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와 함께 그리스도시대의 주된 유태교파 중의 하나. 성서나 탈무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필로(Philo Judaeus), 플라비우스 요셉(Flavius Josephus), 플리니(Elder Pliny)에 의해 이 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시작되어 2세기경에 소멸하였으며 팔레스티나지방 밖으로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4,000명 가량이 이 파에 속했으며 엄격하게 조직되어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공동체생활을 하였다. 지원자들은 복종과 비밀엄수에 대한 서약과 더불어 3년간의 수습기를 거쳤다. 그들의 예배나 교리가 엄밀히는 비유태교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바리사이적인 유태교 교리에 의한 가르침에 근사하다. 때때로 주장되고 있는,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이 이 파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은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 성서에는 이 파에 관한 기록이 없고, 많은 학자들이 에세파를 ‘사해문서’에 나타난 공동체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에비온파 [한] ∼派 [라] Ebionaei [영] Ebionites
1세기에서 4세기에 특히 요르단 동부에서 성행했던 유대계 그리스도교 이단. 에비온파라는 명칭은 에비온(Ebion)을 창설자로 보는 교부(敎父)들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에비온 즉 ‘가난한 이들’과 관계가 깊다(마태 5:3, 루가 4:18, 7:22). 에비온파에 관한 자료들은 산재해 있어 종합하여 통일된 의견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지만, 다음의 주장을 했음은 명백하다.
예수의 신성(神性)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 예수를 모세가 예언한 구세주(Messiah)로 받아들였으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뽑힘은 예수가 계명을 완벽하게 지킴으로써,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내림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모세법을 강조하여 계속적으로 지킬 것을 주장하였고 성 바울로의 이론과 서간을 부인하였다. 이는 바울로의 하느님 체험을 신들린 환상이라고 믿었고 바울로가 예루살렘의 성 야고보가 의도했던 모세법의 완전한 준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에비온파는 마태오의 복음서를 근거로 하는 ‘히브리복음서’만을 사용하였다. 소위 말하는 ‘에비온복음서’와 글레멘스(Clementine)의 문헌들은 에피파니오(Epiphanius of Salamis)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에비온파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구약(Old Law)의 희생제도는 정결 · 금욕 · 절제 등으로 대치된다고 보았으며, 특히 성세수(聖洗水)에 의해 폐지된 것으로 보았다.
에비온파는 청빈한 공동생활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으며 채식주의와 세례의 신비적 의식에서 절정에 달하는 목욕재계를 행하였다. 유스티노(Justinus), 이레네오(Irenaeus),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히폴리토(Hippolytus), 에피파니오 등이 에비온파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4세기 라틴교부들은 그 때까지 로마와 이집트 · 소아시아에 잔존해 있던 에비온파들을 심마치안(Symmathians)으로 묘사하였다.
에밀리아니 [라] Emiliani, Hieronymus
Emiliani, Hieronymus(1486∼1537). 성인. 축일은 2월 8일. 이탈리아의 종교생활개혁자, 수도회 창설자. 베네치아의 상류가정에 태어나 소마스카(Somasca)에서 페스트환자 간호봉사중에 전염, 별세하였다. 1496년부터 군대에 복무, 1508년 성채(城寨) 카스텔 누오보 디 퀘르(Castel Nuovo di Quer) 방어전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기적적으로 탈주하였다. 1528년부터 친구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fa, 1476~1559)의 종교적 지도하에 영웅적인 이웃사랑과 고행(苦行)의 생활에 들어가 병자와 무의탁자의 구호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먼저 베네치아, 브레시아(Brescia), 베르가모(Bergamo), 베로나(Verona), 밀라노 등지에 고아원을 설립, 율수성직자(聿修聖職者)의 수도회를 창립, ‘천주의 가난한 종의 회’(Compagnia del servi dei poveri)란 이름으로 발족, 후에 그 본부 소재지 이름을 따서 소마스카회(Somaschi)로 칭하게 되었다. 1747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시복(諡福), 1767년 글레멘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1928년 비오 11세는 그를 고아 및 무의탁 청소년의 보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그의 초상은 손에 쇠사슬을 쥐고, 곁에 탄알이 놓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에리우제나 [원] Eriugena, Joannas Scotus
Eriugena, Joannas Scotus(810?∼877?). 카롤링 르네상스의 대표적 철학자.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고대 이래의 문예를 터득한 후 알퀴누스(Alcuinus, 735~804)에 이어서 파리에 유학, 가롤링조의 왕 프랑크 2세에게 초빙되어 그 궁정학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 아우구스티노 등 라틴 교부(敎父)를 연구했고, 고트샬크(Gottschalk) 논쟁 때에는 힝크마르(Hincmar de Reims)의 부탁으로 ≪예정론≫(De Praedestinatione)을 집필(851년), 하느님은 유일한 의지(意志)이므로(아우구스티노주의), 이중예정은 있을 수 없고, 죄와 벌도 허무하므로 하느님이 그것을 예지(豫知)할 수도 없다고 고트샬크를 논박하였다. 그의 범신론적 경향은, 그 무렵에 그리스 교부들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과 무관한 것은 아니며, 왕의 위촉으로 ≪위(僞) 디오니시오문서≫를 라틴역하고(858년), 그것을 토대로 해서 ≪자연의 구분에 관하여≫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완성하였다(867년). 그 신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스콜라철학의 성립을 촉진했으나, 진정한 종교와 진정한 철학을 한 자리에 놓는 대담한 합리주의 및 범신론적인 실재론 때문에 의혹을 자아내게 되어, 13세기 이래 여러 번 금서(禁書) 목록에 들었지만, 비정통적인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애독되었다. 그밖에 그는 보에시오(A.M.S. Boetius), 요한복음서들을 주해(註解)하여 스콜라철학의 주석학풍(註釋學風)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에를레 [원] Ehrle, Franz
Ehrle, Franz(1845∼1934). 중세 연구가, 추기경. 독일의 뷔르텐베르크 태생. 예수회에 들어가 교황청 도서관 관리자, 추기경이 되었다. 로마교회 도서관장 겸 고문서고 보관자로서 유럽대륙을 여행하며 중세관계의 사본(寫本)을 조사 수집해서 그 복원에 공헌했으며, 데니플레(H.S. Denifle)와 함께 스콜라철학사의 학문적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저서 ≪Der sentenzen Kommentar Peters von Candia≫(1924)는 14세기 스콜라철학의 중요한 연구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