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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기념 희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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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4과: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2베드1,1-3,1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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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제4과: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2베드1,1-3,18)
1. 말씀읽기: 2베드1,3-11 그리스도인의 소명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8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자는 근시안이라서 앞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이 문란한 교리와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장을 펼치며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 2서는 엄밀한 의미의 서간 유형보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언’ 유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이 서신은 베드로 사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여러 교리를 다시 강조하는 유언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참고 기다리고 계실 뿐, 그분의 날은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시며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

2.1. 인사(2베드1,1-2)
 편지를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가, 우리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덕분에 우리처럼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귀한 믿음을 받아들인 하느님 자녀들에게 인사하며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청하며 인사합니다. 그런데 이 은총과 평화는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얻게 됩니다.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2베드1,2) 

2.2. 그리스도인의 소명(2베드1,3-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첫째, 믿음에 덕을 더하십시오. 둘째, 덕에 앎을 더하십시오. 셋째, 앎에 절제를 더하십시오. 넷째, 절제에 인내를 더하십시오. 다섯째, 인내에 신심을 더하십시오. 여섯째,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십시오. 일곱째,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①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은 믿음을 실천하며 그것을 자랑하거나 독선으로 빠지지 않고 늘 겸손하게 성모님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슬기로운 종처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성실함으로 타인을 향해 양보하며, 믿음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삶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을 가르치고 있고, 이 세 덕을 을 합쳐 ‘향주삼덕(向主德)’ 또는 ‘대신덕(對神德)’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가지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윤리덕과 달리, 하느님께서 신자들의 영혼에 직접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직접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신앙의 핵심 바탕입니다. 
 신덕(信德, Virtus fidei)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그분께서 교회를 통해 계시하신 모든 진리가 참됨을 굳게 믿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신덕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모든 덕의 출발점이자 근원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능력으로,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망덕(望德, Virtus spei)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행복으로 갈망하며,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의 은총을 신뢰하며 바라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망덕은 현세의 어떤 역경이나 고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구원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 주는 영적인 닻입니다. 신덕(믿음)이 있어야 망덕(희망)이 생기며, 이 희망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기대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인내로 버티게 만듭니다.
 애덕(愛德, Virtus caritatis)은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향주삼덕 중 가장 위대하고 완성된 덕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고,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신덕과 망덕은 이 세상(현세)에서만 필요하지만, 애덕은 천국에서도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은 향주삼덕(신·망·애)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덕(믿음)이 있기에 삶의 시련을 묵묵히 통제하고 인내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를 향한 망덕(희망)이 있기에 힘든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유지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애덕(사랑)이 내 영혼에 가득 차 흘러넘칠 때, 비로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웃과 형제들까지도 품어 안는 완벽한 형제애와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② 덕에 앎을 더하는 삶
 아무리 좋은 의도와 열정(덕)을 가지고 행동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기준과 분별력(앎)이 없으면 오히려 그 열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아폴로는 에페소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출신의 훌륭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학식이 높고 성경에 정통했으며, 주님의 길을 배워 아주 뜨거운 열정(덕)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한 일을 가르치던 선한 전도자였습니다(덕, 바른 행실의 모습)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세례와 온전한 복음의 깊이(앎)는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가 그를 따로 데려다가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앎을 전함)해 주었습니다(앎, 지식을 더해줌, 사도행전 18,26) 아폴로는 자신의 기존 지식을 고집하지 않고 겸손하게 참된 앎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그의 선한 열정은 더욱 정교해졌고, 아카이아 지방으로 건너가 성경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을 논박하며 교회를 세우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 전에도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열심(덕)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참된 지식(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느님을 잘 섬긴다는 선한 의도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렬한 빛을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후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앎)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참조: 필리 3,8)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고,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영적 여정을 걷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알고 말하는 것과 모르면서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해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가톨릭 교회는 전례주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전례시기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분명 앎을 더하는 삶입니다. 구역모임, 레지오, 주일학교, 사목회의 분과활동도 덕에 앎을 더 할 때 믿음은 더 크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③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이란 내가 아는 지식과 정보, 옳고 그름을 타인에게 무기로 휘두르지 않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다스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교만해지거나 상대를 가르치려 들기 쉬운데, 여기에 절제를 더하면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백성을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족속이라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단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하느님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에 당신 사랑과 자비와 구원을 풍성하게 베푸셨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사실을 과시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만 지식을 나누는 태도는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삶의 태도이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거나 대화할 때, 복음나누기를 할 때, 상대방이 틀린 말을 하거나 내가 이미 아는 내용을 말할 때, 중간에 말을 끊거나 지적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앎에 절제를 더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자들이 학문과 신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교만해질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에, ‘아무리 높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형제들을 섬기는 겸손함과 사랑이 없다면 그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지식의 추구보다 삶의 실천과 겸손을 우선하는 절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변론가(소피스트)들의 가짜 앎을 비판하며, 스스로의 앎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철저한 절제를 통해 진짜 지혜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겉보기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 감추어 두며, 필요한 이가 도움을 청할 때 겸손하게 그 지혜를 전해줍니다. 물처럼 자신을 낮추고 공을 세워도 자랑하지 않으며, 필요할 때만 앎을 드러내는 절제의 덕목은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앎에 절제를 더하면 내 등불로 남을 눈부시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발밑을 어둡지 않게 비춰주는 따뜻함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이고,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④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이란 내가 통제하고 참아 내기로 결단한 상태(절제)를 흔들림 없이 끝까지 유지해 내는 삶(인내)을 의미합니다. 절제가 순간의 멈춤이라면 인내는 그 멈춤을 시간 속에서 완성하는 뚝심이라고 합니다. 유혹을 끊어내는 절제와 고통을 버텨내는 인내가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경건함과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말을 아끼는 것이 ‘절제’라면, 상대방이 나를 오해하고 비난해도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절제에 인내를 더한 삶’입니다.

 젊은 시절 방탕함과 이단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후 육체적 쾌락과 명예욕을 극도로 절제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이교도들의 침공과 교회 내부의 분열이라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분노를 절제하며, 죽는 순간까지 교회를 지키고 수많은 신학 저서를 남기는 위대한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온몸에 극심한 가려움과 통증을 느끼며 질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끍어야만 했던 욥도 아내와 친구들이 위로라는 그릇에 담긴 단죄와 비난을 인내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절제가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의 결단이라면, 인내는 그 차가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믿음을 키워 나가는 그리스도인은 인내로서 절제를 완성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앎을 더해 나가며, 신덕과 망덕과 애덕을 키워 나가며 믿음을 삶으로 고백합니다. 

⑤ 인내에 신심을 더하는 삶
 인내에 신심(경건)을 더하는 삶은 내가 겪는 고통과 억울함을 단순히 버텨내는 인내를 넘어 그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우리 주님께서는 더 억울하셨고, 더 괴로우셨으니 주님을 따르는 나는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지’하면서 기도하는 영적인 삶입니다. 인간적인 인내는 깊은 상처와 외로움, 교만과 보상심리 등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신심이 더해지면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라고 고백하며 그 모든 것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고, 내 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분노나 분열을 일으키며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멈추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하는 영혼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어려움을 주님을 위해 봉헌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 ‘주님, 이 고통을 바라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 작은 마음으로 상처받으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을 위로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시련은 나를 파괴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입니다. 갈등이나 아픔 속에서도 매일의 미사와 기도,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닮은 자녀가 되도록 은총을 줍니다.

 오상을 받으신 성 비오 신부님은 예수님의 오상(五傷)을 받아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시기하고 의심한 교회 내부의 오해로 인해 수년 동안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를 금지당하는 혹독한 제재를 받았습니다. 1918년 비오 신부님의 몸에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가 나타나자,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가 산 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교황청 내부와 일부 의사들은 가짜 기적이며, 신부의 심리적 이상이나 화학 약품으로 조작된 상처라고 의심했습니다. 군중들의 광적인 열광과 거짓 예언자에게 현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청은 1931년 6월 9일 교황청은 비오 신부님에게 가장 강력한 행정 처분을 내립니다. 공동체 미사(공개 미사) 집전 금지, 오직 외부인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수도원 내부의 작은 경당(골방)에서, 복사(미사 보조자) 단 한 명만 두고 철저히 비공개로 혼자서만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하루에 최대 15~19시간씩 신자들의 고해를 듣던 ‘고해소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재로 인해 남녀를 불문하고 그 누구에게도 고해성사를 줄 수 있는 성무 집전권이 완전히 정지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영적 지도를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일체의 행위가 전면 차단되었고,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동료 수도자들과의 접촉도 극도로 제한되어, 약 2년 동안 빛이 들지 않는 격리된 방에서 감옥과 같은 생활을 보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빼앗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는 영적 사형 선고였습니다. 더구나 본인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시기와 오해로 인한 억울한 처분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오직 이 한마디만 남겼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
 신부님은 교회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입이 닫혔으니 이제 하느님과 더 깊이 대화하겠다며 묵묵히 기도와 희생으로 그 기나긴 2년의 어둠을 버텨내셨습니다. 이후 신부님의 철저한 겸손과 순명 태도를 전해 들은 교황 비오 11세는 1933년 ‘내가 비오 신부님에 대해 잘못 보고 받았다’며 제재를 모두 풀고 성무 집전권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고독한 시간을 오직 묵주기도와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신심)로 채웠습니다. 신부님의 인내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성덕의 열매로 증명되었습니다.

 성 십자가의 요한 사제도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이끌던 중, 개혁을 반대하던 동료 수도자들에 의해 좁고 어두운 독방 감옥에 갇혀 아홉 달 동안 모진 매질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을 가둔 형제들을 원망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빛조차 잘 들지 않는 감옥의 고통(인내) 속에서 하느님과 영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깊은 신비 영성(신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가톨릭 영성사의 위대한 보물인 영적 시(詩)들을 집필하며 감옥을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인내에 신심을 더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거룩한 미사와 성사로 몸과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⑥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
 신심(경건)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주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교사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채 길가에 버려집니다(루카 10,30). 이때 그 곁을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종교적 신심만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율법을 지키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심 깊은 이들이었지만 강도 맞은 이를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돌아서 가 버렸습니다. 시체나 피를 만지면 종교적으로 부정해져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교리적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자부했지만,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함으로써 그들 신심이 껍데기뿐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종교적 행위가 이웃의 아픔과 단절될 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이 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지만, 강도 맞은 이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측은지심)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합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뒤,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고, 이튿날에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소”(루카 10,35) 하며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⑦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로 1,5-7)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은 인간적인 덕성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향주덕(向主德, 하느님을 향한 덕)’인 사랑(Caritas)으로 성화됩니다. 형제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교우들의 공동체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형제애의 울타리를 넘어,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이들까지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목숨까지 내어주는 ‘자비와 용서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권력을 잡은 뒤 형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다윗은 자신을 시기하여 군대를 풀고 죽이려 쫓아다니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분이시니, 내 손을 그분에게 대지 않겠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지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조차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존재'로 바라보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는 교회 안의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는 ‘형제애’에 충실했던 부제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 군중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바친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와 똑 닮아 있었습니다. 스테파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전구의 기도’를 바친 이 모습은  초자연적 사랑으로 완성된 최고의 형제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해졌을 때 형제애라는 아가페적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은 내 본성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그를 사랑하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하느님 자녀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정적이며,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다. 이 삶에 열정을 다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에 감사하며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2베드1,10-11)

2.3.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2베드1,12-21)
 세상의 유혹이나 거짓 교사들에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늘 배워야 하며,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전해 받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주님께 대한 사랑을 키우며 영적 분별력을 통해 늘 오염되지 않은 신앙의 순수함을 간직해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또 이미 받은 진리 안에 굳건히 서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기억시키려고 합니다.”(2베드1,12)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이미 받은 진리 안에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도록 기억시킵니다. 베드로 사도는 “13 내가 이 천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에게 밝혀 주셨듯이, 내가 이 천막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베드1,13-14)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늘 양 떼 곁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순교를 생각합니다. 천막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막은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천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지상의 나그네입니다. 이 천막이 허물어지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사도는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러분이 언제나 이러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2베드1,15)라고 말씀하시며 천상 교회에서도 주님께 이 양 떼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주님의 양 떼를 베드로 사도에게 맡기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함께 하였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했고, 승천과 성령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교묘하게 꾸며낸 신화를 따라 한 거짓이 아니라, 주님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1,17-18)

 베드로 사도는 보고 들은 것을 힘 있게 증언하였습니다. 보고 들었기에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1,19)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과 예언자들의 선포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지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흔들림이 있을 때 유혹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현혹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에 확신을 갖고, 전해 받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하느님 자녀들은 진리 안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2.4.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2베드2,1-22)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오히려 박해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기억시키며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거짓 교사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구분
거짓 예언자
거짓 교사
주요 활동 시기
구약 시대
초기 교회
활동 장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교회 가운데에서
등장방식
백성 외부나 왕실 등에서 단독 예언자로 활동하며 선포
교회 내부로 은밀히 침투하여 활동
주된 거짓 행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환상, 거짓 평화, 거짓 계시를 선포
교리와 진리를 왜곡하고,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가르침
핵심/본질
백성에게 영적 착각을 심어줌
(거짓 평안, 남아있는 자)
주님을 부인하고 방탕함과 탐욕으로 착취함. 탐욕에 이끌려 주님의 주권을 업신여김
유혹 수단
탐욕, 불의한 이익,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짓 평화
육체의 방탕한 욕망, 실없는 큰소리, 거짓된 자유의 약속
공통된 심판과 결말
갑작스러운 파멸과 멸망(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홍수 때의 불경한 자들과 같음. 멸망의 종이 됨. 개나 돼지와 같은 영적 상태에 빠져 짙은 암흑과 멸망을 맞이하게 됨


 거짓 교사들의 방탕한 행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악행을 따라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며,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하느님 자녀를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상선벌악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내릴 판결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고, 그들에게 닥칠 파멸은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드신 것은 불경한 자들에게 내릴 벌의 본보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삶과 그들로부터 악영향을 받은 이들의 삶(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생활)은 의인들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의인은 그들 가운데에 살면서 무도한 행실들을 보고 듣느라고 그 의로운 영혼이 날마다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 더러운 욕망에 빠져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 주님의 주권을 업신여기는 자들, 당돌하고 거만하여 거리낌 없이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는 자들은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낮의 술잔치를 기쁨으로 삼는 이들, 하느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도 자기들의 속임수를 즐기는 너절하고 지저분한 자들,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마음은 탐욕에 젖어 있는 그들, 바른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빠져든 이들,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 불의한 돈벌이를 좋아하다가 그 범법 때문에 책망을 받는 이들, 그들은 해악을 저지른 대가로 해악을 입을 것입니다. 그들은 물 없는 샘이며 폭풍에 밀려가 버리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짙은 암흑이 마련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실없이 큰소리치면서,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갓 빠져나온 이들을 육체의 방탕한 욕망으로 유혹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신들은 멸망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굴복을 당한 사람은 굴복시킨 쪽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①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은 성경에서 ‘불의한 이익(돈)을 위해 영적 능력을 타협한 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리코 앞의 요르단 건너편 모압 벌판에 진을 치자 모압인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모압 임금 발락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무찌르기 위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에게 자기 신하들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당신이 축복하는 이는 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는 이는 저주를 받는 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민수22,6)

 발라암은 이 상황을 주님께 아뢰었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이들과 함께 가지 마라. 그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해서는 안 된다.”(민수22,12)

 첫 번째 청원이 거부되자 발락은 두 번째로 더 높은 대신들을 많이 보내여 발라암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발라암에게 “이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다면,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만 하여라.”(민수22,2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발라암은 아침에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의 대신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발라암의 길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시어 발라암에게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 있었습니다. 나귀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길을 비켜나 밭으로 들어가고, 벽으로 바싹 붙고, 갈 곳이 없자 주저앉기까기 하였습니다. 발라암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자 주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열어 주시어 왜 세 번씩이나 때리냐고 항변하게 합니다. 발라암은 손에 칼만 있었으면 당장 쳐 죽였을 것이라고 하자 나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날까지 당신이 일생 동안 타고 다닌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당신께 이렇게 하는 버릇이라도 있었습니까?”(민수22,31)

 그때 주님께서 발라암의 눈을 열어 주셨고, 그제야 그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무릎을 꿇고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렸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나귀를 때린 것을 지적하시며 “네가 내 앞에서 나쁜 길을 걷기에, 내가 막으려고 나왔다.“(민수22,32)고 말씀하십니다. 나귀가 세 번이나 비켜나지 않았으면 발라암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말라암에게 “이 사람들과 함께 가거라.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하는 말만 해야 한다.”(민수22,35)라고 경고하십니다.

 발락이 원하는 것은 발라암이 야곱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라암을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청했지만, 오히려 축복해 줍니다. 주님께서 담아 주신 말씀을 전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발락은 세 번씩이나 발라암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니 화가 났습니다. 원수들을 저주해 달라고 불렀지만 오히려 축복해 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라암은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24,17)라는 신탁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발라암은 발락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기에 다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요한묵시록은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에서 발라암의 죄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14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발라암은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다.”(묵시2,14)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을 때, 백성이 모압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여자들이 저희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백성을 부르자, 백성은 거기에서 함께 먹으며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프오르의 신 바알의 멍에를 메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상을 섬긴 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사람들 가운데에서 스스로 프오르의 신 바알의 멍에를 멘 자를 죽여라.”(민수25,5)

 발라암은 발락에게 여인들을 이용해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뜨려 하느님 스스로 이스라엘을 벌하시도록 하는 비열한 간계를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그 재난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만 사천 명이 죽게 됩니다. 그 후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미디안 여자들을 모두 살려주자, 모세는 발라암이 발락에게 제공한 간계를 다시 기억시킵니다. 

	“너희가 여자들을 모두 살려 두다니! 16 프오르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발라암의 말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을 배신하게 하여, 주님의 공동체에게 재앙이 내리게 한 것이 바로 이 여자들이다. (민수31,15-16)

 발라암은 발락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발락을 위한 저주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시킬 방법, 여인들을 이용하여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에 빠트리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발라암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발라암의 영적 타락과 배반을 불의한 돈벌이를 좋아하다가 짐승(나귀)에게 책망을 받은 예언자의 미친 행동으로 묘사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의 탐욕을 고발합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 탐욕에 빠져 잘못된 길로 달려가는 이의 상징이 바로 발라암이고, 발라암이 걸은 길을 “발라암의 어그러진 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11 저들은 불행합니다! 카인의 길을 따라 걸었고 돈벌이 때문에 발라암의 오류에 빠졌으며 코라처럼 반항하다 망하였기 때문입니다.”(유다1,11) 
 
 발라암은 하느님의 뜻과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과 세속적 이익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영적 소경이 되어 결국 공동체를 죄악으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거짓 예언자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 내부에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교사들의 오만함과 무지, 탐욕과 영적 소경의 삶은 엄중한 심판과 멸망을 끌어당겼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이성만을 과신하는 오만한 자들은 주님의 심판을 끌어당깁니다.

	“11 천사들은 더 큰 힘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주님에게서 그들에 대한 모욕적인 판결을 끌어내지 않습니다.”(2베드2,11)

 천사들은 거짓 교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힘과 능력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으로 ‘모욕적 판결, 비난의 심판’을 함부로 내리지 않고, 모든 심판의 권한을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유다서(1,9)에서는 대천사 미카엘이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욕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구분
미카엘 대천사 (유다 1,9)
교만한 거짓 교사들 
(2베드 2,10-12)
지위
위대하고 강력한 대천사
한갓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태도
악마 앞에서도 겸손하게 하느님의 심판에 맡김
영적인 권세와 성스러운 것들을 함부로 모독함
교훈
하느님의 질서와 권위를 철저히 존중함
자기 이성만 믿고 본능대로 사는 지각없는 짐승


 신명기 34장에서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었을 때, 주님께서 그를 골짜기에 묻어 주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서간에서는 ‘모세의 승천’이라는 외경을 인용하여, 악마는 모세가 과거 이집트인을 죽였던 죄를 들먹이며 ‘모세는 죄인이므로 그 육신은 나의 소유다’라고 주장하며 모세의 무덤을 공개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시신을 우상숭배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모세의 시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감추려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악마를 대하는 미카엘 대천사의 태도입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천상 군대의 지휘관이자 악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고 강력한 대천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자기 스스로 악마에게 저주나 모욕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심판과 판결의 권한은 오직 최고 재판관이신 하느님께만 속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씀하십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자신의 권위가 아닌 ‘하느님의 권위’에 의지하여 악마를 물리칩니다. 이는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피조물이 가져야 할 가장 모범적인 겸손과 완벽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강한 능력을 지닌 천사들조차 하느님의 주권과 질서를 존중하여 겸손하게 행동하는데,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거짓 교사들은 교만하여 성스러운 영적 권위와 영적 세계를 함부로 비방하고 모독한다는 점을 대비시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2베드2,12
유다1,10
그런데 그들은 잡혀 죽을 것으로 태어난 지각없는 짐승과 같아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모독하고 있으니, 
짐승들이 멸망하는 것처럼 
그들도 멸망할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다 모독하지만, 
지각없는 짐승처럼 누구나 본성으로 아는 것들, 
바로 그것들로 멸망하고 맙니다.


 가장 뛰어난 천사조차도 악마를 향해 함부로 교만하게 굴거나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는데, 보잘 것 없는 거짓 교사(인간)들이 하느님의 신비와 영적 권위를 무시하고 모독할 수 있는가? 결국 그들의 교만와 오만과 타락은 멸망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② 의로움은 거룩한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개와 돼지에 비유하여 속담을 들려줍니다.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으나, 교회 내부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나 영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다시 본 모습으로 되돌아감을 구약성경과 당시의 속담 아하카르의 지혜서는 기원전 6~5세기경 아람어로 쓰인 이 문헌은 당시 동방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던 속담집이었습니다. 아하카르가 자신을 모함하고 배신한 조카 '나단(Nadin)'에게 그의 은혜 모르는 본성과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여러 동물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주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내 아들아, 너는 목욕탕에 들어가 씻기기 위해 주인의 상에 놓인 맛있는 음식을 거부한 개와 같구나. 내 아들아, 너는 고귀한 사람들과 함께 목욕하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러운 하수구를 보고는 바로 달려가 다시 진흙탕에 몸을 뒹군 돼지와 같구나. 내 아들아, 너는 고기 한 조각을 물고 강을 건너다가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마저 빼앗으려 입을 벌렸다가, 가지고 있던 고기마저 물속에 떨어뜨리고 만 개와 같구나.”

을 인용하여 지적합니다.

	“22‘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2,22)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가는 개처럼 우둔한 자는 제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잠언26,11)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당시 근동 지역에서 널리 쓰이던 고대 동방의 속담(아하카르의 지혜서 등)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개와 돼지는 율법적으로 불결하고 정결하지 못한 동물을 상징했습니다. 이 비유가 주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본질(성품)이 바뀌지 않은 외적 변화의 한계입니다. 돼지는 더러운 진흙탕을 좋아하는 동물이고, 개 역시 자신이 내뱉은 것을 다시 삼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나 거짓 신앙인들은 복음과 교회의 영향으로 잠시 겉모습을 깨끗하게 단장했을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 새로 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나눔 및 묵상 6: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여전히 죄와 부패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2베드 2,22은 단순한 일상적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내면의 거듭남과 본질의 변화가 없이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경건을 흉내 내는 것은 결국 옛 죄악의 습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강력한 비유입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령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영적으로 어떻게 성장되어 있으며, 신앙의 향기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2.5. 주님의 재림(2베드3,1-18)
 베드로 사도는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2베드3,1)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 1서를 언급합니다. 서간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두 편지로 나는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려 순수한 정신을 불러일으키려고 합니다.”(2베드3,1)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자녀들인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내리신 계명을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조롱꾼들이 하느님 자녀들을 조롱하며 유혹하고,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4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2베드3,4)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조롱을 들려주며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순수한 정신을 불러 일으켜 주님의 계명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그때의 세상이 홍수에 잠겨 물로 멸망하고, 심판(노아의 홍수)받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느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게 살아가는 노아에게 배를 만들게 하셨고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배를 만들어서 동물들 한 쌍 식을 배에 태워 홍수를 이겨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홍수를 이야기 했지만 사람들은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참조: 마태24,38-39) 그들은 회개할 기회를 저버렸습니다. 하느님을 저버린 사람들은 결국 홍수로써 벌을 받게 된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의 하늘과 땅도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같은 말씀으로 보존됩니다. 불경한 사람들이 심판받아 멸망하는 날까지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강조합니다.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심은 회개하여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며 “깨어 있어라”(마태24,42)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이고,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일을 맡기셨고,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굳건하게 이어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2베드3,11-12)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이익입니다. 그날이 오면 눈에 보이는 것들과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하느님 보다 앞 자링 둔 것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그때야 비로소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주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2베드3,15)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공동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16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3,16)
 
베드로 사도는 잘못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와 주님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이라는 신앙의 균형을 강조하시며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리지 말고,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키워 나가도록 두 가지를 마지막으로 권고하십니다.

 첫째,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느님 자녀들은 이미 알고 있는 올바른 신앙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도록 늘 깨어 주의해야 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유혹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변의 환경이 변하더라도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둘째,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신앙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매일의 삶 속에서 더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넘어, 그분과 더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앎을 넓혀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릴 때 가능하게 됩니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삶은 스스로 영광받으려는 삶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영광 드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갈 때,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이나,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나,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흔드는 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며 주님의 영광에 의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2베드1,1-3,18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내 삶의 자리가 바알 프오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③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흔들릴 때는 언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질 때는 언제입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7:06: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3과: 겸손과 깨어 있음(1베드5,1-14)]]></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8]]></link>
			<description><![CDATA[제 3과: 겸손과 깨어 있음(1베드5,1-14)
1. 말씀읽기: 1베드5,8-10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겸손과 깨어 있음 
 목자들은 양 떼를 기꺼이 돌보아야 하고, 젊은이들은 겸손하게 순종하며 서로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돌볼 때,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하느님 자녀를 위협할지라도 믿음을 굳건히 하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됩니다. 목자들은 양 떼를 보살피기 위해 겸손의 삶을 살아가며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의 양 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기 위해 목자들의 가르침 안에서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2.1. 지도자들의 의무(1베드5,1-4)
 목자들은 지배하는 군주가 아니라, 참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혼을 돌보는 하느님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는 지배가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데서 옵니다. 교회의 안팎으로 박해가 밀려올 때, 목자들이 바치는 희생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천상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첫 번째 서간을 마치면서 원로들에게 권고합니다. 원로들에게 권고하기에 앞서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라고 말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이 표현은 교황의 가장 오래된 공직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2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2-3)
 
 원로들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목자의 삶은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양 떼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착한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2.2. 겸손과 깨어 있음(1베드5,5-11)
 베드로 사도는 젊은이들에게 원로들의 사목에 복종하라고 권고합니다. 젊은이들은 교회 안에서 원로들 아래에서 봉사하는 부제나 봉사자, 다른 구성원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질서와 교회의 가르침(교도권)에 대한 순종은 하느님 자녀들에게는 당연한 것 입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할 때,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고, 그렇게 자신을 낮출 때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5,5)

 교회 공동체는 세상 법적인 구속력이 없습니다. 교회를 세상 단체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면 일치와 순종은 사라지고 분열과 반목만 남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교만은 죄의 뿌리이며, 오직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목자들과 일치하며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강한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젊은이들은 교회의 원로들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깨어 있으면서 유혹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1베드5,8-9)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자녀들이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목자와 불화를 일으킬 때,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박해자들과 비신자들로부터 온갖 위협과 조롱과 모함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때, 박해와 유혹 속에서 두려움에 압도되거나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적대자 악마’는 ‘비방하는 자, 고소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박해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악의적인 비방으로 교회를 흔들던 박해자들 옆에 이런 악마들이 있었습니다.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극심한 공포를 표현하며, 악마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공포심을 주며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믿음을 굳건히 할 때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과 일치할 수 있으며, 악마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신앙 안에서 하나 되어 한 마음 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일치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하느님 자녀들도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서간을 통해 위로받고 있던 로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전역에서 동일한 박해를 겪은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시련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교회를 돌보고 계시고, 은총으로 보살피십니다. 지금 교회가 겪고 있는 고난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주어진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러 주신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믿으며 이 시련을 이겨내고, 목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충실히 돌보아야 합니다.

 사자의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는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신뢰입니다. 악마는 대적할 때만 하느님 자녀들로부터 물러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확신을 공동체에게 선포합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1베드5,11)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승리를 선포하는 영광송입니다. 권능은 지배력, 통치력, 주권을 의미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로마 제국과 황제의 권력은 거대해 보이지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된 통치자는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아멘’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므로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라는 선포에 온 마음으로 동의하고, 확신하며 순종하겠다는 신앙공동체의 공식적인 응답입니다. 

나눔 및 묵상: 4
세상의 그 어떤 시련과 박해자도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권 아래에 있을 뿐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한 권능을 지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영원한 권능 안에서 반드시 승리와 찬양으로 마무리 됩니다. 일상 삶에서 하느님의 일시적인 침묵으로 느껴지거나, 내 힘으로는 통제하기 힘든 무력한 상황을 겪을 때, ‘영원한 권능’을 지니신 주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위로를 받고 계십니까?
                                                                           
                                                                           

2.3. 끝 인사(1베드5,12-14)
 베드로 사도는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편지가 어떻게 씌여졌는지를 밝힙니다. 또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5,12)

 베드로 사도는 멀리서 명령하는 목자가 아니라, 고난받는 하느님 자녀들과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된 은총은 단순히 죄를 덮어주는 법정적 선언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만드는 성화 은총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겪는 극심한 박해와 고난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정화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만드는 ‘참된 은총의 과정’임을 선포하며 격려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과 하느님 자녀들이 겪는 고난의 가치’가 베드로 사도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교회의 목자로서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영적 권위와 신앙적 가르침과 권고와 위로는 하느님 자녀들을 진리 안에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굳건히 서 있으라’는 권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을지라도, 유혹과 박해 앞에서 낙심하게 되면 그 은총의 상태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성사를 통해 끊임없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으며 하느님의 은총에 항구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교회안에서 목자와 양 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연결되어 있으며, 신앙의 시련을 겪는 이들을 격려하고 기도로 연대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보여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마치며 인사하고 평화를 빌어줍니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5,13-14)
 
 바빌론은 하느님 자녀들의 유배지, 하느님 자녀들을 박해하는 상징으로 보통 인식되지만 서간에서는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 베드로 사도가 마르코를 '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사도적 전승 안에서 복음의 유산이 어떻게 계승되는지 보여줍니다. 실제로 마르코는 베드로의 설교를 바탕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하였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전승입니다.
(1베드5,13)라는 표현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빌론은 당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로마를 뜻했습니다. 로마 교회를 바빌론 교회라고 부르면서 비록 이교도들의 문화와 박해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곳 역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영광스러운 장소임을 알려줍니다.
바빌론이라는 세속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하느님 자녀의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긍정적인 신앙적 자부심을 심어줍니다. 그러므로 바빌론 교회는 유배되어 갇힌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 복음선포의 최전선에 있는 교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고,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빌ㄹ어줍니다. 바빌론(로마) 교회는 두려움에 떠는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치유하고 사랑을 나누며, 로마 제국의 심장부 한가운데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흐르는 교회,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교회임을 베드로 사도는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나눔 및 묵상: 5
교회 공동체는 비록 험난하고 세속적인 환경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함께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을 품고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세상에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우리 공동체는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어떻게 이루고 있습니까?
                                                                           
                                                                           

3. 정리해 봅시다.
① 1베드5,1-14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단체장들은 어떻게 단체를 이끌고, 사목위원들은 어떻게 본당 사제의 사목에 협력하며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있을까요?
                                                                           
                                                                           
③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5,5) 나의 겸손으로 끌어들이는 은총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고,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7:05: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제 2과: 고난과 확신(1베드3,13-4,19)]]></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7]]></link>
			<description><![CDATA[제 2과: 고난과 확신(1베드3,13-4,19) 
1. 말씀읽기: 1베드4,12-19 그리스도인의 받는 고난
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17 사실 심판이 하느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되었습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느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종말이야 어떠하겠습니까? 18 “의인이 가까스로 구원을 받는다면 불경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19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고난과 확신
 베드로 사도는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어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단순한 불행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의로움을 살아가기 위해 받는 고난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파스카 신비의 확장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2.1.박해에 맞선 확신(1베드3,13-17)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을 살아가며,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이웃에게 다가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선을 행하는데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14 그러나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1베드3,13-14)

 박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자들과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고, 하느님 자녀들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라고 권고하십니다. 박해시기에 순교자들은 박해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천주교의 올바름과 정당함을, 천주교가 참된 종교임을 밝히며 교리를 설명하고 계명을 선포하였습니다. 박해자들 앞에서 심문받는 장소는 천주교를 선포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두려웠지만 하느님을 체험한 순교자들은 기도하면서 당당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은 일시적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11 주님께서 당신 손으로 나를 붙잡으시고 이 백성의 길을 걷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12 이 백성이 모반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모반이라고 하지 마라.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마라. 13 너희는 만군의 주님만을 거룩히 모셔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해야 할 분이시다.(이사8,11-13)

 하느님 자녀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의 선한 처신을 비방한다 하더라도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1베드3,16) 

 세상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굳건히 모실 때, 내 마음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늘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합당한 거룩한 생활과 거룩한 사제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박해자나 이교인들이 ‘당신들은 왜 고난 속에서도 기뻐합니까? 당신들이 가진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하느님 자녀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를 바르게 설명하며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말하더라도 태도가 거만하거나 공격적이면 복음의 문이 닫힙니다. 베드로 사도는 온유함과 공손함으로 타인에 대한 존중을 겸손하게 드러내고, 흠잡을 데 없는 바른 양심으로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포하는 복음과 실천하는 행동이 일치하는 의롭고 선한 삶을 보여줄 때, 교회를 모함하고 중상하던 자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님께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 자체를 피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의탁하며 선을 지속하는 태도가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3,17) 

 내 잘못으로 벌을 받는 것이라면 그 고통은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뜻 안에서 허락된 '의로운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에 우리를 온전히 결합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칼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확신, 세상의 질문에 온유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 고백,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선한 행실과 바른 양심입니다.

2.2. 그리스도의 승리(1베드3,18-22)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십자가를 짊어 지시고 희생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구약의 소나 양을 번제물로 바치는 제사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단 한 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가집니다.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3,18-19)

 감옥은 그리스도 이전의 의인들이 구원을 기다리며 갇혀 있던 ‘저승’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신 것은 그곳에 있는 이들을 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약의 의인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던 영혼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 지옥에 떨어진 악인이나 불순종한 이들에게 사후 회개의 기회를 주어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류 전체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히브 9,27-28).

 구약의 대사제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매년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반복해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인류를 속량하셨습니다. 교회가 매일 미사에서 새로운 제사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바쳐진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제단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은 일부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셈족 언어 표현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1베드3,20)  

 주님께서는 늘 기회를 주십니다. 노아 때의 대홍수는 세상을 죄로부터 정화한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순종은 구원을 가져오고, 불순종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상속재산으로 받게 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죄에서는 죽고, 은총 안에서 살아난 이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오롯한 순종은 생명과 구원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1베드3,22)

 하느님 오른쪽은 성부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영광과 권능을 받는 자리이고, ‘천사, 권력, 권능’이 복종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닫혔던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고, 전에 계셨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시어 하느님 오른쪽에서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례 성사를 통해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3. 참그리스도인(1베드4,1-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이들입니다. ‘육으로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고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죄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영적 투쟁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고난을 겪으셨으니, 여러분도 같은 각오로 무장하십시오.”(1베드4,1)

 죄와는 거리가 멀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2 그러니 남은 지상 생활 동안,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1베드4,2)

 이 세상의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은 남은 지상 생활 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방탕, 욕정, 주정, 흥청대는 술잔치, 폭음,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교인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도 있지만 천국 본향을 향하는 이 세상의 나그네들은 이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무모한 방종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놀라워하며 여러분을 비방합니다.”(1베드4,4)

 전에는 자신들과 함께 어울려 모든 것을 했지만,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면서 바뀐 생각과 말과 행위는 그들에게 많은 놀라움을 줍니다. 더 나아가 비방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기회를 잡은 이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를 갖추신 분을 받아들이고, 기회를 걷어찬 이들은 그분께 셈을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6 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1베드4,6)
 
 죽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원죄로 인해 하늘 문이 닫혀 있었기에 저승에서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며 잠들어 있던 구약의 모든 의인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1베드 4,6).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심은 구원의 복음 선포의 충만한 완성입니다. 이것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속량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 사업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나게”(요한 5,25) 하시고자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생명의 영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묵시 1,18),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구약의 성도들에게 "마침내 인류의 죄가 대속되었고 구원의 문(천국)이 열렸다"는 승리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언되었음을 다시 알려 줍니다. 또한 ‘심판’은 영원한 지옥 형벌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공통으로 내려진 ‘육체적 죽음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의인들 역시 인간이기에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저승이라는 제한된 처소에 머무는 한계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은 마침내 모든 사슬에서 풀려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2.4. 종말과 공동체 생활(1베드4,7-11)
 확신을 가진 희망은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마지막 때를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다가오는 종말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7 만물의 종말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9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 10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4,7-10)

 하느님 자녀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백성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기도와 사랑,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가 될 것을 가 제시하는 가장 첫 번째 종말 대비책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1베드4,3)라는 표현은 이교도들의 영적 방탕과 혼미함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전례 안에서 깨어 하느님과 소통하는 침묵과 정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1베드4,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증명된 한결같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잠언을 인용하면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움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잠언10,12)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감싸준다는 윤리적 의미를 넘어, 형제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은 세례성사 이후 우리가 지은 죄의 잠벌을 상쇄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효력을 지닙니다.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야고보 5,20)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베푼 사랑은 결국 그와 나를 구원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은 공동체 내의 죄의 상처를 치유하는 강력한 은총의 통로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하는 공동체입니다.

	“11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1베드4,11)

 그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 아멘.“(1베드4,11) 

 신자들이 은사 안에서 세상에 봉사하는 이유는 ‘영광과 권능’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영광은 하느님의 외적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그분이 행하신 구원 사건의 눈부신 드러남을 뜻합니다. 권능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과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넘어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의 신성을 예수님께도 고백하면서 세상의 권력과 인간의 영광은 유한하지만, 주님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선포하며 성부와 성자의 같은 영광과 권능을 고백합니다.

 ‘아멘’은 동의와 응답입니다. 앞서 선포된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라는 진리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과연 그렇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공동체가 확언하는 응답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봉사와 전교 활동이 내 자랑이 아닌,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2.5. 그리스도인의 받는 고난(1베드4,12-19)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만났을 때 도망치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성화의 기회로 삼아 끝까지 선을 행하며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련의 불길이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 박해를 이겨낸 그리스도인도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4,14) 

 고난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정화하고 신앙을 순수하게 단련하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고, 주님께서 그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넘치도록 후하게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고문과 굶주림과 죽임을 고통스럽고 두려웠지만 이겨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주님과 일치하는 것이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듯이 일상 삶 안에서 마주하는 그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받아들이고, 주님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을 행복으로 느낄 때, 그때야 비로소 주님과 온전하게 일치하고, 주님의 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박해는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유다인들의 행복관이었고, 박해받는 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개념이 유다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예레미야 예언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릅니다. 알고 있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겨야만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의로움을 보여주셨고,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의롭지 못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겸손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했습니다.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드러나고, 그 의로움은 겸손과 성실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의롭게 살아간 신앙인들이 의롭지 못한 이들 때문에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박해로 지상에서의 생명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12)

 모욕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뜻으로 심한 욕입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팔라티노 언덕, Palatine Hill)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856년 로마 팔라티노 언덕 남서쪽 사면, 노예나 군인들의 교육 장소(Paedagogium)로 쓰이던 건물의 벽면에서 발굴되었는데 충격적인 그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사람의 몸에 당나귀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십자가 앞에는 한 남성이 손을 들고 예배하는 조잡한 몸짓을 하고 있고, 그림 아래에는 그리스어로 “알렉사메노스가 자신의 신을 경배한다”라고 긁어서 적혀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조롱 섞인 낙서는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그림(서기 200년경 추정)으로 인정받고 있다.왜 당나귀 머리로 그렸을까?당시 로마 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범죄자나 노예가 당하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인물'을 신으로 섬기는 해괴하고 미신적인 종교로 취급받았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당나귀 머리를 한 신을 믿는다"는 악의적인 소문과 비하가 퍼져 있었는데, 낙서를 한 사람은 동료인 '알렉사메노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이 소문을 인용해 조롱 섞인 낙서로 괴롭혔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은 중상모략입니다. 의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신앙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참아 받으셨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신앙인들. 그가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고,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고통을 기쁘게 이겨냅니다. 그래서 고난의 현장은 성령께서 가장 강하게 현존하시는 장소이며, 주님의 은총이 넘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역경이 의로움 때문이어야지 불의 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15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드4,15)
 
 그리스도인은 살인자나 도둑,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삶으로 이웃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으로 이방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은 신앙을 끝까지 지켜내며 박해자들에게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믿음이 올바름을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삶, 계명을 지키는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삶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박해시대에 ‘천주학쟁이’는 박해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명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세속주의 문화의 충돌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생태계를 보존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물질만능주의와 편의주의 문화 속에서 신앙적 가치를 지켜나가는데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둘째, 생명문화를 수호하면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교회가 낙태, 안락사 반대의 목소리를 낼 때 외면당하며, 생명윤리에 대해서 의학 기술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대상으로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셋째, 가정과 혼인 가치관의 위기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가정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이혼과 재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고, 창조 질서에 따라 남녀의 성별 구분을 하며 성 정체성을 겪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깊어만 갑니다.
넷째, 삶의 자리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부정부패나 융통성을 요구하는 직장 문화 속에서 양심을 지키며 올바르게 처리하다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주말 근무나 주일의 중요한 약속이나 행사 때문에 주일 미사의 의무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다섯째,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유혹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손안에 TV가 들어와 있고, 수많은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 유혹 앞에서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홀로 성당에 머물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선택이 흔들릴 때가 많아졌습니다. 또한 미디어에서 나오는 반가톨릭적인 내용들이 재미있고 흥미롭게 펼쳐질 때, 조건 없이 수용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여섯째, 영적 메마름과 고독입니다. 바쁜 일상속에서 침묵과 기도의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그 안에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정치와 경제의 주제들이 공동체 안으로 파고들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내 안에 기대와 실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영적 공허가 불러오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옳고, 영적으로 충만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결국 고독으로 이어지고, 다양한 마음의 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가까스로 구원을 받는다면 불경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1베드4,18)

 “심판이 하느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되었습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느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종말이야 어떠하겠습니까?”(1베드4,17)라는 말씀은 하느님 자녀들이 시련을 통해 먼저 정화된다면, 복음을 거부한 불신자들의 종말은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나눔 및 묵상 3:
 우리는 행동이 없는 믿음을 경계합니다. 박해와 불이익 속에서도 그리스도인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성실하신 창조주’로 고백하고, 우리를 지어내신 분께서 끝까지 나를 책임지실 것을 신뢰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역경은 무엇이고, 그 역경은 어떻게 기쁨으로 승화되었습니까?
                                                                           
                                                                           

3. 정리해 봅시다.
① 1베드3,13-4,19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오늘날 그리스도인 받는 고난 앞에서 확신을 가진 삶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역경에 맞선 확신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변화시켜 줍니까?
                                                                           
                                                                           
③ 베드로 사도는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삶의 모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형제자매들의 모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7:04: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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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과: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2서(1베드1,1-3,12)]]></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6]]></link>
			<description><![CDATA[제 1과: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읽어야 할 말씀(1베드1,1-3,12)

1. 시작기도: 1베드1,13-21.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7 그리고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하느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고 그분 백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그분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퉁이 돌이신 분,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가 되시는 분과 결합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2.1. 인사(1베드1,1-2)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먼저 자신을 소개하면서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편지의 수신인들은 퐅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선택하신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룩해져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고, 또 그분의 피가 뿌려져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상에서 박해받는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정결하게 되어 죄에서 죽고 은총과 평화를 누리며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총과 평화가 풍성히 내리기를 빌며 인사합니다. 

2.2. 희망에 대한 감사(1베드1,3-12)
 이 희망은 인간의 상상이나 지적 노력이 가져다준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입니다(1,3).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지향하는 목표는 앞으로 올 하느님의 나라, 신자들에게 보장된 불멸의 상속 재산입니다. 곧 믿음이 ‘직접 봄’으로 바뀌고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구원을 충만히 또 궁극적으로 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1베드1,3-4) 

 이 희망은 새로운 행동의 원동력이고, 신자들은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련 속에서도 기쁨과 함께 투쟁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희망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의와 의문을 제기합니다. 믿는 이들은 조용하지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상속 재산이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행복선언’(마태5,3-12)의 재확인입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베드1,5-6) 

 신앙의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타협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오롯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묵묵히 믿음을 실천해 나갈 때, 그 믿음의 순수성은 더욱 커져 나갑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1,5-7) 

 믿음의 순수성은 중요합니다. 순수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올바른 믿음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우리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밝혀져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해 들었고, 물려받은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고, 믿음을 지켜 나가며 믿음의 순수성을 키워 나갈 때, 그리스도인은 영광스럽게 되고, 그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언자들이 계시를 받았고,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2.3.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1베드1,13-21)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가 당신을 섬기고 당신께서 이루신 일들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악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따르고, 그분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입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 2절은 하느님 자녀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9,2) 거룩한 사람의 모습은 온전하게 주님을 향하며 계명을 지키는 삶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규칙과 규정들을 기쁘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거룩한 생활입니다.

 거룩한 생활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내야합니다.

 거룩한 생활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14,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 그 삶이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입니다.

2.4. 신자 생활(1베드1,22-2,3)
 베드로 사도의 관심사는 신자 공동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선포된 희망에 의지하여 꿋꿋이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받은 구원에 대한 희망은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희망이야말로 나날이 이어지는 삶에서 끈기와 기쁨으로 펼치는 활동의 근원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베드1,24-25)

 이 서간의 수신자들은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소외와 박해를 겪던 그리스도인(나그네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에게 세상의 고통과 권력은 일시적일 뿐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썩어 없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썩지 않는 말씀의 불변성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라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강대국 바빌론도 결국 풀처럼 마를 것이나, 너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영원하다며 위로를 건네며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선포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로마의 압박도 결국 지나갈 풀과 같다며 격려합니다.

 풀은 본질적으로 유약하고 수명이 짧습니다. 아름답고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일시적입니다. 지중해와 중동 지역의 풀은 봄철 뜨거운 사막 바람이 불면 하룻밤 사이에도 누렇게 마르고 꽃이 떨어집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룬 대제국이나 개인의 화려한 성취도 시간의 흐름(종말) 앞에서는 허무하게 사라짐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비록 신자들이 세상에서는 풀처럼 유약하고 박해받는 처지일지라도, 영원한 말씀인 복음을 붙들고 있기에 이미 영원한 생명(썩지 않을 씨앗)을 소유한 승리자라고 격려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모든 중상을 버려야 합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하느님 자녀들은 이미 맛보았으니 그 구원을 얻기 위해 버릴 것은 버리고, 움켜 잡을 것은 움켜잡아야 합니다.

2.5. 교회의 기초와 사명(1베드2,4-10)
 교회의 기초는 살아 있는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며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단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모퉁이의 머리돌이십니다.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2,5)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과 신자들의 삶을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2.5.1. 영적 집을 짓는 하느님 백성
 BC 721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 BC587년 남유다가 멸망했습니다.  BC 705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 왕이 전사하자, 유다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로 보고 반란을 도모합니다. BC 703년 ~ 702년, 남유다의 히즈키야 왕과 지도자들은 아시리아의 보복을 막기 위해 이집트에 사절단을 보내 은밀하게 군사 동맹을 체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행동을 죽음과의 계약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BC 701년, 새로운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Sennacherib)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BC587년, 치드키야왕은 우유바단함과 불순종으로 우상숭배를 막지 못하고, 끝까지 이집트의 군사력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도망치다 잡혀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아시리아가 남유다를 위협할 때(BC705-701),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아시리아의 위협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와 군사 동맹을 맺으며 하느님 대신 인간의 힘에 의지하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헛된 동맹을 책망하시며 흔들리지 않는 기초에 의지해야, 하느님께 의지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죽음과 맺은 너희의 계약은 파기되고 저승과 맺은 너희의 협약은 유지되지 못하리라. 사나운 재앙이 지나가게 되면 너희는 그것에 짓밟히리라.”(이사28,18)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17 그리고 나는 공정을 줄자로, 정의를 저울로 삼으리라. 우박이 거짓의 피신처를 쓸어 가고 물이 은신처를 씻어 가리라.”(이사28,16-17)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1베드2,6-7)

① 성경에서 돌은 하느님의 현존과 약속을 영원히 기억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야곱은 꿈에서 하느님을 뵌 후, 베고 자던 돌을 가져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그곳을 하느님의 집(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28,18).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넌 후, 각 지파의 수대로 12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비를 세워 후대에 하느님의 기적을 전했습니다(여호4,20-24)

② 또한 돌은 영원히 지켜야 할 법과 준엄한 공의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돌판에 친히 새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변함없고 영원함을 뜻합니다. 또한 구약에서 신성모독이나 중대한 죄를 지은 자는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 있는 죄악을 단호하게 제거하는 공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③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모퉁잇돌’ 이십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모퉁잇돌이십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만나는 중심이 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자녀들이 모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이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든든한 반석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결국 심판받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녀들은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생명을 얻는 “살아있는 돌, 산 돌”들이기에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집을 짓는 하느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5.2. 영적 제물을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
 하느님 자녀들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2,9) 하느님 자녀들은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사랑과 자비와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것을 보편사제직이라고 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로 결합된 하느님 자녀들은 왕직, 예언직, 사제직에 참례합니다. 예언직은 말과 삶의 모범을 통해 세상의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왕직은 세상의 악과 죄에 물들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세상을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백성이 이제 하느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제 하느님 자녀들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적 제물로 바치는 거룩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보편사제직무를 부여받은 하느님 자녀들은 일상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 영적 제물로 봉헌하고, 세상에서 복음을 실천합니다.
 사제단의 핵심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녀들은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제라는 신분답게 거룩한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박해받는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고, 거룩함과 품격 있는 삶을 통해 사제단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과거 성전 예배의 핵심은 소나 양을 봉헌하는 희생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들은 죽어가는 동물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며 하느님 자녀의 거룩한 삶을 영적 제물로 봉헌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자신이 변화시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입어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영적 제물로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12,6-8)
 
 하느님 백성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거룩한 재물로 바쳐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재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원하시고 온전하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신비롭게 동참함으로써만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2.6. 신자와 이교인(1베드2,11-12)
 당시 초대 교회 신자들은 로마 제국에서 법적으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외국인 거주자’나 ‘방랑자’처럼 소외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영적으로 승화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기에 이 세상에 동화될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를 본향으로 두고 잠시 지나가는 영적 나그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기에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해야 하고,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2,12) 

 역사적으로 당시 로마 제국의 이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오해하고 박해했습니다. 황제 숭배와 이교 신전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무신론자’ 혹은 ‘반정부 선동가’로 몰았고, 성찬례를 인육을 먹는 행위로,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입맞춤 평화 인사를 나누는 것을 근친상간으로 중상모략했습니다. 오해를 푸는 열쇠는 “바르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억울한 비난에 대해 말싸움이나 물리적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교인들 한가운데서 가장 도덕적이고 정직하며 의로운 삶, 착한 행실로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권고합니다. 신자들의 변함없는 정직함, 희생, 사랑의 착한 행실을 보며 자신들의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삶의 태도가 감동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들도 신자들의 삶에 감화되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바른 처신은 나 혼자 거룩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나를 비난하던 이교인들까지 하느님을 믿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자녀들이 이방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음 선포가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들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7. 선량한 국민(1베드2,13-17)
베드로 사도는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3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임금에게는 주권자이므로 복종하고, 14 총독들에게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도록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므로 복종하십시오.”(1베드2,13-14)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당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이며, 총독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의 관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잔인한 이교도 정권이었음에도 베드로 사도는 복종을 권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국가의 본질적 임무가 ‘악인에게 벌을 주고 선인에게 상을 주는 것(상선벌악)’이라고 정의합니다. 국가가 이 공의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한, 신자는 법과 질서를 준수하며 사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현세의 권력자들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권력자 개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녀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처벌하기 위해 세상의 권세와 제도를 허락하신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13,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선을 행할 때,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녀들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자유인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 공동체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임금을 존경하는 삶이 자유로운 삶입니다.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1베드2,16)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율법, 세상의 헛된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나는 하느님의 백성이니 세상 법은 안 지켜도 된다”는 식의 방종이나 무법 행위의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하느님의 자발적인 종’이 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종이기에 세상 권력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으며, 동시에 사회적 책임은 온전히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신분, 인종,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우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절대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경배하며, 황제를 신으로 숭배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통치자로서 마땅한 예의와 존중을 갖추어야 합니다.

2.8. 충실한 하인(1베드2,18-25)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 자녀들이 로마 제국의 법적 권리가 없음을 위로하며, 세상의 시민권 대신 하늘의 영적 시민권을 선포했을 때, 이 편지를 통해 하느님 자녀들은 큰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하인 여러분, 진정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뿐 아니라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 19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8-19)

 베드로 서간이 작성된 당시, 로마 시민권자나 속주 자유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인(노예)들이었습니다. 당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하인(노예)'들을 향한 이 권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비와 구원의 여정으로 인식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드2,21)

 하인 신분으로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때에는, 견디어 낸다고 한들 그것은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하느님 자녀들은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보기 ‘본보기’의 희랍어 휴포그라모스(ὑπογραμμός)는 어린아이가 글씨를 배울 때 밑에 깔고 따라 쓰는 '본글씨'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몸소 고난을 겪으심으로 우리가 따라 그려야 할 완벽한 삶의 서체를 남겨주셨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를 남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신앙생활의 방해물이 아니라 부르심의 핵심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최고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십니다. 길 잃은 양에게 친히 찾아오시어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의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하느님 자녀들은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나눔 및 묵상 1
베드로 사도는 당시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던 최하층 노예(하인)들에게 사회적 해방 투쟁을 선동하는 대신, 부당한 채찍질과 고난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임을 알리며 하느님 자녀들에게 영적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침묵으로 인내하는 삶은 무력한 굴종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부당함속에서 고통스럽고 억울할 때, 하느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2.9. 아내와 남편(1베드3,1-7)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이 말씀은 자칫 가부장적인 권고요,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말로 들리기 쉽지만, 가톨릭 교회의 영성과 혼인 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교회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듯,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로마 제국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의 종교를 따르지 않고 홀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남편과 신앙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경건하고 순결한 삶의 모범’을 통해 남편을 감동시키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이 따르는 선교입니다. 아내들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편도 그리될 것이기에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딸들이 어떻게 자신을 치장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3 머리를 땋아 올리거나 금붙이를 달거나 좋은 옷을 차려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지 말고, 4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과 같이 썩지 않는 것으로, 마음속에 감추어진 자신을 치장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귀중한 것입니다.”(1베드3,3-4)

 당시 유행하던 사치스러운 겉치장은 이교 사회의 허영을 상징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영원히 썩지 않는 가치인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으로 내면을 가꾸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의 미덕과도 일맥상통하며,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의 거룩한 부인들의 예를 들며 ‘전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부인들도 남편에게 순종하며 이렇게 자신을 치장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라의 모범을 예로 드십니다.
	“6 예컨대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선을 행하고 아무리 무서운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라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1베드3,6)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무리 무서운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이교도 남편의 핍박이나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굽히지 않는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남편을 향하여 아내를 존중하며, 이해심을 가지고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내도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7 마찬가지로 남편들도 자기보다 연약한 여성인 아내를 존중하면서, 이해심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아내도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가로막히지 않습니다.”(1베드3,7)

 당시에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거나 종속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이해하고 존중하라고 권고합니다. 아내가 연약한 것은 인격적인 열등감이 아니라 당시 법적·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던 아내의 현실을 인정하고 남편이 아내의 보호막이 되어 주라는 사랑의 권고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은총을 함께 물려받을 ‘영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동반자’입니다.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사람이라는 말씀은 당시 가치관을 뒤흔든 파격적인 선포입니다. 혼인 안에서 두 사람은 주님의 상속자로서 대등한 품격을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 영성의 핵심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억압하거나 함부로 대하면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가정 안에서 아내와의 화목과 사랑의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의 신앙 관계를 결정짓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2.10. 참다운 신앙 공동체(1베드3,8-12)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며 서로 소통하고 주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가 바로 참다운 신앙 공동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생각을 같이하고 서로 동정하고 형제처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3,8)

 생각을 같이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기에 주님 안에서 마음이 일치가 된 상태입니다. 서로 동정한다는 것은 함께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도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12,26)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원칙이고, 하느님 사랑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슬픔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슬픔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주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치는 신앙인들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시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느님 자녀를 형제처럼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친가족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처럼 대하기에 형제의 허물과 약점을 단죄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게 됩니다. 그 마음이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모든 덕목의 기초는 겸손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의 자세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3-5)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은총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축복해 주어야 하고,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줄 때, 남은 나에게 그대로 해 주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나에게 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은총을 끌어당기는 중요한 원칙을 말씀해 주십니다.

	“9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3,9) 

 예수님께서는 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 주라고 말씀하셨고,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까지 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을 상속받는 방법’을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형제자매들을 먼저 생각하며 평화를 추구합니다. 
	“10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는 이는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혀를 조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입술을 조심하여라. 11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 12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신다.”(1베드3,10-12)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거짓, 험담, 중상모략입니다. 혀를 다스리는 것은 성화(聖化) 과정의 핵심입니다. 많은 분열이 혀를 통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때, 평화는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최고의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까지 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평화를 간직하고,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평화는 하느님의 구원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를 드러내실 때, 정의는 실현되고, 하느님 자녀들은 참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나눔 및 묵상 2:
하느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눈은 고난받는 의인들을 사랑으로 굽어보시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받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신다.”(1베드3,12)라고 말슴하시며 영적 위로를 줍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힘과 위로를 얻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위로를 통해 나는 어떻게 힘을 내었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는 무척 중요합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자신의 재물까지도 사용하는 신앙인. 그가 바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는 더욱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린 형제자매의 마음을 돌려서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직무이며,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직무입니다.(참조: 2코린토5,18-21) 또한 나 자신의 평화도 중요합니다. 내가 평화를 간직하고 있어야 그 평화를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 평화를 간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지 주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는 신앙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1베드1,1-3,12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하느님 백성은 사회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참다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참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하느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③ 하느님 백성은 생각을 같이하고(일치), 서로 동정하고(공감), 형제처럼 사랑하고(형제애), 자비를 베풀며(측은지심),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겸손). 이 다섯 가지를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이 끌어당기는 평화로운 공동체는 어떤 세상일까요?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7:03: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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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베드로 서간 입문]]></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5]]></link>
			<description><![CDATA[1. 베드로 서간 입문
‘가톨릭 서간’이란 특정 독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일반을 상대로 쓴 편지라는 뜻으로 사용해 온 용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특정 개인이나 지역 교회가 아닌 모든 신자(보편 교회)를 대상으로 쓰인 7편의 편지를 가톨릭 서간이라고 합니다. 야고보 서간, 베드로의 두 서간, 요한의 세 서간, 그리고 유다 서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동 서간'이라고도 부릅니다. 야고보 서간: 실천하는 믿음의 중요성과 인내, 혀(말)의 절제, 공동체의 사랑을 강조.
   베드로 1서: 시련을 겪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며, 거룩한 삶을 권고.
   베드로 2서: 거짓 교사를 경계하고,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성장할 것을 당부.
   요한 1서: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선포하고, 형제 사랑과 올바른 신앙을 강조.
   요한 2서: 진리 안에 머물며 사랑을 실천하고, 거짓 가르침을 멀리하라고 경고.
   요한 3서: 진리를 따르는 이들을 격려하고, 교회 내의 나눔과 협력을 칭찬.
   유다서간: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과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며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촉구.
 베드로 서간은 수신인 곧 독자가 누구라고는 지목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어 볼 수 있고 읽어 마땅한 편지로서 베드로 서간은 ‘공동 서간’, 곧 ‘가톨릭 서간’이라는 전통적인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두 통의 편지인 베드로 1서와 베드로 2서는 극심한 박해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 1서는 로마의 박해가 시작될 무렵, 소아시아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시련을 겪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살아 있는 희망’을 강조합니다. 금보다 귀한 것은 시련을 거친 ‘믿음’이라고 격려합니다.

 베드로 서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또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들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서간의 집필 동기는 열성이 식어 가고 그에 따라 갖가지 환난으로 시련을 겪으면서 용기를 잃을 위험이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첫째,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선택된 겨레요 임금의 사제직이며 거룩한 민족’(1베드 2,9)으로 정의하며, 세상 속에서 품위 있게 살 것을 권고합니다. 
둘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교회 내부로 침투한 잘못된 가르침과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고, 사도들로부터 전해진 올바른 신앙(성전)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넷째,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임을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로 그날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부인하고 따라서 윤리적으로도 ‘자유롭게’ 살자는 거짓 교사들의 교리적이며 윤리적인 오류를 반박하고 이런 오류의 위험에서 공동체를 보호하려 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베드로 사도는 목자로서 “무엇보다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라며 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또한 장로들에게 억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양 떼를 돌보고,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예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을 대물림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부 출신의 투박한 성격이었지만, 서간 속의 문체는 매우 따뜻하고 사목적인 애정이 가득 차 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7:02: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베드로 서간1,2서]]></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4]]></link>
			<description><![CDATA[베드로 서간 제목 차례
1. 베드로 서간 입문	3
                      제 1과: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5
1. 시작기도: 1베드1,13-21.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5
2.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5
  2.1. 인사(1베드1,1-2)	5
  2.2. 희망에 대한 감사(1베드1,3-12)	6
  2.3.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1베드1,13-21)	7
  2.4. 신자 생활(1베드1,22-2,3)	9
  2.5. 교회의 기초와 사명(1베드2,4-10)	10
      2.5.1. 영적 집을 짓는 하느님 백성	10
      2.5.2. 영적 제물을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	12
  2.6. 신자와 이교인(1베드2,11-12)	13
  2.7. 선량한 국민(1베드2,13-17)	14
  2.8. 충실한 하인(1베드2,18-25)	15
  2.9. 아내와 남편(1베드3,1-7)	17
  2.10. 참다운 신앙 공동체(1베드3,8-12)	18
3. 정리해 봅시다.	22
4. 실천사항	22
5. 말씀으로 기도하기	22
  
                              제 2과: 고난과 확신	23
1. 말씀읽기: 1베드4,12-19 그리스도인의 받는 고난	23
2. 고난과 확신	23
  2.1.박해에 맞선 확신(1베드3,13-17)	23
  2.2. 그리스도의 승리(1베드3,18-22)	25
  2.3. 참그리스도인(1베드4,1-6)	27
  2.4. 종말과 공동체 생활(1베드4,7-11)	29
  2.5. 그리스도인의 받는 고난(1베드4,12-19)	31
3. 정리해 봅시다.	35
4. 실천사항	35
5. 말씀으로 기도하기	35

                            제 3과: 겸손과 깨어 있음	36
1. 말씀읽기: 1베드5,8-10	36
2. 겸손과 깨어 있음 	36
  2.1. 지도자들의 의무(1베드5,1-4)	36
  2.2. 겸손과 깨어 있음(1베드5,5-11)	37
  2.3. 끝 인사(1베드5,12-14)	39
3. 정리해 봅시다.	41
4. 실천사항 	41
5. 말씀으로 기도하기	41

                        제4과: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	42
1. 말씀읽기: 2베드1,3-11 그리스도인의 소명	42
2.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	42
  2.1. 인사(2베드1,1-2)	42
  2.2. 그리스도인의 소명(2베드1,3-11)	43
      ①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	43
      ② 덕에 앎을 더하는 삶	44
      ③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	45
      ④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	46
      ⑤ 인내에 신심을 더하는 삶	47
      ⑥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	49
      ⑦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	49
  2.3.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2베드1,12-21)	51
  2.4.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2베드2,1-22)	52
      ①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	54
      ② 의로움은 거룩한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	58
  2.5. 주님의 재림(2베드3,1-18)	60
3. 정리해 봅시다.	63
4. 실천사항	63
5. 말씀으로 기도하기	63


1. 베드로 서간 입문
‘가톨릭 서간’이란 특정 독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일반을 상대로 쓴 편지라는 뜻으로 사용해 온 용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특정 개인이나 지역 교회가 아닌 모든 신자(보편 교회)를 대상으로 쓰인 7편의 편지를 가톨릭 서간이라고 합니다. 야고보 서간, 베드로의 두 서간, 요한의 세 서간, 그리고 유다 서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동 서간'이라고도 부릅니다. 야고보 서간: 실천하는 믿음의 중요성과 인내, 혀(말)의 절제, 공동체의 사랑을 강조.
   베드로 1서: 시련을 겪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며, 거룩한 삶을 권고.
   베드로 2서: 거짓 교사를 경계하고,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성장할 것을 당부.
   요한 1서: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선포하고, 형제 사랑과 올바른 신앙을 강조.
   요한 2서: 진리 안에 머물며 사랑을 실천하고, 거짓 가르침을 멀리하라고 경고.
   요한 3서: 진리를 따르는 이들을 격려하고, 교회 내의 나눔과 협력을 칭찬.
   유다서간: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과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며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촉구.
 베드로 서간은 수신인 곧 독자가 누구라고는 지목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어 볼 수 있고 읽어 마땅한 편지로서 베드로 서간은 ‘공동 서간’, 곧 ‘가톨릭 서간’이라는 전통적인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두 통의 편지인 베드로 1서와 베드로 2서는 극심한 박해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 1서는 로마의 박해가 시작될 무렵, 소아시아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시련을 겪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살아 있는 희망’을 강조합니다. 금보다 귀한 것은 시련을 거친 ‘믿음’이라고 격려합니다.

 베드로 서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또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들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서간의 집필 동기는 열성이 식어 가고 그에 따라 갖가지 환난으로 시련을 겪으면서 용기를 잃을 위험이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첫째,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선택된 겨레요 임금의 사제직이며 거룩한 민족’(1베드 2,9)으로 정의하며, 세상 속에서 품위 있게 살 것을 권고합니다. 
둘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교회 내부로 침투한 잘못된 가르침과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고, 사도들로부터 전해진 올바른 신앙(성전)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넷째,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임을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로 그날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부인하고 따라서 윤리적으로도 ‘자유롭게’ 살자는 거짓 교사들의 교리적이며 윤리적인 오류를 반박하고 이런 오류의 위험에서 공동체를 보호하려 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베드로 사도는 목자로서 “무엇보다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라며 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또한 장로들에게 억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양 떼를 돌보고,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예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을 대물림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부 출신의 투박한 성격이었지만, 서간 속의 문체는 매우 따뜻하고 사목적인 애정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 1과: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읽어야 할 말씀(1베드1,1-3,12)

1. 시작기도: 1베드1,13-21.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7 그리고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하느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고 그분 백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그분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퉁이 돌이신 분,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가 되시는 분과 결합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2.1. 인사(1베드1,1-2)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먼저 자신을 소개하면서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편지의 수신인들은 퐅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선택하신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룩해져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고, 또 그분의 피가 뿌려져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상에서 박해받는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정결하게 되어 죄에서 죽고 은총과 평화를 누리며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총과 평화가 풍성히 내리기를 빌며 인사합니다. 

2.2. 희망에 대한 감사(1베드1,3-12)
 이 희망은 인간의 상상이나 지적 노력이 가져다준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입니다(1,3).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지향하는 목표는 앞으로 올 하느님의 나라, 신자들에게 보장된 불멸의 상속 재산입니다. 곧 믿음이 ‘직접 봄’으로 바뀌고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구원을 충만히 또 궁극적으로 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1베드1,3-4) 

 이 희망은 새로운 행동의 원동력이고, 신자들은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련 속에서도 기쁨과 함께 투쟁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희망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의와 의문을 제기합니다. 믿는 이들은 조용하지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상속 재산이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행복선언’(마태5,3-12)의 재확인입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베드1,5-6) 

 신앙의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타협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오롯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묵묵히 믿음을 실천해 나갈 때, 그 믿음의 순수성은 더욱 커져 나갑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1,5-7) 

 믿음의 순수성은 중요합니다. 순수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올바른 믿음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우리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밝혀져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해 들었고, 물려받은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고, 믿음을 지켜 나가며 믿음의 순수성을 키워 나갈 때, 그리스도인은 영광스럽게 되고, 그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언자들이 계시를 받았고,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2.3.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1베드1,13-21)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가 당신을 섬기고 당신께서 이루신 일들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악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따르고, 그분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입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 2절은 하느님 자녀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9,2) 거룩한 사람의 모습은 온전하게 주님을 향하며 계명을 지키는 삶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규칙과 규정들을 기쁘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거룩한 생활입니다.

 거룩한 생활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내야합니다.

 거룩한 생활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14,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 그 삶이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입니다.

2.4. 신자 생활(1베드1,22-2,3)
 베드로 사도의 관심사는 신자 공동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선포된 희망에 의지하여 꿋꿋이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받은 구원에 대한 희망은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희망이야말로 나날이 이어지는 삶에서 끈기와 기쁨으로 펼치는 활동의 근원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베드1,24-25)

 이 서간의 수신자들은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소외와 박해를 겪던 그리스도인(나그네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에게 세상의 고통과 권력은 일시적일 뿐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썩어 없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썩지 않는 말씀의 불변성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라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강대국 바빌론도 결국 풀처럼 마를 것이나, 너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영원하다며 위로를 건네며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선포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로마의 압박도 결국 지나갈 풀과 같다며 격려합니다.

 풀은 본질적으로 유약하고 수명이 짧습니다. 아름답고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일시적입니다. 지중해와 중동 지역의 풀은 봄철 뜨거운 사막 바람이 불면 하룻밤 사이에도 누렇게 마르고 꽃이 떨어집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룬 대제국이나 개인의 화려한 성취도 시간의 흐름(종말) 앞에서는 허무하게 사라짐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비록 신자들이 세상에서는 풀처럼 유약하고 박해받는 처지일지라도, 영원한 말씀인 복음을 붙들고 있기에 이미 영원한 생명(썩지 않을 씨앗)을 소유한 승리자라고 격려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모든 중상을 버려야 합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하느님 자녀들은 이미 맛보았으니 그 구원을 얻기 위해 버릴 것은 버리고, 움켜 잡을 것은 움켜잡아야 합니다.

2.5. 교회의 기초와 사명(1베드2,4-10)
 교회의 기초는 살아 있는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며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단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모퉁이의 머리돌이십니다.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2,5)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과 신자들의 삶을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2.5.1. 영적 집을 짓는 하느님 백성
 BC 721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 BC587년 남유다가 멸망했습니다.  BC 705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 왕이 전사하자, 유다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로 보고 반란을 도모합니다. BC 703년 ~ 702년, 남유다의 히즈키야 왕과 지도자들은 아시리아의 보복을 막기 위해 이집트에 사절단을 보내 은밀하게 군사 동맹을 체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행동을 죽음과의 계약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BC 701년, 새로운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Sennacherib)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BC587년, 치드키야왕은 우유바단함과 불순종으로 우상숭배를 막지 못하고, 끝까지 이집트의 군사력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도망치다 잡혀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아시리아가 남유다를 위협할 때(BC705-701),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아시리아의 위협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와 군사 동맹을 맺으며 하느님 대신 인간의 힘에 의지하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헛된 동맹을 책망하시며 흔들리지 않는 기초에 의지해야, 하느님께 의지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죽음과 맺은 너희의 계약은 파기되고 저승과 맺은 너희의 협약은 유지되지 못하리라. 사나운 재앙이 지나가게 되면 너희는 그것에 짓밟히리라.”(이사28,18)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17 그리고 나는 공정을 줄자로, 정의를 저울로 삼으리라. 우박이 거짓의 피신처를 쓸어 가고 물이 은신처를 씻어 가리라.”(이사28,16-17)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1베드2,6-7)

① 성경에서 돌은 하느님의 현존과 약속을 영원히 기억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야곱은 꿈에서 하느님을 뵌 후, 베고 자던 돌을 가져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그곳을 하느님의 집(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28,18).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넌 후, 각 지파의 수대로 12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비를 세워 후대에 하느님의 기적을 전했습니다(여호4,20-24)

② 또한 돌은 영원히 지켜야 할 법과 준엄한 공의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돌판에 친히 새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변함없고 영원함을 뜻합니다. 또한 구약에서 신성모독이나 중대한 죄를 지은 자는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 있는 죄악을 단호하게 제거하는 공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③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모퉁잇돌’ 이십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모퉁잇돌이십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만나는 중심이 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자녀들이 모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이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든든한 반석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결국 심판받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녀들은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생명을 얻는 “살아있는 돌, 산 돌”들이기에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집을 짓는 하느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5.2. 영적 제물을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
 하느님 자녀들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2,9) 하느님 자녀들은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사랑과 자비와 구원을 선포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백성이 이제 하느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을 보편사제직이라고 합니다. 사제단의 핵심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녀들은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제라는 신분답게 거룩한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라고 베드로 사도는 격려합니다. 

 과거 성전 예배의 핵심은 소나 양을 봉헌하는 희생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들은 죽어가는 동물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며 하느님 자녀의 거룩한 삶을 영적 제물로 봉헌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자신이 변화시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입어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영적 제물로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12,6-8)
 
 하느님 백성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거룩한 재물로 바쳐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재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원하시고 온전하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신비롭게 동참함으로써만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2.6. 신자와 이교인(1베드2,11-12)
 당시 초대 교회 신자들은 로마 제국에서 법적으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외국인 거주자’나 ‘방랑자’처럼 소외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영적으로 승화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기에 이 세상에 동화될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를 본향으로 두고 잠시 지나가는 영적 나그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기에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해야 하고,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2,12) 

 역사적으로 당시 로마 제국의 이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오해하고 박해했습니다. 황제 숭배와 이교 신전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무신론자’ 혹은 ‘반정부 선동가’로 몰았고, 성찬례를 인육을 먹는 행위로,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입맞춤 평화 인사를 나누는 것을 근친상간으로 중상모략했습니다. 오해를 푸는 열쇠는 “바르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억울한 비난에 대해 말싸움이나 물리적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교인들 한가운데서 가장 도덕적이고 정직하며 의로운 삶, 착한 행실로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권고합니다. 신자들의 변함없는 정직함, 희생, 사랑의 착한 행실을 보며 자신들의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삶의 태도가 감동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들도 신자들의 삶에 감화되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바른 처신은 나 혼자 거룩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나를 비난하던 이교인들까지 하느님을 믿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자녀들이 이방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음 선포가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들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7. 선량한 국민(1베드2,13-17)
베드로 사도는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3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임금에게는 주권자이므로 복종하고, 14 총독들에게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도록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므로 복종하십시오.”(1베드2,13-14)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당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이며, 총독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의 관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잔인한 이교도 정권이었음에도 베드로 사도는 복종을 권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국가의 본질적 임무가 ‘악인에게 벌을 주고 선인에게 상을 주는 것(상선벌악)’이라고 정의합니다. 국가가 이 공의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한, 신자는 법과 질서를 준수하며 사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현세의 권력자들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권력자 개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녀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처벌하기 위해 세상의 권세와 제도를 허락하신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13,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선을 행할 때,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녀들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자유인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 공동체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임금을 존경하는 삶이 자유로운 삶입니다.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1베드2,16)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율법, 세상의 헛된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나는 하느님의 백성이니 세상 법은 안 지켜도 된다”는 식의 방종이나 무법 행위의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하느님의 자발적인 종’이 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종이기에 세상 권력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으며, 동시에 사회적 책임은 온전히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신분, 인종,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우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절대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경배하며, 황제를 신으로 숭배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통치자로서 마땅한 예의와 존중을 갖추어야 합니다.

2.8. 충실한 하인(1베드2,18-25)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 자녀들이 로마 제국의 법적 권리가 없음을 위로하며, 세상의 시민권 대신 하늘의 영적 시민권을 선포했을 때, 이 편지를 통해 하느님 자녀들은 큰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하인 여러분, 진정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뿐 아니라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 19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8-19)

 베드로 서간이 작성된 당시, 로마 시민권자나 속주 자유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인(노예)들이었습니다. 당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하인(노예)'들을 향한 이 권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비와 구원의 여정으로 인식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드2,21)

 하인 신분으로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때에는, 견디어 낸다고 한들 그것은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하느님 자녀들은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보기 ‘본보기’의 헬라어 하이포그라모스(ὑπογραμμός)는 어린아이가 글씨를 배울 때 밑에 깔고 따라 쓰는 '본글씨'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몸소 고난을 겪으심으로 우리가 따라 그려야 할 완벽한 삶의 서체를 남겨주셨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를 남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신앙생활의 방해물이 아니라 부르심의 핵심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최고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십니다. 길 잃은 양에게 친히 찾아오시어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의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하느님 자녀들은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나눔 및 묵상 1
베드로 사도는 당시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던 최하층 노예(하인)들에게 사회적 해방 투쟁을 선동하는 대신, 부당한 채찍질과 고난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임을 알리며 하느님 자녀들에게 영적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침묵으로 인내하는 삶은 무력한 굴종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부당함속에서 고통스럽고 억울할 때, 하느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2.9. 아내와 남편(1베드3,1-7)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이 말씀은 자칫 가부장적인 권고요,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말로 들리기 쉽지만, 가톨릭 교회의 영성과 혼인 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교회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듯,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로마 제국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의 종교를 따르지 않고 홀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남편과 신앙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경건하고 순결한 삶의 모범’을 통해 남편을 감동시키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이 따르는 선교입니다. 아내들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편도 그리될 것이기에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딸들이 어떻게 자신을 치장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3 머리를 땋아 올리거나 금붙이를 달거나 좋은 옷을 차려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지 말고, 4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과 같이 썩지 않는 것으로, 마음속에 감추어진 자신을 치장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귀중한 것입니다.”(1베드3,3-4)

 당시 유행하던 사치스러운 겉치장은 이교 사회의 허영을 상징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영원히 썩지 않는 가치인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으로 내면을 가꾸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의 미덕과도 일맥상통하며,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의 거룩한 부인들의 예를 들며 ‘전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부인들도 남편에게 순종하며 이렇게 자신을 치장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라의 모범을 예로 드십니다.
	“6 예컨대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선을 행하고 아무리 무서운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라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1베드3,6)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무리 무서운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이교도 남편의 핍박이나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굽히지 않는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남편을 향하여 아내를 존중하며, 이해심을 가지고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내도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7 마찬가지로 남편들도 자기보다 연약한 여성인 아내를 존중하면서, 이해심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아내도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가로막히지 않습니다.”(1베드3,7)

 당시에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거나 종속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이해하고 존중하라고 권고합니다. 아내가 연약한 것은 인격적인 열등감이 아니라 당시 법적·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던 아내의 현실을 인정하고 남편이 아내의 보호막이 되어 주라는 사랑의 권고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은총을 함께 물려받을 ‘영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동반자’입니다.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사람이라는 말씀은 당시 가치관을 뒤흔든 파격적인 선포입니다. 혼인 안에서 두 사람은 주님의 상속자로서 대등한 품격을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 영성의 핵심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억압하거나 함부로 대하면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가정 안에서 아내와의 화목과 사랑의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의 신앙 관계를 결정짓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2.10. 참다운 신앙 공동체(1베드3,8-12)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며 서로 소통하고 주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가 바로 참다운 신앙 공동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생각을 같이하고 서로 동정하고 형제처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3,8)

 생각을 같이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기에 주님 안에서 마음이 일치가 된 상태입니다. 서로 동정한다는 것은 함께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도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12,26)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원칙이고, 하느님 사랑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슬픔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슬픔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주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치는 신앙인들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시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느님 자녀를 형제처럼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친가족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처럼 대하기에 형제의 허물과 약점을 단죄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게 됩니다. 그 마음이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모든 덕목의 기초는 겸손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의 자세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3-5)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은총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축복해 주어야 하고,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줄 때, 남은 나에게 그대로 해 주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나에게 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은총을 끌어당기는 중요한 원칙을 말씀해 주십니다.

	“9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3,9) 

 예수님께서는 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 주라고 말씀하셨고,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까지 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을 상속받는 방법’을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참다운 신앙공동체는 형제자매들을 먼저 생각하며 평화를 추구합니다. 
	“10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는 이는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혀를 조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입술을 조심하여라. 11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 12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신다.”(1베드3,10-12)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거짓, 험담, 중상모략입니다. 혀를 다스리는 것은 성화(聖化) 과정의 핵심입니다. 많은 분열이 혀를 통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때, 평화는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최고의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까지 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평화를 간직하고,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평화는 하느님의 구원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를 드러내실 때, 정의는 실현되고, 하느님 자녀들은 참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나눔 및 묵상 2:
하느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눈은 고난받는 의인들을 사랑으로 굽어보시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받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신다.”(1베드3,12)라고 말슴하시며 영적 위로를 줍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힘과 위로를 얻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위로를 통해 나는 어떻게 힘을 내었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는 무척 중요합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자신의 재물까지도 사용하는 신앙인. 그가 바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는 더욱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린 형제자매의 마음을 돌려서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직무이며,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직무입니다.(참조: 2코린토5,18-21) 또한 나 자신의 평화도 중요합니다. 내가 평화를 간직하고 있어야 그 평화를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 평화를 간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지 주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는 신앙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1베드1,1-3,12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하느님 백성은 사회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참다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참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하느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③ 하느님 백성은 생각을 같이하고(일치), 서로 동정하고(공감), 형제처럼 사랑하고(형제애), 자비를 베풀며(측은지심),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겸손). 이 다섯 가지를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이 끌어당기는 평화로운 공동체는 어떤 세상일까요?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제 2과: 고난과 확신
읽어야 할 말씀(1베드3,13-4,19) 
1. 말씀읽기: 1베드4,12-19 그리스도인의 받는 고난
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17 사실 심판이 하느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되었습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느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종말이야 어떠하겠습니까? 18 “의인이 가까스로 구원을 받는다면 불경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19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고난과 확신
 베드로 사도는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어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단순한 불행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의로움을 살아가기 위해 받는 고난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파스카 신비의 확장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2.1.박해에 맞선 확신(1베드3,13-17)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을 살아가며,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이웃에게 다가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선을 행하는데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14 그러나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1베드3,13-14)

 박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자들과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고, 하느님 자녀들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라고 권고하십니다. 박해시기에 순교자들은 박해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천주교의 올바름과 정당함을, 천주교가 참된 종교임을 밝히며 교리를 설명하고 계명을 선포하였습니다. 박해자들 앞에서 심문받는 장소는 천주교를 선포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두려웠지만 하느님을 체험한 순교자들은 기도하면서 당당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은 일시적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11 주님께서 당신 손으로 나를 붙잡으시고 이 백성의 길을 걷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12 이 백성이 모반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모반이라고 하지 마라.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마라. 13 너희는 만군의 주님만을 거룩히 모셔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해야 할 분이시다.(이사8,11-13)

 하느님 자녀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의 선한 처신을 비방한다 하더라도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1베드3,16) 

 세상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굳건히 모실 때, 내 마음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늘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합당한 거룩한 생활과 거룩한 사제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박해자나 이교인들이 ‘당신들은 왜 고난 속에서도 기뻐합니까? 당신들이 가진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하느님 자녀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를 바르게 설명하며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말하더라도 태도가 거만하거나 공격적이면 복음의 문이 닫힙니다. 베드로 사도는 온유함과 공손함으로 타인에 대한 존중을 겸손하게 드러내고, 흠잡을 데 없는 바른 양심으로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포하는 복음과 실천하는 행동이 일치하는 의롭고 선한 삶을 보여줄 때, 교회를 모함하고 중상하던 자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님께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 자체를 피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의탁하며 선을 지속하는 태도가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3,17) 

 내 잘못으로 벌을 받는 것이라면 그 고통은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뜻 안에서 허락된 '의로운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에 우리를 온전히 결합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칼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확신, 세상의 질문에 온유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 고백,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선한 행실과 바른 양심입니다.

2.2. 그리스도의 승리(1베드3,18-22)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십자가를 짊어 지시고 희생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구약의 소나 양을 번제물로 바치는 제사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단 한 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가집니다.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3,18-19)

 감옥은 그리스도 이전의 의인들이 구원을 기다리며 갇혀 있던 ‘저승’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신 것은 그곳에 있는 이들을 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약의 의인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던 영혼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류 전체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히브 9,27-28).

 구약의 대사제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매년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반복해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인류를 속량하셨습니다. 교회가 매일 미사에서 새로운 제사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바쳐진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제단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은 일부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셈족 언어 표현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1베드3,20)  

 주님께서는 늘 기회를 주십니다. 노아 때의 대홍수는 세상을 죄로부터 정화한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순종은 구원을 가져오고, 불순종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상속재산으로 받게 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죄에서는 죽고, 은총 안에서 살아난 이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오롯한 순종은 생명과 구원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1베드3,22)

 하느님 오른쪽은 성부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영광과 권능을 받는 자리이고, ‘천사, 권력, 권능’이 복종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닫혔던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고, 전에 계셨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시어 하느님 오른쪽에서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례 성사를 통해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3. 참그리스도인(1베드4,1-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이들입니다. ‘육으로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고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죄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영적 투쟁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고난을 겪으셨으니, 여러분도 같은 각오로 무장하십시오.”(1베드4,1)

 죄와는 거리가 멀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2 그러니 남은 지상 생활 동안,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1베드4,2)

 이 세상의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은 남은 지상 생활 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방탕, 욕정, 주정, 흥청대는 술잔치, 폭음,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교인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도 있지만 천국 본향을 향하는 이 세상의 나그네들은 이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무모한 방종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놀라워하며 여러분을 비방합니다.”(1베드4,4)

 전에는 자신들과 함께 어울려 모든 것을 했지만,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면서 바뀐 생각과 말과 행위는 그들에게 많은 놀라움을 줍니다. 더 나아가 비방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기회를 잡은 이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를 갖추신 분을 받아들이고, 기회를 걷어찬 이들은 그분께 셈을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6 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1베드4,6)
 
 죽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원죄로 인해 하늘 문이 닫혀 있었기에 저승에서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며 잠들어 있던 구약의 모든 의인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1베드 4,6).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심은 구원의 복음 선포의 충만한 완성입니다. 이것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속량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 사업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나게”(요한 5,25) 하시고자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생명의 영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묵시 1,18),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구약의 성도들에게 "마침내 인류의 죄가 대속되었고 구원의 문(천국)이 열렸다"는 승리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언되었음을 다시 알려 줍니다. 또한 ‘심판’은 영원한 지옥 형벌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공통으로 내려진 ‘육체적 죽음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의인들 역시 인간이기에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저승이라는 제한된 처소에 머무는 한계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은 마침내 모든 사슬에서 풀려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2.4. 종말과 공동체 생활(1베드4,7-11)
 확신을 가진 희망은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마지막 때를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다가오는 종말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7 만물의 종말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9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 10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4,7-10)

 하느님 자녀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백성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기도와 사랑,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가 될 것을 가 제시하는 가장 첫 번째 종말 대비책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1베드4,3)라는 표현은 이교도들의 영적 방탕과 혼미함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전례 안에서 깨어 하느님과 소통하는 침묵과 정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1베드4,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증명된 한결같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잠언을 인용하면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움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잠언10,12)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감싸준다는 윤리적 의미를 넘어, 형제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은 세례성사 이후 우리가 지은 죄의 잠벌을 상쇄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효력을 지닙니다.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야고보 5,20)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베푼 사랑은 결국 그와 나를 구원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은 공동체 내의 죄의 상처를 치유하는 강력한 은총의 통로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하는 공동체입니다.

	“11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1베드4,11)

 그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 아멘.“(1베드4,11) 

 신자들이 은사 안에서 세상에 봉사하는 이유는 ‘영광과 권능’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영광은 하느님의 외적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그분이 행하신 구원 사건의 눈부신 드러남을 뜻합니다. 권능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과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넘어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의 신성을 예수님께도 고백하면서 세상의 권력과 인간의 영광은 유한하지만, 주님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선포하며 성부와 성자의 같은 영광과 권능을 고백합니다.

 ‘아멘’은 동의와 응답입니다. 앞서 선포된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라는 진리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과연 그렇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공동체가 확언하는 응답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봉사와 전교 활동이 내 자랑이 아닌,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2.5. 그리스도인의 받는 고난(1베드4,12-19)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만났을 때 도망치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성화의 기회로 삼아 끝까지 선을 행하며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련의 불길이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 박해를 이겨낸 그리스도인도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4,14) 

 고난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정화하고 신앙을 순수하게 단련하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고, 주님께서 그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넘치도록 후하게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고문과 굶주림과 죽임을 고통스럽고 두려웠지만 이겨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주님과 일치하는 것이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듯이 일상 삶 안에서 마주하는 그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받아들이고, 주님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을 행복으로 느낄 때, 그때야 비로소 주님과 온전하게 일치하고, 주님의 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박해는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유다인들의 행복관이었고, 박해받는 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개념이 유다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예레미야 예언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릅니다. 알고 있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겨야만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의로움을 보여주셨고,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의롭지 못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겸손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했습니다.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드러나고, 그 의로움은 겸손과 성실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의롭게 살아간 신앙인들이 의롭지 못한 이들 때문에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박해로 지상에서의 생명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12)

 모욕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뜻으로 심한 욕입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팔라티노 언덕, Palatine Hill)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856년 로마 팔라티노 언덕 남서쪽 사면, 노예나 군인들의 교육 장소(Paedagogium)로 쓰이던 건물의 벽면에서 발굴되었는데 충격적인 그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사람의 몸에 당나귀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십자가 앞에는 한 남성이 손을 들고 예배하는 조잡한 몸짓을 하고 있고, 그림 아래에는 그리스어로 “알렉사메노스가 자신의 신을 경배한다”라고 긁어서 적혀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조롱 섞인 낙서는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그림(서기 200년경 추정)으로 인정받고 있다.왜 당나귀 머리로 그렸을까?당시 로마 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범죄자나 노예가 당하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인물'을 신으로 섬기는 해괴하고 미신적인 종교로 취급받았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당나귀 머리를 한 신을 믿는다"는 악의적인 소문과 비하가 퍼져 있었는데, 낙서를 한 사람은 동료인 '알렉사메노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이 소문을 인용해 조롱 섞인 낙서로 괴롭혔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은 중상모략입니다. 의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신앙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참아 받으셨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신앙인들. 그가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고,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고통을 기쁘게 이겨냅니다. 그래서 고난의 현장은 성령께서 가장 강하게 현존하시는 장소이며, 주님의 은총이 넘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역경이 의로움 때문이어야지 불의 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15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드4,15)
 
 그리스도인은 살인자나 도둑,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삶으로 이웃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으로 이방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은 신앙을 끝까지 지켜내며 박해자들에게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믿음이 올바름을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삶, 계명을 지키는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삶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박해시대에 ‘천주학쟁이’는 박해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명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세속주의 문화의 충돌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생태계를 보존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물질만능주의와 편의주의 문화 속에서 신앙적 가치를 지켜나가는데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둘째, 생명문화를 수호하면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교회가 낙태, 안락사 반대의 목소리를 낼 때 외면당하며, 생명윤리에 대해서 의학 기술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대상으로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셋째, 가정과 혼인 가치관의 위기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가정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이혼과 재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고, 창조 질서에 따라 남녀의 성별 구분을 하며 성 정체성을 겪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깊어만 갑니다.
넷째, 삶의 자리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부정부패나 융통성을 요구하는 직장 문화 속에서 양심을 지키며 올바르게 처리하다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주말 근무나 주일의 중요한 약속이나 행사 때문에 주일 미사의 의무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다섯째,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유혹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손안에 TV가 들어와 있고, 수많은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 유혹 앞에서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홀로 성당에 머물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선택이 흔들릴 때가 많아졌습니다. 또한 미디어에서 나오는 반가톨릭적인 내용들이 재미있고 흥미롭게 펼쳐질 때, 조건 없이 수용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여섯째, 영적 메마름과 고독입니다. 바쁜 일상속에서 침묵과 기도의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그 안에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정치와 경제의 주제들이 공동체 안으로 파고들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내 안에 기대와 실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영적 공허가 불러오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옳고, 영적으로 충만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결국 고독으로 이어지고, 다양한 마음의 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가까스로 구원을 받는다면 불경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1베드4,18)

 “심판이 하느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되었습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느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종말이야 어떠하겠습니까?”(1베드4,17)라는 말씀은 하느님 자녀들이 시련을 통해 먼저 정화된다면, 복음을 거부한 불신자들의 종말은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나눔 및 묵상 3:
 우리는 행동이 없는 믿음을 경계합니다. 박해와 불이익 속에서도 그리스도인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성실하신 창조주’로 고백하고, 우리를 지어내신 분께서 끝까지 나를 책임지실 것을 신뢰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역경은 무엇이고, 그 역경은 어떻게 기쁨으로 승화되었습니까?
                                                                           
                                                                           

3. 정리해 봅시다.
① 1베드3,13-4,19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오늘날 그리스도인 받는 고난 앞에서 확신을 가진 삶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역경에 맞선 확신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변화시켜 줍니까?
                                                                           
                                                                           
③ 베드로 사도는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삶의 모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형제자매들의 모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제 3과: 겸손과 깨어 있음
읽어야 할 말씀(1베드5,1-14)
1. 말씀읽기: 1베드5,8-10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겸손과 깨어 있음 
 목자들은 양 떼를 기꺼이 돌보아야 하고, 젊은이들은 겸손하게 순종하며 서로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 자녀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돌볼 때,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하느님 자녀를 위협할지라도 믿음을 굳건히 하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됩니다. 목자들은 양 떼를 보살피기 위해 겸손의 삶을 살아가며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의 양 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기 위해 목자들의 가르침 안에서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2.1. 지도자들의 의무(1베드5,1-4)
 목자들은 지배하는 군주가 아니라, 참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혼을 돌보는 하느님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는 지배가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데서 옵니다. 교회의 안팎으로 박해가 밀려올 때, 목자들이 바치는 희생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천상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첫 번째 서간을 마치면서 원로들에게 권고합니다. 원로들에게 권고하기에 앞서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라고 말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이 표현은 교황의 가장 오래된 공직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2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2-3)
 
 원로들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목자의 삶은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양 떼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착한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2.2. 겸손과 깨어 있음(1베드5,5-11)
 베드로 사도는 젊은이들에게 원로들의 사목에 복종하라고 권고합니다. 젊은이들은 교회 안에서 원로들 아래에서 봉사하는 부제나 봉사자, 다른 구성원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질서와 교회의 가르침(교도권)에 대한 순종은 하느님 자녀들에게는 당연한 것 입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할 때,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고, 그렇게 자신을 낮출 때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5,5)

 교회 공동체는 세상 법적인 구속력이 없습니다. 교회를 세상 단체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면 일치와 순종은 사라지고 분열과 반목만 남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교만은 죄의 뿌리이며, 오직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목자들과 일치하며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강한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젊은이들은 교회의 원로들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깨어 있으면서 유혹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1베드5,8-9)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자녀들이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목자와 불화를 일으킬 때,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박해자들과 비신자들로부터 온갖 위협과 조롱과 모함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때, 박해와 유혹 속에서 두려움에 압도되거나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적대자 악마’는 ‘비방하는 자, 고소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박해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악의적인 비방으로 교회를 흔들던 박해자들 옆에 이런 악마들이 있었습니다.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극심한 공포를 표현하며, 악마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공포심을 주며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믿음을 굳건히 할 때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과 일치할 수 있으며, 악마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신앙 안에서 하나 되어 한 마음 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일치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하느님 자녀들도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서간을 통해 위로받고 있던 로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전역에서 동일한 박해를 겪은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시련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교회를 돌보고 계시고, 은총으로 보살피십니다. 지금 교회가 겪고 있는 고난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주어진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러 주신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믿으며 이 시련을 이겨내고, 목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충실히 돌보아야 합니다.

 사자의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는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신뢰입니다. 악마는 대적할 때만 하느님 자녀들로부터 물러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확신을 공동체에게 선포합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1베드5,11)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승리를 선포하는 영광송입니다. 권능은 지배력, 통치력, 주권을 의미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로마 제국과 황제의 권력은 거대해 보이지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된 통치자는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아멘’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므로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라는 선포에 온 마음으로 동의하고, 확신하며 순종하겠다는 신앙공동체의 공식적인 응답입니다. 

나눔 및 묵상: 4
세상의 그 어떤 시련과 박해자도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권 아래에 있을 뿐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한 권능을 지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영원한 권능 안에서 반드시 승리와 찬양으로 마무리 됩니다. 일상 삶에서 하느님의 일시적인 침묵으로 느껴지거나, 내 힘으로는 통제하기 힘든 무력한 상황을 겪을 때, ‘영원한 권능’을 지니신 주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위로를 받고 계십니까?
                                                                           
                                                                           

2.3. 끝 인사(1베드5,12-14)
 베드로 사도는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편지가 어떻게 씌여졌는지를 밝힙니다. 또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5,12)

 베드로 사도는 멀리서 명령하는 목자가 아니라, 고난받는 하느님 자녀들과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된 은총은 단순히 죄를 덮어주는 법정적 선언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만드는 성화 은총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겪는 극심한 박해와 고난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정화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만드는 ‘참된 은총의 과정’임을 선포하며 격려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과 하느님 자녀들이 겪는 고난의 가치’가 베드로 사도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교회의 목자로서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영적 권위와 신앙적 가르침과 권고와 위로는 하느님 자녀들을 진리 안에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굳건히 서 있으라’는 권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을지라도, 유혹과 박해 앞에서 낙심하게 되면 그 은총의 상태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성사를 통해 끊임없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으며 하느님의 은총에 항구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교회안에서 목자와 양 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연결되어 있으며, 신앙의 시련을 겪는 이들을 격려하고 기도로 연대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보여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마치며 인사하고 평화를 빌어줍니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5,13-14)
 
 바빌론은 하느님 자녀들의 유배지, 하느님 자녀들을 박해하는 상징으로 보통 인식되지만 서간에서는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 베드로 사도가 마르코를 '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사도적 전승 안에서 복음의 유산이 어떻게 계승되는지 보여줍니다. 실제로 마르코는 베드로의 설교를 바탕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하였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전승입니다.
(1베드5,13)라는 표현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빌론은 당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로마를 뜻했습니다. 로마 교회를 바빌론 교회라고 부르면서 비록 이교도들의 문화와 박해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곳 역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영광스러운 장소임을 알려줍니다.
바빌론이라는 세속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하느님 자녀의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긍정적인 신앙적 자부심을 심어줍니다. 그러므로 바빌론 교회는 유배되어 갇힌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 복음선포의 최전선에 있는 교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고,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빌ㄹ어줍니다. 바빌론(로마) 교회는 두려움에 떠는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치유하고 사랑을 나누며, 로마 제국의 심장부 한가운데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흐르는 교회,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교회임을 베드로 사도는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나눔 및 묵상: 5
교회 공동체는 비록 험난하고 세속적인 환경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함께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을 품고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세상에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우리 공동체는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어떻게 이루고 있습니까?
                                                                           
                                                                           

3. 정리해 봅시다.
① 1베드5,1-14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단체장들은 어떻게 단체를 이끌고, 사목위원들은 어떻게 본당 사제의 사목에 협력하며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있을까요?
                                                                           
                                                                           
③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5,5) 나의 겸손으로 끌어들이는 은총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고,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제4과: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
읽어야 할 말씀(2베드1,1-3,18)
1. 말씀읽기: 2베드1,3-11 그리스도인의 소명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8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자는 근시안이라서 앞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거짓 예언자들과 주님의 재림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이 문란한 교리와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장을 펼치며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 2서는 엄밀한 의미의 서간 유형보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언’ 유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이 서신은 베드로 사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여러 교리를 다시 강조하는 유언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참고 기다리고 계실 뿐, 그분의 날은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시며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

2.1. 인사(2베드1,1-2)
 편지를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가, 우리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덕분에 우리처럼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귀한 믿음을 받아들인 하느님 자녀들에게 인사하며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청하며 인사합니다. 그런데 이 은총과 평화는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얻게 됩니다.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2베드1,2) 

2.2. 그리스도인의 소명(2베드1,3-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첫째, 믿음에 덕을 더하십시오. 둘째, 덕에 앎을 더하십시오. 셋째, 앎에 절제를 더하십시오. 넷째, 절제에 인내를 더하십시오. 다섯째, 인내에 신심을 더하십시오. 여섯째,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십시오. 일곱째,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①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은 믿음을 실천하며 그것을 자랑하거나 독선으로 빠지지 않고 늘 겸손하게 성모님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슬기로운 종처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성실함으로 타인을 향해 양보하며, 믿음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삶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을 가르치고 있고, 이 세 덕을 을 합쳐 ‘향주삼덕(向主德)’ 또는 ‘대신덕(對神德)’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가지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윤리덕과 달리, 하느님께서 신자들의 영혼에 직접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직접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신앙의 핵심 바탕입니다. 
 신덕(信德, Virtus fidei)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그분께서 교회를 통해 계시하신 모든 진리가 참됨을 굳게 믿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신덕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모든 덕의 출발점이자 근원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능력으로,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망덕(望德, Virtus spei)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행복으로 갈망하며,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의 은총을 신뢰하며 바라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망덕은 현세의 어떤 역경이나 고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구원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 주는 영적인 닻입니다. 신덕(믿음)이 있어야 망덕(희망)이 생기며, 이 희망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기대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인내로 버티게 만듭니다.
 애덕(愛德, Virtus caritatis)은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향주삼덕 중 가장 위대하고 완성된 덕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고,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신덕과 망덕은 이 세상(현세)에서만 필요하지만, 애덕은 천국에서도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은 향주삼덕(신·망·애)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덕(믿음)이 있기에 삶의 시련을 묵묵히 통제하고 인내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를 향한 망덕(희망)이 있기에 힘든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유지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애덕(사랑)이 내 영혼에 가득 차 흘러넘칠 때, 비로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웃과 형제들까지도 품어 안는 완벽한 형제애와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② 덕에 앎을 더하는 삶
 아무리 좋은 의도와 열정(덕)을 가지고 행동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기준과 분별력(앎)이 없으면 오히려 그 열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아폴로는 에페소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출신의 훌륭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학식이 높고 성경에 정통했으며, 주님의 길을 배워 아주 뜨거운 열정(덕)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한 일을 가르치던 선한 전도자였습니다(덕, 바른 행실의 모습)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세례와 온전한 복음의 깊이(앎)는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가 그를 따로 데려다가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앎을 전함)해 주었습니다(앎, 지식을 더해줌, 사도행전 18,26) 아폴로는 자신의 기존 지식을 고집하지 않고 겸손하게 참된 앎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그의 선한 열정은 더욱 정교해졌고, 아카이아 지방으로 건너가 성경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을 논박하며 교회를 세우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 전에도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열심(덕)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참된 지식(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느님을 잘 섬긴다는 선한 의도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렬한 빛을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후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앎)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참조: 필리 3,8)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고,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영적 여정을 걷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알고 말하는 것과 모르면서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해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가톨릭 교회는 전례주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전례시기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분명 앎을 더하는 삶입니다. 구역모임, 레지오, 주일학교, 사목회의 분과활동도 덕에 앎을 더 할 때 믿음은 더 크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③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이란 내가 아는 지식과 정보, 옳고 그름을 타인에게 무기로 휘두르지 않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다스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교만해지거나 상대를 가르치려 들기 쉬운데, 여기에 절제를 더하면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백성을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족속이라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단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하느님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에 당신 사랑과 자비와 구원을 풍성하게 베푸셨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사실을 과시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만 지식을 나누는 태도는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삶의 태도이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거나 대화할 때, 복음나누기를 할 때, 상대방이 틀린 말을 하거나 내가 이미 아는 내용을 말할 때, 중간에 말을 끊거나 지적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앎에 절제를 더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자들이 학문과 신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교만해질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에, ‘아무리 높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형제들을 섬기는 겸손함과 사랑이 없다면 그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지식의 추구보다 삶의 실천과 겸손을 우선하는 절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변론가(소피스트)들의 가짜 앎을 비판하며, 스스로의 앎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철저한 절제를 통해 진짜 지혜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겉보기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 감추어 두며, 필요한 이가 도움을 청할 때 겸손하게 그 지혜를 전해줍니다. 물처럼 자신을 낮추고 공을 세워도 자랑하지 않으며, 필요할 때만 앎을 드러내는 절제의 덕목은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앎에 절제를 더하면 내 등불로 남을 눈부시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발밑을 어둡지 않게 비춰주는 따뜻함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이고,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④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이란 내가 통제하고 참아 내기로 결단한 상태(절제)를 흔들림 없이 끝까지 유지해 내는 삶(인내)을 의미합니다. 절제가 순간의 멈춤이라면 인내는 그 멈춤을 시간 속에서 완성하는 뚝심이라고 합니다. 유혹을 끊어내는 절제와 고통을 버텨내는 인내가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경건함과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말을 아끼는 것이 ‘절제’라면, 상대방이 나를 오해하고 비난해도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절제에 인내를 더한 삶’입니다.

 젊은 시절 방탕함과 이단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후 육체적 쾌락과 명예욕을 극도로 절제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이교도들의 침공과 교회 내부의 분열이라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분노를 절제하며, 죽는 순간까지 교회를 지키고 수많은 신학 저서를 남기는 위대한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온몸에 극심한 가려움과 통증을 느끼며 질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끍어야만 했던 욥도 아내와 친구들이 위로라는 그릇에 담긴 단죄와 비난을 인내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절제가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의 결단이라면, 인내는 그 차가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믿음을 키워 나가는 그리스도인은 인내로서 절제를 완성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앎을 더해 나가며, 신덕과 망덕과 애덕을 키워 나가며 믿음을 삶으로 고백합니다. 

⑤ 인내에 신심을 더하는 삶
 인내에 신심(경건)을 더하는 삶은 내가 겪는 고통과 억울함을 단순히 버텨내는 인내를 넘어 그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우리 주님께서는 더 억울하셨고, 더 괴로우셨으니 주님을 따르는 나는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지’하면서 기도하는 영적인 삶입니다. 인간적인 인내는 깊은 상처와 외로움, 교만과 보상심리 등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신심이 더해지면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라고 고백하며 그 모든 것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고, 내 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분노나 분열을 일으키며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멈추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하는 영혼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어려움을 주님을 위해 봉헌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 ‘주님, 이 고통을 바라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 작은 마음으로 상처받으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을 위로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시련은 나를 파괴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입니다. 갈등이나 아픔 속에서도 매일의 미사와 기도,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닮은 자녀가 되도록 은총을 줍니다.

 오상을 받으신 성 비오 신부님은 예수님의 오상(五傷)을 받아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시기하고 의심한 교회 내부의 오해로 인해 수년 동안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를 금지당하는 혹독한 제재를 받았습니다. 1918년 비오 신부님의 몸에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가 나타나자,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가 산 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교황청 내부와 일부 의사들은 가짜 기적이며, 신부의 심리적 이상이나 화학 약품으로 조작된 상처라고 의심했습니다. 군중들의 광적인 열광과 거짓 예언자에게 현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청은 1931년 6월 9일 교황청은 비오 신부님에게 가장 강력한 행정 처분을 내립니다. 공동체 미사(공개 미사) 집전 금지, 오직 외부인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수도원 내부의 작은 경당(골방)에서, 복사(미사 보조자) 단 한 명만 두고 철저히 비공개로 혼자서만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하루에 최대 15~19시간씩 신자들의 고해를 듣던 ‘고해소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재로 인해 남녀를 불문하고 그 누구에게도 고해성사를 줄 수 있는 성무 집전권이 완전히 정지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영적 지도를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일체의 행위가 전면 차단되었고,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동료 수도자들과의 접촉도 극도로 제한되어, 약 2년 동안 빛이 들지 않는 격리된 방에서 감옥과 같은 생활을 보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빼앗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는 영적 사형 선고였습니다. 더구나 본인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시기와 오해로 인한 억울한 처분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오직 이 한마디만 남겼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
 신부님은 교회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입이 닫혔으니 이제 하느님과 더 깊이 대화하겠다며 묵묵히 기도와 희생으로 그 기나긴 2년의 어둠을 버텨내셨습니다. 이후 신부님의 철저한 겸손과 순명 태도를 전해 들은 교황 비오 11세는 1933년 ‘내가 비오 신부님에 대해 잘못 보고 받았다’며 제재를 모두 풀고 성무 집전권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고독한 시간을 오직 묵주기도와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신심)로 채웠습니다. 신부님의 인내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성덕의 열매로 증명되었습니다.

 성 십자가의 요한 사제도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이끌던 중, 개혁을 반대하던 동료 수도자들에 의해 좁고 어두운 독방 감옥에 갇혀 아홉 달 동안 모진 매질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을 가둔 형제들을 원망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빛조차 잘 들지 않는 감옥의 고통(인내) 속에서 하느님과 영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깊은 신비 영성(신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가톨릭 영성사의 위대한 보물인 영적 시(詩)들을 집필하며 감옥을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인내에 신심을 더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거룩한 미사와 성사로 몸과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⑥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
 신심(경건)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주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교사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채 길가에 버려집니다(루카 10,30). 이때 그 곁을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종교적 신심만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율법을 지키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심 깊은 이들이었지만 강도 맞은 이를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돌아서 가 버렸습니다. 시체나 피를 만지면 종교적으로 부정해져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교리적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자부했지만,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함으로써 그들 신심이 껍데기뿐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종교적 행위가 이웃의 아픔과 단절될 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이 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지만, 강도 맞은 이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측은지심)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합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뒤,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고, 이튿날에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소”(루카 10,35) 하며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⑦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로 1,5-7)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은 인간적인 덕성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향주덕(向主德, 하느님을 향한 덕)’인 사랑(Caritas)으로 성화됩니다. 형제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교우들의 공동체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형제애의 울타리를 넘어,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이들까지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목숨까지 내어주는 ‘자비와 용서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권력을 잡은 뒤 형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다윗은 자신을 시기하여 군대를 풀고 죽이려 쫓아다니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분이시니, 내 손을 그분에게 대지 않겠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지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조차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존재'로 바라보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는 교회 안의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는 ‘형제애’에 충실했던 부제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 군중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바친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와 똑 닮아 있었습니다. 스테파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전구의 기도’를 바친 이 모습은  초자연적 사랑으로 완성된 최고의 형제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해졌을 때 형제애라는 아가페적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은 내 본성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그를 사랑하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하느님 자녀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정적이며,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다. 이 삶에 열정을 다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에 감사하며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1베드1,10-11)

2.3.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2베드1,12-21)
 세상의 유혹이나 거짓 교사들에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늘 배워야 하며,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전해 받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주님께 대한 사랑을 키우며 영적 분별력을 통해 늘 오염되지 않은 신앙의 순수함을 간직해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또 이미 받은 진리 안에 굳건히 서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기억시키려고 합니다.”(2베드1,12)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이미 받은 진리 안에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도록 기억시킵니다. 베드로 사도는 “13 내가 이 천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에게 밝혀 주셨듯이, 내가 이 천막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베드1,13-14)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늘 양 떼 곁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순교를 생각합니다. 천막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막은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천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지상의 나그네입니다. 이 천막이 허물어지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사도는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러분이 언제나 이러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2베드1,15)라고 말씀하시며 천상 교회에서도 주님께 이 양 떼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주님의 양 떼를 베드로 사도에게 맡기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함께 하였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했고, 승천과 성령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교묘하게 꾸며낸 신화를 따라 한 거짓이 아니라, 주님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1,17-18)

 베드로 사도는 보고 들은 것을 힘 있게 증언하였습니다. 보고 들었기에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1,19)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과 예언자들의 선포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지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흔들림이 있을 때 유혹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현혹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에 확신을 갖고, 전해 받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하느님 자녀들은 진리 안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2.4.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2베드2,1-22)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오히려 박해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기억시키며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거짓 교사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구분
거짓 예언자
거짓 교사
주요 활동 시기
구약 시대
초기 교회
활동 장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교회 가운데에서
등장방식
백성 외부나 왕실 등에서 단독 예언자로 활동하며 선포
교회 내부로 은밀히 침투하여 활동
주된 거짓 행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환상, 거짓 평화, 거짓 계시를 선포
교리와 진리를 왜곡하고,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가르침
핵심/본질
백성에게 영적 착각을 심어줌
(거짓 평안, 남아있는 자)
주님을 부인하고 방탕함과 탐욕으로 착취함. 탐욕에 이끌려 주님의 주권을 업신여김
유혹 수단
탐욕, 불의한 이익,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짓 평화
육체의 방탕한 욕망, 실없는 큰소리, 거짓된 자유의 약속
공통된 심판과 결말
갑작스러운 파멸과 멸망(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홍수 때의 불경한 자들과 같음. 멸망의 종이 됨. 개나 돼지와 같은 영적 상태에 빠져 짙은 암흑과 멸망을 맞이하게 됨


 거짓 교사들의 방탕한 행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악행을 따라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며,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하느님 자녀를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상선벌악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내릴 판결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고, 그들에게 닥칠 파멸은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드신 것은 불경한 자들에게 내릴 벌의 본보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삶과 그들로부터 악영향을 받은 이들의 삶(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생활)은 의인들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의인은 그들 가운데에 살면서 무도한 행실들을 보고 듣느라고 그 의로운 영혼이 날마다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 더러운 욕망에 빠져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 주님의 주권을 업신여기는 자들, 당돌하고 거만하여 거리낌 없이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는 자들은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낮의 술잔치를 기쁨으로 삼는 이들, 하느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도 자기들의 속임수를 즐기는 너절하고 지저분한 자들,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마음은 탐욕에 젖어 있는 그들, 바른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빠져든 이들,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 불의한 돈벌이를 좋아하다가 그 범법 때문에 책망을 받는 이들, 그들은 해악을 저지른 대가로 해악을 입을 것입니다. 그들은 물 없는 샘이며 폭풍에 밀려가 버리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짙은 암흑이 마련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실없이 큰소리치면서,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갓 빠져나온 이들을 육체의 방탕한 욕망으로 유혹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신들은 멸망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굴복을 당한 사람은 굴복시킨 쪽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①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은 성경에서 ‘불의한 이익(돈)을 위해 영적 능력을 타협한 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리코 앞의 요르단 건너편 모압 벌판에 진을 치자 모압인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모압 임금 발락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무찌르기 위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에게 자기 신하들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당신이 축복하는 이는 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는 이는 저주를 받는 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민수22,6)

 발라암은 이 상황을 주님께 아뢰었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이들과 함께 가지 마라. 그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해서는 안 된다.”(민수22,12)

 첫 번째 청원이 거부되자 발락은 두 번째로 더 높은 대신들을 많이 보내여 발라암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발라암에게 “이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다면,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만 하여라.”(민수22,2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발라암은 아침에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의 대신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발라암의 길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시어 발라암에게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 있었습니다. 나귀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길을 비켜나 밭으로 들어가고, 벽으로 바싹 붙고, 갈 곳이 없자 주저앉기까기 하였습니다. 발라암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자 주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열어 주시어 왜 세 번씩이나 때리냐고 항변하게 합니다. 발라암은 손에 칼만 있었으면 당장 쳐 죽였을 것이라고 하자 나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날까지 당신이 일생 동안 타고 다닌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당신께 이렇게 하는 버릇이라도 있었습니까?”(민수22,31)

 그때 주님께서 발라암의 눈을 열어 주셨고, 그제야 그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무릎을 꿇고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렸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나귀를 때린 것을 지적하시며 “네가 내 앞에서 나쁜 길을 걷기에, 내가 막으려고 나왔다.“(민수22,32)고 말씀하십니다. 나귀가 세 번이나 비켜나지 않았으면 발라암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말라암에게 “이 사람들과 함께 가거라.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하는 말만 해야 한다.”(민수22,35)라고 경고하십니다.

 발락이 원하는 것은 발라암이 야곱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라암을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청했지만, 오히려 축복해 줍니다. 주님께서 담아 주신 말씀을 전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발락은 세 번씩이나 발라암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니 화가 났습니다. 원수들을 저주해 달라고 불렀지만 오히려 축복해 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라암은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24,17)라고 신탁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발라암은 발락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기에 다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요한묵시록은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에서 발라암의 죄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14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발라암은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다.”(묵시2,14)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을 때, 백성이 모압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여자들이 저희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백성을 부르자, 백성은 거기에서 함께 먹으며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프오르의 신 바알의 멍에를 메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상을 섬긴 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사람들 가운데에서 스스로 프오르의 신 바알의 멍에를 멘 자를 죽여라.”(민수25,5)

 발라암은 발락에게 여인들을 이용해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뜨려 하느님 스스로 이스라엘을 벌하시도록 하는 비열한 간계를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그 재난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만 사천 명이 죽게 됩니다. 그 후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미디안 여자들을 모두 살려주자, 모세는 발라암이 발락에게 제공한 간계를 다시 기억시킵니다. 

	“너희가 여자들을 모두 살려 두다니! 16 프오르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발라암의 말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을 배신하게 하여, 주님의 공동체에게 재앙이 내리게 한 것이 바로 이 여자들이다. (민수31,15-16)

 발라암은 발락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발락을 위한 저주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시킬 방법, 여인들을 이용하여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에 빠트리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발라암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발라암의 영적 타락과 배반을 불의한 돈벌이를 좋아하다가 짐승(나귀)에게 책망을 받은 예언자의 미친 행동으로 묘사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의 탐욕을 고발합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 탐욕에 빠져 잘못된 길로 달려가는 이의 상징이 바로 발라암이고, 발라암이 걸은 길을 “발라암의 어그러진 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11 저들은 불행합니다! 카인의 길을 따라 걸었고 돈벌이 때문에 발라암의 오류에 빠졌으며 코라처럼 반항하다 망하였기 때문입니다.”(유다1,11) 
 
 발라암은 하느님의 뜻과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과 세속적 이익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영적 소경이 되어 결국 공동체를 죄악으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거짓 예언자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 내부에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교사들의 오만함과 무지, 탐욕과 영적 소경의 삶은 엄중한 심판과 멸망을 끌어당겼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이성만을 과신하는 오만한 자들은 주님의 심판을 끌어당깁니다.

	“11 천사들은 더 큰 힘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주님에게서 그들에 대한 모욕적인 판결을 끌어내지 않습니다.”(2베드2,11)

 천사들은 거짓 교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힘과 능력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으로 ‘모욕적 판결, 비난의 심판’을 함부로 내리지 않고, 모든 심판의 권한을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유다서(1,9)에서는 대천사 미카엘이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욕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구분
미카엘 대천사 (유다 1,9)
교만한 거짓 교사들 
(2베드 2,10-12)
지위
위대하고 강력한 대천사
한갓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태도
악마 앞에서도 겸손하게 하느님의 심판에 맡김
영적인 권세와 성스러운 것들을 함부로 모독함
교훈
하느님의 질서와 권위를 철저히 존중함
자기 이성만 믿고 본능대로 사는 지각없는 짐승


 신명기 34장에서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었을 때, 주님께서 그를 골짜기에 묻어 주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서간에서는 ‘모세의 승천’이라는 외경을 인용하여, 악마는 모세가 과거 이집트인을 죽였던 죄를 들먹이며 ‘모세는 죄인이므로 그 육신은 나의 소유다’라고 주장하며 모세의 무덤을 공개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시신을 우상숭배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모세의 시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감추려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악마를 대하는 미카엘 대천사의 태도입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천상 군대의 지휘관이자 악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고 강력한 대천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자기 스스로 악마에게 저주나 모욕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심판과 판결의 권한은 오직 최고 재판관이신 하느님께만 속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씀하십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자신의 권위가 아닌 ‘하느님의 권위’에 의지하여 악마를 물리칩니다. 이는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피조물이 가져야 할 가장 모범적인 겸손과 완벽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강한 능력을 지닌 천사들조차 하느님의 주권과 질서를 존중하여 겸손하게 행동하는데,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거짓 교사들은 교만하여 성스러운 영적 권위와 영적 세계를 함부로 비방하고 모독한다는 점을 대비시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2베드2,12
유다1,10
그런데 그들은 잡혀 죽을 것으로 태어난 지각없는 짐승과 같아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모독하고 있으니, 
짐승들이 멸망하는 것처럼 
그들도 멸망할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다 모독하지만, 
지각없는 짐승처럼 누구나 본성으로 아는 것들, 
바로 그것들로 멸망하고 맙니다.


 가장 뛰어난 천사조차도 악마를 향해 함부로 교만하게 굴거나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는데, 보잘 것 없는 거짓 교사(인간)들이 하느님의 신비와 영적 권위를 무시하고 모독할 수 있는가? 결국 그들의 교만와 오만과 타락은 멸망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② 의로움은 거룩한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개와 돼지에 비유하여 속담을 들려줍니다.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으나, 교회 내부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나 영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다시 본 모습으로 되돌아감을 구약성경과 당시의 속담 아하카르의 지혜서는 기원전 6~5세기경 아람어로 쓰인 이 문헌은 당시 동방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던 속담집이었습니다. 아하카르가 자신을 모함하고 배신한 조카 '나단(Nadin)'에게 그의 은혜 모르는 본성과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여러 동물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주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내 아들아, 너는 목욕탕에 들어가 씻기기 위해 주인의 상에 놓인 맛있는 음식을 거부한 개와 같구나. 내 아들아, 너는 고귀한 사람들과 함께 목욕하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러운 하수구를 보고는 바로 달려가 다시 진흙탕에 몸을 뒹군 돼지와 같구나. 내 아들아, 너는 고기 한 조각을 물고 강을 건너다가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마저 빼앗으려 입을 벌렸다가, 가지고 있던 고기마저 물속에 떨어뜨리고 만 개와 같구나.”

을 인용하여 지적합니다.

	“22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2,22)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가는 개처럼 우둔한 자는 제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잠언26,11)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당시 근동 지역에서 널리 쓰이던 고대 동방의 속담(아하카르의 지혜서 등)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개와 돼지는 율법적으로 불결하고 정결하지 못한 동물을 상징했습니다. 이 비유가 주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본질(성품)이 바뀌지 않은 외적 변화의 한계입니다. 돼지는 더러운 진흙탕을 좋아하는 동물이고, 개 역시 자신이 내뱉은 것을 다시 삼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나 거짓 신앙인들은 복음과 교회의 영향으로 잠시 겉모습을 깨끗하게 단장했을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 새로 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나눔 및 묵상 6: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여전히 죄와 부패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2베드 2,22은 단순한 일상적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내면의 거듭남과 본질의 변화가 없이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경건을 흉내 내는 것은 결국 옛 죄악의 습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강력한 비유입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령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영적으로 어떻게 성장되어 있으며, 신앙의 향기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2.5. 주님의 재림(2베드3,1-18)
 베드로 사도는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2베드3,1)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 1서를 언급합니다. 서간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두 편지로 나는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려 순수한 정신을 불러일으키려고 합니다.”(2베드3,1)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자녀들인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내리신 계명을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조롱꾼들이 하느님 자녀들을 조롱하며 유혹하고,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4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2베드3,4)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조롱을 들려주며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순수한 정신을 불러 일으켜 주님의 계명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그때의 세상이 홍수에 잠겨 물로 멸망하고, 심판(노아의 홍수)받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느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게 살아가는 노아에게 배를 만들게 하셨고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배를 만들어서 동물들 한 쌍 식을 배에 태워 홍수를 이겨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홍수를 이야기 했지만 사람들은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참조: 마태24,38-39) 그들은 회개할 기회를 저버렸습니다. 하느님을 저버린 사람들은 결국 홍수로써 벌을 받게 된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의 하늘과 땅도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같은 말씀으로 보존됩니다. 불경한 사람들이 심판받아 멸망하는 날까지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강조합니다.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심은 회개하여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며 “깨어 있어라”(마태24,42)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이고,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일을 맡기셨고,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굳건하게 이어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2베드3,11-12)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이익입니다. 그날이 오면 눈에 보이는 것들과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하느님 보다 앞 자링 둔 것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그때야 비로소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주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2베드3,15)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공동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16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3,16)
 
베드로 사도는 잘못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와 주님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이라는 신앙의 균형을 강조하시며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리지 말고,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키워 나가도록 두 가지를 마지막으로 권고하십니다.

 첫째,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느님 자녀들은 이미 알고 있는 올바른 신앙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도록 늘 깨어 주의해야 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유혹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변의 환경이 변하더라도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둘째,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신앙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매일의 삶 속에서 더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넘어, 그분과 더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앎을 넓혀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릴 때 가능하게 됩니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삶은 스스로 영광받으려는 삶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영광 드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갈 때,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이나,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나,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흔드는 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며 주님의 영광에 의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3. 정리해 봅시다.
① 2베드1,1-3,18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②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내 삶의 자리가 바알 프오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③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흔들릴 때는 언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질 때는 언제입니까?
                                                                           
                                                                           

4. 실천사항
                                                                           
                                                                           

5. 말씀으로 기도하기]]></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6:26:4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6"><![CDATA[신약성경 이야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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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가톨릭 교회 교리서]]></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3]]></link>
			<description><![CDATA[https://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159460]]></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at, 25 Jul 2026 11:48: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3"><![CDATA[예비신자교육]]></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가해 연중 제 17주일;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2]]></link>
			<description><![CDATA[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가해 연중 제 17주일
1. 말씀읽기:마태13,44-52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그물의 비유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비유를 끝맺는 말씀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은 하느님 나라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붙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한 이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다른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 가치 때문에 다른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또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물에 비유하십니다. 

문제 1: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비유는 무엇입니까?
①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의 비유
② 귀한 진주를 발견한 진주 상인의 비유
③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물의 비유
④ 열심한 척하면서 기도 안하는 기동이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러한 보물에 비유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가치를 알고 있기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아마도 그가 느끼기에 그 보물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질문 2: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밭은 무엇이고 밭에 숨겨진 보물은 무엇일까요?
① 밭은 그냥 밭이고, 보물은 그냥 귀한 보물입니다.^*^
② 밭은 내 주변에 펼쳐진 일상생활이고, 보물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질문 3: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① 미사의 은혜를 깨닫고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
② 봉사의 기쁨을 느끼고 쉬는 날이나, 또 시간을 내어서 기쁘게 봉사하는 사람.
③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는 기쁨을 깨닫고 기쁘게 기도하며, 집에서도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시간을 만들어서 자주 기도하는 사람
④ 신앙의 기쁨과 은총을 깨닫고, 그것을 기쁘게 전하는 사람.
⑤ 미운 사람이 있지만 하느님 때문에 너그럽게 용서하며 자비롭게 상대방을 대하는 사람

질문 4: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며 가치를 두는 생각과 말과 행위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귀한 가치를 위해 내가 이차적으로 생각하는 것들, 버린 것들은 무엇입니까? 부모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남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모른 척 그 밭을 샀다면 사기꾼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남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그 보물이 있음을 주인에게 알려야겠지요. 모르는 척 그 밭을 산다는 것도 양심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말하는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생활함으로써 그 가치를 알게 되었고, 이 삶이 참된 기쁨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친구가 세례성사를 받고 자기 친구에게 “왜 이렇게 좋은 것을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니? 왜 좀더 일찍 내가 세례성사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신앙의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보니 좋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첫째, 기도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변화되게 됩니다.
둘째, 사람이 변합니다. 너그러워지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배려하게 됩니다.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에 용서하게 됩니다.
셋째, 성당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습니다. 적어도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변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은총을 받습니다. 성사를 통해 은총을 받는 것이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가를 부르면서, 함께 기도하면서 몸이 은총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섯째,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봉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내가 하느님을 위해서 작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질문 5: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산 그 진주는 무엇일까요?
① 값진 진주는 그냥 진주입니다. ^*^
② 값진 진주는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진주 상인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신앙인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고 있는 상인입니다. 여기서 ‘진주’라는 단어는 값비싼 가치만이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개 안에서 태어난 진주는 영롱한 빛을 발하며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며,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운 신앙은 영롱한 빛을 발하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말하는 진주는 바로 하느님 나라요,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났고, 예수님께서 참된 목자이심을 알았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것임을 알고, 가장 값진 진주임을 알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찾는 진주(예수님)를 발견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하느님 나라)을 차지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차지할 것은 차지하는 현명한 신앙인, 슬기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질문 6: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신앙인(비유에서 진주상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① 늘 기도하며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
②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
③ 약속을 잘 지키고, 성실한 사람.
④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나눌 줄 아는 사람.
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 ^*^

 신앙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은 늘 다른 것과 비교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7: 예수님께서는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무엇입니까?
① 우리는 ‘상선벌악’을 알고 있고, 마지막 때에 심판받을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받는 사심판과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받게 되는 공심판이 있습니다. 비유에서 그물은 심판의 도구입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이들은 상을 받고, 그 반대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의롭게 살아야 주님께 상을 받게 됩니다.
③ 그물에 걸려온 물고기의 운명이 어부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의 운명도 하느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의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만 악인들에게는 벌을 주십니다. 

질문 8: 천주교의 4대 교리는 무엇입니까?
① 천주존재: 하느님께서는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 것처럼,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② 삼위일체: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현존하십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을 만났고, 신약의 백성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아 뵈었으며, 성령강림 때 성령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는 고백이 삼위일체입니다. 물, 얼음, 수증기는 모양이 달라도 모두 똑같은 물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③ 강생구속: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을 강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어 우리를 구원(속량)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됩니다.
④ 상선벌악: 하느님은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시며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한 이에게는 벌을 주십니다.

질문 9: 사심판과 공심판은 무엇입니까?
① 사심판(私審判)은 지상의 삶을 마친 후 각 사람이 받는 심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 한평생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온전히 마주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영혼이 심판을 받아 천국, 연옥, 지옥이 결정됩니다.
② 공심판(公審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순간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 이 심판은 인류의 구원자로서 구원사업을 완성시키는 행위요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마지막으로 간섭하는 사건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으로 심판받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마태 25,35). 

질문 10: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①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버릴 것은 버리고, 움켜잡을 것은 움켜잡으며, 참된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②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시는 것.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작은 도움을 내미는 것. 이것을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움켜잡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 11: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가르쳤던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② 새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이고, 헌것들은 구약성경과 율법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제자가 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구약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헛된 것들은 버립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부르심에 온전히 의탁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와 닿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왜 기쁨으로 와 닿고 있습니까?
                                                                         
                                                                        

② 나의 재산목록 1호부터 10호까지 써 보세요. 이것들 중에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③ 우리는 상선벌악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착한 일은 무엇이고, 학교에서 착한 일은 무엇일까요?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정하기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참되게 알고, 내가 발견한 보물을 잃지 않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아버지!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저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구원을 주시는···, 등으로 말씀에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 중에서 와닿는 말씀(감동, 기쁨, 사랑, 행복, 통회, 감사, 열정 등)을 한 구절 선택합니다. 그 말씀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 속에서 기도합니다.)
 저는 
                                                                                                                                                                                                                                                                     있습니다/되었습니다./~습니다.
(와 닿는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사랑, 감사, 열정, 잘못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통회, 그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제 결심을 하기 위해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제가                                                                        
                                                                            
                                   하소서/ 주소서/~ 도록 강복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사항을 2-3개 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그 결심(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착한 행동과 사랑스러운 모습,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내가 변화되면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Fri, 24 Jul 2026 13:59: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11"><![CDATA[말씀과 놀이 2026]]></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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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Re:교우필지(敎友必知)1-10 페이지,  성호경]]></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1]]></link>
			<description><![CDATA[<b>십자가 성호</b>
거룩한 교회(성교회)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공경을 갖추어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오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슴 아픈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목숨(명혼)을 바쳐 (우리를 죄에서) 사셨으니,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구속)하신 보배로운 그릇이요, 악마(사마)를 항복하게 만드는 귀한 병기(무기)입니다.

 

우리를 이 무기(병장)로써(악마의 유혹으로부터) 건져내시며, 평안을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히,온전한(지극한) 마음으로십자가 성호를 어떻게 긋는가?오른손(우수)을 높이 들어이마에 십자가를 긋고,성교회(가톨릭 교회)의 도리를 묵상하며정성껏(힘있게) 십자가를 긋고,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며가슴에 또 십자가를 그으면,원수(악마와 마귀)들로부터 구원받으리라.

 

다시 손을 높이 들어서대십자(큰 십자가 성호)를 그을 적에,이마에서부터 가슴까지,왼쪽 어깨(왼엇디리)에서 오른쪽 어깨(오른엇디리)로손으로 직접 (십자가를) 그으면서입으로는 마음속으로(또는 조용히) 기도하되,"성부와 성자와 성령(성신)의 이름으로"도장을 찍듯 고백(인호)합니다. 아멘.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그 뜻을 마주 보며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이 외에는 또 무슨 뜻이 있는가?(우리의 작은) 생각을 벗어나는 지극한 신비가 있습니다.

 

입(에 긋는 것)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방정맞은(그릇된) 말을 면하고자 함이요,가슴(에 긋는 것)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마음속(사유)의 감각과 생각을 바르게 하고자 함이라.삼위이신 하느님 천주를영성(신령한 성품)으로 일체이심을 고백함인가?삼위이신 우리를 대신하신 주님,하나의 성품과 하나의 체 정성이 예의이신가?원수들 가운데에서 구원하리라.우리 원수는 무엇인가?마귀와 세상과 육신, 이 세 가지 원수(삼구)가우리를 해치는 원수가 아니란 말인가?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유혹하여) 천사(천신)와 같은 지위에서 떨어지게 하니,천주(하느님)의 표상(자녀라는 표징)을 받았음에도거룩한 교회(성교회)에 처음 들어올 때의바른 몸가짐을 어기고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하느님의 법에 따라즉시 벌을 누리게(받게) 됩니다.본래 천사들과 같이 빛나던 사람이라도교만하게 굴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면,지옥 속에 떨어져 마귀의 우두머리처럼 되고원래의 나쁜 부류(악인)로 확정되어 버리고 맙니다.

 

천지의 전능(하신 하느님)을 면전에서 배척하고,세상의 거짓된 화려함(초화)을 좋아하는악인의 죄와 벌을 다루는 내용이며,(사람들이) 이러한 무리와 사귀어 들어서이 세상에 편지(복음이나 교리)를 주어 책을세운 소문이 마땅히 고당(널리 퍼짐)하니,이는 복(북)이 있는 자의 지식(식)이라.(세속의 무리는 사람을) 범죄하도록 유인하여죄를 짓게 하고 그 자체로 벌을 받게 하도다.이러한 무리가 주동(주대)이 되어 세력을 떨치니,(그를 따르는) 몸(육신)이 죄를 짓고 저주를 받게 하니라.

 

세속(세상)이란 무엇인가?(하느님의 가르침을) 신청(지켜 청함)하지 않으면 세속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이단과 사방에서 악한 바람(유혹)이 불어닥칠 때,그를 순순히 따르고 가로지르면(순횡하면) 결국 영혼이 죽게 되느니라.육신이란 무엇인가?이익과 녹봉(이록)을 구하며 비위 맞추고 사는 것인가?성대하게 먹고 마시며(성식) 사치스럽고 훼방하는 데 빠져(육체적) 쾌락을 누리면, 육신을좋아하는 까닭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하느님의 법적(계명)인 도리를 거슬러 살려 하도다.(그렇다면 마귀, 세속, 육신의 삼구를 물리치기 위해)거룩한 십자가(십조의 가)를어디어디 세 군데에 긋는가?

 

(이마, 입, 가슴에 긋는) 공경하는 마음의 표시를 기리노라.이 세상을 돌아보며교회의 문서와 내려오는 가르침, 그리고 예법(외례)을 돌아보라.(십자가의) 가문과 효용을 깊이 새겼는가?온갖 신하(백공시종)들의 비판과 판단 속에서도(십자가의) 결재 권한과 능력이 무척 크게 있네.위엄을 지도하여 외치고,(마귀, 세속, 육신의) 유혹(유각)을 받을 때에십자가 성호(십조성호)를 그으며 영혼을 구하면,천주를 공경하여 얻는 신앙의 유익(경신뢰익)이 크게 있으리라.비신자(외인)를 대면할 때 험담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세속의온갖 물욕과 잡념을 닮으려 하거든 마땅히 교우의 본분을 행하소서.]]></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12:57: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우필지(敎友必知)-천주교 신자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기도문과 戒文(계문: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번역한 책]]></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link>
			<description><![CDATA[교우필지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

(교우들이 반드시 알 것이라 말하노라)

예수님 탄생(천주강생) 1894년 갑오년 5월에 정요셉은 번역하여 베껴 쓰노라.거룩한 교회의 법이 엄격하니, 누구든지 주교가 허락(준고)을 내린 후에 교우들에게 전하라는 지침(시칙)이 있습니다. 이 책은 스스로 번역하여 공식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니 함부로 전하지 마옵소서.

<b>교우필지</b><b>(</b><b>敎友必知</b><b>)</b>

 

저자 졍요셉 역

간행년대 : 1894년(고종 31).

청구기호 : 古1900-2

책수 1책(54장)

판본 필사본

사이즈 17.5×18.4㎝.

 

천주교 신자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기도문과 戒文(계문: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번역한 책이다. 번역의 대본과 역자인 정요셉은 미상이다. 권머리에‚ 이 책은 主敎(주교)의 감준을 거치지 않고 사사로이 번역한 것이므로 전하지 말라고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漢文書(한문서)를 일반 신도가 번역하여 개인 신앙생활의 규범서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이다. 전반부는 십자성호·천주십계·성교사규·진복팔단이다. 성호‚ 십계‚ 사규‚ 팔단 등의 내용은 심오하다기보다 일상적이다. 형식이 4·4체의 한글 가사라는 점도 독특하다. 후반부는 천주경·성모경·종도신경·사종·사주덕·성신칠은·속죄삼공·영혼삼사·육신오관·사람의 세 원수·천주를 패역하는 여섯 가지 죄·천주의 강벌을 받을 네 가지 죄·죄를 이기는 일곱 가지 덕 등이다. 형식은 본문을 큰 글자로 하고 작은 글씨로 뜻풀이를 하였고 간간히 주석을 달아 설명을 보충하였다. 후반부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천주교의 전통적인 기도문과 생활을 단속하는 戒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반부 역시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필요한 기본 소양을 갖추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평신도가 주교의 감준을 거치지 않고 간행했다는 점과 내용 역시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이므로 초기 천주교도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경구)

<b>&lt;</b><b>소장</b><b>:</b><b>서울대규장각</b><b>&gt;</b>

 

 

 

<b>자료제공 </b><b>: </b><b>박 수 환</b>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12:56:1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예부(禮部)에 프랑스 선교사를 석방하여 송환함을 통보하는 자문(咨文)]]></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9]]></link>
			<description><![CDATA[<b>예부</b><b>(</b><b>禮部</b><b>)</b><b>에 프랑스 선교사를 석방하여 송환함을 통보하는 자문</b><b>(</b><b>咨文</b><b>)</b>

 

<b>淸國禮部 咨文</b><b>(</b><b>청국예부 자문</b><b>)</b>

 

표제/표시사항 : 咨文(자문 / 朝鮮國王 受給; 淸國禮部 發給(조선국왕 수급:청국예부 발급)

판사항 : 筆寫本(필사본)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淸國禮部 發給(청국예부 발급) 고종16년(1879년)

형태사항 : 1張; 58.0 x 116.0 cm

 

<b>【</b><b>해제</b><b>】</b> 고종 16년(1879) 7월 11일에 청국 예부에서 조선국왕에게 보내 온 문서. 조선에서 붙잡은 법국인(法國人:프랑스인) 교사(敎士) 최진승[崔鎭勝, 일명 올돌(兀乭), V.M.Deguette]을 석방하여 중국의 해구(海口)로 보내라고 알리는 내용이다. 『고종실록』16권 1879년 4월 11일 기사에 의하면 "공주 지방에서 기찰에 의해 프랑스 사람 최올돌이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혀 있는데, 의주부(義州府)에 넘겨서 봉성(鳳城)으로 압송하라."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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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고종, 프랑스 선교사를 석방하여 청으로 압송한다는 내용의 자문을 보냄(고종→예부)

연월일 고종 16년(1879년, 淸 德宗 光緖 5年, 日本 明治 12年) 7월 19일

발 신 조선 고종

수 신 청국 예부

 

<b>예부</b><b>(</b><b>禮部</b><b>)</b><b>에 프랑스 선교사를 석방하여 송환함을 통보하는 자문</b><b>(</b><b>咨文</b><b>)</b>

조선국왕이 자문(咨文)으로 통보하는 일, 소방(小邦)은 작년 5월 프랑스인 이복명(李卜明)이라는 자를 체포하였는데 그가 은밀히 사교(邪敎)를 일으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하고자 하였으므로 조사를 하여 별도로 뿌리뽑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사신이 간절히 요청하였다 하여 특별히 천지가 날마다 살리는 덕을 미루어 귀 예부(禮部)에 칙유(勅諭)하시어 석방하라고 전달 명령하시었습니다. 소방은 삼가 황지(皇旨)를 준수하여 즉각 석방하여 송환하였으며 연이어 자문을 갖추어 귀 예부에 번거롭게 부탁하여 상세히 살펴 황상께 전달 상주해 주십사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올해 윤3월에 충청도 공주(公州) 지역에서 프랑스 사람 최올(崔兀)이라는 자를 체포하였는데 근래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바닷길로 몰래 들어와 그곳에 와서 숨어있었으며 이복명이 체포된 후 겁을 먹고 도망쳐 은닉하였다가 다시 잡히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황을 조사하고 그의 말을 따져보니 바로 이복명과 같은 무리였다가 그물에서 빠져나온 자로서 간교하게 숨어 있다가 그 잔당들이 이미 무너지자 자취를 숨기고서 잠시 쉬고 있었던 것이니 더욱 간교하고 사특합니다. 이미 앞선 자문에서 나라의 법도에 살려둘 수 없다고 아뢰었으니 범죄의 자취에 따라 죄를 내리자면 진실로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최올돌(崔兀乭)을 이복명에 비추어 본다면 같은 죄를 저질렀는데도 그 처분은 다른 것이 되니, 하나는 풀어주고 하나는 구속한다면 공평함이 어그러질까 우려됩니다. 황상의 모두 살려주시고자 하는 어짊을 우러러 본받아 아직 사형에 처하지 않고 상규(常規)를 지키고 있습니다. 감히 작년의 전례에 따라 현재 프랑스 사람 최올돌을 의주부(義州府)에 압송해서 본 의주부의 훈도(訓導) 최경환(崔璟煥)을 차정하여 관압해가게 해서 봉황성(鳳凰城)에 교부하는 외에 귀 예부에 바라건대 이러한 연유를 황제께 대신 상주해주십시오. 외람되이 돌봐주시는 은혜를 믿고 누차 구구한 말씀을 올리니 더욱 지극한 황송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냅니다. 운운(云云).

광서(光緖) 5년(1879) 7월 19일

<b>출전 ㆍ</b><b>『</b><b>同文彙考</b><b>』 </b><b>原編</b><b>, </b><b>洋舶情形</b><b>, </b><b>「</b><b>報禮部法國敎士釋送咨</b><b>」</b><b>, </b><b>光緖 </b><b>5</b><b>년 </b><b>7</b><b>월 </b><b>19</b><b>일</b>

 

 

<b>報禮部法國敎士釋送咨</b>

朝鮮國王爲咨報事 小邦於昨年五月, 拿獲法國人李卜明者, 以其暗設邪敎, 誑惑愚氓, 行將査究, 另圖鋤治. 乃有該國使臣籲懇, 特推天地曰生之德, 勅諭貴部, 轉令放釋. 小邦欽遵皇旨, 旋卽解送, 繼有具咨, 煩乞貴部, 照詳轉奏天陛矣. 又於本年閏三月, 忠淸道公州地, 譏捉佛郞國人崔兀者, 詳覈根因, 則以爲潛越海路, 來此隱伏, 自李卜明逮捕之後, 恐㥘逃匿, 亦被詗拏云云. 究情察辭, 的是李卜明之同黨, 而漏網者, 奸窩旣破餘孼, 猶存秘蹤, 假息尤爲狡慝. 已於前咨中, 以邦憲不宜更屈爲奏, 則執跡蔽辜, 固當置辟乃已而. 第念崔兀乭之於李卜明, 可謂一而二也, 一放一拘, 恐欠平允. 仰體皇上, 欲竝生之仁, 未克膠守常規, 敢據昨年已例, 現在佛郞國人崔兀乭, 領送于義州府, 差定本府訓導崔璟煥, 管押前去, 交付鳳凰城外, 申乞貴部, 將此緣由, 轉達天聽焉, 猥恃寵眷, 歷陳衷曲, 益不勝悚惶之至. 爲此, 合行移咨. 云云.

光緖五年七月十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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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책임표시사항 : 광서 5년(1879년) 9월 16일 咨文 / 朝鮮國王 受給; 淸國禮部 發給

판사항 : 筆寫本(필사본) (자문/ 조선국왕 수급: 청국예부 발급)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淸國禮部 發給(청국예부 발급, 고종 16년(1879)

형태사항 : 1張; 58.0 x 72.0 cm &lt;소장 국립도서관&gt;

<b>【</b><b>해제</b><b>】 </b>고종 16년(1879) 9월 16일에 청국 예부에서 조선국왕에게 보내 온 문서. 지난 윤3월 조선 충청도 공주에서 잡은 프랑스인 최올돌(崔兀乭:최승진)을 봉황성(鳳凰城)으로 차송하였다는 조선의 자문을 황제에게 아뢰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고종실록』16권 1879년(고종 16) 8월 29일에 의주부윤 임한수(林翰洙)가 올린 장계에 의하면 "최올돌을 오랫동안 책문(柵門)에 머물러 둘 수 없기 때문에 급히 훈도(訓導)로 하여금 봉성장(鳳城將)에게 압송해 들여보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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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책임표시사항 : 咨文 / 朝鮮國王 受給; 淸國禮部 發給(조선국와 수급;청국예부 발급)

판사항 : 筆寫本(필사본)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淸國禮部 發給(청국예부 발급) 고종 16(1879년)

형태사항 : 1張; 59.0 x 73.0 cm

 

<b>【</b><b>해제</b><b>】</b> 고종 16년(1879) 10월 20일에 청국 예부에서 조선국왕에게 보내 온 문서. 지난 윤3월 충청도 공주에서 잡힌 프랑스 교사 최진승(崔鎭勝)을 청의 요구대로 중국으로 출송(出送)하였다는 조선국왕의 자문을 황제에게 아뢰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그리고 최올돌과 최진승이 성(姓)은 같으나 이름이 다른데 추국한 결과 동일 인물임이 밝혀졌다. 최진승 건과 관련해서 『고종실록』16권 1879년(고종 16) 7월 9일 기사에 의하면 중국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李鴻章)이 영중추부사 이유원(李裕元)에게 프랑스 선교사 최진승[V.M.Deguette]이 귀국(조선)에 감금되어 있으니 이를 석방시켜서 본국(중국)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해 8월 16일 기사에 승문원에서 중국 예부에서 보내 온 자문을 보고서 최진승을 봉성으로 압송하겠다는 내용의 회답을 중국에 보내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뢴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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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b>드게트</b><b>(Deguette Victor Marie, 1848 ~ 1889,</b> <b>한국명 최동진</b><b>(</b><b>崔東鎭</b><b>) </b><b>신부</b><b>)</b>

드게트(Deguette Victor Marie, 1848 ~ 1889, 한국명 최동진(崔東鎭)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세례명은 빅톨, 한국명은 최동진(崔東鎭), 최진승(崔鎭勝), 최올돌(崔兀乭) 등으로 불리었다.

 

그는 1848년 프랑스의 퐁 수 아브랑쉬에서 태어나 모르탱 소신학교와 구탕스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87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한국에 파견되었다.

 

1876년 2월에 만주에 도착한 후 리델, 블랑 등과 함께 입국을 시도하여 리델 주교만 돌아가고 블랑 신부와 함께 5월에 입국, 서울에서 좀 쉬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전교하였으며, 충청도 등지로 피신하였다. 그후 입국한 리델 주교가 1878년 6월 중국으로 추방될 때를 전후하여 다시 전교활동에 나섰다가 곧 관헌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만주에서 리델 주교를 만나 ‘라한사전’ 편찬에 착수하고 1881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교회서적을 인쇄하기도 하다가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1883년 조선에 재입국하여 당시 강원도 이천(伊川), 함경도 원산(元山) 등지에서 전교활동을 했다.

 

원산에서는 개항이 되고 한불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완고한 원산 주민들과 그곳 지방관의 무지로 1887년 체포된 채 서울로 호송되었다가(드케트 추방사건) 다시 교회측과 프랑스 대리공사의 엄중한 항의에 힘입어 원산으로 귀임하였고, 1889년 4월 블랑 주교의 지시로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했으나 장티프스로 인해 동년 4월 29일 선종하였다.

 

<b>&lt;</b><b>자료정리 </b><b>: </b><b>박 수 환</b><b>&gt;</b>]]></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12:03: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해남윤씨 윤두서의 가족관계도,]]></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missa.or.kr/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7/6a61ffdb2de173981389.png" alt=""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11:51: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홍지영 · 강완숙 내외]]></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7]]></link>
			<description><![CDATA[<b>별라산의 별난 사람</b> 홍지영 · 강완숙 <b>내외</b>

 

강완숙 남편 홍지영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

- 1872년 덕산군 지도에서 별라산 인근을 화대한 지도.

<b>홍지영의 별라산</b><b>과 원백돌의 응정리</b>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을 모은 「수기」는 1790년 진산 사건 이후 충청도 초기 교회의 생생한 현장 정보를 중계한다. 탄압 대상의 동향과 활동 정보 및 관련자 색출에 대한 보고서라서 그렇다. 「수기」에서 특별히 지속적 주목 대상이 된 인물 중 하나가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이다.

 

1791년 12월 2일에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에서 박종악은 이 지역의 호법(護法)하는 무리로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洪芝英)과 홍주 응정리(鷹井里)의 원백돌(元白乭)을 꼽았다. 별라산은 고지도에는 <b>별아산</b><b>(</b><b>別鵝山</b><b>)</b><b>으로 나온다</b><b>.</b> 한편 박종악은 1792년 1월 3일의 보고에서 성호 이익의 종손 이삼환이 80여 호나 되는 장천리(長川里)에 사는데, 홍지영의 별라산과는 고작 3리 거리지만, 별라산과 달리 한 집도 사학에 물들지 않았다고 썼다. 홍지영이 살던 별라산이 이삼환의 장천리와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는 얘기다. 남아있는 1801년 이삼환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장천리는 오늘날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이다.

 

홍지영의 집은 이곳에서 3리 떨어진, 별라산 자락 덕산군 고현내면(古縣內面) 별라산리(別羅山里)에 있었다. <b>오늘날 행정명으로는 예산군 고덕면 대천</b><b>3</b><b>리 별암 마을에 해당한다</b>. 현지에서는 별아미 마을이라고도 한다. 별아산의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보인다. 이곳은 176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편성 민호 93호, 남자 105명, 여자 260명이 거주한다고 쓴, 꽤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별라산의 위치 비정과 관련 내용은 2015년 6, 7월에 임성빈, 최휘철 선생 등 천주교 순교자유적답사회에서 정리한 답사 보고서의 도움을 받았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임성빈 선생께 감사드린다.)

 

<b>원백돌은 복자 원시장 베드로이다</b>. 백돌은 세례명 베드로의 음차다. 그가 있던 응정리는 홍지영의 별라산에서 9.8㎞ 떨어진 홍주 합남면(合南面)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이니 현재 합덕 성당이 자리한 일대이다. 인근에 신리, 솔뫼성지가 도보 거리에 포진해있다. 여사울성지와도 그다지 멀지 않다.

 

박종악은 홍지영에 대해 “원래 양반의 명색으로 함께 배우는 사람은 상천(常賤)과 친소를 묻지 않고 번번이 내외가 상통하여 안방으로 맞아들인다.”고 썼다. 홍지영의 아내는 바로 초기 교회의 여걸 강완숙(姜完淑, 골룸바, 1760~1801)이다. 열흘 뒤에 쓴 12월 11일 보고에서는 홍주 지역 사학교도들이 무려 60여 책의 사서(邪書)를 들고 와서 자수했고, 이에 홍지영 등 네 사람을 잡아 가두고 신당(神堂)을 헐어버리게 했다고 적었다. 이들은 당시 별도의 예배 공간까지 마련해두고 집회를 가졌던 모양으로, 천당(天堂)으로도 불린 예배 장소는 응정리 원백돌의 집에 있었다.

 

 

 

 

 

 

 

 

 

 

 

- 1768년 풍산홍씨 족보.(최휘철 선생 편집본에 필자가 관련 내용을 추가(초록색 부분)해 정리한 것임).

 

 

<b>별라산의 신앙 공동체</b>

 

12월 20일에 올린 보고에서 박종악은 다시 이렇게 썼다. 홍지영을 붙잡아 조사하자, “저의 어미와 처는 과연 서양학 언문 책자에 종사하였으나 저는 문자를 알지 못해 애당초 뜻을 두지 않았다”고 발뺌했고, 박종악은 홍지영을 타이른 뒤 다짐을 받고 석방했다. 한편 박종악은 홍지영이 “전혀 문자를 몰라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따로 보고 했다.

 

1792년 1월 3일의 보고에도 홍지영 집안의 신앙 활동에 대한 설명이 길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들은 상하친소(上下親疏)나 노소장유(老少長幼)를 따지지 않고 서로를 교중(交中)이라 부르며 신앙생활을 했다. 길가는 사람이 신자임을 밝히면 양반가의 아낙이 안방에서 그를 맞아 가까운 친척처럼 대접하고, 떠날 때는 노자까지 주어 보냈다. 양반가의 아낙은 언문 사서를 읽고, 상천(常賤)의 경우 입으로 외워 전했다.

 

이렇듯 별라산의 신앙 공동체는 1792년 당시 기록만 보더라도 신앙으로 똘똘 뭉친 특별한 구역이었다. 글 속의 양반가 아낙은 상경 이전의 강완숙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밖에 홍지영 집 행랑채에 사는 고오봉(高五峯), 김취재(金就才)와 그의 다리 저는 처남, <b>대천</b><b>(</b><b>大川</b><b>) </b><b>장터</b> 옆 안갑동(安甲同), 이름을 모르는 안충의(安忠義) 외에 별라산 사람 장성로(張聖魯)와 그의 생질 이가(李哥) 등 여러 사람이 별라산 신앙 공동체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활발하게 신앙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특별히 장성로는 그 인근의 유명한 의사여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해 관가에서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b>홍지영은 혜경궁 홍씨의 </b><b>7</b><b>촌 서조카</b>

 

앞서 12월 20일의 보고 끝에 추가된 다음 내용이 묘하다. “홍지영을 잡고 나서 비로소 이 사람이 영돈녕 홍낙성(洪樂性, 1718~1798)의 5촌 서조카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영(英)자는 영(榮)입니다. 당초에 사실과 어긋났으니 너무도 황공합니다.”

 

이름 한 글자 틀린 것이 왜 황공했을까? 돌림자가 영(英)이 아니라 영(榮)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는 임금 정조와 혼척으로 얽힌 가까운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 박종악이 무식한 향반으로 여겼던 홍지영은 놀랍게도 정1품 영돈녕부사 홍낙성의 5촌 서조카였다. 그는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와는 6촌 간이었다. 그렇다면 홍지영은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이고, 강완숙은 혜경궁의 7촌 서질부(庶姪婦)가 된다. 그의 문벌이 비록 서족이라고는 해도 시골 구석의 한미한 무지렁이 양반은 아니었다.

 

이에 <b>「</b><b>풍산홍씨대동보</b><b>」</b><b>의 추만공파</b><b>(</b><b>秋巒公派</b><b>) </b><b>파보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b><b>.</b> 홍낙성의 부친 홍상한(洪象漢, 1701~1769)에게 서제(庶弟) 홍직호(洪直浩, 1719~?, 초명 鐵漢)가 있었고, 그의 아들은 홍낙풍(洪樂豊, 1743~1819)이었다. 조부 홍석보(洪錫輔, 1672~1729)는 서자 낙풍을 포함해 아들이 둘뿐이었다. 결국 홍낙성의 5촌 서조카라면 홍낙풍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b>그런데 족보에는 홍낙풍 아래에 </b><b>‘</b><b>무후</b><b>(</b><b>無後</b><b>)’</b><b>라 하고 홍지영의 이름이 없다</b><b>. </b><b>이름을 파낸 것이다</b><b>. </b><b>왜 팠을까</b><b>? </b><b>부부가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b><b>, </b><b>대역부도로 죽은 강완숙의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b><b>.</b>

 

<b>족보에서 파낸 홍지영이 실제 홍낙풍의 아들이요</b>, 홍직호의 손자란 사실은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 1801년 「사학징의」 기록 중 남대문 밖에 살던 권생원의 여종 복점(福占)의 공초에 <b>“</b><b>홍문갑</b><b>(</b><b>洪文甲</b><b>: </b><b>홍지영의 아들</b><b>)</b>의 아비는 일찍이 홍영산(洪靈山)의 집 여종과 유모의 일로 결성(結城)에 내려가 1년에 두 번쯤 올라와서 어머니를 뵙습니다”라는 진술이 결정적이다. 강완숙의 여종 정임(丁任)도 “제 바깥 상전이 갈만한 곳은 덕산(德山)의 농막(農幕)이나 결성(結城)의 수리(水里)와 오리(五里) 등지”라고 진술했다. 덕산 농막은 별라산집을 가리키고, 이와 별도로 결성의 수리와 오리라는 곳에 전장과 노비 등의 근거가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홍지영은 무과에 급제해 영산 현감을 지냈던 조부 홍영산, 즉 홍직호에게서 물려받은 전장(田莊)과 노비 관리를 위해 1801년 당시까지 가족과 떨어져 별라산과 결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다. <b>홍문갑은 홍지영의 아들 복자 홍필주의 초명이다</b><b>.</b>

 

조부 홍직호가 영산 현감을 지냈고, 그는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홍낙성의 서제(庶弟)였다. 그 아들 <b>홍낙풍은 현감을 지낸 기계</b><b>(</b><b>杞溪</b><b>) </b><b>유씨</b><b>(</b><b>氏</b><b>) </b><b>욱기</b><b>(</b><b>郁基</b><b>)</b><b>의 딸과 혼인했다</b><b>. </b>홍지영은 그 홍낙풍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홍지영이 내포 지방의 지체 낮은 외교인 향반(鄕班)이며, 순박하지만 어리석고, 신앙생활에도 우유부단했던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강완숙이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여 쫓아내기까지 한 인물로 그려졌다.

 

강완숙은 1792년 이후 어느 시점에 남편 홍지영을 남겨두고 상경하는데,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가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아들 홍필주를 데리고 올라왔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아 석연치가 않다.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여장부의 기질이 다분했던 강완숙은 왜 남편만 남겨두고 훌쩍 상경했을까? 여기에는 분명 우리가 잘 모르는 속사정이 있음에 틀림없다.

 

다시 「수기」로 돌아가, 1792년 1월 3일 자 보고에서 박종악은, 충청도 사학의 종장(宗匠)이라는 홍낙민(洪樂敏)이 12월 10일에 예산에 내려와 수령과 대면하고 관아에서 묵어 잔 뒤에, 11일에 예산 호동(狐洞), 즉 여사울에 도착해 노비 박꽁꽁의 집에 묵은 동향을 적었다. 이어 19일에는 “그 서족(庶族)인 덕산 별라산에 사는 홍지영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했다. <b>별라산은 내포 지역</b> 교회에서 홍낙민이 한 차례 내려올 때마다 순방할 만큼 비중 있는 곳이었고, <b>그곳의 책임자가 홍지영이었다</b><b>.</b>

 

그는 과연 무식하고 신앙심도 약하며, 천주교를 믿는다고 아내를 내쫓기까지 했던 인물이었을까? 쫓겨났다는 그의 아내 강완숙은 어째서 굳이 성정이 만만찮았던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의 아들까지 데리고 상경 길에 올랐을까? 족보상 1819년까지 살아있던 것으로 나오는 <b>홍지영의 부친 홍낙풍</b>은 왜 이들과 함께 살지 않았을까? 1801년 당시 「사학징의」에 천주교 관련 인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나오는 또 다른 홍낙풍은 누구인가? 우리는 연쇄적인 질문에 휩싸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7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10:00: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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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천주교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 표창장]]></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6]]></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09:58:3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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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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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지역학으로서의 내포학,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5]]></link>
			<description><![CDATA[<b>하나</b><b>. </b><b>지역학으로서의 내포학</b>

 
<ol>
 	<li>지역학[地域學]이란 무엇인가? 9</li>
 	<li>지금 왜 지역학[地域學]인가? 9</li>
 	<li>지역학이 필요한 이유 10</li>
 	<li>지역학의 현재 10</li>
 	<li>지역학으로서 내포학[內浦學]을 다루는 의미 11</li>
 	<li>천주교 중심의 내포학 12</li>
</ol>
 

 
<ol>
 	<li><b> </b><b>지역학</b><b>[</b><b>地域學</b><b>]</b><b>이란 무엇인가</b><b>?</b></li>
</ol>
지역학이란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다. 지역학은 특정 지역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융합적 사고를 요구하며, 세계화의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고 또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다. 지역학은 특정 지역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융합적 사고를 위하여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언어, 문학, 법학 등과 같은 다양한 분과학문의 학제적 교류를 바탕으로 한 융합학문이기도 하다. 지역학은 세계 단위에서는 국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지자체에서는 ‘지명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ol>
 	<li><b> </b><b>지금 왜 지역학</b><b>[</b><b>地域學</b><b>]</b><b>인가</b><b>?</b></li>
</ol>
현실을 더욱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틀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상에 대한 내재적이고 총체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래 지속된 중앙집권적 정치와 행정체계에서 벗어나 분권과 자치라는 화두를 가지고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민자치라는 영역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지난 1987년 개정 헌법에 따라 지방자치법이 부활하여 1991년부터 지방선거가 다시 치러지고 있고 2020년 지방자치법이 전면 개정됨에 따라 자치와 분권이 매우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시점이다.

또한 현 정부에서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2023년 7월 10일 ‘지방시대위원회’로 명칭 변경)를 두고 지역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의 특성에 맞는 자립적 발전을 통하여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과 국가균형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갈수록 심화하는 지역 간 격차 및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고 어디에 살든 균등한 기회를 누리는 공정･자율･희망의 지방시대를 만들기 위해 국민이 공감하고 호응할 수 있는 정책을 계속 발굴해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ol>
 	<li><b> </b><b>지역학이 필요한 이유</b></li>
</ol>
지역학이 필요한 이유를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 지역학은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의 특화된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지역학은 한국사와 한국문화 전반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부분적인 요소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줄 수 있다.

둘째, 지역학은 문화의 창의적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고 지역학이 주로 다루는 지역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추출하는 과정은 미래지향적인 문화 발전 초석 마련의 토대로 작용할 수 있다. 기초연구를 통해 지역학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도시를 스토리텔링화하는 데 성공한 도시는 도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셋째, 지역학은 지역발전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지역학의 효과는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미래 비전의 숙지를 통해 주민의 자긍심을 북돋우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지역학 대중화는 주민의 애향심과 더불어 지역의 문화유산 및 문화콘텐츠 발굴을 촉진하고 관광자원 개발로도 이어질 수 있다.

 
<ol>
 	<li><b> </b><b>지역학의 현재 </b></li>
</ol>
지역학은 일정한 지역의 지리, 역사, 문화 따위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세계지역학회가 있고 각국에 지회로서 그 나라의 지역학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지역학회는 지역학(Regional Science)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모임으로서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국제적 교류를 위한 창구 기능을 목적으로 1983년 창립되었다. 지역학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연구 분야가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학제 간 접근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지역학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한국지역학회는 여러 지역연구 분야에서 단편적으로 활용되는 이론적 틀, 분석기법, 정책연구 등을 종합하여 독창적인 연구 분야로 승화시키는 학문으로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자치와 분권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서 지방분권과 지방자치 나아가 주민자치를 더욱 강화하고 체계를 갖추는 의미에서도 지역학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 1993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인 국내 지역학으로서 ‘서울학’이 등장했고, 이어서 지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학(2002)·부산학(2003)·대구경북학(2005) 등의 지역학이 차례로 수립되었다. 이후 점차 ‘지역의 정체성 정립이 곧 지역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하면서 광역지자체들과 지역 대학들에서는 자기 지역의 ‘지역학’을 개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현재 전국 대개의 광역시·도에는 소속 행정구역명을 따서 만들어진 독립된 지역학이 수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충청남도에도 충남학을 만들어 충남의 총체적 현상을 대상으로 협의의 역사 문화뿐만 아니라 충남의 정치 경제 사회 산업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융합학으로서의 지역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충청남도 충남학 진흥에 관한 조례’를 제정(2021.8. 17.)하여 지원하고 있다.

충남에서 최초의 지역학은 천안학(天安學)으로 나사렛대학교 심재권 교수가 제창하고 천안시 및 천안발전연구원 천안학연구소가 2009년 이후 천안에 소재한 각 대학교의 교양과목으로 개설한 대학교 학부 교양 강좌의 이름이자, 충청남도 천안시가 시행하는 지역 홍보 및 지역학 연구 정책으로 운영하고 있다. 천안학의 개설로 천안이라는 지역에 대해 이해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수강생들의 호평과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반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의 교양과목으로만 개설되었지 정작 연구기능과 시민 강좌는 멀리했다는 비판도 있다.

아산시에서도 아산 지역문화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2010년 순천향대학교에 ‘아산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아산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조사, 발굴, 연구하여 아산학 정립에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고, 아산 지역발전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순천향대학교·선문대학교·호서대학교·유원대학교 등에서 ‘아산학 강좌’를 운영하는 한편 ‘아산학연구소 전문가 워크숍’과 아산학연구소 학술대회· 시민 대상 아산학 강좌가 열리고 있다. 내포와 관련해서는 홍성군에서 지난 2012년부터 ‘홍성 내포학 대학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ol>
 	<li><b> </b><b>지역학으로서 내포학</b><b>[</b><b>內浦學</b><b>]</b><b>을 다루는 의미</b></li>
</ol>
지역학으로서 내포학을 다루는 의미는 충남학이 충청남도 15개 시·군 전체를 다루지만, 내포는 충청남도의 10개 시·군에 걸친 범위를 통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포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우선 조선 후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호서 내포 18 고을이 이미 적지(赤地)로 판명되었으니, 청컨대 박사창(朴師昌)을 어사(御史)로 파견해 떠도는 백성을 안집(安集) 시키고, 수령(守令)을 염찰(廉察)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lt; 『英祖實錄 』 卷45, 英祖 13年 8月 癸未條&gt;

 

위의 기사에서는 ‘호서 내포 18고을’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한 호서 내포의 18고을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우리는 먼저 조선 후기 홍주진관(洪州鎭管)에 속한 18개 군현을 떠올릴 수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 홍주진관에는 서천·면천·서산·태안·온양·평택·홍산·덕산·청양·남포·비인·결성·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 등 모두 18개 군현이 포함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홍성·서천·서산·태안·아산·예산·당진·청양·부여·보령과 경기도의 평택까지 일컫는다. 즉 충청남도 15개 시·군 중 금산·계룡·공주·천안·논산을 제외한 모든 기초 지방행정 구역이 포함된 영역이다.

내포가 아산만을 중심으로 한 수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그리고 더 넓은 지역을 의미하는 용어로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내포라는 용어가 다음과 같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정유(丁酉)에 전라도도순어사(全羅道都巡禦使) 김횡(金鋐)이 조선(漕船)으로 내포(內浦)에 이르러 왜와 싸워 대패(大敗)하여 사자(死者)가 태반(太半)이었다.

&lt; 『高麗史』 卷40, 世家 40 恭愍王 13年(1364) 4月 丁酉&gt;

 

기사(己巳)에 왜가 내포에 침구(侵寇)하여 병선(兵船) 30여 척을 부수고 여러 주(州)의 조속(租粟)을 약탈하였다.

&lt; 『高麗史』 卷40, 世家 40 恭愍王 19年(1370) 4月 己巳&gt;

 

이상의 내용으로 내포에 관한 기록은 모두 공민왕대의 기록이며, 전라도 조운선 및 왜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내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이미 공민왕 대에 이르면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그 지역은 전라도의 조운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지역학으로서의 충남학은 아직 완성된 학문이 아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형성도상의 학문이다. 이 점은 사실상 전국의 모든 지역학이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지역학은 기본적으로 아직 분과학문의 학제적 연구의 종합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성격과 연구 방법론의 개발을 통한 독립된 분과학문으로의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충남에서 일부를 제외한 다수의 면적인 내포를 다루는 것은 내포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성격, 지명유래, 개척적 문화수용, 역사적 성격 등을 살펴볼 때 지극히 시의적절한 시도이다.

 
<ol>
 	<li><b> </b><b>천주교 중심의 내포학</b></li>
</ol>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이란 내포 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인식하며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고,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 줄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내포학은 다음 세 가지의 큰 틀 안에서 바라보고 연구하고 있다.

첫째, 지리적 개념과 문화적 개념, 시대적 바탕(정치와 경제 포함) 위에서의 내포 지역의 가톨릭 신앙 역사를 인식하며 가톨릭 신앙의 수용과정과 정착, 가톨릭 신앙이 내포 지역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둘째, 내포 지역이 가진 공간적, 문화적, 현상적 특징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바라보며, 내포 지역 안에서의 가톨릭 신앙의 총체적 삶과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지역 사회를 넘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는 방안 연구.

셋째, 내포의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활용을 통한 국민의 문화 향유권 충족 방안에 관한 연구.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자칫하면 지역과는 동떨어진 학문으로 천주교만을 위한 학문이 될 수 있다.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서는 천주교 중심의 신앙과 문화 안에서 지역이 상생하고 함께 조화로운 역사와 문화의 꽃을 어떻게 피우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둘째, 내포 지역의 지역민들을 위해서는 배타주의와 지역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조화를 이루며, 다음 세대도 내포 지역의 총체적 환경 안에서 누적된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포 지역의 천주교를 바탕으로 한 삶의 양식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내포 지역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자연환경과 종교는 내포 지역의 주민들에게 어떤 삶의 영향을 미쳐왔는지, 객관적 사실 위에서 ‘내포 지역’과 ‘다른 지역’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분명 평범하게 살아가는 지역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존중하도록 만들어주며, 지역 안에서 공동체의 총체적 삶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며 존중과 배려의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할 것이다.

<b>둘</b><b>. </b><b>천주교 중심의 내포학</b>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박물관이다.

 
<ol>
 	<li>들어가는 말</li>
 	<li>자료의 수집과 활용</li>
</ol>
① 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 ② 데이터 공유와 연구 확장성 문제

③ 데이터 보존과 연구 지속성 문제
<ol>
 	<li>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li>
</ol>
3.1.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3.2. 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① 시간별 분류 ② 공간별 분류 ③ 주제별 분류 ④ 형태별 분류
<ol>
 	<li>문화자원의 활용과 자원화</li>
 	<li>나가는 말</li>
</ol>
 
<ol>
 	<li><b> </b><b>들어가는 말</b></li>
</ol>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내포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다루고 있는 지역학이다. 지역학은 인문학와 예술, 경제와 지정학, 종교와 문화 등을 포함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 문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 지역의 문학, 사학 철학과 같은 보편적 인문학을 지역적 특수성을 통해 이해할 때인문학은 지역학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지역적으로는 1890년 한국천주교회가 내포지역에 설립한 두 성당, 간양골(공세리)과 양촌(합덕)이 사목한 내포 지역의 시간과 공간적 특성 안에 담긴 천주교 신앙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고, 가톨릭 신앙의 요람인 내포 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인식하며 주제별로 형태별로 구분하며 연구하여 내포지역이 천주교 신앙의 살아있는 박물관임을 드러내고 있다.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박물관이다. 지리적 개념과 문화적 개념, 시대적 바탕(정치와 경제 포함) 위에서의 내포 지역의 가톨릭 신앙 역사는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가톨릭 신앙의 수용과정과 정착, 가톨릭 신앙이 내포 지역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내포 지역이 가진 공간적, 문화적, 현상적 특징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바라보며, 내포 지역 안에서의 가톨릭 신앙의 총체적 삶과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지역 사회를 넘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방안이 연구되고, 내포의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활용을 통한 지역 주민의 문화향유권 충족 방안에 대해 연구가 지속될 때,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지역학으로써의 자리를 굳건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내포라는 지역적인 특성 안에서의 삶과 종교문화, 통치 이념과 종교의 갈등에서 겪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박해, 신분제도 안에서 인간의 고뇌와 평등한 신앙인의 삶, 인간의 존귀함과 고귀함을 깨달은 이들의 배려와 나눔의 삶,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이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을 내포지역은 잘 보여주고 있고,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이를 탐구하고 있으니, 지역학으로써의 내포학은 이 지역의 훌륭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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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 </b><b>자료의 수집과 활용</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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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료의 수집과 활용이며,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교회와 연구자들의 의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데이터에 대한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되는데, “첫째, 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 둘째, 데이터 공유와 연구 확장성 문제, 셋째, 데이터 보존과 연구 지속성 문제”이다. 수집된 데이터를 위의 세 가지 큰 틀 안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포학 연구자들뿐 아니라 각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나 개인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확장이 필요하다. 인식의 전환은 데이터 개방과 공유로 이어져 협업을 통한 새로운 자료가 지속적으로 생성되어 풍성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게 된다.

<b>① </b><b>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b>

연구 자료들이 개방될 때 연구자들은 누적된 자료를 통해 좀 더 쉽게 그 주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다양한 자료들인 인터넷에 올라와 있지만, 그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많고, 출처도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자료에 대한 공유 정책을 수립하고, 연구데이터의 저작권과 소유권을 주장하기보다, 출처만 밝힌다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연구자 및 공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자료의 검색 및 다운로드가 용이하도록 제공하며, 연구 결과에 사용된 원본 데이터를 함께 제공할 때, 연구 결과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의 검토 과정을 거쳐 연구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할 때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연구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며, 연구자들의 자료 공유를 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 교회는 시복시성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하고 있다. 주교회의나 교회사 연구소들,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 연구 논문 자료실들은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 연구자들이 그 데이터의 기초자료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고, 기존 연구자들이 이미 해 놓은 것을 처음인 것처럼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결국 누적된 연구의 이득을 새연구자들이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데이터 개방이 필요하다.

 

<b>② </b><b>데이터 공유와 연구 확장성 문제 </b>

데이터 공유는 연구 결과의 투명성과 공동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현재 각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가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개인 연구자들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교회도 연구소와 개인 연구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자료 공유 방법, 저작권 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명확한 데이터 공유 정책을 수립하여 연구소와 연구자들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어야 한다. 특별히 ‘주교회의’에서 연구자들의 모든 자료를 공유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방안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연구 확장성을 위해 연속적인 주제를 제시하고 논문 공모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주제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나 응용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그 주제에 대한 상세한 연구 방법론을 공개하여 다른 연구자들이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하거나, 연구 결과에 사용된 원본 데이터를 함께 제공하여 다른 연구자들이 추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다른 연구자들과의 공동 연구나 그룹 연구, 온라인 포럼 등을 통해 연구 공유와 연구 확장이 촉진될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수밖에 없다. 각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나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데이터가 공유될 때, 더 큰 결과물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b>③ </b><b>데이터 보존과 연구 지속성 문제</b>

데이터 보존은 연구 데이터의 원본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료의 변형이 왔을 때, 원본 데이터를 통해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할 때, 데이터의 안정성과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디지털 자료로 보존할 경우에는 표준화된 데이터 포맷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E-book으로 웹에서 제공하고, PDF 파일과 텍스트 파일, 이미지 파일과 음성파일의 포맷이 함께 사용된다면 데이터의 원본을 변형시키지 않을 있고,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안정성과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연구 지속성을 위해 연구자들에게 연구 자금을 지급하고, 기금을 형성하는 일이다. 기금이 형성되어 있을 때, 지속적이고 장기적이며, 수준 높은 연구가 지속되고, 출판과 자료 제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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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 </b><b>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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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연구와 교육을 혁신하려는 시도, 즉 인문학의 위기에서 부상한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은 미시적(微視的)으로는 지역학 강의의 범주와 지향점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 관성화된 인문학 교육의 목적을 상기시키고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디지털은 오픈 소스(open source)의 영역이고, 디지털은 풍부함(copiousness)을 중시한다. 그래서 디지털 인문학은 생성 인문학(Generative Humanities)이며. 공동창조(co-creation)라고 말한다.

흩어져 있는 자료들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은 미시적으로는 내포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세밀하게 파악하여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거시적(巨視的)으로는 내포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전체적으로 분석하여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연구자들 각자의 자리에서도 함께 협업하며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지속적인 데이터 생성과 창조적인 활용이 가능하게 된다.

 

<b>3.1. </b><b>디지털 아카이브</b>(digital archive)

아카이브(archives)는 정부나 관공서, 기타 조직체의 공문서와 사문서를 소장·보관하는 문서국 또는 기록보관소를 의미하는 말이다. 보통은 웹에서 파일 전송을 위해 백업용이나 보관용, 기타 다른 목적으로 한곳에 모아둔 일단의 파일을 말한다. 아카이브란 단순히 파일들의 목록만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지원되는 프로그램에 따라 하나의 디렉토리나 구조일람표 밑에 파일들을 조직화할 수도 있다. 웹사이트상에서의 아카이브는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흔히 일람표나 목록표 등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액세스할 수 있도록 모아 놓은 개별 발간물들을 지칭하지만, 웹사이트에 게재된 잡지나 저널 그리고 신문 등의 내용 중에서 지난 기사들을 모아 놓은 것을 아카이브라고 부르기도 한다.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는 인터넷에 디지털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서 저장고이자 콘텐츠 아카이브다. 디지털로 전환된 사물의 반영물은 디지털 복제로 수많은 사람의 용도에 맞게 사용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지구화된 차원에서 실시간적인 데이터로 이루어진 내용물이 축적됨과 동시에 사용되는 시공간압축의 저장고이다. 이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올린 말과 생각, 의견과 감정이 쌓이는 실시간 저장고라고 할 수 있는데, 사용자가 올려놓은 디지털 콘텐츠는 그것이 저장되는 물리적 장소(서버)에 상관없이 네트워크 안에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 축적된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개인의 노력으로 구성되는 사적 아카이브와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공적 아카이브로 구성된다. 디지털 아카이브가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면 새로운 모양으로 전환된다. 링크로 연결된 디지털 아카이브는 고립된 아카이브와 달리 상호 연결을 통해 양적 축적을 질적 변환으로 이끈다. 아카이브가 살아 있는 생명력을 가지려면 종류가 다른 새로운 창조물들과 접속해야 하고 새로운 링크를 만들어야 하며 하나의 부분이 기꺼이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야 한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변형되고 확장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 완성되는 관계의 연속이자 지속이다. 이러한 디지털 아카이브의 특성 때문에 지식과 정보의 완결성은 약화된다. 네트에서는 무수한 타자의 개입과 변형으로 정보와 지식의 자체 완결성이 과거에 비해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개인의 창의력과 집중에 의존하는 체계적인 저작물은 쇠퇴하고 공동 작업이나 기동성 있게 현실에 대응하는 부분적 중간 결과물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초고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완성된 원고를 뜻하지만 이제 온라인 버전이란 다른 사람들의 비판과 개입을 기다리는 열려있는 지적 과정으로서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특징은 물리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데이터의 단위로 축적된다는 특징으로 인하여, 디지털 아카이브는 장소의 소멸과 공간의 통일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되는 데이터는 플랫폼을 거쳐 저장된다. 축적된 디지털 아카이브의 정보는 그 시간성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흐름에 모두 적용된다. 실시간으로 축적되는 정보와 실시간으로 조회되어 재현되는 축적된 정보는 항상 현시적이다. 또한 아카이브에 저장된 정보는 물질 아카이브와 다르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즉, 언제 어느 때라도 조회한다면 다시 살아날 예비 동면 상태로 남아 창조와 동시에 축적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에 의해 형성된 자료들은 디지털 형태로 전환하여 저장한다. 연구자들에 의해 생성된 디지털화된 내용물은 축적되고, 연구자들의 활동 결과와 함께 누적되면서 디지털 아카이브는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문서, 소리,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로 원본을 재현한다.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는 사물이 디지털로 전환되어 보관된다. 이러한 디지털 정보들은 수많은 사람의 용도에 따라 사용된다. 그렇기에 디지털 아카이브는 기존 아카이브와는 다르게 보관보다는 사용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공간적인 접근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등의 특성들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결국 디지털 정보의 장점인 검색과 활용의 용이, 원본 변형의 용이와 복사의 특성을 그대로 가져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아카이브는 다양한 참여자들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열린 체계를 갖고 있기에 그 공공성을 강하게 가져간다고 할 수 있다.

 

<b>3.2. </b><b>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b>

지역을 연구 대상이자 주체로 하는 지역학은 수많은 역사의 조각들을 모으고, 현장을 조사하며, 기존 자료와 구술자료를 기반으로 연구하게 된다. 지역의 자료를 충실하게 발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오랜 연구활동을 해 오고 있는 향토학자들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1890년 간양골과 양촌에 세워진 두 본당의 사목지를 대상으로 하기에 광범위하고 숨겨진 역사가 더 많은 실정이다. 그러므로 먼저 수집된 역사와 문화자원을 구조화시켜 메타데이터(Metadata)를 작성해야 한다. 메타데이터(Metadata)는 일반적으로 데이터에 관한 구조화된 데이터로, 대량의 정보 가운데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검색하기 위해 원시데이터(Raw data)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구조화 혹은 표준화한 정보를 의미한다. 시간, 공간, 주제, 형태별로 분류 체계를 마련하여 검색 및 활용에 용이하도록 구축하여 내포의 역사 문화자원과 신앙 유산자원을 디지털화해야 한다.

 

<b>① </b><b>시간별 분류</b>

이승훈의 세례를 통해 천주교가 시작된 1784년은 한국교회사에 획을 긋는 시간이다. 성호학파가 녹암계와 순암계로 구분되어 1777년 강학회가 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 교회 창설 이전의 시간과 교회창설,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과 활동과 을묘박해와 정사박해(1794~1801),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1871), 한불수교조약(1886년), 조선에 9개의 본당 설립(공세리, 합덕 설립, 1890년), 일제 강점기의 내포교회, 대전교구 설정(1948년), 6.25 전쟁(1950~1953),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서울 세계 성체대회(1989년), 대전교구 시노드(2019년) 등으로 내포의 천주교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 이 시간별 분류 안에 시대적 상황과 정치 경제와 문화와 천주교 신앙을 담아 구분하게 된다면 시간을 거슬러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오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일의 우리 지역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된다.

 

<b>② </b><b>공간별 분류</b>

내포지역은 가톨릭 신앙의 박물관이다. 많은 이들이 내포를 ‘한국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라고 말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고 부족한 정의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앙의 시작과 발전, 성장의 기원 등이 모두 담겨 있기에 요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내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신앙은 전국 각지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었고, 내포는 지금도 가톨릭 신앙의 중심으로 살아가며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으니 요람이라는 말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이 있다. 분명한 것은 내포 지역은 가톨릭 신앙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살아 숨 쉬는 천주교 신앙 유산이 내포에 가득하고, 그것을 찾아 순례의 길을 걷는 이들이 이어지고 있다.

내포학의 공간별 분류는 크게 1890년부터 공세리 성당과 합덕성당이 사목하던 곳, 서산, 서천과 공주를 중심으로 오래된 성당과 초기부터 이어져 온 공소, 순교지와 교우촌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포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의미 있는 공간들의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 교통과 삶의 자리를 담아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면 입체적으로 내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국제성지로 선포된 해미를 중심으로 성지들을 연결시켜 공간의 개념을 입체적으로 구현한다면 성지를 순례하는 이들이 마치 메타버스 안에서 체험하는 그 놀라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b>③ </b><b>주제별 분류</b>

지역학으로서의 내포학은 설정된 범위의 총체적인 삶을 다룬다. 천주교 신자들이 타 종교신자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겪게 되는 모든 것들도 주제별로 분류가 될 수 있다. 유교와 천주교, 천주교 신앙과 불교 신앙, 유학자들과 실학자들, 지주와 소작농, 신분제도와 천주교, 교우촌과 신자들의 생활, 박해자와 배교자,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 6.25와 천주교, 내포의 종교문화(성체거동, 장례와 연도, 판공성사, 성영회 사업, 음악과 건축 등) 등은 크게 내포문화를 주제별로 구분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된다.

 

<b>④ </b><b>형태별 분류</b>

한국 교회의 특별함은 ‘평신도 중심의 교회’에 있다. 평신도들이 주도적으로 선교사를 영입하였고, 공동체를 이끌었으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내포학에서는 크게 성직자 중심과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 형태를 분류하여 오늘날 성직자 중심의 공동체 형태의 장단점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성지순례자들을 위하여 순교지와 유적지, 탄생지와 무덤과 가묘, 유형 문화재와 무형문화재, 교우촌과 공소, 순교신심과 성모신심과 성체신심, 성체거동과 장례 문화, 건축형태, 천주가사와 성가 등 다양한 형태별로 분류하여 총제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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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 </b><b>문화자원의 활용과 자원화</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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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은 내포학의 핵심 연구 대상이자 개념으로 문화콘텐츠학의 ‘자원화’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원화’란 역사학을 필두로 미술사학, 건축학, 문화재학 등의 각 분과 학문의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와 연구 결과물을(원자료, Source) 콘텐츠로 활용하기 쉬운 중간단계의 것인 자원(Resource)으로 가공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원화는 원자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면서 개별 자원의 맥락과 연관성을 구조화하여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지식 가공 과정이다.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은 내포라는 특이한 장소에서 천주교 중심으로 축적된 유형무형의 신앙문화 산물로 내포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신앙과 문화적 분위기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지역의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원천 자료이다.

내포지역은 역사문화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통한 문화자원화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지역문화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성지순례가 보편화된 지금은 역사문화자원 분류의 기준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재정의함으로써 그 범주를 대폭 확장할 때, 이를 통해 내포 전 지역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천주교 중심의 관점에서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와 종교, 문학과 건축 등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때 내포가 지닌 가치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 연구의 자원화를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사목적 배려와 주민들에게는 문화적 혜택을 수혜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치원, 중고등학교, 피정의 집, 연수원, 성지, 성당의 교육관 등 이 모든 것들이 천주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지역과의 연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원화되어야 한다.

자원화는 신앙과 역사와 문학의 가치를 시각화시켜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충족시키고, 교회가 지닌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공세리 성당에서는 박물관에 전시된 제의를 ‘제의 전시회’를 통해 자원화하였다. 패션쇼를 하는 것처럼 제의를 입고 역대 신부님들의 사목을 소개하며 공세리의 역사를 들려주고, 그 제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제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32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4개의 성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있으며, 순례자들이 원할 때, 원하는 성극을 공연하며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하며 순례자들에게 공세리의 신앙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매년 1회 성체거동을 통해 축제로 역사를 알려주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병을 찍는 체험을 직접 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에 이 성체거동을 전수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합덕성당이나 여사울 성지, 솔뫼와 신리성지, 황새바위성지와 홍주성지, 다락골 줄무덤과 성거산 성지 등도 지니고 있는 신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시각화하여 연계시킨다면 내포가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해미국제성지는 대전교구에 있는 다양한 성지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지구촌 모든 이들이 방문하고 순례하며 자원화된 내포의 신앙역사문화를 시청각적으로 체험하며 머물 수 있는 곳이 된다면 ‘내포의 박물관’은 그 빛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해미국제성지가 가지고 있는 원자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개별 자원의 맥락과 연관성을 구조화하여 시청각적으로 가공 과정을 거쳐 자원화되어 교구의 모든 성지와 연계될 때, 해미국제성지는 ‘내포는 신앙의 박물관이다.’라는 것을 방문자들이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모든 성지도 그 중심에 서서 가톨릭 신앙의 보물을 세상에 빛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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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 </b><b>나가는 말</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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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1890년에 설립된 두 본당의 사목지를 대상으로 총체적인 삶을 연구하며, 시대별, 장소별, 주제별 원천자료를 발굴하여 이를 자원화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축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각 자원별 연관 관계와 맥락을 규명하고 스토리텔링을 시도함으로써 일반 국민들도 내포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특히 역사문화자원의 적합한 활용 방안과 이를 기초로 한 내포지역의 성지계발 계획의 방향성을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고, 내포의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자원화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고, 이 자료를 공유하며, 다양한 연구자들이 쉽게 자료에 접근하며 자료를 재생산하여 내포가 신앙의 거대한 박물관임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자료에 접근하고 원자료를 통해 재생산하는 자료가 만들어질 때, 지역사회와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내포의 천주교는 이렇게 일반 시민과 공유하며 신앙의 역사를 신자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도 대화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발굴된 자료와 숨어있는 자료들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자료의 수집과 활용, ‘디지털아카이브 구축’과 ‘자원화’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다.

<b>셋</b><b>. </b><b>내포의 신앙문화 활용을 통한 선교활동과 신앙유산 전승</b><b>, </b><b>그리고 자원화</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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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들어가는 말 9</li>
 	<li>생생문화재 공모사업 11</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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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국가유산청 문화유산 활용사업 현황 11

2.2. 2022~2024년에 공세리 성당에서 이루어진 생생문화사업 14

2.3. 대전교구의 국가 유산 활용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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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내포의 천주교 국가유산 활용을 위한 방안 17</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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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내포 교회가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문화재 활용 사업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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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나가는 말 25</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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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 </b><b>들어가는 말</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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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은 어떤 나라나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며 사상적·문화적 배경이 되었다. 가톨릭의 종교문화자원은 단순히 역사문화자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국민의 문화향유권 충족을 위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특별히 내포의 천주교 문화는 지역 전체를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고 있게 지역 안에서 보편적 가치를 가지며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문학 등에 다양한 영향을 주었고, 지역사회와 함께 하며 이 문화를 지켜왔고, 그 역사는 내포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포의 가톨릭 종교문화자원은 내포지역의 보편적 가치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현재 국가유산 중 유형문화재는 성당과 사제관 등이 자리잡고 있고, 무형문화로 등록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단지 지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40년(since 1784년)이 된 가톨릭은 더 이상 특정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뒤따라가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앞서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b>“</b><b>어머니인 교회는 참으로 이 매체들이 올바르게 사용되면 인류에게 커다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b><b>. </b><b>이 매체들이 정신적 휴식과 수양을 위하여 또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튼튼히 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기 때문이다</b><b>.”</b>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에서는 내포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내포의 총체적인 삶을 연구하여 자료를 공유하고 지식을 덧대어 디지털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화화 역사의 자원화’를 향해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포는 거대한 신앙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내포가 품고 있는 국가유산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국민에게도 큰 관심이 있는 자원이고,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과 자긍심을 키우며,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게 될 때, 가톨릭의 신앙 유산은 다음 세대에도 더욱 풍요롭게 전해지게 될 것이다. 현재 각 국가유산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들이 심화되어 자원화될 때, 내포의 신앙유산은 내포를 찾는 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그 신앙을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며 선포할 수 있도록 더 큰 도움을 주게 된다. 현재 국가유산청에서 시행하는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내포의 국가유산을 더욱 빛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을 대상으로 문화재활용사업을 통해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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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 </b><b>생생문화재 공모사업</b></li>
</ol>
국가가 지원하는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남녀노소 누구나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각 지역의 문화유산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와 의미들을 담아낸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충족시키고 높이려는 것이다. 가톨릭은 좋은 ‘문화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내포는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을 살아 숨 쉬게 만들면 다음 세대도 우리가 전해 받은 신앙유산을 더욱 풍요롭게 전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톨릭이 하고 있는 많은 프로그램에 보편성을 추가하면 일반 대중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을 대중과 함께 하고, 좀 더 보편적인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며, 지속적으로 진행하면 그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지역의 문화재로 존중받게 될 것이다. ‘성체거동과 연도’ 뿐만 아니라 ‘성모의 밤이나 묵주기도의 밤, 순교자의 밤’ 등도 일반 대중이 함께 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든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행사가 될 것이다.

 

예전에 합덕에서는 성모승천 대축일에 소화데레사 성녀 성극을 공연했는데, 약 3,000여명이 관람했고, 성당 앞에 장이 섰다고 한다. 공세리도 성극공연팀이 있었을 때가 선교가 잘 되었다고 한다.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 하는 문화행사나 교육행사나 신심행사를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아 지자체와 함께 진행하고, 천주교 중심의 내포의 역사와 핵심가치를 문화유산 활용사업으로 지속시켜 나간다면 가톨릭의 문화를 통해서 신자들의 긍지를 드높이고, 지역 주민들에게 천주교가 멀리 있는 종교가 아님을 인식시켜 주게 될 것이다.

국가는 ‘국가유산 문턱은 낮게, 프로그램 품격은 높게, 국민 행복은 크게’라는 전략으로, 닫히고 잠자고 있는 국가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매년 프로그램을 공모한다. 국가유산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역의 인적·물적자원과 결합하여 활용한 국가유산 향유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지정유산 및 등록문화유산’을 대상으로 사업을 공모하고 있다.

 

 

<b>2.1. </b><b>국가유산청 문화유산 활용사업 현황</b>

2022년을 기준으로 생생문화재(165건), 향교·서원 활용사업(107건), 문화재야행(45건),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43건), 고택·종갓집 사업(45건), 세계유산 활용(21건)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다양한 단체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공세리의 예를 들면, 지난 3년간 지역 단체에서 “생생문화재 사업”을 통해 성당에서 문화재활용사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대전교구도 기획팀을 만들어 프로그램 공모에 참례하면,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을 통해 성당과 성지, 신자들에게 큰 영적 이익을 주며 선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table>
<tbody>
<tr>
<td><b>구분</b></td>
<td><b>시범육성형</b></td>
<td><b>집중육성형</b></td>
<td><b>지속발전형</b></td>
</tr>
<tr>
<td>사업기간</td>
<td>1-2년차</td>
<td>3-5년차</td>
<td>6년차 이상</td>
</tr>
<tr>
<td>국비 지원금액</td>
<td>5천만원 이내</td>
<td>1억원 이내</td>
<td>1억 오천 이내</td>
</tr>
<tr>
<td>추가지원</td>
<td colspan="3">외국인 대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업은 지원금액의 10% 범위 내에서 예산 추가 지원(단, 신청금액 범위 내)</td>
</tr>
</tbody>
</table>
신청자격은 ‘공고일 현재 법령에 의해 설치·운영 중인 공모해당 분야의 법인 및 단체이며, 공고일 현재 공모분야에서 주된 활동을 하고, 문화유산(문화재) 관련 프로그램 운영경험이 있거나 사업수행이 가능한 인력과 역량 등을 갖춘 법인 또는 단체이다.

 

<b>① </b><b>1</b><b>차 서류평가 심사 기준</b>
<table>
<tbody>
<tr>
<td><b>평가</b>

<b>항목</b></td>
<td><b>항목</b></td>
<td><b>세부</b>

<b>점수</b></td>
<td><b>판단기준</b></td>
</tr>
<tr>
<td rowspan="2"><b>사업</b>

<b>계획의</b>

<b>충실성</b>

<b>(30)</b></td>
<td>계획의

적합성</td>
<td>15</td>
<td>사업계획이 구체적이고 충실한가?

(프로그램 시기, 수혜 대상 적절성, 횟수, 예산 등)

해당 국가유산 활용에 대한 이해 및 기획의도는 적절한가?</td>
</tr>
<tr>
<td>콘텐츠

경쟁력</td>
<td>15</td>
<td>해당 국가유산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이는가?

수혜대상에 부합하는 국가유산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는가?

유사 프로그램과 차별적인가?</td>
</tr>
<tr>
<td rowspan="2"><b>사업</b>

<b>운영</b>

<b>역량</b>

<b>(40)</b></td>
<td>사업수행

역량</td>
<td>20</td>
<td>해당 지자체는 추진의지가 높은가?

수행단체는 추진역랑(전문성, 인력)을 갖추었는가?

프로그램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td>
</tr>
<tr>
<td>사업관리</td>
<td>20</td>
<td>홍보의 타깃이나 추진의지가 높은가?

지역주민 참여를 위한 방안은 갖추었는가?

안전관리를 위한 계획은 적절한가?</td>
</tr>
<tr>
<td><b>지속 </b>

<b>가능성</b>

<b>(30)</b></td>
<td>기대효과</td>
<td>30</td>
<td>프로그램은 국가유산 향유에 기여하는가?

프로그램은 지속발전 가능성이 있는가?

계획을 통해 지역 활성화를 가져오는가?</td>
</tr>
<tr>
<td><b>가산점</b>

<b>(5)</b></td>
<td>관내업체</td>
<td>5</td>
<td>관내를 소재지로 둔 업체인가?</td>
</tr>
</tbody>
</table>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지자체에 보고하면 지자체에서는 전문가 3명 이내로 구성되어 종합 검토하여 충남도와 국가유산청으로 송부하게 된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반드시 소유자(관리자)의 장소 사용 확약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당과 가톨릭 교회내의 문화유산 시설에 대한 계획서를 다른 단체에서 선점할 수 없다.

가톨릭은 문화와 예술의 영감을 세상에 불어넣고 있고, 가톨릭에서 행하던 것들을 지자체에서 흡수한 경우도 있다. 2014년부터 합덕성당에서는 성체거동을 거행할 때 지역 풍물패들을 모아 풍물대회를 했고, 성체거동 행렬 때 길놀이를 맡겼다. 그 후 ‘기지시 줄다리기’에서도 풍물대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성체거동을 할 때 지역의 종교와 전통문화 계승자들이 모여 함께 일치와 화합의 음악회를 했는데, 이것이 당진시에서는 매년 음악회로 지속되고 있다. 가톨릭과 다른 단체의 특징 중 하나는 가톨릭은 특정 문화행사가 지속되다가 단절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반면, 지자체나 다른 단체들은 지속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데 있다. 그래서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지속성’이다.

 

<b>② </b><b>대전교구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생문화사업 현황 </b>

2021년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 다양한 단체가 지자체와 협력하여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생생문화사업을 펼치고 있다. 포구나 성벽, 인물이나 자연환경 등을 활용하여 문화사업을 펼치면서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충족시키고 있다. 공세리 성당에서도 문화상상 연구소에서 “둘러보‘공’ 놀아보‘세’”라는 사업명을 가지고 22년부터 생생문화사업을 진행했다. ‘공세 곶창지와 성당’을 주제로 하여 3년 연속 사업을 진행했다.
<table>
<tbody>
<tr>
<td><b>지역</b></td>
<td><b>사업명</b></td>
</tr>
<tr>
<td rowspan="2">논산시</td>
<td>옛 강경포구의 영광을 지현하다.</td>
</tr>
<tr>
<td>三代가 함께하는 종학당 삼도락(三道樂)</td>
</tr>
<tr>
<td rowspan="2">당진시</td>
<td>흥겨운 줄난장, 생생하게 즐기자</td>
</tr>
<tr>
<td>면천읍성 360도 투어</td>
</tr>
<tr>
<td rowspan="2">금산군</td>
<td>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순례길 따라 걷기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진산 성지성당 탐방)</td>
</tr>
<tr>
<td>어기여차 우여차! 농바우를 끄시세</td>
</tr>
<tr>
<td>서천군</td>
<td>모여봐요 동백의 숲!</td>
</tr>
<tr>
<td>청양군</td>
<td>위기의 조선, 그리고 최익현</td>
</tr>
<tr>
<td>예산군</td>
<td>칭찬받는 황새 만들기

룰루랄라♪ 충의사에서 놀아보자!</td>
</tr>
<tr>
<td>태안군</td>
<td>2021년 수군과 함께 안흥진성을 보고! 느끼고! 즐기자</td>
</tr>
<tr>
<td>홍성군</td>
<td>결성을 사수하라</td>
</tr>
<tr>
<td rowspan="2">부여군</td>
<td>동헌에서 피는 문화향기</td>
</tr>
<tr>
<td>생생와박사! 정암리 와요(瓦窯)</td>
</tr>
<tr>
<td>천안시</td>
<td>山溜穿石! 그래 石吾처럼~</td>
</tr>
<tr>
<td>공주시</td>
<td>공주 문화재에서 만나는 대한민국의 근대!</td>
</tr>
<tr>
<td>보령시</td>
<td>충청수영성, 푸른 바다의 전설</td>
</tr>
<tr>
<td rowspan="2">아산시</td>
<td>다시 생각해보는 임진왜란</td>
</tr>
<tr>
<td>온주아문 秀樂하다!</td>
</tr>
<tr>
<td>서산시</td>
<td>성벽에 새긴 역사</td>
</tr>
</tbody>
</table>
 

<b>2.2. 2022~2024</b><b>년에 공세리 성당에서 이루어진 생생문화사업</b>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진행된 ‘문화상상 연구소’의 “둘러보‘공’ 놀아보‘세’”라는 사업은 교회가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문화상상 연구소’는 ‘공세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는 종교시설이고 단순한 아름다운 사진 명소’라고 생각과 공세리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곶창지가 아산을 비롯한 충청도 일대의 세곡이 모이는 장소이며, 보관하는 세곡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은 곳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부각되지 않고 있음에 바탕을 두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b>① </b><b>공세리 성당 스탬프 투어 </b>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박물관인공세리의 가치를 느껴보는 프로그램으로 공세리성당과 이명래 고약이 생겨난 일화를 탐구하고 스탬프를 찍으며 기억하는 투어. 참자자에게 공세리 일대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교육한다.

 

<b>② </b><b>내 손안의 이명래 고약</b>

이명래 고약의 발원지와 그 일화를 소개하고 이에 맞는 체험 활동으로 이명래 고약이 드비즈 신부님에 의해 탄생한 스토리와 이명래 고약의 탄생 비화를 립밤 만들기를 통해 교육하며 체험할 수 있게 한다.

 

<b>③ </b><b>공세곶고지 탐구생활</b>

공세곶고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교육으로 조선시대 세금이 쌀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쌀을 이용한 미니 계량 체험 프로그램으로 홉, 되를 이용한 계량 체험을 통해 조선시대의 부피, 무게를 재는 단위에 대한 교육이다.

 

<b>④ </b><b>조운선 미니게임</b>

잠가자가 직접 준비한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나만의 조운선 만들기를 진행한다. 공진창에서 서해, 강화도를 지나 한양의 경창까지 이동하는 조운선의 항해 경로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 후, 바람과 암초 등 세곡을 운반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을 추가하여 재미요소와 함께 역사적 사실을 전단한다. 경주가 진행될 때 실제 세곡을 운반하던 것과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추가하여 게임과 설명이 함께 진행되는 형태로 구성된다.

 

<b>⑤ </b><b>공세리 달빛 야행</b>

공세리 스탬프 투어, 공세리 사진관, 업사이클링 조명 만들기, 공세리 소풍, 공세리 한마당의 큰 주제로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공세리 사진관’은 공세리 일원에 조명과 포토존을 설치하여 사진 촬영 스팟을 설정하고, 자유롭게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하며, 촬영된 사진은 인화해서 액자에 담아 제공한다. ‘업사이클링 조명 만들기’는 유리병을 활용한 조명 만들기 체험으로, 체험을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의 의미와 공세리 성당의 고딕 양식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 ‘공세리 소풍’은 공세곶고지와 공세리성당에 관련된 다양힌 이야기를 레시피북 형태로 소품 바구니와 함께 제공한다. 소풍 바구니 구성품은 김밥, 샌드위치 등 저녁식사 대용으로 충분한 먹거리와 함께 제공한다. ‘공세리 한마당’은 가족과 함께 하는 레크레이션, 공연, 빔프로젝터를 통한 참가자들의 사진 콘테스트 등 흥겨운 시간 안에서 공세리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b>⑥ </b><b>공세리 유리 공방</b>

‘업사이클링 유리공예 체험, 기후변화와 재활용 배우기, 둘러보공 공세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업사이클링 유리공예 체험은 폐유리 조각을 활용한 업사이클링 캔들 홀더를제작하고, 제험을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의 의미를 배울 수 있도록 구성했다. 기후변화와 재활용 배우기는 기후변화에 따른 우리의 생활 모습 변화와 인식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과 재활용,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노력과 방안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둘러보공 공세리’는 공세리 성당의 역사와 성당의 건축양식에 대한 교유으로 성당이 가지는 의미와 역사를 배우고 체험활동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상상연구소에서는 공세리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공세리 워크북’, ‘공세리 기념 배지’, ‘수채화 키트’, 창문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여 보급하였고, 야외무대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공세리에서 이루어진 생생문화사업은 인터넷 신청을 통해서 각지에서 찾아온 부모와 자녀들이었다. 천주교 신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당을 처음 와 보는 이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프로그램 진행을 통해 공세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공세리 성당이 신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생생문화사업은 교회가 세상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찾아오는 이들만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올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고,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가톨릭의 문화와 전통,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전해 주며 그 안에 가톨릭 신앙을 담아 전해 줄 수 있다. 찾아오게 만드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사명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b>2.3. </b><b>대전교구의 국가 유산 활용</b>

내포지역은 다양한 천주교 국가유산을 품고 있고, 대부분은 성지로 선포되어 수많은 순례객들의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다.
<table>
<tbody>
<tr>
<td><b>지정연도</b></td>
<td><b>국가유산 명칭</b></td>
<td><b>형태</b></td>
<td><b>관리단체</b></td>
</tr>
<tr>
<td rowspan="4">1998.7.25</td>
<td>공주 중동성당</td>
<td>성당</td>
<td rowspan="4">(재)대전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td>
</tr>
<tr>
<td>부여 금사리성당</td>
<td>성당</td>
</tr>
<tr>
<td>아산 공세리성당</td>
<td>성당</td>
</tr>
<tr>
<td>당진 합덕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01.6.27</td>
<td>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td>
<td>성당</td>
<td>거룩한말씀의 수녀회</td>
</tr>
<tr>
<td>2004.4.10</td>
<td>예산성당</td>
<td>성당</td>
<td rowspan="4">(재)대전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td>
</tr>
<tr>
<td>2007.4.30</td>
<td>서산 동문동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07.7.3</td>
<td>서산 상홍리 공소</td>
<td>공소</td>
</tr>
<tr>
<td rowspan="2">2008.4.10</td>
<td>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td>
<td>교우촌</td>
</tr>
<tr>
<td>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td>
<td>수목</td>
<td>서산시</td>
</tr>
<tr>
<td rowspan="3">2008.12.22</td>
<td>당진 신리 다블뤼주교 유적지</td>
<td>유적지</td>
<td rowspan="8">(재)대전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td>
</tr>
<tr>
<td>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td>
<td>생가터</td>
</tr>
<tr>
<td>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td>
<td>순교터</td>
</tr>
<tr>
<td>2013.2.12</td>
<td>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td>
<td>순교터</td>
</tr>
<tr>
<td>2014.9.26</td>
<td>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td>
<td>기념관</td>
</tr>
<tr>
<td>2014.10.30</td>
<td>대전 대흥동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15.8.25</td>
<td>강경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17.5.29</td>
<td>천주교 진산성지성당</td>
<td>성당</td>
</tr>
</tbody>
</table>
현재, 많은 성지나 성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사와 성사, 십자가의 길, 박물관 관람, 도보순례, 성지 안내, 개인기도 등이다. 성지나 성당별로 지자체와 연계하여 음악회나 전시회, 축제 등이다.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부족한 편이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도 없는 실정이다. 본당과 함께 있는 국가유산은 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신자가 없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성지는 프로그램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ol>
 	<li><b> </b><b>내포의 천주교 국가유산 활용을 위한 방안</b></li>
</ol>
교회의 국가유산들에 대한 공간과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역사적 가치 안에서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이 핵심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교육과 신앙문화를 체험하게 한다면 다음 세대로 초대 교회가 지녔던 그 신앙을 보존하며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게 될 것이다.

 

<b>3.1. </b><b>가치 알기 및 브랜드화 </b>

2024년 현재, 공세리를 찾는 이들 중에는 많은 학술팀들이 있다. 성벽을 연구하는 이들과 유배문학을 연구하는 이들, 해양포럼을 하는 이들, 건축을 연구하는 이들, 기우제 등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공세리는 답사코스가 됐다. 공세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이다. 공세리 뿐만 아니라 모든 성당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모르는 가치를 연구자들은 알고 있을 수 있고, 교회가 힘들어하는 프로그램을 일반단체에서는 쉽게 진행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국가유산 활용프로그램을 하는 많은 단체가 저녁 행사를 ‘달빛야행’이라는 개념에 담아서 참석을 유도하고 있다. 교회가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순교자의 밤, 묵주기도의 밤, 성모의 밤’ 등은 천주교 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참례하겠지만 일반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가톨릭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그 행사를 통해서 비신자들도 신앙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프로그램 진행에 지역 주민들이나 비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예비신자 등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가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찾아오는 성당을 만든다면 교회도 충만해지고, 세상도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렇게 공간이 지닌 가치를 알고, 그 가치를 브랜드화시킨다면 그 브랜드를 찾아 자연스럽게 성당을 찾아오게 되고, 그 성당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상설화이다.

 

<b>3.2. </b><b>사단법인 설립</b>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을 위해서는 먼저 사단법인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인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그 법인을 통해 국가유산의 활용과 천주교의 무형문화유산을 등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인에는 국가유산을 담당하는 본당신부나 전담사제를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시키고, 책임과 부담은 줄여주고, 혜택만 받을 수 있도록 기획해야 한다. ‘시범육성형’은 사제의 임기와 관련이 없지만 ‘집중육성형과 지속발전형’은 사제의 임기가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한다. 국가유산을 담당하는 사제의 승인이 필요하고, 국가유산을 담당하는 사제가 거부하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설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프로그램의 지속성”이다.

 

<b>3.3. </b><b>생생문화재 공모사업</b>

법인 담당자가 협력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시범육성형과 집중육성형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지속발전형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내포교회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 있다. 공모사업을 통해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지속성을 가지며 성당과 성지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구내의 국가유산 10곳만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에 참여하게 된다면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이 커지게 된다.
<table>
<tbody>
<tr>
<td><b>대상</b></td>
<td><b>시범육성형 지원 예산</b><b>(</b><b>안</b><b>)</b></td>
<td><b>집중육성형 지원 예산</b><b>(</b><b>안</b><b>)</b></td>
<td><b>지속발전형 지원 예산</b><b>(</b><b>안</b><b>)</b></td>
</tr>
<tr>
<td>국가유산 10곳(예)</td>
<td>5천*10=5억</td>
<td>1억*10=10억</td>
<td>1억오천*10=15억</td>
</tr>
<tr>
<td>국가유산 16곳(예)</td>
<td>8억</td>
<td>16억</td>
<td>24억</td>
</tr>
</tbody>
</table>
교구는 국가유산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구를 지원한다. 국가유산의 활용을 통해 교구를 지원한다면 교구도 풍요로워지고 국가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성당과 성지들도 큰 도움을 받게 된다. 활용사업을 통해 성당과 성지를 알리고, 국가유산을 통해 신자들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며,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240년 이상 된 가톨릭 문화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한정된 문화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이다.

 

<b>3.4. </b><b>내포 교회가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문화재 활용 사업들</b>

<b>① </b><b>교구가 원하는 프로그램 진행</b>

교구는 국가유산을 품은 성당과 성지에 원하는 사목지침이 있고, 그 사목지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당연히 바랄 것이다. 담당 사제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교구가 제시하고, 교구의 의지가 담당 사제를 통해 국가유산의 활용사업으로 펼쳐진다면 교구민들에게도 큰 복이 된다. 교구는 성지나 성당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사목이 있다. 전체를 바라보며 교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도 교구장이 성당을 방문했을 때는 사진을 함께 찍고 싶어 하고, 싸인을 받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신자교육과 신심교육, 성소 개발을 위한 젊은이들과의 만남, 사목위원이나 구역의 봉사자들과의 만남 및 교육, 예비신자들과의 만남 등을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안에 교구의 사목방침을 프로그램으로 개발하여 진행한다면 국가유산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대전교구는 가톨릭 문화를 활짝 꽃피우는 교구가 될 것이다.

 

<b>② </b><b>공통된 프로그램 진행 및 프로그램 공모</b>

생생문화재 활용사업 법인에서 공통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것을 각 국가유산 성당이나 성지에서 일정을 바꾸어서 진행한다면, 부담 없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성모의 밤’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진행한다면 한쪽에서는 성모님에 대한 생애를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주고,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등을 성극으로 공연하며, 스템프 투어를 통해 성당과 성모님을 이해하게 하고, 참된 성모신심을 가르치며, 묵주 만들기나 팔찌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들의 적극성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저녁식사 대용으로 음식 만들기(떡, 김밥, 만두 등)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스텝의 운영은 법인에서 진행하고, 핵심적인 부분(예를 들면 성모의 밤 미사 주례)을 그곳 사제가 진행하고, 장소사용료까지 지급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성당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성극팀, 찬양팀, 프로그램 진행팀, 음향팀 등의 봉사자를 모으고,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하며 국가유산 활용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면 어느 순간 이 모든 팀들이 전문팀이 되고, 각 본당은 재정적 부담없이, 봉사자에 대한 부담없이 일정만 사전조율하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과 야간 조명, 음악회와 함께 하는 야행, 젊은이들을 위한 문학의 밤, 가을 축제, 성탄 축제, 교리축제, 성소 축제 등을 각 국가유산에 맞게 프로그램화하고, 법인에서 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국가유산을 품은 성당과 성지는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한 곳(국가유산)이라도 신청을 해서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소 개발 프로그램은 교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합덕본당의 신자들은 선조 순교자들의 정신을 물려받아, 신앙생활을 철저히 수행했으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사제직의 존귀함을 가르치면서 성소에 대해 권고하기도 했고, 가정에서는 함께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 예비신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방학 동안 본당의 신학생들이 미래의 사제라는 마음으로 존경과 맞갖은 예의로 품위를 높여 주었고 자녀들에게 그런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학생들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조심스럽게 처신하고자 했으며 긍지를 가졌다. 신학생에 대한 신자들의 예우와 신학생들의 성실한 자세는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신학교 입학을 동경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또 하나의 특기할만한 전통적 이벤트가 있었다. 그것은 신학생이 부제품 받을 계획이 있는 해 여름방학에 본당의 원로급 어른들과 부제, 신학생들 앞에서 강론 발표회를 하는 것이었다. 본당의 어른들은 신학생이 오랫동안 준비한 강론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경건한 자세로 열심히 경청하였다. 그것은 마치 대학원 강당에서 학위 수여 전 발표회(difense) 같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발표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면서 부제와 신학생들이 발표한 강론 내용과 발표 자세, 억양 등을 평가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마을의 어른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어린이로만 여겼던 그 신학생이 어느새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강론을 훌륭하게 잘했다고 흐뭇해하며 아들 신학생을 둔 부모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특히 사제성품을 받은 후 첫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의 부모가 누리는 기쁨과 영광은 뭇 신자들로부터 큰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성소가 많은 곳에서는 그 비결이 있었다. 그 비결이 전통이 되어 내려왔기 때문에, 그 문화를 접한 이들은 성소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된 것이다. 젊은이들을 불러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다른 이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하며,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젊은이들의 자기 개발과 인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성소에 대한 싹을 틔우게 하고, 열매 맺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합덕성당이나 솔뫼, 신리 등지에서 매년 지속적으로 행한다면 분명 교구의 성소는 풍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내포에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1785년에 벌써 여사울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신자가 생겨났다는 것은 이존창 루도비코가 복음 선포를 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이존창에게 가면 교리를 배울 수 있고, 원동지에게 가면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전주교구는 초남이에 교리당을 세워 유항검 아오스딩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는 내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여사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현재 공세리에는 다양한 교구의 본당의 예비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순례를 오고 있다. 그 이유는 예비신자들이 왔을 경우 그동안 배운 교리를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6개월 과정 안에서 예비자 교리를 시작한 이들이 처음으로 접해야 하는 곳이 여사울이고, 중간에 합덕과 공세리를 순례하여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되는지를 알게 하고, 세례 받기 전 해미나 갈매못, 황새바위 등을 순례하며 결심을 다지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신앙의 참된 가치를 직접 보고 배우며, 영세 후 냉담율도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견진교리를 받게 될 경우, 성령의 은사를 활성화시키는 방식을 삶으로 배울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 여사울이 된다면, 여사울은 이존창 루도비코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 앞으로 소환하게 될 것이다.

 

공통된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서는 프로그램 공모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별히 젊은 사제들에게 프로그램을 문의하게 된다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시될 것이고, 일반 신자들과 함께, 또한 해당 국가유산에서 신앙생활하는 이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많은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지속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b>③ </b><b>순교자들의 행적을 성극화하여 공연 </b>

내포는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장시키고, 순교로서 증거한 삶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내포다. 순례자들이 성지나 성당을 찾을 때, 그곳의 역사를 전시물이나 해설로 듣는 것이 아니라 성극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세리에서는 32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4가지 성극으로 만들어 순례 신청시 성극 공연을 원할 경우, 무료로 공연해 주고 있다. ‘순교자 박홍갑, 순교자 하 바르바라, 삼대의 순교(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종 필립보와 마리아의 순교’를 신자들과 후원자들로 구성된 아산연극단이 공연하고 있다. 또한 성모신심을 위해서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루르드의 성모마리아’도 공연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법인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면 각 성지와 성당에서 다양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순교자들의 생애를 성극으로 공연할 때, 순례자들과 성지나 성당을 찾는 이들은 가톨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다음 세대에도 내포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전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포는 도보순례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 공간은 없다. 산티아고 순례들에 들어선 이들은 오전에는 걷고, 오후에는 지역의 문화를 즐긴다. 내포 도보순례자들에게도 각 성지에서 성극을 공연해 주면, 도보순례의 피로를 풀고, 성지순례의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b>④ </b><b>스토리텔링을 담은 음악회 </b>

현재 많은 국가유산에서 봄·가을로 다양한 음악회를 하고 있다. 해미성지에서는 교황님 방한 10주년(2024년)을 맞이하여 열린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해미에 5,000명 이상이 모였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교팀이 운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5,000명 이상 모인 장소에서 레지오 단원이나 선교위원들을 통해 “천주교를 알려드리니다.”라는 작은 유인물이라도 나눠줬다면, 부채나 작은 기념품에 새겨 주었다면 참석자들이 천주교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유명 가수 때문에 그 저녁에 몰려왔지만, 그 기회를 통해서 교회는 선교의 장으로 탈바꿈시켰어야 했다. 사목에는 반드시 재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 재정을 성지나 본당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가는 국민의 문화향유권 충족을 위해서는 국가유산청을 통해 지원한다. 그것을 지원받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참석자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주고, 본연의 선교사명을 수행할 때, 문화재청과 교회는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음악회를 개최하면서 본당의 성가대로만 구성을 하면 참례자들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리 공모하여 지역의 참가자들을 모으고, 공연할 수 있는 실력있는 이들을 발굴하며, 인지도 있는 가수와 함께 스토리가 있는 음악회를 진행한다면 대화가 오가는 장, 역사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장, 신앙을 고백하는 장이 될 것이다.

 

<b>⑤ </b><b>제의 전시회를 통한 교회의 역사 알리기</b>

제의는 단순히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들의 거룩한 경배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하느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제의 전시회를 통해 하느님 백성은 거룩한 전례에 어떻게 참례해야 하는지, 제의를 입고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는 누구인지, 사제와 함께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제의 전시회를 통해 긴 시간 동안 성당에서 사목하신 사제들의 열정에 감사하는 계기와 젊은이들이 미래의 사제직을 꿈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모든 지체가 같은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임무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동안 입는 거룩한 옷에서도 그 차이가 드러난다. 거룩한 옷은 각 봉사자의 고유 임무를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또한 거룩한 행위를 아름답게 하는 데에도 이바지하는 것이 제의다. 사제, 부제, 평신도 봉사자들이 입는 옷은 거룩한 전례 안에서 거룩하게 드러나야 한다.

제의 전시회는 그 성당의 역사를 알려준다. 1대 신부부터 제의를 입고 복사들과 함께 행렬하며 제의의 의미와 그 신부님이 계셨을 때의 역사적 상황과 사목을 진행자가 이야기 해 준다. 공세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의 전시회는 신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역대 신부님들이 복사들과 행렬할 때, 진행자들은 신부님과 제의에 대해서 설명한다. 예를 들면 공세리 2대 4대 신부님이신 드비즈 신부님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b>드비즈 에밀리오 신부님</b><b>(2</b><b>대</b><b>, 4</b><b>대</b><b>) </b><b>행렬</b>

진행1: 공세리의 2대 신부님은 드비즈 에밀리오 신부님, 한국명 성일론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1894년 7월 5일, 조선으로 발령 받으시고 이렇게 당신의 감동을 드러내십니다.

<b>“</b><b>아름다운 땅 조선으로 가라고 나흘 전에 발령을 받았습니다</b><b>. </b><b>이 거룩한 땅 위에 일하며</b><b>, </b><b>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에 저의 땀을 섞게 되었습니다</b><b>. </b><b>하느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b><b>.” </b>

 

<b>행렬방식</b><b>: </b>드비즈 신부는 장백의와 백색제의를 입고 핼렬한다. 행렬은 복사 두명이 앞서 가고 세례 받을 가족이 따라가고, 그 뒤를 드비즈 신부가 따라간다. 군중은 본당에 부임하는 신부를 환영한다. 그렇게 행렬을 한 번 한 후에 다시 돌아서서 중간 즈음에 서서 드비즈 신부는 유아에게 물을 부으면서 세례를 거행한다. 드비즈 신부는 주전자를 들고 아이에게 물을 붓는 자세를 취한다.

 

진행2: 드비즈 신부님께서는 1895년 6월에 공세리에 부임하십니다. 간양골은 동학군에 의해 황폐화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초대 신부님이신 파스키에 신부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공세리에 10칸짜리 기와집 한 채를 계약해 놓았습니다.

 

<b>1895</b><b>년 </b><b>6</b><b>월 </b><b>10</b><b>일 드비즈 성 신부는 양촌본당 퀴를리에 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서울을 출발하여 걸매나루에 도착</b><b>, </b><b>걸매리 장 안드레아 신학생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b><b>9</b><b>시에 말을 타고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공세리에 도착하였다</b><b>. </b><b>드비즈 성 신부가 공세리에서 성당으로 사용할 집은 </b><b>10</b><b>칸 되는 기와집으로 지붕과 방</b><b>, </b><b>마루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습니다</b><b>. </b>

 

드비즈 신부님은 1896년 4월 21일 전국 사제가 함께 모여 거행된 피정을 마치면서 명동 교구청의 당가 신부로 전근 발령을 받게 됩니다.

 

<b>진행 </b><b>1: </b><b>제의설명</b><b>:</b>

제의는 서방 교회의 전례 의상으로 도입되면서 측면이 접어 포개진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부제는 사제가 제의의 측면을 접는 것을 거들었으며, 간혹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끈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13세기 초부터는 제의의 측면을 조금 짧게 하는 경향이 대두하였으며, 이는 15세기 복식을 설명하는 삽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세기와 그 다음 세기를 거치면서 제의는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형태를 취했습니다. 옷의 측면이 더는 발목까지 내려오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손목까지만 이르렀을 뿐이며, 접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제의는 백색제의입니다. 세례 성사의 상징과도 같이 백색 제의는 영광과 결백, 기쁨을 상징합니다.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많이 사용합니다. 대축일과 축일별로 보면 수난과 관련 있는 축일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축일,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기념일, 천사들 축일, 순교자가 아닌 성인들의 축일과 기념일,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6월 24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등의 미사 성제 때에 사용합니다.

 

(제의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의를 보여주며 포즈를 취하여 카메라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다.)</td>
</tr>
</tbody>
</table>
 

모든 본당의 역사를 제의 전시회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제의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이들이 제의를 직접 입어볼 수 있고, 역사를 들을 수 있으며,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성당의 신앙의 역사가 다음 세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되고, 신자들은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제의 전시회는 공세리에서는 신앙 역사의 자원화된 한 예이다.

 
<ol>
 	<li><b> </b><b>나가는 말</b></li>
</ol>
내포지역은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이고, 내포를 찾는 이들에게 죽은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박물관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대전교구는 16개의 국가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국가유산을 통하여 국민의 문화향유권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교회의 전통이 다음 세대에도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통합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통해 누구나 쉽게 내포의 박물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접한 자료를 통해 신앙을 키우고, 역사를 배우며, 가톨릭에 대해 호감을 갖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면에서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국사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내포교회에는 신앙유산을 다음세대에 전해주는데 큰 도움이 되는 계기이며, 가톨릭의 문화를 자원화하여 보편적인 문화 선교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지속시켜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09:55: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주교 조직 내부로 스며든 밀정 조화진(趙和鎭)]]></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4]]></link>
			<description><![CDATA[<b>정사박해 인물 </b><b>趙和鎭 </b><b>관련자료</b>

<b>국역 비변사등록 </b><b>167</b><b>책</b>

 

<b>제목 </b><b>: </b><b>景慕宮 </b><b>아래 </b><b>10</b><b>호 </b><b>民人 </b><b>등의 </b><b>上言 回啓</b><b>에 대한 </b><b>備邊司</b><b>의 </b><b>啓 </b>

연월일 : 정조 8년 1784년 10월 01일 (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전기생략 --

 

<b>원춘도 춘천</b><b>(</b><b>原春道春川</b><b>)</b>에 사는 <b>유학</b><b>(</b><b>幼學</b><b>) </b><b>조화진</b><b>(</b><b>趙和鎭</b><b>)</b>의 상언에 말하기를 ‘사들인 각종의 무명은 병신년(丙申年)에 산능도감(山陵都監)에 진배했고 나머지 무명은 또 경모궁 개건도감(景慕宮改建都監)에 진배했습니다. 무명 값을 내려줄 때 내도고인(內都庫人) 서득복(徐得福)등 11명이 주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값을 받아 갔는데 2천 1백여 냥이 되도록 많습니다. 도감(都監)에 호소했더니 서득복 등이 도감에서 법사(法司)에 공문을 보내 독봉(督捧)하도록 했다는데 종내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또 <b>격쟁</b><b>(</b><b>擊錚</b><b>)</b>을 했고 저들은 값을 받아 간 뒤 전량을 상납한 것으로 법사(法司)에서 처리했으나 저들이 또 몰래 받아 간 것입니다. 속히 호조에서 자세히 조사해 판결을 내려 지급하고 서득복 등의 죄상에 엄한 형벌을 가하고 멀리 귀양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 무명 값을 도고(都庫) 주인에게 잃은 것이 과연 저들의 말과 같다면 그것을 추심하고자 함은 이상한 일도 아닌데 이면의 사실을 본사에서 조사해 밝혀내서 어려움이 있으니 호조에서 자세히 밝혀 결정 처리하고 다시 분분하게 정소(呈訴)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이하생략 --

 

 

 

 

 

 

<b>#</b><b>고려할 사항 </b><b>: </b><b>본자료의 인물이 정사박해 당시 밀정 조화진</b><b>(</b><b>趙和鎭</b><b>)</b><b>의 동일 인물인지 확인이 필요함</b><b>, </b><b>동일인이라면 출신지역이 춘천지역인물로 나와 있기에 자료로 올렸음</b><b>,</b>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b>◇</b><b>천주교 조직 내부로 스며든 밀정 조화진</b><b>(</b><b>趙和鎭</b><b>)</b>

 

1798년 12월 1일 정충달(鄭忠達)을 충청병사에 임명한 당일의 일이다. 정조가 하직 인사 차 들린 정충달에게 고개를 들게 했다. 고개를 들자 곁에 서 있던 한 사내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했다.

“두 번 세 번 자세히 보아, 훗날 만나더라도 그의 얼굴을 꼭 기억하도록 하라.” 정충달이 충청도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b>조화진</b><b>(</b><b>趙和鎭</b><b>)</b><b>이었다</b><b>. </b><b>그는 청교</b><b>(</b><b>靑橋</b><b>) </b><b>조씨의 서출</b><b>(</b><b>庶出</b><b>)</b><b>로</b><b>, </b>정조에게서 <b>천주교도 색출의 밀명을 받고 내려온 밀정이었다</b><b>.</b>

그는 이후 붓 매는 필공(筆工)이나 행상 행세를 하며 이 지역 천주교도의 집을 들락거렸다. 손으로 성호를 긋고 입으로는 기도문을 외우면서 천주교도인 체했다.

가는 곳마다 묵어 자면서 교인들의 실태를 지역별로 자세히 기록해, 연락책이었던 <b>음성 현감 노숙</b><b>(</b><b>盧橚</b><b>)</b><b>에게 </b>비밀문서로 보고했다.

노숙은 조화진의 보고에 따라 천주교도를 체포해 가면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화진도 함께 붙들어 갔다가 뒤로 놓아 주는 술수를 부렸다. 이 때문에 천주교도들은 조화진이 밀고자란 사실을 한동안 꿈에도 몰랐다.

1798년과 1799년 두 해 사이에만 조화진의 밀고로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 교회 측에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조화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〇 풍양조씨(豊穰趙氏) 4파인 남원공파(南原公派)에서 다시 한평군파(漢平君派 : 이른바 노론집)와 <b>청교파</b><b>(</b><b>靑橋派 </b><b>: </b><b>이른바 소론집</b><b>)</b>로 나누어지는데, 조화진(趙和鎭)은 청교파이다. <b>한평군파</b>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조만영의 딸(<b>신정황후</b>)이 문조(익종)와 결혼을 하고,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년)에는 <b>조병현</b><b>(</b><b>趙秉鉉</b><b>)</b><b>이 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b><b>(</b><b>己亥敎難</b><b>)</b><b>을 일으키기도 하였다</b><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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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가톨릭</b><b>/</b><b>한국 천주교회사</b>

 

[스크랩] 정조말년의 박해 -7

 

<b>4) </b><b>배</b><b>(</b><b>裵</b><b>)</b><b>「</b><b>관겸</b><b>」</b><b>프란치스꼬의 순교</b>

 

※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와 그의 세 친구 다음으로, 같은 시기(時期)에 같은 도(道)에서 고통(苦痛)을 당한 다른 순교자(殉敎者) 한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다.

 

① 배(裵)「관겸」프란치스꼬는 당진(唐津) 고을 진목 마을 출신으로, 이벽(李檗)이 천주교를 전하자마자 입교(入敎)하였다. 1791년에 첫 번째로 체포(逮捕)되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관장(官長) 앞에서 배교(背敎)하는 나약(懦弱)함을 보였었다(본고 50쪽 참조). 그러나 이내 진실히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② 그는 자기 고을을 떠날 수밖에 없어, 처음에는 서산(瑞山) 고을로 갔다가 그 후 다른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같이, 면천(沔川) 고을 양제(揚堤)로 가서 자리를 잡았으며, 1898년 그곳에 신부(神父)를 모실 희망(希望)으로, 그와 그의 동료들이 강당(講堂)을 한 채 마련하였었다.

③ 얼마 후에 <b>조화진</b><b>(</b><b>趙和鎭</b><b>)</b><b>이라는 배교자</b><b>(</b><b>背敎者</b><b>)</b><b>가 </b>본관(本官)에게 그들을 밀고 하고, 직접 포졸(捕卒)들을 데리고 동네로 왔었다. 배(裵)「관겸」프란치스꼬는 10월 3일에 체포(逮捕)되어 홍주(洪州)로 압송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lt;다움 인터넷&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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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한국사</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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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天主敎의 儒敎社會에의 挑戰</li>
 	<li>천주교 박해(天主敎 迫害)</li>
</ol>
(4) 종교(宗敎)와 정치(政治)의 혼동(混同)

기미(己未)년에는 충청도(忠淸道)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신부(神父:주문보)의 발자취를 알아내고자 <b>조화진</b><b>(</b><b>趙和鎭</b><b>)</b>이란 자를 시켜서 겉으로 믿는 체하고 충청도(忠淸道) 일대의 실정을 엿보게 한 때문이다. 이해 겨울에는 청주(淸州)에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충청도(忠淸道)의 교우(敎友)들이 거의 다 희생되었다.註 036

 

&lt;註) 036 : 黃嗣永帛書 6行·14行

<b>&lt;63&gt; </b><b>밀사와 밀정</b><b>, </b><b>그리고 명도회 </b>

<b>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b>

 

<b>◇</b><b>천주교 조직 내부로 스며든 밀정 조화진</b>

 

북경으로 밀사가 오가는 사이에 정조는 주문모 신부의 조속한 검거를 위해 장용영(壯勇營)의 별군직(別軍職)을 시켜 몰래 기찰(機察)을 강화했다. 특별히 천주교의 위세가 대단했던 충청도 내포 인근의 검속을 강화했다.

 

1798년 12월 1일 정충달(鄭忠達)을 충청병사에 임명한 당일의 일이다. 정조가 하직 인사 차 들린 정충달에게 고개를 들게 했다. 고개를 들자 곁에 서 있던 한 사내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했다. “두 번 세 번 자세히 보아, 훗날 만나더라도 그의 얼굴을 꼭 기억하도록 하라.” 정충달이 충청도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조화진(趙和鎭)이었다. 그는 청교(靑橋) 조씨의 서출(庶出)로, 정조에게서 천주교도 색출의 밀명을 받고 내려온 밀정이었다.

 

그는 이후 붓 매는 필공(筆工)이나 행상 행세를 하며 이 지역 천주교도의 집을 들락거렸다. 손으로 성호를 긋고 입으로는 기도문을 외우면서 천주교도인 체했다. 가는 곳마다 묵어 자면서 교인들의 실태를 지역별로 자세히 기록해, 연락책이었던 음성 현감 노숙(盧橚)에게 비밀문서로 보고했다. 노숙은 조화진의 보고에 따라 천주교도를 체포해 가면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화진도 함께 붙들어 갔다가 뒤로 놓아 주는 술수를 부렸다. 이 때문에 천주교도들은 조화진이 밀고자란 사실을 한동안 꿈에도 몰랐다.

 

1798년과 1799년 두 해 사이에만 조화진의 밀고로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 교회 측에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조화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b>는 결국 감옥에서 스이에 </b><b>1801</b><b>년 신유사옥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조화진을 물고 들어가</b><b>, </b><b>그 또한 여러 달을 감옥에 갇혀 형벌을 받게 되었다</b><b>. </b><b>조정에서는 밀정인 그의 존재를 전혀 몰랐으므로 달리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b><b>. </b><b>그스로 목을 달아 자살했다</b><b>. ‘</b><b>벽위편</b><b>’</b><b>에 그 내용이 자세하다</b><b>.</b>

 

‘사암연보’에는 1799년 10월에 그 조화진이 다산 자신과 이가환을 무고한 일을 적었다. 충청감사 이태영(李泰永)이 비밀 공문으로 조화진의 무고 편지를 보고했다. 정조는 자신이 파견한 조화진의 보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산과 이가환에 대한 내용을 무고로 규정하고 그 편지를 대신들에게 회람시켰다. 편지 중에는 과거 주문모 신부를 밀고했던 한영익 부자가 천주교 신자가 된 이야기까지 들어있었다. 정조는 주문모를 밀고했던 한영익이 천주교 신자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무고임이 증명된다며 불똥이 다산에게 튀는 것을 한 번 더 막아주었다.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09:53: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연일정씨(延日鄭氏) 정충달(鄭忠達)과 정휘량(鄭彙良--&gt;장인 趙泰萬) 가족관계 &lt;萬家譜&gt;]]></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3]]></link>
			<description><![CDATA[<b>연일정씨</b><b>(</b><b>延日鄭氏</b><b>) </b><b>정충달</b><b>(</b><b>鄭忠達</b><b>)</b><b>과 정휘량</b><b>(</b><b>鄭彙良</b><b>--&gt;</b><b>장인 </b><b>趙泰萬</b><b>) </b><b>가족관계 </b><b>&lt;</b><b>萬家譜</b><b>&gt;</b>

<b>&lt;</b><b>정충달의 사촌 정휘량</b><b>&gt;</b>

<b>정휘량</b><b>(</b><b>鄭彙良</b><b>)</b> : 영조의 부마인 <b>정치달</b><b>(</b><b>鄭致達</b><b>)</b><b>의 숙부</b>로 사도세자 죽임에 앞장선 인물이며, 정치달은 정휘량과 가까운 조카항렬로 정휘량의 종조부 정종빈(鄭宗賓)의 손자이며 <b>정충달</b><b>(</b><b>鄭忠達</b><b>)</b><b>과 정치달</b><b>(</b><b>鄭致達</b><b>)</b>과는 사촌간이다 특히, 병사 <b>정충달</b><b>(</b><b>鄭忠達</b><b>)</b>은 정조가 가짜 천주교 신자인 밀정 조화진(趙和鎭)을 소개받고 조화진으로 하여금 천주교신자와 접촉하여 천주교 신자의 정보를 수집하여 밀고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리고 정휘량(鄭彙良)의 장인 조태만(趙泰萬)의 사촌 형 조태채(趙泰采)는 노론의 4대신으로 영조를 세제책봉에 앞장선 인물이다. 조태채의 후손들이 서천에 정착하여 살았다. 조태채의 묘소가 서천군 서천읍 구암리에 있다. <b>정조가 박종악</b><b>(</b><b>朴宗岳</b><b>)</b><b>을 충청관찰사로 보내고</b> 천주교신자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비밀로 주고받았던 수기(隨記)가 있다. 박종악(朴宗岳)은 조태채 후손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외조부이다. 조두순(趙斗淳)도 박해에 앞장선 인물이다.

<b>양주조씨</b><b>(</b><b>楊州趙氏</b><b>) </b><b>조태채</b><b>(</b><b>趙泰采</b><b>) </b><b>후손 영의정 조두순</b><b>(</b><b>趙斗淳</b><b>)</b><b>의 외조부 박종악</b><b>(</b><b>朴宗岳</b><b>) </b><b>가족관계 </b><b>&lt;</b><b>萬家譜</b><b>&gt;</b>

 

조태채(趙泰采) 증손자 <b>조정철</b><b>(</b><b>趙貞喆</b><b>)</b>은 정조 암살미수사건의 주모자 <b>홍지해</b><b>(</b><b>洪趾海</b><b>)</b><b>의 사위</b>로 사건에 연루되어 27년간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정조의 죽음으로 순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재집권하자 풀려나 제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인물]]></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09:50: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Re:풍산 홍씨 족보이우경(李羽慶)의 사위는 豊山洪氏 홍지영(洪芝榮) &lt;신원속보&gt;, 홍지영의 첫 부인은 이씨]]></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2]]></link>
			<description><![CDATA[<b>신유박해로 삭제된 홍지영</b><b>(</b><b>洪芝榮</b><b>)</b><b>의 가족관계 복원에 대하여</b>

 

 
<ol>
 	<li><b> </b><b>삭제된 홍지영</b><b>(</b><b>洪芝榮</b><b>)</b><b>의 가족관계 족보 복원실태</b></li>
</ol>
◯ 1801년 신유박해로 홍지영(洪芝榮)가족의 당시 족보는 박해로 순교한 홍지영의 재취 부인 강완숙(姜完淑:골롬바)과 전처 아들 홍필주(洪弼周:필립보), 딸 홍순희(洪順喜:루시아)가 순교를 하였다. 이러한 사건으로 관련된 가족관계의 족보는 삭제된 상태이다.

◯. 그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이 홍지영(洪芝榮)의 가족관계를 각종 사건의 심문관정의 공초와 처분결과 등 각종 사건의 자료를 통하여 밝혀져 있다. 특히<b>&lt;</b><b>한양대 정민 교수</b><b>&gt;</b>가 1768년도 풍산홍씨 족보를 통하여 복원하였지만, 홍지영(洪芝榮)의 첫째 부인은 밝히지 못했다고 한다.

 
<ol>
 	<li><b> </b><b>홍지영</b><b>(</b><b>洪芝榮</b><b>)</b><b>의 첫째 부인의 누구일까</b><b>?</b></li>
</ol>
◯ 필자는 지역의 향토사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뜻밖에 홍지영(洪芝榮) 부인과 관련된 가족관계인 전주이씨 담양군파 간옹(看翁) 이헌경(李憲慶) 묘지명에서 사위 홍지영(洪芝榮)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홍지영(洪芝榮)의 첫째 부인은 보령군 청라면 살았던 이우경(李羽慶1724〜1813)의 3째 막내딸로 확인되었다. 이우경(李羽慶)은 전주이씨 담양군파 후손이라 삭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lt;신원속보&gt;

 
<ol>
 	<li><b> </b><b>이우경</b><b>(</b><b>李羽慶</b><b>)</b><b>과 석북 신광수</b><b>(</b><b>申光洙</b><b>)</b><b>와 가족관계</b></li>
</ol>
◯ 이우경(李羽慶)과 석북 신광수(申光洙1712~177)는 이복동생 진택 신광하(申光河),부용당신씨(芙蓉堂申氏)의 외사촌간이 된다. 이러한 내.외사촌간으로 서로간 왕래하며 절친하게 지냈다.

◯ 신광수와 동생 신광하, 신부용당의 고향은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대등리(숭문동)이다. 숭문동은 1791년 진산사건으로 인하여 권상연(權尙然:야고보1751~1791)이 숭문동으로 피하였던 곳이며, 윤지충(尹持忠:바오로1759-1791)은 광천(廣川)피신하였던 곳이다. 광천은 이우경(李羽慶)의 고향 청라면과 가까운 곳이다.

 

부용당신씨(芙蓉堂申氏)가족은 생계가 어려워 외가의 농토를 얻어 보령 신성(新城)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윤지충(尹持忠)이 광천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ol>
 	<li><b> </b><b>석북 신광수</b><b>(</b><b>申光洙</b><b>)</b><b>가 홍지영</b><b>(</b><b>洪芝榮</b><b>) </b><b>첫째 부인에게 보낸 한글편지 발견</b></li>
</ol>
◯ 석북 신광수가 홍지영의 첫째 부인, 즉 외사촌 조카딸에게 한글편지가 석북 신광수(申光洙) 고령신씨 종중에서 소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글편지는 1773년 12월 15일자로 홍지영(洪芝榮)의 첫째 아들 홍필주(洪弼周1773〜1801)가 태어난 년도이다. 한글편지 봉투의 수신자는 &lt;<b>홍서방댁</b>&gt;이라 하고 글내용도 한글편지 이다. 한글편지는 주로 부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아 홍지영(洪芝榮)의 첫째 부인인 조카딸에게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1768년 풍산홍씨 족보.(최휘철 선생 편집본에 필자가 관련 내용을 추가(초록색 부분)해

정리한 것임). <b>&lt;</b><b>자료</b><b>: </b><b>정민 한양대교수</b><b>&gt;</b>

<b>전주이씨 담양군파 이우경</b><b>(</b><b>李羽慶</b><b>)</b><b>의 부친 이제암</b><b>(</b><b>李齊嵒</b><b>)</b>

<b>-</b><b>이천령</b><b>(</b><b>李千齡</b><b>)</b><b>의 사위는 석북 </b><b>申光洙 </b><b>부친 신호</b><b>(</b><b>申澔</b><b>)</b><b>며</b><b>, </b><b>신광하</b><b>(</b><b>申光河</b><b>)</b><b>와 부용당신씨의 외조부는 </b><b>李千齡</b><b>, </b><b>이우경</b><b>(</b><b>李羽慶</b><b>)</b><b>은 석북 신광수</b><b>, </b><b>이복동생 신광하</b><b>, </b><b>신부용당의 외사촌이다</b><b>. </b><b>이우경</b><b>(</b><b>李羽慶</b><b>)</b><b>의 부친은 이제암</b><b>(</b><b>李齊嵒</b><b>)</b><b>이다</b><b>. </b>

<b>&lt;</b><b>신원속보</b><b>&gt;</b>

 

 

 

<b>이우경</b><b>(</b><b>李羽慶</b><b>)</b><b>의 사위는 </b><b>豊山洪氏 </b><b>홍지영</b><b>(</b><b>洪芝榮</b><b>) &lt;</b><b>신원속보</b><b>&gt;</b>

<b>豊山洪</b><b>씨 홍지영</b><b>(</b><b>洪芝榮</b><b>)</b><b>의 처 </b><b>李氏</b><b>부인</b><b>(</b><b>李羽慶</b><b>의 딸</b><b>)</b><b>에게 보낸 석북 신광수</b><b>(</b><b>申光洙</b><b>) </b><b>한글편지</b>

 

 

 

<b>艮翁</b><b>(</b><b>간옹 </b><b>: </b><b>李獻慶</b><b>-</b><b>이헌경</b><b>)</b><b>先生文集卷之十六 </b><b>/ </b><b>誌</b>

 

<b>崇祿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捴府都捴管李公墓誌銘</b> a234_329a 편목색인

 

獻慶事我族父知事公自公中身。距今五十年。竊瞷公處而在鄕黨。出而游太學。仕而接僚寀蒞郡縣。一辭稱之曰吉士善人。人人亦皆曰某愛我。無或有怨惡之人。或以是疑公之一於和。而徐考其行則與人羣居。輔友以仁。喜䂓人過失。居官不廢刑威。不悅人而人悅之者何故。曰惟誠而已。孟子稱周有二大老。 a234_329b而又以德一齒一爵一爲達尊三。今公以崇品之卿九耋之年。至誠之道。服人心又如此。宜其爲一國之大老。而數十年退居湖海。以花竹泉石自娛。其操介如。其聞煇如。歿之日。遠近吊者哭聲皆哀。

---중략 --

庭無間言。公嘗曰吾八年游學在外。不以寡嫂與家事爲念者。賴有內助之賢。有三子。凝慶進士。申氏出也。羽慶，承慶。承慶出後族父齊喬。凝慶有三女。適李宗溟，李柱溟進士，沈浹。<b>羽慶有三女二子</b><b>。</b><b>女適洪樂衡</b><b>，</b><b>金瑞鎭</b><b>，</b><b>洪芝榮</b>。子廷翼，廷翬。廷翬爲凝慶後。承慶有二子一女幼。內外曾孫不錄。銘曰。

a234_331b肅英在宥。元氣厖厚。鍾毓薰龢。邦多黃耈。雖則多矣。孰德之茂。孰秩之高。似公兼有。翼翼鮐背。上殿趍走。 王多寵錫。金犀芾綉。宜爲蓍蔡。訊失若否。公心西顧。公馬南首。獨行考槃。巖卧泉潄。雖有經緯。蛹不見紬。化行家鄕。州縣與究。是亦爲政。擧隅知袤。存爲衆愛。歿無人咎。和俗弗隨。孰察所守。我銘不多。尙眎來後。

 

<b>【</b><b>이우경</b><b>(</b><b>李羽慶</b><b>1724</b><b>〜</b><b>1813)</b><b>】 </b>

◯ 이우경의 조부는 이천령(李千齡), 부친은 이제암(李齊嵒)로 전주이씨로 한산군수를 역임한 파곡 이성중(李誠中)의 후손이다. 이천령은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이복동생 진택 신광하(申光河)와 부용당 신씨(芙蓉堂申氏)의 외조부이다. 고향은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이다.

◯ 이우경과 석북 신광수, 진택 신광하, 부용당신씨와 내, 외사촌간으로. 외가인 청라면 의평리에 자주 찾아가 친하게 지냈다.

◯ 이우경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딸은 홍낙형(洪樂衡)에게, 둘째는 김서진(金瑞鎭), 막내딸은 홍지영(洪芝榮)에게 시집을 갔다는 사실을 간옹 이헌경(李憲慶)선생문집 묘지명에 설명하고 있다.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09:45: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영월에서 석북 신광수(申光洙)가 외사촌 이우경(李羽慶)의 딸에게 보낸 한글편지]]></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1]]></link>
			<description><![CDATA[<b>영월에서 석북 신광수</b><b>(</b><b>申光洙</b><b>)</b><b>가 외사촌 이우경</b><b>(</b><b>李羽慶</b><b>)</b><b>의 딸에게 보낸 한글편지</b>

 

【편지봉투】

홍 서방 댁에게 (외사촌 李羽慶의 사위 洪芝榮 댁)

영월에서 보내는 편지 근봉

 

【내용】

한 번 서울 왔을 때에 만나 보았는데, 다시 멀리 떨어져 서로 만나 보나 볼 길 없더니 뜻밖에 원(원,영월부사)를 하여 오니 올 때에는 설마 삼년 임기를 마치기 전에 아니 만날까 했는데, 멀고 불쌍하여 잊히지 아니하는 것을 네가 어이 알겠느냐?

느굇골(마을 이름) 빈 터에 죽은 풀을 보니 지나가다가 눈물이 나고, 네 생각하니 충주 깊은 골짜기에 뜻밖에 와서 손수 물 긷고 절구질을 한다니 애잔하고 불쌍한 마음이야 내 딸과 다르랴마는, 이렇게 쇠잔하고 가난한 고을에서 내 빚 4천여 냥을 건네어 눈앞이 캄캄하게 지내고 있는데,(내가) 잊은 듯 지금까지 (이렇게) 있으니, 나를 오죽 박절하고 무심하다고들 여겼을꼬?

이제야 돈 두 냥, 유청 한 되, 생 꿩 한 마리, 녹말 한 되를 전하는 이에게 해서 보내니, 멀리 있는 친척의 바라는 것은 없으나, 3.4일 일정으로 사람을 시켜 전하는 정이나 알게 하여라. 자녀들은 얼마나 되었는고? 내가 봄에는 아무쪼록 벼슬을 버리고 가려고하니, 그때 서울로 가게 되면 일부러 그리로 갈 길을 정하여(그 대, 너를 )보고 가려고하거니와, 관청 일의 사연을 미리 어떻게 기약하리. 벌써 광주 아주버님 소상이 머지않았으니 만사가 슬프고, 당신 한평생의 신세와 높고 착하시던 일 생각하면 논물뿐이로다. 탐탐 이만 그치며 내내 무사하기를 바란다.

 

1733년 12월 15일 외종숙 신광수(申光洙)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09:38: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missa.or.kr/?kboard_redirect=6"><![CDATA[내포학 자료실 2026-02-22]]></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여군 方生面 상종(羅馬里)마을 천주교인 약탈사건]]></title>
			<link><![CDATA[https://www.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90]]></link>
			<description><![CDATA[<b>부여군 </b><b>方生面 </b><b>상종</b><b>(</b><b>羅馬里</b><b>)</b><b>마을 천주교인 약탈사건</b>

 

<b>◯ </b>일시 : 1892. 11. 17

◯ 상종대 마을 이장 : 김정일(김영일:Kim Tchyeong-il)

◯ 상종대 천주교 교인 : 백만수

◯ 도둑 주동자 : 박건실, 박치관, 김광오

<b>&lt;</b><b>사건의 발단</b><b>&gt; </b>

세금 징수원 김영일(이장:김정일)이가 하수인 한씨, 정씨, 김씨, 세 사람은 거짓말로 소요를 조장하고 천주교도들의 돈을 갈취한 사건이다. 당시 부여군 방생면 상대마을에 천주교도 4가정이 각각 살고 있었는데 포졸 3명과 함께 천주교도들의 집에 찾아와 천주교도들을 충청도 감사 명령에 따라 체포하라 하여 체포하려고 하자 천주교도들이 명령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자 포졸들은 오던길에 명령서를 잃어버렸다고 둘러대며 천주교도 2명을 폭행한 후 포박하여 한 주막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천주교도들의 돈으로 배불리 먹고 또한 포졸들은 천주교도들이 풀려나기 위해 고리로 빌린 27리가튀르를 갈취하였다. 그러는 사이 천주교도들을 체포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인근 건달들이 모두 모여 약20명이 그날 저녁 천주교도 마을로 찾아가 보이는 것은 모두 약탈해갔다.

 

<b>&lt;</b><b>약탈해간 물건</b><b>&gt; </b>

◯ 탈곡하지 않은 벼 12섬

◯ 소두 2섬과 8말

◯ 대두 2섬과 10말

◯ 조1 섬과 10말

◯ 담배 잎 100발

 

<b>【</b><b>사건의 처리전말</b><b>】 </b>

◯ 1893. 2. 27 양촌성당 <b>퀴를리에</b><b>(</b><b>南一良</b><b>)</b>신부는 사건의 처리를 <b>조선주재 프랑스</b> <b>공사관</b> 『<b>프랑대</b>』에게 보고하고 본국의 외부부 장관에게 보고하여 조선정부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고 처벌하도록 외교적 조치로 범인들을 체포하여 죄를 묻고 사건을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b>부여군 은산면 나령리</b><b>(</b><b>옛 부여군 </b><b>方生面 羅馬里</b><b>, </b><b>나마리공소 </b><b>--&gt; </b><b>상터공소</b><b>?)</b>

 

<b>【</b><b>10</b><b>】 </b><b>퀴를리에 신부 거주지에서 일어난 사건의 해결</b>

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

정치국 제43호

서울,

1893년 2월 27일

퀴를리에(Léon Curlier)[南一良] 신부. 상종대(Syang Tjyong-Tai) 사건

첨부 2

장관님,

본인은 1892년 11월 17일 조(Tchouo)[趙秉稷] 신임 외아문 독판 각하가 부임할 당시 우리와 우리 국민들에게 보인 적대적인 감정에 대해 각하에게 보고한 바 있습니다. 선교회와 선교사들에 반대하는 자들은 독판의 태도를 금세 이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불미스런 사고가 계속 일어났고 본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했습니다.

퀴를리에(Curlier) 신부가 뮈텔 주교를 통해 본인에게 알려온 바에 따르면 천주교인들이 <b>상종 마을에서</b> 아문의 포졸들과 비신자 백성들에게 가해를 받았다 합니다. 본인은 이 기회를 통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Conseil des Affaires Etrangères)[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독판에게 예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강경한 질책을 하였습니다. 본인은 천주교도들에 대한 독판의 태도가 최근 발생한 어려운 사태의 부분적 원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독판이 천주교에 대해 여러 자리에서 행한 적대적인 발언을 취소하지 않고 하루하루 미룬다면 또다시 혼란이 초래되어 조선에 이롭지 않으리라 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독판에게 우리 선교사들이 직접적으로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본인에게는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백성의 움직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알렸습니다. 독판과의 대담은 4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각하를 설복시키게 되어 상당히 만족하였습니다. 독판은 지방관에게 보낼 공문을 본인에게 직접 전해주었습니다. 주교가 그 공문을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공식 소장과 함께 지방관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주교의 메모와 독판의 서신 번역본을 본 공문에 동봉합니다.

뮈텔 주교는 본 사건의 해결에 대해 본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 왔습니다. 선교회에 특히 좋았던 것은 본인의 요청으로 독판이 천주교도들과 비(非)천주교도들 모두 이희 전하의 백성이므로 당국으로부터 똑같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충청도 지방관에게 보내는 공문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경구.
<ol>
 	<li>프랑댕</li>
</ol>
파리의 외무부 장관 리보 각하께, 등등

별지

◈ 별첨 1

정치국 공문 제43호 첨부 1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이 <b>부여 현감에게 보낸 공문</b>

계사년(Kié-sa)[癸巳] 음력 1월 8일

새해를 맞이하여 올해 전하의 빛나는 성은이 만 배 더 빛나기를 바랍니다. 신년을 맞이하여 본인은 전하께 본인의 의무를 고하고 전하께서 영원하고 완벽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대표가 본인에게 보낸 공문입니다.

천주교도와 비천주교도는 모두 조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귀하가 말한 곳의 <b>세금 징수원 김영일</b><b>(Kim Yyeng-il)</b><b>과</b> 그 하수인 한(Han), 정(Tjyeng), 김(Kim) 세 사람은 거짓말로 소요를 조장하고 천주교도들의 돈을 갈취하였습니다. 실로 통탄할만한 일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지역의 무뢰한들도 아무 이유 없이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본인이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에 <b>백만수</b><b>(Paik Man-sou)</b>가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길 바라며 죄인들을 잡아서 투옥하고 갈취한 물건들은 회수하여 각 주인에게 되돌려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소요를 일으킨 주동자들은 엄중히 처벌 받아서 앞으로는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백만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예전과 같이 자신들의 집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십시오. 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이들에게 이러한 혜택을 베풀 수 있을 방법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상이 본인이 귀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서명：조병직(Tjô Piong-sik)[趙秉稷]

원문과 동일함.

번역자 서기관 임시서리

서명：C. 생송.

 

별지

◈ 별첨 2

정치국 공문 제43호 첨부 2

조선 대목이 프랑댕 씨에게 1893년 2월 19일 보낸 의견서

<b>충청도의 선교사 퀴를리에</b><b>(Curlier) </b><b>신부가</b> 본인에게 천주교도 중 한 명을 보내어 아래와 같은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였습니다. 신부는 본인이 귀하에게 이를 알리고 귀하가 박해받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청원하였습니다.

<b>부여</b><b>(Pou-Ye)[</b><b>扶餘</b><b>] </b><b>방생</b><b>(Pang-saing)</b><b>촌 상형대</b><b>(</b><b>상종대</b><b>;Syang-Hyoung tai) </b>마을에는 천주교도 네 가정이 각각 살고 있습니다. 음력 지난 달 15일(1893년 2월 1일) <b>김정일</b><b>(</b><b>김영일</b><b>;Kim Tchyeong-il)</b><b>이라는 이장</b>(chef de canton)이 <b>한</b><b>, </b><b>정</b><b>, </b><b>김이라는 포졸 </b><b>3</b><b>명과 함께 천주교도들의 집에 찾아왔습니다</b><b>.</b> 이들은 천주교도들을 체포하라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이 관리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천주교도들이 명령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더니 포졸들은 오던 길에 명령서를 잃어버렸다고 둘러대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마을에 있던 천주교도 두 명을 폭행한 후 포박하여 한 주막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천주교도들의 돈으로 배불리 먹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포졸들은 천주교도들이 풀려나기 위해 고리로 빌린 27리가튀르를 갈취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천주교도들을 체포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인근 건달들이 모두 모여 약 20명이 그날 저녁 천주교도 마을로 찾아가 보이는 것은 모두 약탈해갔습니다. 즉,

 

-　탈곡하지 않은 벼 12 섬

-　소두 2 섬과 8 말

-　대두 2 섬과 10 말

-　조 1 섬과 10 말

-　담배 잎 100 발

 

이것은 천주교도들의 일 년 양식이었습니다. 현재 천주교도들은 최악의 궁핍 상태에 몰려있습니다. 천주교도들 중 백만수라는 자는 옷까지 빼앗겼습니다. 약탈당한 <b>천주교도들을 대표</b>하여 <b>백만수</b>가 이 관리에게 문서를 통해 고소하려 하였으나 아마도 죄를 저지른 포졸들의 말에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 이 관리는 고소당한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고, 고소인들이 천주교도라는 것을 알고 고소장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포졸들이 다녀간 후 양식을 약탈해간 <b>도둑들의 주동자</b>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b>박건실</b><b>(Pak Ken-sil)</b>

<b>　</b><b>박치관</b><b>(Pak Tchi-koan)</b>

<b>　</b><b>김광오</b><b>(Kim Koang-o)</b>

 

 

<b>&lt;</b><b>자료정리 </b><b>: </b><b>국편사료조사위원 박 수 환</b><b>&gt;</b>]]></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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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3 Jul 2026 08:45:3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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