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1911∼1984). 대구 대교구 부주교. 몬시뇰. 세례명 야고보.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 역곡리(慶尙北道 尙州郡 恭儉面 力谷里)에서 출생. 1935년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해 5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경남 옥포(玉浦)본당에서 8년 동안 사목하고 1943 대구교구장 비서를 거쳐 1945년 6월 왜관(倭館)본당 주임으로 부임, 본당 사목에 헌신하는 한편 왜관 순심(純心)여자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후 부산 중앙본당(1948년), 경북 영천본당(1950년), 대구 삼덕동본당(1959년) 등의 주임 신부를 역임하고 1962년 1월 대구 교구 비서실장, 1962년 7월 부주교에 임명되었으며, 1964년 대구지방법원 가사재판 조정위원,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상임위원, 경북도청 자문위원 등에 위촉되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대구 대봉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한 후 1971년 대구 가톨릭 문회관 관장겸 대구교구 가톨릭 액션협의회 총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대구교구사제단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또한 유신헌법에 의한 제1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78년부터 대구 가톨릭 근로자회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81년 대구교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이기수(李基守, 야고버), 전석재(全碩在, 이냐시오) 신부와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에 서임되었다. 1982년부터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투병생활 중에 1984년 9월 1일 대구 가톨릭 병원에서 선종, 대구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명서 [한] 李∼
이∼(1821∼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베드로. 일명 재덕.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다가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전주(全州)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자 전라도지방에서는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어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조화서 · 조윤호 부자,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 중병에 걸려 조화서가 여러 번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체포되었고, 전주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천주를 버릴 수 없습니다” 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며 순교를 예비했다.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매임 [한] 李梅任
이매임(1788∼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데레사. 성녀 허계임(許季任)의 시누이. 성녀 이정희(李貞喜) · 이영희(李英喜) 자매의 고모.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과부가 되어 봉천동(奉天洞)의 친정으로 돌아온 후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입교 후 친정 식구들을 가르치고 권면하여 신앙으로 인도했고 이어 조카 이영희가 혼기에 이르러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상경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1839년 4월초 함께 살고 있던 이정희 · 이영희 자매, 김 루시아, 김성임(金成任)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허계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이들과 함께 4월 11일 남명혁(南明赫)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결국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만수 [한] 李晩秀 [관련] 토사주문
이만수(1752∼1820). 자(字)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翁) 혹은 극원(-園). 연안(延安) 이(李)씨. 복원(福源)의 아들. 1783년 사마시(司馬試)에, 17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각각 합격, 대사성(大司成) 겸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공조판서, 수원유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호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치안유지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수원 유수로 부임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그래서 그가 대제학을 지내던 시절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짓기도 하였다. <토사주문>이란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으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박해사실 때문에 청나라 황제가 문책할 것을 두려워 한 조정이 진주사(陳奏使)를 보내기로 하고 이 진주사가 청나라 황제를 만났을 때 전한 글을 말한다. (⇒) <토사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