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 [한] 貞德 [라] castitas [영] chastity [관련] 윤리덕 절덕 정결

정결을 실천하는 덕행. 윤리덕의 일종인 절제의 덕에 속한다. 정덕은 정결을 실천하는 능력이요 이를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태도이다. (⇒) 정결, 윤리덕, 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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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한] 政黨 [영] political party [독] politische Partei [프] parti politique

정당이란 본질적으로는 어느 특정조직에의 참여, 즉 어떤 집단의 부분이 된다는 것과, 특수한 프로그램에 의하여 다른 여러 조직에서의 분리, 즉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뜻한다. 달리 설명하면, 공통된 원리 · 정책을 가지고, 일정한 정치 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정치 권력에로의 참여를 목적하여 맺어진 정치단체라고 할 수 있다.

정당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살피자면, 우선 정당의 본질, 정당체계, 정당의 여러 가지 유형을 미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정치현상은 권력론과 정책론의 두 가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정당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여서 권력론의 관점에서는 정당이란 지배와 저항을 위한 정치조직인 것이며, 일반국민에게 정책선택을 하기 위한 선택지(選擇脂, alternative)를 제공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는 복수 조직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적인 선택지 제공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비대를 초래했을 경우엔 일당독재(一黨獨裁)가 되고 만다. 정당체계는 1당제, 양당제, 그리고 다당제(多黨制)로 나누어진다. 정당은 그 바탕에서부터 민주적인 풍토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독재체제에 있어서도 형식적인 외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당을 만들어 운용해 오고 있다. 정당의 유형으로는, 정당이 갖는 일반적인 성격에 따라서 ① 이익정당 즉 특정한 이익과 결부되어 있는 정당, ② 세계관 정당 즉 사상 · 철학 · 문학의 체계를 간판으로 내거는 정당, ③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파벌을 만들어 권력적 지위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 패트러니지(patronage, 단골거래 후원자)형 정당 등으로 구분되며, 조직의 시각에서 볼 때는, 19세기적 형태인 인적 정당과 20세기적 형태인 대중정당(大衆政黨) 또는 조직정당으로 분류된다.

소련에 있어서의 공산당이라든지 2차 대전 전의 독일 ·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나치 · 파시스트 정당 같은 것은 하나의 정당이 정치권력을 독점한 형태인데, 서구에 있어서는 양자를 모두 일괄해서 전체주의 정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태적으로는 일당독재체제라 하더라도, 첫째 당이 아래로부터의 에너지를 흡수할 기능을 가지고 있느냐, 둘째로 그 정당이 앞세우는 세계관 또는 정책이 역사적인 발전 법칙에 합치하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구체적인 존재형태와 그 의미가 결정적으로 달라지므로, 양자를 통틀어 전체주의적이라고 지칭하는 데는 문제가 많다.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양당제냐 다당제냐 하는 점에 있다. 양당제의 경우, 두 정당이 그 중간에 놓여 있는 국민을 자기의 진영으로 흡수하려고 하여, 정책의 제시를 보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점에서 국민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의 합리성과, 정당의 측면에서 볼 때의 보다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한 합리성이 서로 모순되는 딜레마 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다당제에 있어서는 각 정당의 수비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당은 자기의 정책 또는 이데올로기를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며, 게다가 이 경우에는 선택지가 다수 존재하는 탓으로, 국민의 선택을 위해서는 이 제도가 유리한 것이다. 그렇지만 1당만으로는 정권을 획득하지 못하므로, 복수정당의 연합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교섭과 타협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국민과의 관계는 간접적인 관계로 물러나게 되며, 국민의 요구도 자연히 그 교섭관계에서 왜곡되어 버린다는 불이익이 있다. 결국 양당제가 좋으냐, 다당제가 좋으냐 하는 문제는, 그 나라의 국민의식의 분포상황에 대한 고려와, 각기의 제도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합리적으로 계산한 뒤에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

어쨌든 정당을 구분하는 요소는, 하나는 정치 결정과정에의 참가 또는 참여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사회의 특수한 여러 이익을 공통적인 전체 속에 알맞게 빚어 넣는 통합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이 두 가지 점에서 찾아야만 된다.

그리스도 교인의 정당 가입은 가능하지만, 그 가입에 제약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권력은 사회 공동체의 단합을 보장하기 위한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요소인 한, 그 목적은 공동선의 실현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정치를 전부라고 절대시하는 경향은 중대한 위험을 내포한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서한 <행동에의 부름>(‘레룸 노바룸’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 1971. 5. 14)에 따르면, “정치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정치활동에 간여하는 그리스도 교인은 정치활동을 복음과 부합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고, 여러 가지 정당한 제도와 여론 가운데서도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사심없이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실성을 증거해야 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정당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기에 와서부터이며, 벨기에 · 네덜란드 · 독일 등에서 결성되었다. 이는 모두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 서는 것들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남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에도 그러한 정당이 생기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정의와 진리를 존중하면서 정당을 만드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회가 정쟁(政爭)에 휘말리거나 교회의 지지에 의해서 특정 정당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배격한다. 가톨릭 신자가 정당에 가입하는 경우 그 정당의 강령이나 정책이 가톨릭 교리와 위배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신자 각자의 자유이다.

[참고문헌] R. Michels, Zur Soziologie des parteiwesens in der modernen Demokratie,

1911, 2 Aufl., 1925 / M. Duverger, Les partis politiques, 1951 / S. Neumann(ed.), Modern Political Parties, 1956 /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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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규 [한] 鄭南奎

정남규(1886∼?). 사회사업가. 세례명은 요한. 1886년 5월 14일 서울 옥인동(옛 지명은 옥동)에서 구한말의 정2품(正二品)벼슬을 지낸 부(父) 정창인(鄭昌寅)과 모(母) 최 바르바라 사이의 3남2녀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1903년 일본인 경영의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졸업하고 탁지부(度地部) 토지조사국 감사원으로 채용되었고 이듬해인 1904년 영세, 입교하였다. 한일합방 후, 경북 의성군수(義城郡守)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경성부(京城府)[현 서울시]의 재무주임으로 있다가 일제의 수탈정책을 의식하고 사직, 1923년 모친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권유로 교회사업에 투신하여 명동본당의 회장으로 명동성당 구내의 ‘홍길동 집’에 수용되어 있던 노인들을 돌보았다. 그 뒤 본격적인 자선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 1924년 명동본당의 회장들과 ‘애긍회’(哀矜會)를 조직하고 1925년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양로원을 설립, 행려병자, 보호자 없는 노약자들을 수용하였다. 그 후 양로원을 왕십리로, 다시 화양리로 확장, 이전하여 1950년 6월까지 연 261명 수용하였다. 1950년 9월 16일 납북된 후로 행방불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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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하 [한] 鄭圭夏

정규하(1863∼1943).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忠南 牙山郡 新昌面 南方里)에서 부(父) 정기화(鄭基化, 마태오)와 모(母) 한 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병인(丙寅)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음성(陰城) 장호원을 거쳐 15세 경 충주(忠州) 근방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전부 잃고는 다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주, 그 뒤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다가 1884년 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서품 후 강원도 횡성(橫城) 풍수원(豊水院)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 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초, 동학혁명의 실패와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산골인 풍수원에도 나타나곤 했는데 그들을 맞아 격려하고 침식을 제공하였고 풍수원본당 교우들 중에도 상당수가 의병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건평 120평의 연와조성당을 건축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을 개설하고 논산에서 박 토마스를 선생으로 초빙,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삼위학교는 후일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1942년 노환으로 보좌 김학용(金學用) 신부에게 풍수원본당의 운영을 맡기고 휴양하다가 이듬해인 1943년 10월 23일 81세로 선종, 풍수원성당 뒷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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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만 [한] 丁奎萬

정규만(1915∼1981). 서울 대교구 소속신부. 세례명 마르코. 황해도 곡산군 도하면 현암리에서 출생. 1937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에 유학, 1939년 철학과를 졸업하고 1942년 12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943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1946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천주공교신학교[성신대학의 전신, 성신대학은 가톨릭대학의 전신]교수,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거쳐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성신대학 학장,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인천 성 바오로수녀회 지도신부를 역임하였다. 1960년 다시 가톨릭대학 교수로 복귀, 1967년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69년 취임 2년은 병으로 학장직을 사임하고 그 뒤로 휴양하면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81년 5월 7일 명동 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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