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혜(?∼1801). 순교자. 세례명은 간디다. 이합규(李鴿逵)의 전교로 입교,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체포되어 이해 5월 14일(음 4월 2일)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정배 [한] 淨配 [라] sponsa [영] spouse [관련] 배필
교회를 상징하는 모상들 중의 하나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배 즉 배필이라는 뜻. 구약의 백성을 묘사하던 이 말을 바울로가 교회에 적용하였다. 그는 에페 5:23-32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견주어 부부가 일체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체이며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듯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한다. (⇒) 배필
정미반회사건 [한] 丁未泮會事件
정미년(丁未年) 즉 1787년 10월경에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등이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걸 목격하고 성토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미반회사건을 발설한 사람은 이기경(李基慶)으로, 원래 그는 이승훈, 정약용과는 친밀한 사이로, 그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대하며 보조를 같이했었다. 그러나 정미년부터 그들과 떨어져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고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이기경은 정미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서 서학서만을 보고 있는 걸 목격했었다고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낙안은 이를 왕에게 알려 그들을 벌주어야 한다고 극렬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직접적인 박해가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점차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라고 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장차 박해를 유발케 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 李晩采, 闢衛編, 闢衛社, 1931.
정문호 [한] 鄭∼
정문호(1801∼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일명 계식. 충청도 임천(林川)에서 양반으로 태어났다.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한 뒤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했고 또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존경받았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다가 병인(丙寅)박해 때에는 전주(全州)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한원서 ·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직전 정문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예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고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정두원 [한] 鄭斗源
정두원(1581∼?). 문신. 자는 정숙(丁叔). 호는 호정(壺亭) · 풍악산인(楓嶽山人). 본관은 광주(光州). 홍문관 정자(正字)를 지낸 정명호(鄭明浩)의 아들.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161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23년 성천부사(成川府使), 1624년 관향사(館餉使), 1627년 전향사(轉餉使) 등을 역임했고,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당시 북경(北京)에서 전교 중이던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Rodriguez, 중국명 陸若漢)를 만나 친교를 맺고 이듬해 홍이포(洪夷砲) · 천리경(千里鏡) · 자명종(自鳴鐘) 등의 서양 과학기구와 ≪직방외기≫(職方外記) ·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많은 서학서(西學書)를 가지고 귀국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서양과학 기술을 소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