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 [원] Calais, Alphonse

Calais, Alphonse(1833∼1884).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강(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 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주요 저술로는 ≪강신부 훈계≫(필사본)가 있다.

[참고문헌] Marie Calais, Des Missions Coreennes au Cloitre Cistercien, 1833-1884, Belgique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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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상시오 [관련] 요셉 칼라상시오

⇒ 요셉 칼라상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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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데아전례 [한] ∼典禮 [영] Chaldean rite [관련] 동방전례

동방시리아 교회에 근원을 갖고 고대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로서 14세기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부시리아 합동 동방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지칭한다. 칼데아란 말은 동방의 다른 네스토리우스파와 구별하기 위해 16세기부터 상용되었다. 현재 이라크, 이란, 팔레스티나, 레바논, 이집트, 시리아, 터키 등지의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인도의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도들도 사용한다. 서부 시리아 전례라고 불리는 안티오키아 전례에 대응하여 동부 시리아 전례라고도 불린다. 교황청의 동방교회성성은 칼데아 전례를 독립된 별개의 전례로 인정, 공식적인 전례 용어로 고대 시리아어를 사용하며 그레고리오력을 따르고 있다.

이 전례는 주로 안티오키아 전례에서 채택된 것이나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지성소(至聖小, sanctuary)는 높은 벽으로 밀폐되어 있고, 미사 성제를 거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닫혀져 있다. 미사는 제단 아래에서 감사 기도, 빵과 포도주의 봉헌, 삼성송(三聖誦, trishagion)으로 진행, 이어 서간과 복음낭독, 예비자들을 위한 기도가 있고, 신자들과의 미사는 사제가 손을 씻는 것으로 시작된다. 두 번째 봉헌(제물 준비)이 있고 주님과 성모 마리아, 성인들, 죽은 영혼들을 기억하는 기도가 이어진다. 입장기도와 신경을 외고 대입장식이 거행된다. 장엄한 행렬로 제단에 다가와 평화의 입맞춤을 하고 미사 전문(典文) 즉 감사송과 빵과 포도주의 축성, 중재기도, 성령께 드리는 기도가 뒤따른다. 영성체는 거양성체, 주의 기도, 감사의 기도, 축복 후에 행해진다. 그 방법은 축성된 제병의 작은 조각을 축성된 포도주에 적셔서 하는 것이다. (⇒) 동방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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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친회 [한] ~會 [라] Ordo Fratrum Minorum, Capuccinorum, Capuccini [영] Capuchin Franc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창설한 ‘작은 형제회’(O.F.M.)의 한 독립적인 가족. 엄격주의자들이나 프란치스코회 내의 다른 많은 개혁운동들이 그렇듯이 창설자의 수도회칙을 문자 그대로 엄격히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하였다. 카푸친(Capuccino) 개혁운동은 1525년초 이탈리아에서 바시오(Matteo da Bascio, ?~1552)가 시작, 그는 첫 카푸친 수도회회의에서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1529년). 수도회는 교황 글레멘스(Clemens) 7세의 대칙서 (1528)에 이어, 교황 바오로(Paulus) 3세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1536년).

카푸친회는 은둔적 생활을 하는데, 특히 활동과 관상 사이의 완전한 균형을 중시하였다. 가톨릭 개혁시기에는 예수회와 함께 교황청을 도와 최일선의 선교사업에 참가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전을 막았으며 17세기에는 이미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로 진출하였다. 카푸친이란 이름은 아탈리아어로 이들 수도자들이 입고 있던 수도복에 달려있는 세모의 두건(頭巾) 모양에서 유래하였다. 1938년말 현재 1만 1,800명의 회원이 있다. (⇒)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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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 [라] Catacombae [영] catacomb

초대 교회시대 그리스도 교인들의 지하묘소, 박해 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했고, 여기서 전례를 행하였다. 로마의 전형적인 묘이긴 하지만 나폴리나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파리 등지에서도 그 유적이 발견된다. 이 말은 묘지를 의미하는 coemeterium과 동의어(同義語)이지만 coemeterium이 모든 묘지를 지칭하는 것임에 비해 catacombae는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 교인의 무덤을 가리킨다. 지하에 묘를 설치하는 관습이 박해 때문에 생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박해에 의해 촉진된 것만은 사실이다. 최초의 카타콤바는 1세기에 설치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고 2세기초부터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처음에는 가족묘소로 출발했고, 3세기경부터 신자공동묘지(S. Callisto)가 나타난다. 초기의 카타콤바에서는 주로 죽은 이의 이름을 새긴 묘비명(墓碑銘)과 유리그릇, 램프, 주화, 조개껍질, 동(銅)이나 상아로 된 조각 등이 출토되고, 후기의 것에는 죽은 이의 나이와 매장일자를 기록한 묘비명에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과 유족의 기원(祈願)이 적혀 있다. 카타콤바 벽에는 당시 그리스도 교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많은 벽화들이 남아 있다. 즉 초기 신자들의 종말론적 사상을 표현한 그림들이 많다. 중심적인 주제는 대체로 하느님에 의한 구원, 천국에의 희망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들로 구세(救世), 내세의 신앙, 그리스도의 신성(神聖), 세례, 성체, 죽은 이를 위한 전구(轉求),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들을 표현하고 있다. 박해시대에 집회소와 피난처로 쓰였던 카타콤바에는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그 위에 바실리카가 세워졌고, 8세기경에는 카타콤바에 있던 유해(遺骸)를 도시의 성당으로 운반하게 됨으로서 카타콤바에 일반인의 발길이 끊이게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세인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16세기경에 다시 발견되었다. 라테란 조약(제33조)에 의해 로마 교황청이 카타콤바의 처분권, 감독권, 발굴권, 유해이장권을 가지며, 유지 수리의 의무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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