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심문 [한] 異端審問 [관련] 종교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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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한] 異端 [라] haeresis [영] heresy

세례 받은 사람이 가톨릭의 교의(敎義) 중 일부를 거부하는 행위, 또는 거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 이 말은 특정 이론을 지지하는 행위, 는 지지하는 자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airesi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런 의미로 사용된 예는 바리사이‘파’(사도 15:5), 나자렛 ‘도당’(사도 24:5) 등의 경우이다. 한편 이 말은 이교(離敎)의 뜻으로(1고린 11:19), 육정이 빚어내는 일의 하나로(갈라 5:20), 또는 해로운 교설을 도입하여 주님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2베드 2:1) 사용되었다. 후자의 경우 즉, ‘이단’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교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선례(2베드 2:1)는 교회사를 통하여 존중되어 왔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서 벗어난 이단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이단자는 진리의 적(Ambrosius)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로서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견해를 앞세우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진리에 머무르기 위해서 사도의 교리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Lyons의 Irenaeus), 교회와 일치하여 살아가야 한다(Cyprianus). 초대 교회 때 교회의 신앙적 일치에서 떨어져 나간 이단은 중죄에 이단에 빠진 자는 오랜 기간의 참회과정을 거쳐 안수를 받고 나서 교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단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교회에 입교하려는 자에게는 이단의 책임을 물을 수 없으므로 참회과정을 생략하고 안수하였다.

교회법에 의하면 이단이란 세례 받은 신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다(751조). 즉 이단의 성립에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가 세례 받은 신자여야 하고, 둘째 계시진리 즉 교의에 관하여 오류나 의심이 있어야 하며, 셋째 오류나 의심을 지속하자고자 하는 의지가 외부적으로, 언어 기타의 표시로 표현되어야 한다(교회법 1346조). 내면적으로 교의를 부정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신앙을 거스르는 죄가 될 뿐이다(2베드 2:17, 호세 2:12-). 파문의 사면권은 내정(forum internum)에서는 성좌에, 외정에서는 지역 재치권자에게 속한다.

이단자의 파문을 규정한 교회법 조문 (1364조)은 가톨릭 신자가 자기 탓으로 가톨릭 신앙과 친교에서 떨어져 나간 경우에 적용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오래전에 갈라진 개신교 공동체에 속하여 있는 신도들에게는 가톨릭 교의를 거부하거나 이에 관하여 지닌 오류나 의심을 지속하려는 완고한 의지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단과 이단자라는 말을 피하고 그 대신 갈라진 비가톨릭 그리스도 교인 혹은 갈라진 형제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 공의회 이후에는 이단의 개념이 달라졌다. 일찍이 가톨릭 교회 밖에서 태어나면서 세례를 받은 자는 이단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한 아우구스티노의 견해가 오늘날 그대로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단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치는 교의를 고의로 거부하여 교회 형벌의 대상이 되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Heribrnt Heinemann, Heresy, in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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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라] Ignatius

① 로욜라의~(I. de Loyola, 1491/1495~1556). 성인. 축일은 7월 31일. 예수회의 창립자. 스페인의 로욜라 가문 출신. 일찍 입대(入隊), 팜펠루나(Pampeluna) 함락(1521년) 때 부상당하여 병상에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서적을 읽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회복 후 몬세라트(Montserrat)에서 참회, 만레사(Manresa)에서 기도와 금욕 생활을 하였다. 대부분 거기서 쓰여진 ≪영성수련≫(靈性修鍊, Exercitia Spiritualia)은 신비체험을 통해 얻은 그의 영성적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다. 로마와 예루살렘을 탁발(托鉢) 여행,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어린 학생들에게서 문법부터 배우기 시작, 마침내 파리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524∼1534년).

파리 시절, 사비에르(St. Francis Xavier)와 파베르(Petrus Faber) 등 뒷날 첫 예수회원이 된 6인을 알게 되었고 모두 153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들은 교황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수도단체의 설립을 청원, 1540년 교황 바오로(Paulus) 3세의 대칙서 에 의해 예수회는 공인되었다. 그 뒤 급성장하는 예수회와 그 회칙 제정(1547∼1550)에 전념, 회칙은 일생을 통해 개편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수회를 통해 교회를 안으로부터 개혁시킨 데 있으며, 예수회는 교육사업과 성사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 그리고 새로 발견된 이교지역의 복음화를 통해 종교개혁으로 타격받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② 안티오키아의~(I. Antiochenus, 35?∼110?). 성인.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주교, 초기 교회의 신학자. 시리아 출생으로 110년경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축일은 로마전례력에서는 10월 17일. 희랍 정교회에서는 12월 20일. 그의 전반생은 알려져 있지 않은 데 안티오키아에서 개종한 뒤 그리스도 교인이란 명목으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로마로 호송되었다. 호송 도중 스미르나(Smyrna)에서 폴리카르포(Polycarpus)의 환영을 받았고 인근 교회에서도 문안자를 보내왔다. 이에 대한 답례로, 그는 스미르나에서 에페소, 마녜시아(Magnesia), 트랄레스(Tralles) 교회 및 로마 교회로, 트로아스(Troas)에서 필라델피아와 스미르나 교회, 폴리카르포에서 서간을 써 보냈다. 그의 서간은 7개의 진본(眞本)이 전해진다.

서간에서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반박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人性)을 강조했고, 주교직에서 교회의 일치를 구체화하였으며 그의 지역에서 군주제적(君主制的) 주교직을 관철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했듯이 주교를 따르라고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는 것처럼 주교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가톨릭’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사도 전통을 계승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사도 교부들 중 바울로의 사상과 요한의 사상을 결합하여 조화있게 발전시킨 독특한 실천신학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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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한] 李起俊

이기준(1884∼1977). 신부, 세례명은 토마스. 1884년 8월 5일 충북 진천의 배티(현 忠北 鎭川郡 柏谷面 平山里)에서 교우가정의 6형제 중 차남(次男)으로 출생, 태어난 뒤 바로 가족과 함께 안성 미리내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하여 1899년 8월 당시 미리내 본당 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추천으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 1913년 5월 17일 정규량(鄭圭良), 이종순(李鍾順)과 함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종현 대성당(지금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동년 6월 첫 임지인 평북 용천의 산태(山台)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하여 그 뒤 1913년 11월 황해도 봉산 검수본당 주임신부, 1915년 황해도 서흥(瑞興) 본당 주임신부, 192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라틴어 교수, 1930년 춘천 약사리(藥司里) 본당 주임신부, 1932년 황해도 신천(信川) 본당 주임신부, 1933년 황해도 장연(長淵) 본당 주임신부, 1935년 명동 성가숙(聖家宿) 사감(舍監), 1942년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 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였고, 광복 후 1947년에는 유명무실한 교구 출판부 대신 가톨릭출판사를 설립하여 일제하에서 중단되었던 각종 교리 · 신심서를 출판하였다. 1951년 명동본당 주임신부직을 사퇴하고 부주교로만 봉직하다가 1959년 은퇴,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신부, 성직자, 수도자, 일반 평신도의 고해신부로 사제의 사명을 다하다가 1977년 8월 15일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93세로 선종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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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 [한] 利己主義 [라] egoismus [영] egoism

이기주의는 철학에서 때로 인식론적 문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주로 윤리학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기주의는 유아론의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윤리학에서는 이기주의를 “개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 및 모든 자연법과 신 중심 체계(theocentric systems)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기주의는 또한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쾌락주의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인생의 주요 목표로 삼는 ‘권력에의 의지’ 또는 ‘초인적 존재’와 자아 발전을 유일한 존재 이유로 삼는 ‘완벽주의적 이기주의’(perfectionistic egoism) 등과 공통된 부류에 속한다.

1. 주요 지지자 : 고대의 키레네파와 에피큐리안파 사람들은 쾌락주의적 이기주의자들이었으나 이들은 친절함과 우정과 같은 덕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주의가 논리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이기주의를 완화시켰다. 그 뒤 이기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과 함께 사라졌다가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에서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의 쾌락주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났으며 17∼18세기에는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영국의 홉즈는 유물주의와 이에 관련된 윤리학을 옹호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선은 단순히 인간들의 욕구의 대상임에 반하여 악은 그들의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익과 선천적 성격은 주로 자위적 본능과 개인의 힘의 증대와 쾌락에 달려있다고 보았으며 그에 의하면 전쟁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왜냐하면 만약 같은 것을 여러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단지 서로를 파괴시키거나 굴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맨데빌(Mandeville, 1670~1733)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다 날카롭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꿀벌의 우화≫에서 개인적 악이 공동의 이익이 된다고까지 암시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홉즈와 동시대인인 가상디(Gassendi)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쾌락주의가 가장 확고한 기초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쾌락주의의 부활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독자들이 그 불합리성을 간파하기도 했거니와 그의 사상이 그리스도교 사상의 상부 구조를 경시하는 근본적인 쾌락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상디와 영국 경험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도자들은 이기주의를 다소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들 중에는 엘베시오(C.A. Helvetius, 1715~1771), 메트리(J. Mettrie), 홀바흐(Holbach) 같은 이들이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에 의해 흡수되거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으며 허버트 스펜서는 이기주의와 자비는 둘 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상적이고 필요한 현상이며 이들은 진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서로 조화되고 합쳐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반면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노예적 다수를 위해서는 박애와 동정의 그리스도적 윤리가 적당하지만 초인들은 선과 악의 일반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20세기에는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문학작품을 통해 이기주의의 개념이 계속 전파되고 있다.

2. 평가 :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기본진리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②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①의 사실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된다. ③ 쾌락과 개인의 잠재력의 발전과 힘의 획득은 인간의 정당한 권리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이 그의 유일한 목적임을 주장하는 이기주의는 그 중심에 있어 심각하고 해로운 요소를 안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유물론적 또는 실증적으로 거부한 데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철학으로서 이기주의의 부적당함은 또한 정신건강에 미치는 여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기주의자는 사회 및 자기 자신과의 불가피한 모순들과 부딪치게 되어 사랑할 수도 적응할 수도 없게 되며, 결국 좌절되고 불행해지게 된다. 모든 인간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며 소유하는 일이다. 인간은 또한 같은 성격과 필요와 권리를 지닌다. 그러므로 적절하고 합리적인 생을 살기 위하여 인간은 인성의 뚜렷한 모순을 확연히 인식해야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잊을 정도로 열렬히 하느님과 그의 동료를 섬길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D. Broad, Certain Features in Moore its Ethical Doctrines, Illinois 1942 / R.A. Tsanoff, The Moral Ideals of Our Civilization, New York 1942 / J. Nuttin, Psycho-analysis and Personality, tr. G. Lamb, New York 1953 / J. Leclercq, Les Grandes lignnes de la philosophie morale, Paris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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