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의 애욕의 신. 로마신화에서는 ‘큐피드’로서 알려지고 있다. 표상(表象)은 활과 화살을 쥔 뚱뚱한 소년. 에로스는 또한 이 신명(神名)에서 ‘사랑’, ‘성애’라는 뜻으로 전용(轉用)되기도 하고 또는 철학적인 신성(神性)의 충동의 뜻으로서 생성(生成)의 원동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플라톤은 ≪향연≫(Symposion)에서 지혜, 아름다움, 선(善)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에로스라고 하였다.
에라스무스 [원] Erasmus, Desiderius
Erasmus, Desiderius(1466∼1536). 대표적 인문주의자. 고전 및 교부학자. 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 출신. 공주(公住) 형제회에서 8년 교육받은 뒤 1486년 친구와 후원인의 종용으로 스테인(Steyn)의 성 그레고리오 성당 아우구스티노 참사회에 입회, 고전과 교부학을 연구하였다. 1492년 서품을 전후하여 자유로운 지적 욕구충족의 방법을 모색, 캉브레(Cambrai) 주교의 초청으로 수도원을 떠나 일생동안 유럽각지를 배회하였다. 1495년부터 파리에서 수학, 스콜라철학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1499년 생계를 위한 라틴어 강의에서의 제자 마운트조이(Mountjoy) 남작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 콜레트(John Colet), 모어(Thomas More), 와르함(Warham) 대주교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가 고전문학에 적용한 주석학적 방법을 성서에 적용할 것을 모색하기도 하다가 1500년 대륙으로 돌아와 자유로운 연구를 위해 파리와 루뱅에서의 교수직을 거절하고 그리스어를 공부하였다. 2차 영국방문(1505~1506)에서 그리스 신약성서를 고전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이탈리아 체류 뒤 헨리 8세 즉위 때 영국을 다시 방문하여 모어의 집에서 머무르며 ≪우신예찬≫(愚神禮讚, Encomium moriae)을 썼다. 1511년 피셔(John Fisher)에 이끌려 케임브리지의 퀸대학에서 2년 반 동안 체류, 최초의 그리스어 교수가 되었고, 1517년 교황문서에 의해 수도원의 의무로부터 벗어났다. 1521년엔 바젤의 저명한 출판업자 프레뷰(J. Frebeu) 집에서 8년간, 1529년 바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6년간 거주하다 1536년 바젤에서 사망하였다.
초기 저서로는 그리스어 및 라틴어로 된 주제별 금언집 ≪아다지아≫(Adagia, 1500), 신앙의 완성에 있어서의 학문의 유효성을 밝힌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1504)가 있다.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받은 ≪우신예찬≫은 ≪대화≫(Colloquies, 1519)와 더불어 수도원과 교회의 부패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싣고 있는데, 종교개혁의 촉진제가 되었다. 1516년의 신약성서 번역은 신학연구에 획기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스어 원전은 16세기에 출현한 많은 모국어 신약성서의 기반이 되었다. 이밖에 ≪성 예로니모≫(St. Hieronymus, 9권, 1516) 등 많은 교부들의 저서를 정리 출판하였다.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던 그는 방대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로서 저서를 통해 종교개혁의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폭력과 혁명에 대한 기피와 안정 지향적 성향으로 본격적인 종교개혁운동은 반대하였다. 1524년 루터와 개혁 논쟁을 시작, ≪Diatribe de Libero Arbitrio≫(1525)와 ≪Hyperaspistes≫(1526) 등을 남겼으며, 후기에는 교회와 개혁가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파리대학은 1525년부터 1542년까지 저서들을 판금시켰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으나 그의 저서는 오랫동안 교황청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엄격개연주의 [한] 嚴格蓋然主義 [라] probabiliorismus [영] probabiliorism [프] probabiliorisme
일정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는가, 갖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부딪혔을 때, 법에 규정된 대로 따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법에 반하는 이유가 있을 때에만 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엄격주의라 한다. 엄격주의는 1577년 바르톨로메오(Bartholomaeus de Medina)에 의해 원칙이 선언되었다. 자유롭게 행위할 개연성이 없다면 법에 따르는 것이 더 개연적이고, 똑같은 개연성을 갖는다면 법에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656년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도미니코회 회칙으로 선언되었다. 18세기 이후 이 주장은 거의 주장되지 않는다.
언양본당 [한] 彦陽本堂
주보로 ‘그리스도왕’을 모시는 이 본당은 1927년 5월 25일 경남 울주군 언양면 송대리(蔚州郡 彦陽面 松臺里)에 프랑스인 에밀보드벤(한국명 정도평) 신부가 부임하여 창설되었다. 경주, 울산, 양산 등지 사이에 끼인 언양은 일찍이 박해시대에 신자들의 피난처로 유서깊은 곳이다. 이 고장 출신 교인 중에는 병인박해(1866년) 때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허인백(許仁伯)을 비롯하여, 김종륜(金宗倫), 이양등(李陽登) 등이 이웃 울산 대재[竹嶺]에 숨었다가 경주 포교들에게 잡혀가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나가 간월산(肝月山) 일대에 숨어살던 신자들이 마을로 돌아와 살게 되면서 현재 교회가 들어선 송대리를 중심으로 공소를 차리고, 부산 진본당의 관할을 받았다.
이런 발자취를 통하여 1,300명의 신자를 모아 본당으로 발족한 이 성당의 보드벤 신부는 신자들이 오랜 피난살이로 가난하기 때문에 성당 건립기금을 모을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생활비를 줄여 모은 돈과 프랑스 본국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30년에 건축을 시작, 6년이란 세월을 걸려 석조의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1936년 10월 25일 대구교구 다블뤼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1954년 1월 소화 유치원을 설립하고 1957년엔 강당을 세웠으며 교세의 확장으로 1958년 5월에는 구포본당을 분할하였다. 1966년 12월 예수성심전교수녀회 분원을 개설하고, 1979년 11월에는 안나 데레사회관을 준공하였다. 현재 이 본당은 하용달(河龍達, 안드레아) 신부가 맡고 있으며 신자수 1,600명에 6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본당의 주임을 맡았던 신부는 2대 공(孔) 신부, 3대 조 신부, 4대 정수길(鄭水吉, 요셉), 5대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 6대 이성만(李性萬, 이냐시오), 7대 최병선(崔炳璇, 요한), 8대 김재석(金在石, 요셉), 9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10대 이돈우(李敦雨, 레오), 11대 신윤우(申允雨, 갈리스도), 12대 배상섭(裵尙燮, 요한), 13대 이동훈(李東勳, 안토니오), 14대 김성도(金成道, 모이세), 15대 최영철(崔永喆, 알로이시오), 16대 권지호(權支浩, 프란치스코), 17대 김승주(金承柱, 크리소스토모) 신부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