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연(1738∼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충주(忠州) 출신으로 권일신(權日身)에게 문교(問敎)하여 입교하였다. 충주지방에서 전교하다가 신유박해(辛酉迫害) 초인 1800년말 체포되어 배교를 취소하고 자신이 입교시킨 이부춘(李富春), 이석중(李石中), 며느리 권아기련(權阿只連) 등과 함께 1801년 10월 5일(음 8월 27일) 충주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기양 [한] 李基讓
이기양(1744∼1802). 문인.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본관은 광주(廣州), 덕형(德馨)의 7대손. 1744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었고 1784년 이벽(李檗)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을 벌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795년 정시문과 을과(庭試文科乙科)에 급제,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이어 검상(檢詳), 승지(承旨), 의주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한 후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淸)에 갔다가 다시 천주교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귀국 후 이가환(李家煥) 등 신서파(信西派)와 교유하며 서학(西學)을 강론하고 실학(實學)을 토대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병조참판(兵曹參判), 우승지(右承旨),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801년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禮曹參判),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이해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고발되어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사후(死後) 신원(伸寃), 복관(復官)되었다. 저서로 ≪복암유고≫(伏菴遺稿)가 있다.
이기경 [한] 李基慶
이기경(1756~1819).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휴길(休吉), 호는 척암(瘠菴). 본관은 전주(全州). 지평 제현(齊顯)의 아들. 177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89년 식년문과 을과(式年文科乙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 강제문신(講製文臣)을 거쳐 감찰(監察) ·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이승훈(李承薰)과 동문수학했던 관계로 1784년 이승훈이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온 뒤 많은 서학서(西學書)를 빌어 보고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곧 공서파(攻西派)에 가담하여 천주교를 배격하였고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과 친(親)신서파인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1794년 유배에서 풀려나 이듬해 지평(持平)에 복직, 그 뒤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언(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낸 뒤 1802년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 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다가 다시 함경도 단천(端川)에 유배되었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이남규(李南圭)의 탄핵으로 다시 경상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어, 1809년 풀려나왔다. 저서로는 그의 후손(後孫)들에 의해 편찬이 완료된 ≪벽위편≫(闢衛篇)이 있는데 이는 정조(正祖) · 순조(純祖) 때의 박해와 교회사(敎會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규경 [한] 李圭景
이규경(1788~?). 조선 후기 실학자.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士). 존관은 전주. 이덕무(李德懋)의 손자, 이광규(李光葵)의 아들.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실학을 연구,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북학파인 조부의 실학을 계승하는 한편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천문지리 · 역산 · 역사 · 예술 · 종교 · 풍속 · 생물 등 모든 학문을 백과전서(百科全書)적으로 고정변증(考訂辨證)했고, 이러한 자신의 연구 업적을 1,400여 항 6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하였다.
특히 서학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수십 종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열독했고 서학의 도입, 활용을 주장했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선 약 80여항에 걸쳐 서학을 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오주연문장전사고≫와 ≪오주서종≫(五洲書種)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