 인내, 너그러우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였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심판은 더욱 엄격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특권과 축복을 받았고, 이 특권은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행하도록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고, 진리에 따라(2,2), 행실에 따라(2,6)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엄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유다인들은 율법과 할례라는 특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그 자체로 인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듣고 실천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외형적인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 즉 그리스도의 영,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구원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될 자격이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고 그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분노의 심판이 내려지는데,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이 유다인은 율법을 척도로, 이방인은 양심을 척도로, 그 행실에 대하여 진리에 따라서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② 신앙을 통한 의화
 바오로 사도는 ‘정의’, ‘의화’, ‘의롭게 하다’ 등의 용어를 로마서에서 40번 정도 사용합니다. ‘의화’라는 말은 무죄 석방의 판결을 내리는 재판에서 연유된 말로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심판관으로서 의로운 결정으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자애라는 이중적인 속성이 의로움, 즉 하느님의 정의이며, 하느님께서 의롭기 때문에 인간을 의롭게 하십니다(로마 3,26; 8,33). ‘하느님은 의로우시다’라는 말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원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은총의 생명을 거저 주시는 행위를 뜻합니다. 즉 하느님이 당신 자신과 인간을 위한 구원 계획에 충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의화는 단순히 죄가 없다고 여겨지는 법정적 선언이 아니라, 성령과 은총을 통해 인간 내면이 실제로 거룩하게 변화(성화)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그 믿음은 사랑으로 실천되는 믿음이며, 세례성사와 성령의 은총 안에서 사랑의 삶을 통해 완성됩니다.

 또한 정의라는 말에는 인간의 잘못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진노 행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로마 1,18). 그러나 단지 인간을 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질책하면서도 인간이 하느님을 믿고 복종함으로써(로마 1,5) 죄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영광스런 모습을 되찾게 하는 데 진노의 목적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범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알기 전, 오직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무상 은총이지만, 아브라함이 탄식속에서도 순명한 것처럼 의화된 신자는 삶 속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③ 성령
 의롭게 된 하느님 자녀들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와 율법의 종살이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보호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에 하느님 자녀들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나약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직접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자녀들이 믿음을 고백하고 기도하도록 일상생활 안에서 현존하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시어 조건 없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고, 인간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의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렇게 의화된 이들 안에 성령께서 머무르시며, 마침내 삶 전체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7. 율법과 믿음과 구원과 은총
① 바오로 사도와 율법
 바오로 사도에게 죄와 죽음과 율법은 인간 역사 안에서 주인들처럼 행세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율법이라는 용어를 쓸 때엔 대체로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며, 이것은 자체로 거룩하고 선하고 영적인 것이지만 인간을 생명으로 이끄는 능력은 없으며, 오히려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죄를 많게 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습니다(로마 5,13-20; 3,20; 4,15; 7,7-13; 7,12.14; 8,2). 물론 율법이 있기 전에 죄는 세상에 있었지만, 율법으로 인하여 인간의 죄가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좋고 거룩한 율법을 죄악의 도구가 되게 하실 수 있는가?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임시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왔습니다.”(갈라 3,23).

 율법은 인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가정교사 구실을 하였습니다. 율법이 임시적으로 주어진 이유는 인간 스스로 율법에 의해서 의로움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 즉 구세주가 오시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음을 절감하도록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구원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인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율법은 일시적이고 열등한 역할밖에 담당하지 않습니다.(참조:갈라 3,17-20)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거룩한 율법이 죄악의 도구가 된 이유를 인간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비록 율법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기에 영적이라 할지라도 죄의 종으로 팔린 모든 인간이 체험하는 갈등을 해소시키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로마7,14). 바오로 사도는 죄를 비유적으로 ‘다른 법’이라고까지 부르며(로마7,23), 율법을 탓하지 않고 죄를 탓하고, 하고자 하는 대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탓합니다(로마7,15).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모세의 율법이 반포되자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의식하면서 아담을 본받아 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로마3,20). 원래 율법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고(로마7,10), 결코 하느님의 약속과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만 하고 그 율법에 순종하지는 않았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에게 조금의 유익도 주지 못했습니다(로마2,12-13.17-18.23.25; 9,4). 

 유대인들은 ‘율법에 맞는 행위들’을 실행함으로써 의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율법은 의로움을 산출해 낼 수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산 이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시편 143,2)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율법의 행위들로써’라는 말마디를 붙였습니다(로마3,20). 율법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외부적 규범만을 제시할 뿐, 그것을 실천에 옮길 능력을 제공해 주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었습니다(로마2,17-24).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채워야 할 법은 더 이상 ‘행위의 법’이 아니고 ‘신앙의 법’이었습니다(로마3,27).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발견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율법에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외부로부터 졸라매어 억압하고, 선을 행하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② 구원과 율법
 율법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사상은 다소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돌 판에 새겨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쓰여진 것입니다(참조: 로마 2,14-15). 이방인의 양심에 쓰여진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무력한 것입니다. 양심이 선악을 판단하기는 하나, 양심이 선악의 절대적인 법정이 될 수 없으며, 양심의 법과 하느님의 의지가 동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義를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며 첫째,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참조: 로마 7,12).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율법이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천사를 통하여 주신(갈라 3,19)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오로는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이해”하고 권위 있게 사용합니다. 둘째,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한 훈육 교사 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라4,23-25)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임시적이며 한계성을 지닌 기능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인식케 하는 기능을 갖고(참조: 로마 3,20),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로마 5,13), 율법이 모든 인간에게 죄가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율법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며,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종교에 헌신적이었습니다(갈라 1,14). 율법종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인간은 마지막에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소망 가운데 끊임없는 도덕적 삶을 사는 노고를 쌓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세상과 육과 악마와 싸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결과에 이르고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해 주셔도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날 치유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원인은 인간의 육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힘 때문입니다(로마 7,18). 누구보다도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도 바오로가 율법을 죄와 동일시한 이유는 바로 율법 자체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 타락한 본성의 결과로 인간은 필연적인 ‘유한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의 의견은 바리사이들의 주장을 거슬러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이기에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채울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여(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율법을 완전히 채울 수 있다고 과신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공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과 인간의 실존 사이에는 엄연한 간극이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로마 3,28 ; 10,4).

③ 구원과 믿음
 사도 바오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을 얻는 사실과 방법에 대하여 말할 때는 항상 “믿음”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그에 따르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뿐잉ㅂ니다.(참조: 로마 3,25; 5,1; 갈라티아 2,16 등).

 믿음의 대상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참조: 갈라디아 2,16; 로마 3,22.26; 필립비 3,9)와 하느님이십니다(1데살로니카 1,8). 그리고 믿음의 내용은 구원의 소식(복음)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참조: 1데살로니카 1,9-10; 1코린토 15,1-8).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믿음’믿음: 사도 바오로 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것,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분을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세주로 세우셨다는 것, 인간은 “믿음을 통하여” 이 구원의 열매를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밖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로마 3,8).
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 구원의 계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접함으로써 그 복음과 접하게 되고, 믿음은 그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써 생기게 됩니다(참조: 로마서 10,17). 그리고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행위임으로, 그 복음을 진실로 믿고 자기의 전존재와 생애를 그 복음으로 규정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비로소 믿는 이의 신뢰가 솟아납니다(참조: 갈라티아 3,6; 로마 4,3). 또한 복음은 미래에 관한 것이고 미래에 완성될 것에 관한 것이므로 믿음은 미래와의 연관에서 ‘희망’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로마 4,18-25).

 ‘믿음’이라는 개념 대신에 바오로 사도는 ‘안다’를 쓰기도 합니다. 즉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다는 것과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며(참조: 로마 6,9), 주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신 이가 우리도 부활시키시리라는 것(참조: 2코린토 4,14 등)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4,22)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모두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나서 혹은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과 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첫째로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둘째로 이 은총이란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인류에게 필요한 구원의 공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고 이 구원의 공로가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은총은 구원의 근원이고 믿음은 구원의 방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은총으로 주시는데 그 구원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을 얻는 방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는 이 믿음이 하느님의 구속의 언약에 있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요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義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서 나타내셨는데 바로 이 義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 또한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④ 구원과 은총
 하느님의 은총은 바오로의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4).

 ‘은총’ 은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는 한없는 사랑으로서, 예전에는 성총(聖寵)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란 말 안에는 언제나 완전히 값없이 그리고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는 선물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은총이라는 개념과 공로라는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며 완전히 모순되는 개념입니다. 아무도 은총을 벌어들일 수 없습니다. 은총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상이란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은총의 근본적인 개념은 주로 사람이 전적인 아량을 가지고 주는 선물이며 받는 사람이 절대로 벌어들이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총이란 그야말로 사랑하지 못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밝히며 또한 은총과 죄가 양립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바오로의 구원관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의화의 개념을 통해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구원을 오직 하느님 자비의 은총으로 보는 바오로 사도는 같은 이유로 믿음의 구원 능력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바오로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 준수를 통한 의화 개념에서 벗어나 하느님은 오직 신앙으로 나아오는 자녀들에게 당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고 역설합니다. 즉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오로가 선행을 강조하는 야고보 2,14-19와 반대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등을 역설하는 이면에는 믿음이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천적인 것임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갈라 5, 22; 필리 1,11; 에페 5,9; 콜로새 1,10 등).

⑤ 구원과 교회와의 관계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구원은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오로는 각자는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하는 교회라는 건물에 속해야 된다고 말합니다(에페 2,16; 4,4.12.16; 콜로새 1,18; 참조: 로마 12,12 이하 등). 그래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큰 관심사이자 염려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1코린 1,10 이하; 3,3-4; 4,6-7; 11,17-22; 참조: 로마 15,5; 에페 4장; 필리 2,1-5).

8. 바오로 사도의 구원관의 특징
①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
 사도 바오로의 구원관의 특징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에 대한 공로는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하느님이 (선수)를 취하셨고 인간은 오로지 회개와 믿음의 반응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행위의 결과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고 이 은총의 영향은 한정된 소수에게만 주어지기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바오로의 구원관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적으로 행위가 완전하여도 그리스도가 없는 한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느님의 그 크신 은총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삶의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마음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밖에는 안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였습니다. 인간 역사 안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하느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최고 목적으로 삼는 것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스스로 악과 허무로 빠지게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에 힘입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능력을 힘입어 하느님과 화해하고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필리 3,9). 하느님의 구원은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미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하는 교회에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그의 큰 관심사이자 염려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재림
 바오로의 또 다른 하나의 중심 사상은 마지막 날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장차 만민 앞에 군림하시는 그분 곁에서 하느님 백성이 누리게 될 영원한 삶, 바로 그것이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02:25: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