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성기를 자극하여 극치감을 느끼는 행위를 말하며 이는 외부적 수단에 의한 신체적 자위와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그림이나 상상에 의한 정신적 자위를 포함한다. 성서에는 자위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는 죄라고 하였다(1고린 6:9). 교회의 가르침도 자위를 금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성기능은 자녀의 출산과 부부애의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도록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자위는 성기능이 지니는 의미와 목적을 벗어나는 반자연적 행위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거슬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위의 원인은 내성적인 성격, 정서적인 불안 등 다양하며 병적인 경우는 심리학자나 의사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활양식을 변화시키고 원만한 인간관계 속에 적극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위의 관심과 기회를 피할 수 있다. 아울러 기도생활에 열심하고 의연한 의지와 자기신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자원 [한] 資源 [영] resources [독] Rohstoffquellen [관련] 자연
좁은 뜻으로는 자연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만을 말하고, 넓은 뜻으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산에 이용되는 것을 자원이라고 한다. 식량, 원재료, 에너지 등은 생황이나 생산 속에서 소비되는 갖가지 물질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들은 많건 적건 간에 사람의 노동에 의하여 생산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생산되는 동안 가해졌던 사람의 노동을 한 꺼풀 한 꺼풀 제거하여, 그 소재의 원천을 추적해 가면 마침내 노동에 의한 생산물이 아닌 것, 즉 자연 그 자체인 것으로 귀착하게 된다. 자원 또는 자연자원(自然資源)이란, 이처럼 자연에 의하여 주어진 유용물로서,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노동이 부가됨에 따라 생산력의 한 요소로 될 수 있는 것들을 지칭한다.
자원에는 토지, 삼림, 물, 매장광물, 수산생물 등이 있으며 이것들이 지구상에 얼마나 분포되어 있는가 하는 양적 질적 상태는, 본디 자연적인 부존(賦存)에 의하여 규정지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관점은 자원이라는 것이 단순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고, 역사의 발전단계에 따라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받는 그러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의 일부를 자원으로서 평가할 경우, 당연히 노동과정에 있어서의 유용성(有用性)의 견지에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때 선택 기준은 기술의 발전수준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탓으로, 자원이 외연적인 범위라든지, 자원으로서의 유용성의 정도 즉 자원적 가치는, 기술의 진보 발전에 다라 변화해 가는 매우 동태적(動態的)이며 상대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이러한 예로는 자원 매장량의 비(非)고정성이나 자원의 전화 또는 대체 가능성들의 문제가 낄 수 있다.
자원적 가치가 기술의 진보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적히라고 앞서 지적했는데, 이 기술의 진보 발전이야말로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 일정한 역사적 생산관계의 소산이기도 하다. 생산력의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는, 자연적인 부존이 많고 적음에 따라 생산력 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이 커지지만, 기술의 진보 발전으로 인하여 생산에 있어서의 자연적인 제약의 비중은 낮아지며, 아울러 생산에 대하여 자연이 담당하는 기증에도 양적 질적인 변화가 생긴다. 자원의 사회경제적인 성격이 일정한 생산관계에 대응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이른바 자원의 계급성 문제가 등장한다.
계급사회 즉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원은 사적 소유에 독점되어, 자원의 이용 개발은 지배계급의 이해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이다. 본래 모든 인류, 모든 국민의 복지를 위하여 쓰여져야 할 자원의 이용 개발이, 지배자에 의한 부의 축적 또는 계급 지배의 수단으로 쓰인다. 더구나 자원의 개발이 전적으로 자본의 이윤추구 원칙 아래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자본에 대하여 사적인 이윤을 낳지 않는 자원개발은 도외시되게 마련이며, 또한 기술의 채용에 있어서도, 자본에 최대한의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만이 추구되어서, 자원 자체가 지닌 자연적인 법칙성이나, 그 속성에 맞는 합리적인 개발방식은 무시되거나 혹은 왜곡된다. 이런 결과 때로는 자원의 혹사, 낭비, 파괴가 빠른 속도로 촉진되게 되며, 이른바 남획(濫獲), 남굴(濫掘), 공해 문제의 발생을 가져온다. 1, 2차 세계대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자원의 쟁탈이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일본이나 독일에서 사용했던 ‘자원’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군수’(軍需)자원 또는 ‘인적’(人的)자원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자원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식민지 지배에서 얻어내는 초과이윤의 원천으로서 자원, 혹은 군사적 · 전략적 가치가 높은 자원을 놓고서의 강대국 사이의 재분할을 위한 쟁탈전의 슬로건의 하나로 쓰여졌다. 자본주의의 테두리와 상대적으로 대립되는, 즉 국민의 자원을 지배계급의 사적인 독점에서 해방하여 이른바 국민적 지지 아래서 하는 소위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자연개발은 사회주의 여러 나라에서 대규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개발 도상에 있는 후진국에 있어서도 자원개발이 과감히 추진되어 나가는 중이다.
사목헌장은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이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기술의 발전이 인간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즉 자원개발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가톨릭 교회는 “큰 땅을 채우고 땅을 복종시켜라”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모든 자원은 모든 사람이 이용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이 자원을 독점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자원은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자연
[참고문헌] 小出博編, 日本資源讀本, 東洋經濟新報社, 1958 /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1967 / 바오로 6세, 세계 안의 정의, 1971.
자연주의 [한] 自然主義 [영] naturalism
자연 이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을 모든 존재와 가치의 기준이고 원리라는 입장. 자연은 상호관련된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 윤리학, 문학에서 나타나며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학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① 철학에서 자연주의는 자연을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다. 고대 스토아학파의 법신론적 유물론은 보편적인 세계이성(logos)이 자연에 내재해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자연을 시공적(時空的)으로 무한한 기계론적 인과율에 의해 지배되는 체계라고 보았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이르면 자연을 상하의 계층으로 된 상호 연관된 물질의 운동 형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② 논리학에서 자연주의란 “쾌락을 가져오는 것”이 선하고 올바른 것인가, “개인과 집단의 자기 보존에 유익한 것”이 선하고 올바른 것인가, “개인과 집단의 자기보존에 유익한 것”이 선하고 올바른 것인가와 같은 윤리적 가치개념을 자연적 사실에 따라 정의하는 유리학설. 대표적인 것으로는 쾌락주의, 공리주의, 진화론적 윤리설 등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사실에서 가치와 당위를 추출하려는 입장을 말한다. ③ 문학에서는 실증주의, 진화론 등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후반에 문학의 조류를 가리키며 졸라(E. Zola)가 대표적이다. 현실을 이상화하여 관념에 빠지는 것을 배척하고 인간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바른 문학인의 자세라는 주장. 그러나 자연주의 문학은 인간의 동물적 측면과 인간의 한경예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작용,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한 면도 있다.
자연종교 [한] 自然宗敎 [영] natural religion [독] naturliche Religion
계시종교에 대비되는 말로 인간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의무를 총칭하여 자연종교라 한다.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자연종교라는 것이 주장되었는데, 이들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기성종교의 교의 · 신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나 경험에서 종교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연 종교란 종교사나 비교종교학 등 일반 종교연구 분야에서 이야기되는 자연적인 종교(nature religion)[원시인이나 미개인이 신봉하였던 원시종교]와는 구분된다. 자연중교에 대한 탐구는 ① 종교개혁 이후 격렬하게 전개된 가톨릭과 개신교의 논쟁과 투쟁으로 그리스도교의 권위가 동요되기 시작하고, ② 과학의 발달과 교역의 확대로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17~18세기의 지적인 상황을 반영하여 나타났다. 당시의 철학자나 사상가, 과학자들은 “종교의 진리와 본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성종교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유리주의자(唯理主義者) 프랑스의 보댕(J. Bodin)이나 영국의 허버트(E. Herbert of Cherbury)에 의해 전개되어 영국의 로크(J. Locke) 등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으로 발전된 자연 종교는 “종교란 모든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이고, 따라서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소용없을 뿐 아니라 해로운 것”이라 하여 계시종교에 반대하고, 최고신(最高神)의 존재, 영생(永生)에 대한 희망, 상선벌악(賞善罰惡)에 대한 신앙 등이 참된 종교의 본질적인 핵심이라 하였다. 틴달(Tindal) 같은 이는 그리스도교는 이 핵심으로 축소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톨란드(J. Toland), 뉴톤(I. Newton), 볼테르(Voltaire) 등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루소(J.J. Rousseau)는 모든 올바르고 참된 종교는 선과 미에 대한 사랑에서 성립된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도, 계시도, 구속(救贖)도 없는 종교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교회는 이자연종교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자연신학 [한] 自然神學 [라] theologia naturalis [영] natural theology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탐구하려는 신학의 한 분야로, 이를 통해 신의 계시가 반이성적(反理性的)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자연신학을 체계화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저서 ≪호교대전≫(護敎大全, Summa contra gentiles, 1258~1261)을 통해서 이성적인 진리와 도덕적인 진리, 신비적인 계시를 차례로 예시하고 이것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한 뒤 “선비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성에 반(反)하는 것도 아님”을 명백히 하고서 “은총은 이성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완성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밝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내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로마 1:19-20)라고 말한 성서의 구절을 전거(典據)로 삼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