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교육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13,1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제목 차례>
들어가는 말 5
하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9
1. 부르시는 예수님 9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13
3.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14
4. 봉사직무를 수행하면서 다가오는 비난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7
제자훈련1 21
둘.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23
1.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태5,13-16) 24
2.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27
3. 스스로 지키고, 지키고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28
4. 화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주님의 제자들 29
5. “예”와 “아니오”를 명확하게 하여라.(마태5,33-37) 32
6. 폭력을 포기하여라.(마태5,38-42) 33
7.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3-48) 38
8.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 42
9.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44
10.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기(마르6,1-6) 45
① 본당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봉사자들 46
② 칭찬이 아니라 모욕으로 다가올 때의 대처법 46
11. 주님께 의탁하기 46
제자훈련 2 53
셋.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55
1. 무화과나무를 통한 가르침(마태21,18-22) 56
2. 지금 이 순간의 믿음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58
3. 풍랑 속에서 주님을 믿게 된 제자들 64
4.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제자들 65
5.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 67
6.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69
7. 토마스의 불신과 믿음 73
제자훈련 3 77
넷.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78
1. 성령을 약속하신 예수님(요한14,15-31) 78
2. 성령강림 80
2.1. 베드로 사도의 변화 82
2.2. 백성의 변화된 삶 88
2.3. 바르나바. 90
2.4.하나니아스와 사피라 92
2.5. 스테파노의 순교와 복음의 전파 93
제자훈련 4 96
다섯. 우리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97
1.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제자들의 삶 98
2. 일흔두 제자를 파견(루카10,1-12)을 통해서 제자의 삶을 배우기 102
3. 함께 복음을 선포하기(마르9,38-41) 107
제자훈련 5 112
여섯. 주님의 기도 117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18
2.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123
3.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125
4.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128
5.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32
6.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133
7.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134
8. 악에서 구하소서. 136
9. 아멘. 139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141
제자훈련 6 142
일곱. 고백성사를 보려고 하는 나. 143
제자훈련 7 147
여덟. 임종자들을 돌보는 주님의 제자들 148
제자훈련 8 152
아홉.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대부모와 대자녀 153
하나. 대부모에 대한 교회법의 규정 154
둘. 어떤 사람이 대부모가 되어야 하는가? 154
셋. 대부모의 권리 155
넷. 대자녀의 의무 155
다섯. 대자녀에 대한 생각들 156
제자훈련 9 158
열. 첫영성체 159
제자훈련 10. 162
들어가는 말
–예수님의 제자교육–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시어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부족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강요하지 않으시고, 칭찬하고 격려하시며 당신의 삶으로 어떻게 사도로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기도 하셨지만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의 고을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은 사랑의 사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하고 더러운 영과 군중들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조용히 여쭈었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9,28)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서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물으셨지만, 제자들에게 밤을 새워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제야 당신의 모든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서로 그렇게 사랑하라고 모범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후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하나 가르치시며 강요하지 않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감싸 주시며,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면 당신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당당하게 실천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아십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때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떻게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따르고 있으며, 주님께서 가신 길을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은 구원의 길이고, 생명을 주시기 위한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의 삶은 부활을 향해야 하고, 구원과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인 내가 걷고 있는 주님 향한 길은 마지못해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삶을 내 삶으로 만들기 위해 가는 길이며, 구원을 향해 가는 길이고, 나와 내 형제자매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기 위해 걷는 길입니다. 그래서 내가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걷기 위해 기도하고 있고, 자기 성장과 성숙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 기쁨을 형제자매들에게 전하기 위해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고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걷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주님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공동체에 얼마나 큰 은총을 주고 있습니까? 하느님 자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 기쁨을 살아가며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데, 그들을 봉사자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봉사자는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며, 형제자매들이 기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성당과 단체와 구역에서 반겨주며, 신앙안에서 친교를 이루며 함께 합니다. 젊은 봉사자는 준비한 열성으로, 나이 드신 봉사자는 삶으로 신앙의 기쁨과 감동을 전해 줍니다.
기도하는 봉사자는 성경을 가까이하며, 묵상기도를 통해 말씀의 맛을 압니다. 기도의 기쁨을 알고 있고 기도하며 기도해 주며, 공동체를 사랑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봉사자는 본당의 전례와 다양한 행사를 형제자매들이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안에서 기쁨과 친교를 누리며, 신앙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신앙공동체도 조직이기에 조직관리를 효과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며, 봉사의 무게가 무겁지 않도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합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동료 봉사자를 사랑합니다.
첫째,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람 낚는 어부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며, 경건하게 전례에 참례하며 기도하는 봉사자
둘째, 인간관계에 충실하기보다는 신앙생활에 충실하며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봉사자
셋째, 공동체를 일치시키며 주님 안에서의 삶을 통해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봉사자
넷째, 기본 교리지식을 갖추고 있고, 묵주기도와 삼종기도를 바칠 줄 알며, 주요기도문을 외울 줄 알고, 아침저녁 기도를 성실하게 바치는 봉사자
다섯째,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 안에서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봉사자
위와 같은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봉사자들은 다음의 것에 힘을 씁니다.
첫째, 교리를 공부하고, 교리 내용을 형제자매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웁니다.
둘째, 기도문의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는 깊이 있게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염경기도에서 묵상기도로 이어지고, 그 묵상기도는 관상기도로 향하게 됩니다.
셋째,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73권의 성경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공부합니다.
넷째, 하느님 백성이 어떻게 전례를 거행해야 하는지를 늘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하고 배웁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기쁘게 희생제사를 바치는 것이 전례입니다. 하느님 백성이 한자리에 모여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고,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참된 친교를 나누는 전례는 하느님 백성의 삶의 중심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기쁨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례 안에서 보고 체험할 때 참된 평화는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전례의 중심은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모든 전례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게 됩니다. 또한 그 전례가 이루어지는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니, 하느님 자녀들이 한 마음으로 하느님 집에 머물며 하느님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다섯째, 공동체를 이끌어 가기 위해 기도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장과 성숙이 신앙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함께 기도하고 함께 배우며 동료 봉사자들과 함께 고민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이 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봉사는 아무나 시켜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직무를 맡아야 하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쁨과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어울릴 수 있도록, 그 직무를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한 임기가 끝나면 냉담을 하거나 임기 중에 그만두려고 하거나, 임기 중에 본당공동체와의 친교를 단절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앙안에 머물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봉사자로서 형제자매들이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는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봉사자들은 모여서 기쁘게 기도하고, 영적인 양식으로 충만해지며, 모임과 활동 후에는 기쁨이 넘치고, 다음 모임이 기다려져야 합니다. 신앙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함께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격려를 받으며 바쁜 일상 삶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 형성하는 봉사자들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함께 고민해 봅시다⓵
지금 어떻게 봉사하고 계십니까? 어떤 봉사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저를 작은 도구로 부르신 하느님 아버지!
제가 주님의 작은 빗자루가 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간전히 원하나이다.
저의 이 열정이 지속적으로 타 올라, 저의 온 생애에는 큰 기쁨이 되고, 형제자매들에게는 작은 모범이 되며, 하느님께는 작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하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해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배를 타고 신앙의 그물을 내려 멋진 삶이라는 미끼를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길 바라시기에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1.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십니다(루카5,2). 그런데 그 어부들은 밤새 허탕 친 어부들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이제 그 허탕 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탕친 어부들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들 중에서 시몬의 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시몬의 집에 계셨었고, 그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아주 귀한 손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나가 달라고 부탁”(루카5,3)하십니다. 비록 밤새 고기잡이에서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말씀하시니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시몬의 배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장소가 되었고, 그 영광된 장소에 시몬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릴까요? 자신의 배를 사람들이 보고 있고, 자신의 배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시몬의 배는 주님을 모신 성전이요, 말씀을 전하는 강론대인 것입니다.
① 요구하시는 예수님
백성들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몬에게는 은총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유혹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지금은 고기가 나올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금 그물을 씻었는데 이젠 좀 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시몬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예’해야 할지, 아니면 ‘싫습니다.’라고 말해야 할지를 갈등하게 만든 시간입니다.
사실 고기잡이들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시간에 그물을 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습니다. 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밤을 온통 지새우면서도 한 마리도 건져 올리지 못하였다면 하물며 아침나절에 고기가 잡힐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남았습니다. 만일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②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시몬 베드로
시몬은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5,5)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못 잡을 수도 있겠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해야 할 자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자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조건 없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늘“비록 절망 속이라 할지라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안 되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지,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아브라함이 고백했고, 성모님께서도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고백할 차례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저는 무엇이든지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조건을 걸어서도 안 됩니다. 시몬은 ‘못 잡으면 보상 해 줘유!’ 또는 ‘우리가 고기 잡는 것을 무엇으로 보증하시겠어요?’ 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늘 믿음을 요구합니다. 온전히 믿고 ‘예’ 할때 주님께서는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쏟아부어 주십니다.
③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했습니다. 그 순명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매우 많은 물고기”(루카5,6)를 통해 헛된 행동이 아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믿지 않고, 응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배를 띄우고 그물을 던지지 않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나를 억지로 행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에 ‘예’하고 응답할 때, 나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예’하고 응답하는 신앙인, 응답을 통해서 주님의 일에 조금이라도 협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시몬은 혼자서는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의 고기들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루카5,7).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비록 처음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씀에 ‘예’하고 응답한 결과는 배에 가득한 물고기들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응답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해 보고 나면 큰 결실을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안 돼요. 불가능해요. 왜 제가 해야 하죠?’라는 말은 내 입에서 나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말은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④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베드로 사도
시몬 베드로는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예수님의 말씀에 어쩔 수 없이 그물을 던졌던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물을 던지러 나가는 시몬 베드로를 본 동료들도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뭣 하러 들으려고! 어리석은 행동이야! 예수님은 고기잡이 잘 모르시잖아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한 시몬 베드로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것 보세요. 지금은 고기가 안 잡힐 시간이라니까요.’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고기가 잡히니 ‘주님의 크신 능력’ 앞에 자신의 불신이 부끄러웠고, 죄송했던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주님!”(루카5,8)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본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저 같으면 “예수님! 이번에는 어디에다 그물을 던질까요? 우리 오늘부터 동업하지요? 50대 50으로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 7, 저 3 해도 됩니다.” 아마 뻔뻔스럽게도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참으로 우리 신앙의 모범이십니다. 부족한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범이십니다. 청하기만 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범이십니다.
⑤ 시몬을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이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한 어부가 될 것입니다. 사람을 낚아서 주님께로 향하게 만들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라는 배를 타고,
신앙이라는 그물을 내려
의롭고 경건한 삶이라는 미끼를 던져
사람들을 낚아 주님께로 나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손에서 그물을 놓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며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4,19)
예수님께서는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부르셨으니 부르신 그분께서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라 하시면 하면 됩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이가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된 이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5,11).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된 이들은 죄로 기울어진 과거의 생활과 결별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렸던 것처럼, 주님을 따르려는 이들은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장애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이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결코 응답할 수가 없으며, 참된 신앙생활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그물(아집, 교만, 위선, 게으름, 욕심, 불신, 불순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봅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봅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열정과 믿음을 보셨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하고 응답했다고 해서 제자의 삶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며,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주어진 일들을 해 나갈 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유다와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부르셨을까요?
첫째,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마르1,17). 사람 낚는 어부는 신앙이라는 배를 타고, 믿음이라는 그물을 세상에 내려, 사람들에게 “신앙인의 멋진 삶”이라는 미끼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끌어 올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마르6,12-13). 그러므로 나 또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9-20)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3.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고, 그의 고백은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든지”(루카9,57)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멀고 험난한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스승님이 가시는 길을 제가 갈 수 있도록 축복을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① 버리고 따르기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와 삯꾼들과 함께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참조:마르1,18-20). 레위도 “나를 따라라.”(마르2,14)라고 말씀하시자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버리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나를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습관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활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움켜잡고 따르려고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고 하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나는 버리기로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②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려움을 이겨낼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9,58)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도 배척을 당하셨고, 사마리아에서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이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함께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③ 예수님을 더 사랑하며 따르기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세속에 대한 집착.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연연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씀하셨습니다.
④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서 따르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갑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고집을 피우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는 예수님을 따라야지,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면서 “나는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11,23)
양다리를 걸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쪽 편에 확실하게 서야 합니다. 예수님 쪽에 설 것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는 것이고,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입니다. 물론 확실하게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께 보여 드리며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강림을 기다히며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베드로 사도는 배반자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보궐선거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도의 자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즉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사도1,21-22)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도의 자격을 주어 자리를 채우는 이유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의 순교 후에는 보궐선거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이유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깨닫게 되었기에 순교한 사도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다른 사도를 뽑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데 만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를 뽑을 때 베드로 사도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혔고, 마티아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봉사자를 뽑을 때도 이렇게 뽑아야 합니다. 교회 정신이 있는 사람, 신앙이 있는 사람, 공동체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을 봉사자로 뽑아야 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봉사자로 뽑아야 하고,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봉사자로 뽑아야 합니다. 아무나 뽑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무나 뽑아서도 안 됩니다. 신앙이 있는 이를 뽑아야 신앙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어야 만이 공동체에서 신앙적인 결정을 할 수 있고, 신앙적인 결정에 순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봉사자로 임명되는데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다른 이가 말한다면 서운한 마음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적합한 인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서로 노력하며 주님을 위한 작은 봉사를 하고자 하는 원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의탁하며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4. 봉사직무를 수행하면서 다가오는 비난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은 사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이 된 세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라는 세리를 눈 여겨 보십니다. 마태오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비록 동족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그 안정적인 자리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5,27)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자 마태오는 이런 저런 요구를 하지 않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세리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 그리고 같은 백성인 유다인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세리나 창녀들과도 함께 어울리신 그분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결심한 세리 마태오는 잔치를 벌려 예수님을 집에 모셨습니다. 여러 동료들을 불러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못마땅해 합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실 수 있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본당에서도 봉사자를 뽑으면 “어떻게 저런 사람을 봉사자로 세울 수가 있는가? 저 사람은 이런 저런 사람이고…, 본당의 얼굴도 있는데…,” 하며 이런 저런 말을 합니다. 봉사자들끼리도 말을 만듭니다.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별로 관심이 없는데,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 같거나, 본당 신부님이랑 더 친해 보이면 불평하거나 비난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상대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같은 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적군의 가장 능력 있는 장군을 없애기 위해서 많은 계략을 꾸미고, 그 장군이 사라질 때, 그 나라도 몰락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군대는 서로 일치해야 합니다. 봉사자들 중에 누군가가 일을 잘 못하면 비난 할 것이 아니라 도와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면 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들의 모습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보기에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불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감정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30)
이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지 않고 제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 걸어봤자 손해 볼 것이 뻔하고, 또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릴 용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께 들으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리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기에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제자들을 불러내어 시비를 걸었을 수도 있습니다.
시비를 걸며 불평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명확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루카5,31)
그리고 당신의 사명을 단순명료하게 말씀해 주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훌륭한 의사이십니다. 그런데 의사에게 병자가 가지 않으면 병자는 병을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병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주님께로 나아온 이들은 모두 주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하러 오셨기 때문에 죄인들과 어울리셨고, 죄인들을 받아들여 주셨고, 그들과 함께 음식도 드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더 나아가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진정한 의인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머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은 형제자매들을 단죄하거나 심판함으로서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에서 멀어진 “자칭 의인”들은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을, 봉사자들을 단죄합니다.
사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죄가 없고, 허물이 없기에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회개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봅니다. 의롭게 살아가지만 언제나 주님 앞에서 부족함과 허물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고, 나를 사랑하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동체의 봉사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능력이 있어서 그 직책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함께 이것을 해 봅시다.’라고 도움을 청하며 형제자매들과 일치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동료 봉사자들이 수고할 때 함께 하고, 격려해 주고, 무거운 짊이 있으면 함께 들어주고, 내가 맡은 부분을 충실히 수행하여 동료 봉사자들과 본당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기 때문이고, 그 일을 맡기시기 위해 부족한 나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도 비난을 받으셨고, 모욕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모욕이나 무관심, 비난이나 조롱도 달게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하십니까? 서운하십니까? 혹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보다도 더 억울하십니까?”
함께 고민해 봅시다⓶.
세례성사를 통하여 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런 저런 봉사를 했고, 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분명 상대방의 말이 옳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마음 안에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납니다. 이해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고,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못하겠다.”고 말하며 뒤로 물러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못 하게 하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어떤 직책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가 아니라 그 직책에 임명한 신부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단체장의 의견을 따라야 하고, 그 직책을 통해 신앙의 이익을 얻게 될 신자들의 기대도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시는 간섭이라고 생각하고, 내 생각은 다른 모든 이들의 생각보다 중요하고, 봉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만큼만 하려고 합니다.
또한 봉사를 하다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봉사자를 위한 봉사를 해야 할 때가 있으며, 어떤 때는 형제자매들로부터 마치 종처럼 부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혀 듣지도 못하고, 당연하게 요구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봉사 했던 사람들로부터 “예전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왜 그리도 잘 못하는가? 나는 예전에 했기 때문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나도 전에는 할 만큼 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봉사자들은 사제를 통해서, 함께 봉사하는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작은 구원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주어지는 시련이나 유혹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분명히 힘을 주십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이겨내지 못할 어려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봉사자들은 “여기까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자훈련1
첫째, 내가 맡고 있는 봉사직무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 청해야 하는 것들 이야기하기
둘째, 내가 맡고 있는 봉사직무를 수행하면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 했을 때” 벌어질 일들을 떠올려 보기
셋째, 봉사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형제자매들과 협력해야 할 목록을 정하기
⓵ 기도
⓶ 친교
⓷ 교육
⓸ 활동
⓹ 기타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뽑으신 것이 아니라 “보시고” 뽑으셨습니다.
두 발은 땅을 디디고 있지만 마음은 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람들을 뽑으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나가 아니라 주님께 뽑힌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에는 당연히 포기가 따라옵니다.
하나를 선택했으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예수님을 선택했으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며,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움켜잡을 것은 확실하게 움켜잡으며, 해야 할 것은 기쁘게 행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어 봅시다.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둘.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살아가야 하고, 실천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유혹과 시련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유혹과 시편이 닥쳐오면 무너지고, 더 나아가 신앙까지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쉬는 교우들 중에서 전에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봉사가 끝난 다음에 성당 일에 관심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으면 봉사가 끝난 후에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7,22)라고 미리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천하지 않고, 말만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선고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7,23)
봉사하다가 오히려 신앙을 잃고 냉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를 하면서 신앙을 더욱 키우는 이들은 더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봉사직을 수행하는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신앙을 키워가야 합니다. 봉사는 신앙인이 하는 것이고, 신앙인의 사랑과 열정과 섬김이 봉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4-35)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할 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고,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그렇게 말씀하셨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태5,13-16)
빛과 소금은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공동체의 빛과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소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동시에 부패를 막아 줍니다. 또 사람이 소금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귀한 존재임을 의미하는데, “내가 세상의 소금”이니 나는 정말로 소중한 존재이고, 막중한 사명을 가진 존재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나는 분명 세상의 소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소금이 음식의 맛도 내지 못하고, 부패도 막아 주지 못하고, 나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런 소금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 버리고 다른 소금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음식에 들어가야 하고, 보관하고자 하는 것에 들어 있어야 하며, 사람이 섭취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금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금인 이유는 ‘나를 통해 맛을 내고, 부패를 막고, 살리기를 원하는 주님의 손’에 들려져서, 주님께서 뿌리시는 곳에 가서 내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뿌리시면(보내시면), 그곳에서 나는 내 삶(말과 행실)으로써 신앙인의 맛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뿌려도 말과 행실로 신앙인의 맛을 내지 못한다면 결국 주님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소금의 역할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을 보여줄 때 상대방은 내 삶을 보고 나를 따라 주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소금은 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물에 닿아 형체를 잃어버리고, 짠맛을 모두 빼앗기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인으로서 살지 못하게 하는 환경들이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②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어둠을 비추어 주고 주변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신앙인은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둠(죄, 죽음, 악행 등)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께서 주신 빛으로 그 어둠(죄, 죽음, 악행 등)을 몰아내며 생명에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빛이 비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선인지 악인지, 의로움인지 부당함인지, 생명인지 죽음인지를 보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기에 옳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의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③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처럼 믿음이 드러나는 봉사자의 모습
그렇다면 실천하는 믿음을 가진 주님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첫째, 기쁘게 주일을 지냅니다. 거룩하게 주일을 보냅니다. 그래서 ‘아! 저 사람은 신앙인이구나. 그리고 주일에는 저렇게 지내야 하는 것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들은 사랑의 계명을 지칩니다.
셋째, 주님의 제자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인내합니다. 비록 물질적인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신앙을 선택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 할지라도 신앙을 선택합니다.
넷째, 주님의 제자들은 자선과 봉사를 통해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내세우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천하는 믿음을 가진 봉사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리피 2,15-16).
예수님께서는 나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빛으로 세우신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비추고자 하시는 곳을 비추기 위해 나를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을 밝게 비추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며, 힘과 위로를 주기 위해 나를 빛으로 세우셨고, 나를 통해 비추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등불이 되어야 하고, 주님 손에 들려진 작은 소금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주님 손에 들려 있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언제나 기도하고, 굳은 믿음을 간직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2.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차지하고 명예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첫째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꼴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게 들어가기 위해서는(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하는 문제로 논쟁을 한 것을 아시고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손수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보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9,36-37)
아이는 힘없는 존재, 나약한 존재,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존재, 피곤하고 오히려 내가 도와주어야 할 존재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앙인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놓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구원받는 사람들, 첫째가 되는 사람들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참조: 마태25,40)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고아를 받아들이거나 보호해 주는 것은 랍비들이 권장하고 찬양한 선행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을 때, 제자의 신분과 형제애의 정신으로 했을 때, 그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기본 법칙입니다.
그런데 유혹이 시작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어른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끊임없이 요구만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몇 번은 계속해서 들어주다가 어느 순간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며, 더 나아가 그 사람과 싸우고, 성당도 멀리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지만 주님의 제자인 나는 그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제자들은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스스로 지키고, 지키고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뭐~ 이런 것 쯤이야~”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죄들이 모여서 큰 죄를 이루고, 구원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작은 선행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규정들을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지켜 나갈 때, 어느 순간 의로움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지키는 것을 떠나서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형식적인 삶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주일에 형식적으로 미사를 하는 봉사자와 기도하며 미사에 참례하는 봉사자의 모습은 다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 마음에 있는 것들이 드러납니다. 모범을 보이는 위치에 있는 봉사자들은 가장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지키고, 다른 이들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 구성원들이 참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지켜야 하는지, 그것을 지킴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은 무엇인지도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도 턱걸이라도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보다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보잘것없는 소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범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벌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것을 범하는 것과, 또 그것을 범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모르는 사람이 실수로 범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제자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단식과 금육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신앙생활을 격려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봉사자들이 형식적으로 살아간다면 그 삶을 통해 공동체의 형제자매들도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마음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덕을 실천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4. 화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주님의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연한 것을 말씀하십니다.“‘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5,21)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것을 넘어서 어떻게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주님의 제자들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말로, 부주의한 행동으로 수많은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인뿐만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형제자매들에게 분노하기보다는 사랑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화해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자매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봉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리고 묘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것을 알고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에게 쏟아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가서는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또 쏟아냅니다. 그러므로 화해의 삶을 통해서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억울하게 만든 그 사람이 하느님께 탄식하며 탄원기도를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싸우고 반목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것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신앙인이 저래도 되나?”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변의 사람들은 “역시 신앙인들은 뭔가 다르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화해와 용서의 바탕 위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지나면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마태5,25)
이 화해는 인간과의 화해로도 생각할 수도 있고, 하느님과의 화해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과의 화해를 생각해 봅시다. 상대방은 나로부터 실제로 손해를 입은 사람이며, “도중”이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재판관”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재판은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형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실행하는 존재를 말하며, “감옥”은 징벌을 받는 장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라는 말씀입니다. 즉, 화해는 할 수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기 전에 회개 할 것은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쁘게 살 수 있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리면 결국 벌을 끌어안으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해는 할 수 있을 때 반드시 해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6)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기억하면서 나 또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형제자매들에게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화해를 청할 수 있을 때 청해야 하고, 잘못을 뉘우칠 기회가 있을 때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늦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은총의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화해하고 용서를 청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합시다. 그렇게 화해하고 용서를 청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봅시다.
5. “예”와 “아니오”를 명확하게 하여라.(마태5,33-37)
주님의 제자들은 “아니오”와 “예”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워 보이지만 너무도 어려운 것입니다. 예전에 고백성사를 볼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성사를 보다가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변명을 하면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면 된단다.”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핑계를 대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 변명 또한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데 상대방이 안 믿어주면 그만입니다. 또한 내가 거짓을 말하는데 상대방을 믿게 하려고 하느님까지 끌어들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좀 더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상대방이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형제자매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5,37)
주님의 제자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해야 합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봉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봉사는 내가 안 하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기에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기로 한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의를 통해서 결정 된 것은 “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된 것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들은 이들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동체에는 작은 잡음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예전에 그렇게 해야 했었는데, 그때 잘못한거야. 그래서 지금 이래!” 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6. 폭력을 포기하여라.(마태5,38-42)
아무리 참고자 하더라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웃음으로 돌려줄 수 있을까요?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돌려줄 수 있을까요? 누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 말로는 참으로 하기 쉬운 것이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굳은 결심과 큰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고, 그것을 해 보라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나 또한 하고자만 한다면 신앙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동태복수법”이 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5,38)라고 하는 것처럼,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가해자의 눈을 피해자가 입은 상해만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복수를 한다 하더라도 감정이 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아들의 눈을 다치게 한 상대방에게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아버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양쪽 눈을 다 멀게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수심에 불타는 복수는 보복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체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의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9-42)
왜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말씀해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그대로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라.
오른뺨을 때린다는 것은 오른손잡이가 손등으로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가장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랍비의 법에는 손등으로 남을 치는 행위는 특별히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 행위에는 두 배의 벌이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모욕을 받아들이고 다른 뺨까지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고방식,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사고방식을 제시하십니다. 내가 한 대 맞았다고 해서 똑같이 때려준다면 그 모욕이 사라질까요? 그 수치스러움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분노의 씨앗을 심을 뿐입니다. 악인에게 똑같이 맞선다면 나 또한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의 행동을 용서할 때, 그 모욕은 내 마음에 자리 잡지 않고,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때린 사람은 두 발 뻗고 자지 못해도, 맞은 사람은 두발 뻗고 잔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맞은 사람은 바로 용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른 뺨을 때리는 이에게 왼뺨마저 돌려 대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시어 용서를 베푸셨고, 모범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면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빌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동을 보여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차례입니다.
②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5,40)고 말씀을 하십니다. 서로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재판을 걸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다. 여기서는 이겨도 죄를 짓게 되고, 져도 죄를 짓게 됩니다. 둘의 관계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속옷을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그래 겉옷도 필요할 테니 이것마저 가지고 가거라.”라고 한다면 “얼씨구나”하면서 가지고 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가져갔다 할지라도 내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다시 한 대를 치더라도, 더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에 맞서서 또 다른 불의를 낳느니보다는 그것을 참아 받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넘치고, 후하게 갚아 주실 것이니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분명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는 사람 또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나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 또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누가 내 뺨을 쳤을 때 다른 한쪽마저 돌려 대 주는 사람, 겉옷을 빼앗겼을 때 속옷마저 내어주는 사람.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고, 지극한 번민 속에도 주님께 매달리며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해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박해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잘 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는 이 말씀. 참으로 어려운 말씀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분명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아주 고약한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주 고약한 구두쇠에 자린고비였고, 또 한 사람은 욕심쟁이에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쟁이인 사람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던 땅을 구두쇠가 땅 주인에게 아주 헐값에 사들였습니다. 욕심쟁이는 그 땅을 내어주기 싫어서 전 주인에게 몇 년 동안 사용하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대금도 미리 지불해 주었으니 못 나가겠다고 하였고, 구두쇠는 자신이 땅을 살 때는 그런 조항이 없었다며 서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증인을 만들고, 계약서를 위조하며 몇 년을 소송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법적인 문제가 서로 걸려서 막대한 소송비용은 물론이요 형사처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때문에 우리 동네가 이렇게 시끄럽게 되었으니 둘다 이 동네를 떠나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땅을 가지고 그렇게 싸운 그들은 동네에서 인심도 잃고, 돈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손해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욕심쟁이는 “그때 그냥 포기할 걸.”하고 후회하였고, 구두쇠는 “몇 년 더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걸.”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문제가 되었던 땅에 작은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구를 본당 신부님께 만들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본당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주면 행복해지거늘…,”
③ 누가 강요하거든 해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5,41)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하실 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실 때, 로마군인들은 키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서 그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로마군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시킬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을 얼마나 크게 기뻐했겠습니까?
누가 강제로 나에게 짐을 지워서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할 때, “네가 가자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이천 걸음까지도 가 줄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가준다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해 주실 것이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보상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주셨겠습니까?
복수를 하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해 주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까지 주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이라야 할 수 있고, 사랑이 가득 담긴 이라야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라야 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이 있어야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혼자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가슴에 온전한 사랑을 담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나머지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나는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마음과 내 힘으로 하겠다는 마음”을 버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자리 잡게 해주시며, 열정이라는 은총을 끊임없이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뻐서 합니다.
누구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합니다.
누가 알아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④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마태5,42)고 하십니다.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의롭지 못한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 제자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면 다시 채워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넘치도록 후하게 채워 주실 것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낯선 자매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파서 일을 못 하고, 아이가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돈을 좀 빌려 달라고…, 그 자매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 자매의 손에 돈을 쥐어 주는 것. 그리고 한 마디 해 주는 것.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그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것이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알면서도 당해줄 수 있는 사람들. 주님의 제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간다면, 형제자매들도 어느 순간 변화될 것입니다. 그가 변화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믿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움켜잡은 것은 놓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조금 내놓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산다.”고 입으로 떠드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움켜잡기만 하면 결국 그것만 움켜잡고 있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붙잡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네에서 평이 안 좋은 아이랑 둘이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꾹 참고서 집에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왜 그렇게 좋지 않은 그 녀석과 놀고 있는 거냐? 그 애가 얼마나 버릇이 없는 애 인줄 알고 있어? 다시는 그 녀석과 놀지마…,”
그러자 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건 나도 알고 있는데 내가 안 놀아 주면 그 애는 놀 친구가 하나도 없어…,”
7.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3-48)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그에게 잘 대해 줍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3-44)
① 이웃 사랑
구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으나 이웃이란 유다인에게 있어서 오직 유다인들만을 가리켰습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를 통해 우상숭배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명령이 이방인을 미워하는 하나의 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속여도, 그들로부터 물건을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유다인들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보복을 하고,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박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제자인 나는 나를 박해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죄를 슬퍼하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님의 사랑’을 나도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내 사랑의 범위도 넓어져 갈 것입니다.
② 하느님의 자녀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다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5,45)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의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이어도, 내가 불의를 저질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의 모습입니다.
또한 내가 의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감사가 나오고, 불평이 올라오려고 할 때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그 불평의 마음을 붙잡지 않게 될 것입니다.
③ 하느님의 상을 받는 방법: 모든 이를 사랑하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6)
하느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 또한 내 옆에 있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내가 받을 상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받지 못할 사람은 없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어느 본당에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형제를 피하는데 유독 베드로 형제만이 성격이 고약한 요셉 형제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서 베드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님은 요셉 형제와 친하게 지내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별것 없습니다.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니 성당에서는 친하게 지낼 만하더군요. 그 형제 아내나 자녀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제자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져 줍시다. 다른 사람이 관심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줍시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④ 하느님의 상을 받는 방법: 모든 이에게 인사하기
한 자매가 냉담을 하였습니다. 냉담 이유는 “성당에 가면 인사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고, 왔냐고 인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의 냉담 얘기에 다른 형제는 “왜 인사를 받으려고 하느냐? 먼저 인사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사람 잘못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처음 성당 나왔을 때 먼저 인사하기가 얼마나 쑥스럽습니까? 신앙의 이름으로 낯선 사람들이 모인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당연히 신앙공동체 안에서 ‘따스함, 마음의 평화, 위해주고 반겨줌, 기도해 줌’ 등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차갑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인사하고, 자기들끼리만 움직이고,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성당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하고 발길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 인사를 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를 처음 보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 아는 사람에게만 하는 인사,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밖에 나오면 아는 체도 안 하는 모습. 서로에게 관심 없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은 너무도 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상처받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무도 없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7)
신앙인이라면 비신자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는 살아가야 합니다. 먼저 다가와서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먼저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하게 인사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의 벗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다가갈 때, 주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⑤ 하느님의 상을 받는 방법: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고 말씀을 하십니다. 완전함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어떻게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이란 사랑하는데 결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데 결점이 없고, 내어주는데 결점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사람을 말하며,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된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가기 위해서 내가 용서해 줄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용서를 받고 있음만을 기억합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것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 원을 주면 일억을 주겠다고 하는데 안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것을 내어 주고,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 때,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내어주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좀 더 너그러운 사람, 좀 더 자비로운 사람, 좀 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굳은 결심을 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봅시다.
그런데 “예수님! 이건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얘야! 그래서 내가 인간이 되었지 않느냐? 인간의 모든 고통을 나 또한 겪었단다. 네가 힘을 내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내가 먼저 해 보인 것이란다. 힘낼 수 있지?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때 “예수님! 잘 안 들려요.^*^”하고 싶을 지라도, “예! 해보겠습니다.”하고 씩씩하게 응답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봅시다.
8.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
주님의 제자들이 가장 어려워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을 자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우렁각시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우렁각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잘하면 그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열심한 유다인들은 그들의 자선이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러한 보상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행도 자꾸 하다보면 내 몸의 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덕을 쌓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의 방법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마태6,3)
오른손이 하는 일이 왼손이 모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자선이라는 아름다운 행위를 어떻게 조심하여 은밀히 해야 할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즉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가 한 행위에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선은 나의 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에 대한 상을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4)
레지오 단원들이 하는 것 중에서 ‘활동 보고’는 많은 유혹을 불러 일으킵니다. 둘씩 짝지어 단장이 활동을 배당하지만 자신 홀로 활동한 것을 보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 됩니다. 활동을 보고하는 이유는 배당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것을 보고할 의무가 있기에 보고합니다. 나 스스로 한 것을 모두 보고한다면 내가 받을 상은 하늘에 쌓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이 쌓여야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고, 이 덕이 쌓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훈련하면 어느 순간 주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9.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그냥 말로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먼저 보여주시고 행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기에 당신 백성을 돌보셨고, 당신 백성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조건이 있는 사랑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는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 사랑을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주님의 제자들도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하라는 것.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제자의 모습 안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 미사에 참례할 때 몸가짐을 경건하게 하며, 반갑게 인사해 주고,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아서 미사에 참례하기(같은 자리에만 앉지 않기, 옆으로 다가가기, 그를 위해 마음 다해 기도해 주기)
둘. 형제자매들의 작은 봉사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기.
셋. 형제자매들의 봉사일정에 겹치지 않게 일정 조정하기
넷. 형제자매들을 칭찬하고 긍정적인 언어들만을 세상에 전하기(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다섯. 배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작은 사랑을 전해주기
여섯. 형제자매들과 함께 협력하고, 혼자 하려 하지 않기
일곱. 행사가 끝난 후에는 칭찬과 격려의 말과 함께 정리정돈 도와 주기
여덟. 결정된 사항에는 절대적으로 순명하기
아홉. 서로의 성향을 존중하면서 의로움 지수를 높이기
열. 성령의 은사를 청하며 진실과 온유와 절제를 통해 인내와 친절과 선행을 베풀기
10.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기(마르6,1-6)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도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마르6,1-6).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받아들였지만 메시지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임을, 자신들보다 훌륭하신 분임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주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나자렛에서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마르6,5). 그 이유는 그들이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놀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당신 일을 포기하시거나 조건을 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마르6,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밤새워 기도하셨고,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을 당합니다. 내가 기쁘게 하고 있는 것들도 어느 순간, 하기 싫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단호하던지,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도망가듯이 그렇게 냅다 튀는 것입니다. 처음의 마음을 기억할 때,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나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늘 기도해야 합니다.
① 본당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봉사자들
봉사를 하면서 함께 하는 형제자매들 때문에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본당의 봉사들도 본당에서 환영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 많은 이들과 많은 인맥을 쌓으려 하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려 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함께 하며 함께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혹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자연스러워지기도 합니다.
② 칭찬이 아니라 모욕으로 다가올 때의 대처법
첫째,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둘째, 예수님께서도 모함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셋째, 예수님께서는 미움에 미움을 받으셨고, 더 나아가 죽임까지 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다섯째, 그러므로 나 또한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여섯째,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물으셨듯이 나 또한 나에게 주어진 봉사직무를 수행하면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물어야 함을 명심하라.
일곱째, 여기서 멈추면 악마가 환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11. 주님께 의탁하기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재물로는 채울 수 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점점 줄어들어 있을 자리조차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예수님 발치에 엎드렸지만 나름대로의 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그들 병에 대한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청하였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10,17)
이 청년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들어왔고 또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시는 그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청하는 이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마르10,19)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이웃에 대한 계명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마르10,20)
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청년의 질문을 통하여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뭔가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① 주님의 제자들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육. 간음하지 말아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아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계명을 지킬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자청년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잘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완전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당황 했습니다. 물론 그가 모든 것을 버리면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결정을 할까요?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10,22)
참으로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닌 척하지도 않고, 거짓으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재물에 눈이 집착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4-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든 이유는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빠져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주어 붙잡고 있기에 못 나가는 것입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보다는 재물에 대한 열정이 더 많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마음을 재물에 두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재물이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도 슬퍼집니다. 의인이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부자 청년.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② 내 이웃을 어떻게 도와 줄 것인가?
내가 가진 재물을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도와 줄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제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는 주님께 의탁하며 다음의 것을 늘 고민해야 합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생활하면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주일미사에도 잘 참례하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선택의 기로에서 무너져 버리기도 합니다. 부자청년처럼 돌아서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10,26)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 할지라도 아직 세상 것들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 재물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이 어려운 것임을 알기에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서로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10,27)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했다 하여 당연하게 구원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안주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될 도리를 다하고 마지막에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비결 아니겠습니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합니다. “모든 것을 놓고도 혹시 붙잡고 있는 것은 없는가?”를 고민하면서 주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합니다.
| 반드시 숙지(熟知)해야 할 내용 |
| 질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답변: 그 질문은 많이 부족합니다. 저에게 그렇게 질문하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봐 주십시오. 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실 것임을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은총입니다. 저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을 위해 저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님께로 향하며 노력하고 있는 저를 주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있고, 이 믿음으로 구원됨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미 완성된 것이고, 더 이상 구원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 되기 합니다. 구원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야 하고, 오늘도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내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는 버렸다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10,29-30)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 보니 물질적인 것들이나 인간적인 것들을 신앙 앞에 두지 않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서로에게 형제자매라고 불립니다.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때문에 무수히 많은 가족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 신앙 안에서 가난한 형제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기에 가난한 이들이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백성을 돌보십니다. 중요한 것은 박해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박해는 아무것도 아니요, 지금 내가 내어놓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마음을 간직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움켜잡을 것은 움켜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10,31)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을 말하고 꼴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자 청년이 지금은 모든 것을 잘 지키고 살아가고 있지만 재물에 연연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는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엉뚱한 것에 집착하거나 잘못된 이상을 품는다면 그들 또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처럼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하느님 자녀들은 구원의 문에 바짝 다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은 그것을 차지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넘치고 후하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민해 봅시다⓷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말씀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니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함께 기뻐하며, 함께 하느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봉사는 나의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5,5)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12)
모욕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뜻으로 심한 욕입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는 것”과 중상모략입니다. 의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참아 받으셨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오히려 예수님 이름 때문에 박해받았음을 기뻐하는 사도들처럼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받해받지, 신앙없는 사람은 박해받지 않습니다. 봉사자가 박해받지, 봉사 안 하는 사람이 받해받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봉사를 하면서 ‘잘 해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됩니다. 겸손해지려 해도 상대방이 무시하고 들어오면 오히려 화가 납니다. 섬기려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후회됩니다. 용서하려 하고, 화해하려 해도 오히려 큰소리치는 형제자매를 보면서 분노하기도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마치 자신이 다 한 것처럼 나설 때는 황당하기도 합니다. 알고 있지만 부서진 마음을 다시 회복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제자들이 고통 받고있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니,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고통을 기쁘게 이겨냅니다. 그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실까요?
제자훈련 2
첫째, 주님의 제자인 나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는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실천해야 할 목록을 정해보고 실천해 봅시다.
둘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봉사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것들 정해보고 실천해 봅시다.
셋째,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며,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동료 봉사자들을 사랑할 것인지,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 봅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실천하느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실천이 중요함을 명심합니다. 실천을 통해 나의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나에게 큰 이익입니다.
용서도 이익입니다.자비를 베푸는 것도 큰 이익입니다.
화해하는 것도 큰 이익이고, 봉사하며 섬기는 것도 큰 이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주님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주님의 사랑받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셋.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항하여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라고 말하자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형에게 먼저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사람들의 생각을 전해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29)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진심입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진심이라 할지라도 위험이나 위협 앞에서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고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국 성령의 은총이 필요함을 성령강림을 통해서 체험하게 됩니다. 나 또한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지금 이 순간의 고백이 변함없는 진심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9,1)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사랑과 용서, 자비와 평화, 내어줌과 섬김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이 우리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때가 바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이며, 주님을 믿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을 주실 때이며, 의로운 이들이 부활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 별처럼 빛날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흔들리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들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며, 행동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믿음을 고백하다가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 믿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작은 힘을 얻어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주님의 제자인 나를 통해 이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 나를 통해서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둘. 나를 통해서 내 옆에 이는 형제자매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셋. 나를 통해서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형제자매들을 도와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1. 무화과나무를 통한 가르침(마태21,18-22)
베타니아에서 밤을 지내신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성안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지만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태21,2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어째서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습니까?”(마태21,20)
무화과나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합니다. 어떻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무화과철도 아닌 시기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말라 버리게 하실까요? 하지만 피조물은 창조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희생하시면서 제자들을 교육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21,21-22)
예수님께서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희생시켜서 제자들을 교육하십니다.
첫째,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믿음을 가지고 청하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지니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위해 기쁘게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비록 철은 아니지만 시장하신 예수님의 허기를 달래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므로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을 위해서 내어 드릴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다는 것은 마치 예루살렘의 형식적인 경신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없는 주님 공경은 아무 소용이 없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또한 가르쳐 주신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한 점 의혹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에는 즉시 “예”하고 내어 드릴 수 있는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주님의 제자들의 삶입니다.
2. 지금 이 순간의 믿음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막지는 않으십니다. 내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도 아시고, 내 마음에 잘못을 품고 있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싸워서 이기길 바라십니다.
① 믿음이 사라진 유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사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나’이기에 이 말씀은 크게 다가옵니다. 내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3)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즉시 제자들이 유다를 축출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함께 식사하면서, 함께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
예수님과 함께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유다. 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인으로 영세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하지만, 예수님과 결코 함께 하지 않는 ‘나’일 수 있습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나’일 수 있습니다. 비록 이런 모습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저에게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다의 선택은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항구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냉담하는 형제자매들이 없게 해야 합니다. 또한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심 보시기에 어떤 모습인지’ 생각하고, ‘형제자매들이 보기에 모범이 되는지’ 생각하고, 스스로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 한 사람의 배반을 예고하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나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5ㄱ)
유다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자신이 배반자임이 모두에게 폭로될까 두려워 다른 사람들이 말 한 후에 자신도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놈!’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ㄴ)
“그것은 네 말이다.”라는 것이 더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유다는 그렇게 마음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이 사라진 유다는 그렇게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유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제가 예수님 사랑하지요?”라고 여쭈었을 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② 흔들린 베드로 사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준비하시며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부족함을 탓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계십니다. 부족한 제자들이지만 부활과 성령을 체험한 후에는 그들의 모습이 바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태26,31-32)
예수님께서는 이 밤에 일어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흩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나약하기만 제자들이기에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스승의 수난 앞에서 도망치는 제자들이 얼마나 큰 절망감에 빠지겠습니까? 그것을 알고 계시기에 미리 말씀해 주시며, 그 때에 힘을 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베드로 사도의 이 고백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닥치면 갈등하게 되고, 나약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한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26,3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성령강림 이후에는 당당하게 믿음을 고백하며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때가 올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굳은 믿음을 지닌 베드로 사도는 서운합니다. 자신은 변함없을 것임을 ‘지금 이 순간’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태26,35)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잠시 후 두려움이 밀려올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두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결심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때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더 기도하며 성령께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모든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부족해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바라보며 주님께로 나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고, 주님 제자의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확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바라보면서 흔들렸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시자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스승님의 일이 궁금해서 따라왔던 베드로 사도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녀 하나가 베드로 사도를 알아봅니다. 늘 스승 옆에 계셨던 베드로 사도의 얼굴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하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하녀는 베드로 사도의 얼굴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마타26,69)
가끔은 ‘저 사람들은 나 인줄 모를꺼야!’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 모르지 상대방은 나를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부끄러운 행동을 했기에 그 하녀가 베드로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그들 주인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기에 베드로 사도까지 알아 본 것입니다. 칭찬하려고 알아본 것이 아니라, 함께 없애려고 알아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마태26,70)
밤이라 얼굴이 잘 안 보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낮이었다면 확실하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두려움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게 되면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놀라보게 변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하녀에게 들킵니다.
“이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마태26,71)
예전 같으면 이 말이 베드로 사도에게는 자랑이 되겠지만 지금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에 두려운 말이 됩니다. 내가 베드로 사도였다면 어땠을까요? 이번에도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다시 부인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알지 못한다고 했을 때, 알고 있는데, 바로 열두 사도 중의 으뜸인데, 베드로 사도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하였지만 베드로의 사투리는 그가 예수님과 일행임을 드러났습니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마태26,73)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라고 하는데 유다인, 특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인의 강한 액센트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애써 발음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라도 사람과 충청도 사람이 사투리에서 구분되듯이 그렇게 베드로 사도가 갈릴래아 사람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도 드러납니다. 행동 안에서 신앙인은 옳지 않을 것을 행하려 할 때 멈칫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죄를 짓습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을까요?
세 번째의 시련에 베드로는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4)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 거짓말을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정말 모른다고 하고, 내 말이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두려움 앞에서 나약한 의지를 드러낼 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 닭 울음소리는 그의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닭의 울음소리는 아침을 알리는 소리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울린 닭의 울음소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소리가 됩니다. 그 닭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거짓을 말하게 됐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도 가끔은 닭 울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무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해야될 것을 하게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붙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부인할 것임을 예고 하셨지만, 그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적어도 그의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변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는 결코 예수님을 부인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26,75)
예수님께서 미리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나자, 베드로 사도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나약한 의지가 두려움 앞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는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보게 했습니다. 그는 슬피 울며 통회했습니다. 이 모습은 다윗 왕과 비슷합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그리고 나단 예언자가 그 잘못을 지적했을 때 즉시 잘못을 시인하고 통회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도 더 넘게 그렇게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잘못을 슬피 울며 뉘우치는데, 나는 과연 어떠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도 내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내 잘못을 시인하고 통회해야 합니다. 또한 일 상 삶 안에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들을 깊이 있게 바라보며,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 풍랑 속에서 주님을 믿게 된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백인 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병든 종을 고쳐 주셨고, 베드로 사도의 장모를 열병에서부터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피곤에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배로 호수를 건너시는 중에 주무셨습니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풍랑은 왜 일어났을까? 물론 바람이 부니 그렇게 풍랑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아지가 주인을 만나면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이것은 반가움의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호수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위로 지나가시니 반가워서 그렇게 요란하게 예수님께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좌우지간 풍랑이 얼마나 거셌는지, 어부였던 제자들도 겁에 질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8,25)
물에서는 제자들이 훨씬 더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가 호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져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주님을 붙들고 매달립니다. 그들 경험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절망 속에서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바꿔 주시리라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이렇게 우리 죽게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배와 물의 전문가들이 구원의 전문가에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8,26)
제자들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믿음만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향한 믿음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혹시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을까요?
‘바람아! 호수야! 좀 조용히 좀 하거라. 나 무지 피곤하다.’
예수님! 저희들이 반가워서 그만 ^*^ 죄송합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풍랑이 잔잔한 호수로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풍랑 치던 호수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잔잔한 호수로 바뀌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 편에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에 우리는 찬미와 감사와 영광만을 드려야 합니다.
4.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십니다. 배고픈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헛된 생각에 물들지 않을 수 있도록 군중과 제자들을 떼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헛된 생각을 호수 가운데에서 역풍을 통해 없애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 네 시쯤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새벽 네 시에 호수를 건널 배가 있을 리가 없고, 또 역풍이 부니 배를 운행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계획을 잡으면 비가 오다가도 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소가 여의치 않으면 다른 장소가 생기고, 비가 오더라도 행사는 계속하게 됩니다. 그저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행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어두운 밤길에 두려움에 떨면서 걸어갈 때, 저 앞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무척 당황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은 당연합니다. 호수 한 가운데서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도 배를 타고 온 사람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기겁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놀란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역풍을 만나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14,28)
비록 물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를 가로 막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 가고 싶었습니다. 또한 물 위를 걸어오신 전능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 또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걸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고서 물 위로 걸어갑니다.
예수님께 가는데 장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부르시면 나는 달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무엇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인간인지라 갑자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컴컴한 호수의 물이 보이자, 베드로 사도의 마음은 예수님이 아니라 두려움이 보였고, 두려움을 움켜잡자,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베드로 사도를 붙잡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14,31)
한순간도 의심 없이 오롯이 주님께 믿음을 둔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평상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게 물 위를 걷는 중에 별의별 생각을 다 하지 않겠습니까?의심을 안 품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의심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고백합니다. 하느님 외에 하실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시니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14,33)
신앙 생활하면서 수많은 체험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많은 응답을 받습니다. 체험과 응답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변화시킵니다. 나도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되었기에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아멘’하고 응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며, 삶으로 드러나는 고백입니다. 신앙고백입니다.
5.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 도착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즉시 제자들에게로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20,2)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부활하셨기 때문이지만, 마리아의 마음에는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들도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고 하셨는데 정말 부활하셨을까? 그런데 우리 눈앞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부활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베드로와 요한은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곧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보다 젊었던 요한이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요한 사도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이 사실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을 쌌던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요한20,5) 아마도 베드로 사도를 향한 겸손의 표현(장유유서)이며,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수위권을 주셨습니다. 그 권위를 요한 사도는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멋진 요한 사도의 모습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수의가 그곳에 놓여 있다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가정(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과는 모순됩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면 수의와 수건도 다 가져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20,9)
빈 무덤을 보고서야 그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회상하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으뜸으로 세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증거를 보고 베드로 사도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믿었지만 자신들의 한계 안에서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 이후에는 바뀌었습니다.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은 온전히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습니다.
6.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그들의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몇몇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슬픔은 기쁨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의 한계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눈을 돌리는 데 방해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틀에 사로잡혀 참된 가치를 못 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이해해야 만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내가 믿는 것이고,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주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쁨 속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스승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온 여자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것은 그 빈 무덤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인도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빈 무덤 이야기를 듣고 부활을 믿게 되었다면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두 제자가 길을 가다가 한 나그네를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십니다.(루카24,15)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루카24,16) 그들은 스승님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고 있었기에 다른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누구신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대화하면서 그들은 가슴 뜨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24,17)
제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멈추어 섰습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들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탄을 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24,25)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을 받아들였으니, 그들은 소경이었고, 귀머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받아야 할 수난은 하느님의 섭리적인 계획에 따른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지금 그 계획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24,26)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루카24,27)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메시아의 수난과 처절한 죽음은 이미 예언자들이 기록하였고, 그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가끔은 상황이 되어야 만이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다가 그 상황이 되어야 만이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심이 있을 때와 관심이 없을 때의 보는 것과 듣는 것의 결과가 너무도 다릅니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24,29)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되었습니다.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가 되어 예수님을 붙들었고, 예수님께서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나보다 나은 신앙의 스승을 모시려는 마음, 자신들의 무지한 머리를 깨우쳐 주시는 분과 좀 더 함께 있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 있다면 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들도 나를 붙잡게 됩니다. 함께 차를 마시며 가슴 뜨거운 신앙이야기를 하는 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를 의미하지는 않고, 그냥 평범한 보통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빵을 떼어 주시는 모습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항상 하시던 동작을 보고서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24,31)
마리아 막달레나가 항상 듣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알아 뵌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에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 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빵을 떼었기에 그 모습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눈앞에 앉아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라져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가끔은 말씀을 읽을 때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결코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론 중에 들려오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구역반모임 때 형제자매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구역모임 안에서나, 강론 중에 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하는 탄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대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전에는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즉시 일어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밤길을 걸었습니다. 기쁨에 넘쳐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기쁨을 전해 주었습니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24,34)
엠마오에서 돌아온 제자들도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빵을 떼실 때에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나도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기쁨을 당신께 전합니다.”나 또한 그렇게 부활의 증인으로서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 |
| ① 나는 가정에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② 나는 삶의 자리에서(학교, 직장, 다양한 모임)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고,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③ 나는 주님 앞에서 부활의 증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
7. 토마스의 불신과 믿음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물질적인 제약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은 기쁨이 넘쳐났고, 그동안 자신들이 겪은 모든 고통과 부활을 믿지 못했기에 부활을 믿지도 못했고, 무덤을 지키지도 못했던 죄스러운 마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20,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멍 난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 지금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바로 처절하게 고통당하시고,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유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함께 죽었었지만(꿈, 희망, 삶의 의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도 부활을 맞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토마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
하지만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는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토마스는 제자들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 할지라도 그것이라도 보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보고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20,25)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손바닥의 상처에 자신의 손가락을, 창에 찔린 상처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무도 극단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토마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에게도 그 모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 안에서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0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토마스에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부활을 전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동료들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닫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보이고 들리는데 닫혀 있으면 자신의 고집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은 내 주변에도 많이 있고, 다른 이들은 나를 향해서도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이라고,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같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잠겨 있는 문을 통과하셔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26) 그리고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7)
한 주일 동안 토마스는 아마도 홀로 의심 속에서 움츠리고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토마스가 원하는 방식으로 토마스를 믿게 하십니다.
보통의 경우 고집을 부리다가도, 일 한번 당해야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토마스 사도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의 눈높이를 맞춰 주시며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서야 토마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20,28)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내 삶도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그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동료들이 말해 주었으면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나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함께 고민해 봅시다④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과 치유를.
둘째, 제자들은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셋째, 제자들은 함께 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걸었고, 함께 음식을 먹었고,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함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넷째, 제자들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을.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겼습니다.
다섯째, 제자들은 희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주님 안에서 보고 듣고, 함께 하며, 희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들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주님의 제자로서 멋지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흔들릴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보았기 때문에 믿었던 것입니다. 믿는다면 고백해야 합니다. 내 믿음과 나의 고백을 방해하는 것들을 깊이 있게 바라보고, 불신의 요소들을 치워 버립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삶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줍시다.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으며, 어떻게 삶으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자훈련 3
첫째, 나는 주님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사도신경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바탕으로 나의 믿음을 이야기 해 봅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 내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가정에서
②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③ 성당에서
④ 일상 생활 중에
셋, 나는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가끔은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흔들리는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흔들림 속에서도 그 자리에 머물며 기도할 수 있게 될까요? 봉사자들은 어떤 은총이 필요할까요? 나는 어떻게 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사목자가 산을 옮기자는 말을 할 때,
먼저 산에 달려가 삽질을 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봉사자들입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목의 협력자로 살아가는 봉사자들입니다.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넷.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문제 중의 하나는 ‘견진성사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하여 탄생한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며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온 삶으로 고백했습니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로 충만해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합니다. 주님 제자의 삶은 가정에서. 각자의 다양한 삶의 터전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며 복음을 선포하고, 늘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찾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합니다. 그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1. 성령을 약속하신 예수님(요한14,15-3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말씀하신 후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16)
성령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인간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실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로 “영”이시요(4, 24),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선물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비로소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 근원적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는 구원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빠라클레토스’를 파견하십니다. 빠라클레토스는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 곧 하느님의 영이시며, 예수님의 계시적인 활동을 지속시키시며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빠라클레토스 성령께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이 활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한 내용을 상기시키고, 예수님처럼 진리 안에서 가르치며, 예수님께서 증언한 내용을 또한 증언하십니다.
성령강림을 통해서 “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바로 이분이시구나!”하고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이끄시어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오류에 빠지지 않게 붙들어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께서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14,17)
진리의 영은 진리를 증언하고,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계시의 총체적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안에서 함께하며 다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이 협조자는 진리의 영(靈)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의미에서의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 안에서 자신들의 허상이 드러나기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진리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지고 볼 수 있는 것,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영혼, 은총, 신심 생활, 믿음, 내세 등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젊은 사람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직 몸에 힘이 남아 있는 노인들. 이런 분들 또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의 가치만을 찾고, 그것만을 쫒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의 제자들은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진리의 영” 즉 성령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솔직함과 충실, 진리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영(靈)의 보이지 않는 감화를 받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명에 대한 그들의 충실은 벌써 제자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성령의 선물입니다. 제자들 속에 벌써 계시는 성령께서는 이제부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눈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지속적으로 보호하는 협조자로서 제자들 가운데 머무시면서 각자가 활동할 내적 힘을 주는 협조자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협조자는 곧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상기시켜 줄 협조자라는 말씀 안에서, 우리는 성령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계시(가르침)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를 계속 이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가르치신 진리를 되새기게 하고 그것을 밝게 비추어 주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잇는 풍부한 보화를 찾아내게 하십니다. 역사 안에서 교회는 맡겨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성령의 보호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협조자, 곧 성령의 임무와 역할은 예수님의 계시 내용을 더욱 심화시키고 현실화시키며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가르침(계시)을 전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가르치신 진리를 되새기게 하고, 그것을 밝게 비추어 주시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풍부한 보화를 찾아내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보호하심에 의지하여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나를 이끌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나, 누군가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나, 기도를 할 때,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나를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며, 그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머물며,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 성령강림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부활 후 40일이 지나시어 승천하셨습니다. 열흘 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는데, 그때가 바로 오순절입니다.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오순절 축제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에 전념합니다. 이층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변화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당당하게 전합니다. 그렇게 사도들의 변화를 통해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성장합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사도2,1-3).
성령강림은 교회의 탄생입니다. 아이는 수정된 순간부터 한 인격체로 존중을 받는데, 아이의 생일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온 시간을 생일로 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성령강림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합니다. 이 순간을 교회의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사도2,4).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참조: 사도2,5-8)
제자들은 그 동안에는 두려워서 말 못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2.1. 베드로 사도의 변화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사도행전 2,14). 하면서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합니다.
첫째,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사도 2,22).
둘째,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3-24).
셋째, 다윗은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2,29-32).
넷째,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 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사도2,33).
다섯째,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2,36).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베드로 사도는 회개할 것을 요구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2,38)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성령을 가득히 받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님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미사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기쁘게 구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변화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 시키며, 견진성사를 통하여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에 성당에 왔을 때 형제자매들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경건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경건함과 광채가 사라지더라.”라고 말씀하시며 실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초심자들이 신자들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변화된 모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고, 새로 태어난 삶을 지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주님께 “주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여쭈며, 주님의 뜻을 찾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때, 새신자들과 예비신자들은 내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롯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베드로 사도는 성령강림 이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사람들에 의해 들려 왔습니다. (참조: 사도3,1-3)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였으며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 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습니다. 이 불구자(앉은뱅이)는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불구자는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사도들을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3,6)라고 말하며 불구자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치유 받은 불구자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온 백성은 불구자였던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적적인 치유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못할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과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소명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이 능력은 더 크게 발휘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믿음의 힘으로 불구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과 공명하며, 예수님의 손이 되어 불구자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치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치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할수 있는 것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백성을 가르치던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보기에 사도들은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거하면, 자연히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 것이고, 사도들의 놀라운 활동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민낯이 드러나기에 위험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하며 심문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 사도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은 심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첫째, 베드로 사도는 “앉은뱅이의 치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구원받은 데에 필요한 이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둘째, 유다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버림받은 돌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중심이시고, 그 하느님 나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만나기에 예수님을 중심으로(그 머릿돌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최고의회는 베드로와 요한의 확신에 찬 모습과 당당한 모습을 보고 또 이들이 배운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습니다.(사도4,13-14) 최고의회는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어떻게 사도들의 입을 막을 것인지를 고민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사도4,16-17)
최고의회는 이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19-20)
대사제의 하녀가 “당신도 예수님의 제자이지요?”하면서 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제는 그 하녀의 주인 앞에서 더 나아가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켜 놓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 놓고 그 안에서 숨죽이던 제자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사도4,29-30)
이렇게 기도를 마친 신자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습니다(사도5,12-13). 끼어든다는 것은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므로 감히 사도들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외심을 가지고 사도들을 따랐습니다.
헤로데는 야고보 사도를 먼저 죽였습니다.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습니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 헤로데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사도12,3-4)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자 교회는 베드로 사도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사도12,5) 베드로 사도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지만 주님의 천사의 이끄심으로 무사히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 사도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감방에 빛을 비추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며 “빨리 일어나라.”(사도12,7)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베드로 사도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천사는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어라.”(사도12,8) 하고 이르니 베드로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천사가 또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라.”(사도12,8) 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따라 나가면서도, 천사가 일으키는 그 일이 실제인 줄 모르고 환시를 보는 것이려니 생각하였습니다.(사도12,9)
베드로 사도가 천사의 뒤를 따라서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어떤 거리를 따라 내려갔는데,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다.(사도12,10)
베드로 사도는 “이 모든 것이 환시를 보는 것이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거리에 섰을 때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죽음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교회의 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시어 베드로 사도를 구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7-8)
우리 공동체도 필요한 것들을 간절하게 청한다면 분명 이루어 주십니다. 나이가 들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교회를 잊어버린 노인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며 다가가서 그들의 기억을 되찾게 하고, 기도하게 만들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 품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준 공동체가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마음을 모아서 노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청하는 것은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서,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믿음을 가진 공동체가 어떻게 성장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도들을 본받아 사도들처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갑시다.
2.2. 백성의 변화된 삶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그 두려움(경외심)이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참된 것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때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자리를 인정해 줄 때 그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일을 기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고, 따라주는 삶.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사도들을 존경하였고, 예수님의 사도들로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수많은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자 군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습니다.(사도5,15) 그리고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습니다.(사도5,16)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16,17-18)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페소1,19) 그래서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들고, 망설이던 것들을 당당히 하게 만들어 줍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토요일 저녁마다 함께 모여서 미사를 봉헌했는데 그것을 “빵 나눔”이라고 불렀습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모습은 비신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일에는 주님과 함께 머물며 기쁨을 나누는 모습 안에서 비신자들은 감동을 느낍니다. 가족과 함께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 안에서, 성당 다녀온 후 집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기도 소리 안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감동을 느끼며 ‘나도 신앙생활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해시대에 박해자들도 당당하게 믿음을 고백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시대만 좋으면 천주를 믿을텐데…,’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의로운 삶은 옆에 있는 이들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2.3. 바르나바.
바르나바는 초대교회의 훌륭한 신앙의 모범으로서 복음을 제일 먼저 진실하게 받아들인 인물들 중의 한 분이십니다. 요셉은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사도4,36-37). 발 앞에 놓는다는 것은 발을 어떤 물건이나 사람 위에 올려놓아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옛 관습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도 손으로 잡거나 발로 그것을 밟고서 ‘내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바르나바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갔기에 ‘격려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사도11,19). 박해를 받고 흩어진 이들 가운데에서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안티오키아에 있는 이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신생 공동체인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돌보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신뢰하고 있었고, 공동체를 이끌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기에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하였습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사도11,23)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11,24)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운 모습과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나오는 격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인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성장 가능성을 본 바르나바는 다른 협조자가 필요하였습니다.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돌볼 협조자를 구하러 타르수스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회심한 사울이 있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이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부르심이 자신을 통해서 열매 맺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맡게 된 것은 예수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는 바르나바를 통해 “회심 이후, 성숙한 믿음을 가지게 된 사울”을 선교일선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서 사울을 찾아 안티오키아로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고,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사도11,25-26)
사목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팀이 필요합니다. 혼자는 한계가 있습니다. 봉사자들은 사제의 훌륭한 사목 협조자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봉사자는 결코 사제의 사목 협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도 봉사자들을 사목의 협조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목은 신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없는 봉사자는 사목자를 지치게 만들고, 잘못된 길로 빠지게 만들고, 공동체를 생기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목자에게는 반드시 사목의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르나바는 잘 알고 있었고, 그 협조자로 사울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는 반드시 사목의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사제를 도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사목의 협조자가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작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단체의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체장은 주어진 봉사를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위원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원들은 도와주지 않고, 자신을 알아 달라고만 하고, 조금 봉사한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고, 어려운 것은 안 하려고 하면 그 단체는 참 어렵게 됩니다. 누가 단체장이 되어도 신명나게 기도하면서 기쁨에 넘쳐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게 위원들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장을 맡은 사람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함을 깊이 인식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바르나바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교회 안에 받아들여지는 첫걸음을 했으나 그 이후의 것들은 모두 바르나바 덕분이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그가 참된 회심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바르나바가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떻게 설교하였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 타르수스에 있는 바오로를 먼저 찾아간 사람도 바르나바였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를 이해해주고 바오로의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바오로의 친구, 영적 아버지, 사목 활동에 있어서의 스승, 사도직 활동으로 이끌어 준 인도자였습니다.
2.4.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바르나바 성인의 모범과는 달리 그 반대의 삶으로 죄를 지은 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의 이름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도 재산을 팔았지만,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사도5,1-2). 그런데 그렇게 봉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죄가 되었을까요? 적게 내었기 때문에 죄가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땅을 팔기 전에도 자신들의 것이었고, 판 후에도 그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이것이 우리들 재산의 전부입니다.”하며 자신들의 양심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사피라는 베드로 사도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대들이 땅을 이만큼 받고 팔았소?”(사도5,8)라고 물었을 때 “예, 그만큼입니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했습니다.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사도5,9) 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자, 하나니아스는 자신의 잘못을 주님께서 모두 보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놀라움과 충격과 절망에 빠져서 죽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피라에게 “그대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라고 말하는데, 베드로 사도의 눈에 사피라는 이미 죽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기쁨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정성이 담긴 봉헌을 하면서 가슴 뜨거웠던 기억이나 행복을 우리는 체험했습니다. 아직은 욕심이 많아서 이것밖에는 내놓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음이 활짝 열리겠지요.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진실을 말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움켜잡는 삶, 나만 생각하는 삶, 다른 이들을 이용하려는 삶, 시기하고 질투하는 삶은 결코 세상을 밝게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면 기쁘게 후원하고 나눔을 실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들 때문에 세상이 더욱 밝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5. 스테파노의 순교와 복음의 전파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당당하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스테파노를 감당할 수 없자 유다인들은 스테파노의 입을 막기 위해 돌을 던집니다. 그 일에 사울도 동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 하듯이 스테파노는 그렇게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스테파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마지막 숨을 내쉽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하고 외칩니다.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인.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신앙인. 그런 신앙인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신앙인의 임종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면서 나 또한 그렇게 주님의 은총 안에서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 제자들은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한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도8,1) 그리고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사도8,4)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습니다.(사도8,2) 이 독실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 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사도8,3) 정의감에 불타는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합니다. 그렇게 박해를 하면 그리스도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스테파노의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곳에서 선교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1,8) 하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함께 고민해 봅시다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더 이상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요? 말하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 말들을 용기 내어서 할 때 얼마나 기쁠까요? 그 기쁨을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그 체험을 함께 나눠 봅시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하고 있는 나를 가족과 형제자매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사랑과 일치를 위한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있습니까? 굳은 믿음과 행동있는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성령께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고, 온전히 맡겼기에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말은 ‘미안합니다, 지난번에 미안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할게요, 고맙습니다. 본받고 싶습니다.’입니다. 입안에서만 맴돌 뿐, 용기가 없어서 고백하지 못하는 말들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말은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들 입니다. 이러한 것은 기도해야 할 수 있는 말들이고, 성령께 온전히 맡겨 드릴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제자훈련 4
첫째, 성령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의 만남처럼 주님 제자들이 만나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주님의 말씀안에서 기뻐하며 기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 베드로 사도처럼, 바르나바처럼, 스테파노처럼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살아갈 때 변화가 됩니다. 주님 제자들의 변화는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성령의 은사를 활성화시켜 은사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는 활성화시켜, 사랑과 기쁨과 평화, 인내와 친절과 선행, 진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우리 공동체가 풍성하게 맺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주님 제자의 삶을 찾아봅시다.
셋째, 성령께서는 공동체를 일치시키십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는 공동체를 일치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단체와 구역, 본당을 일치시키기 위해 주님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넷째, 바르나바는 사울을 사목의 협력자로 삼습니다. 그렇게 함께 노력하여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라고 비신자들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명품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고, 새신자들을 교회 안에 넘치게 할 수 있을까요?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다섯. 우리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 저와 함께 성당 다니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뽑으셨습니다.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마르3,13-15).
사도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야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6,10-11)
주님의 제자들은 오로지 복음 선포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상의 삶을 마감하시고, 그렇게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0,19-20)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제자들 혼자의 힘만으로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어 이끌어 주셔야 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더불어 사랑과 정의의 계획에 몸 바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니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들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내 것을, 내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늘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1.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제자들의 삶
① 모범적인 삶
첫째.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스승이 된다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고, 그들이 나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의 삶이 모범이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옳은 것, 참된 것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주님의 제자들을 따르게 됩니다. 특별히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셋째.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그들이 제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제자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도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섬길 때 스승이 될 수 있고, 섬김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② 세상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삶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모든 죄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며,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 믿음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둘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어야 하고,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삼위로 현존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이제 과거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나기에 이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넷째. 세례를 주기 위해서는 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통해서 그에게 다가갈 때, 그는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형제애를 느끼게 됩니다.
다섯째. 또한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확신이 있어야 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자들의 삶이 형제적 친교 안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③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고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주님 자녀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삶으로 가르쳐야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의 자녀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교리나 강좌를 통해서, 미사 중 강론을 통해서, 일대일 대화를 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대부대모가 대자대녀를 가르치게 해야 하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해야 하며,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이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어떤 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와 함께 하면서 도와주고,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주님의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셋째, 특별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을 올바로 보여주고 사랑을 가르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넷째,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어떤 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그와 함께 하면서 도와주고,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정의를 이웃에게 실천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됩니다.
④ 상호 협력하여 사명을 수행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고, 둘이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일을 할 때 주님께서 함께 계셔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것이니 서로 협력하며 수행해야 합니다.
⑤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사명을 수행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13,1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를 섬길 때 참된 봉사를 할 수 있고, 서로를 섬길 때 더욱 겸손하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주님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⑥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능력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약속해 주십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16,17-18)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다양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새로운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영가와 찬가”를 말할 수도 있지만 믿음을 통해서 내가 하던 “나와 상대방을 죽음으로 이끌던 말들”을 버리고 “나를 살리고 상대방을 살리는 말들”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 하던 모든 말들을 잊어버리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쁨에서 나오는 말을 하게 되고, 그 말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세상 끝까지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또 손으로 뱀을 집어 들어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로마로 가던 바오로 사도는 뱀에 물리고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손에 뱀이 달라붙자 바오로를 살인자라고 생각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 것을 보고 오히려 바오로를 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사도28,1-6). 또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는 이를 기도와 안수로서 고쳐 주었습니다(28,7-10).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독이 든 음식을 먹고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독을 넣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헤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 뱀, 독, 병자.”이런 것들은 모두 죽음과 관련된 것이고 구원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따라옵니다. 어떠한 위험이나 유혹도 믿는 이에게서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믿는 이에게서는 무한한 생명력(기쁨)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려 주고, 영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치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 죽어서’(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이들에게 은총을 나누어 주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2. 일흔두 제자를 파견(루카10,1-12)을 통해서 제자의 삶을 배우기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말로만, 입술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선포하고 있는 내용을 내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아하~ 하느님의 나라는 저렇게 멋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구나!’라고 말할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10,1)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일흔두 제자는 주님께서 오심을 알리는 사람들이고,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그 고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와는 달리 그들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일흔두 제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일흔두 제자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어 공동체를 위해서 보이지 않게 봉사를 해 나가야 합니다.
①“일꾼들을 보내주십사”하고 청하기
파견받은 일흔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의 추수꾼입니다. 추수 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추수되는 곡식들은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톨도 바닥에 떨어져 버려지는 일이 없이 정성스럽게 곡식들을 모으는 일꾼들은 하느님 백성들을 돌보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더 많은 일꾼들(주님의 제자들)이 필요한 이유는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내가 충실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같은 일꾼이 더 많아 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나에게 ‘이것을 함께 해요.’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네!’ 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②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복음을 선포하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그 걱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10,3)
‘이리’라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론가, 열광자, 궤변가(詭辯家)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선포하시는 사랑의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신앙인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누군가가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을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면 가차 없이 없애버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리떼’입니다. 그러므로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모욕과 박해, 죽음까지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임이 있는 경우 나오기 싫은 이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공동체에서 결정된 것을 하기 싫은 이들은 이런저런 불평을 하고, 공동체의 결정을 바꾸어 놓으려고 합니다. 공동체를 재미없게 만들고, 흩어버리려 하며, 사회 모임과 차이가 없게 만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복음적이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봉사할 마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결코 움직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봉사자들의 힘과 열정을 빼앗아 버립니다. 하지만 봉사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리떼 속에 자신이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해야 함을. 주변 사람들이 내가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선 기뻐해야 합니다. ‘아하! 내가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제자이구나!’라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행동은 없고 말만하는 궤변가일 수도 있습니다.
③ 파견받은 이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루카10,4)고 하십니다. 돈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이 필요없이 때문에 여행 보따리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다른 것은 준비하지 말라는 것은 준비된 신발이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할 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말을 선포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게 됩니다.
둘.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아라.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ㄴ)고 하십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가시려는 고을에 가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이들을 만나 인사를 하게 되면 어느 순간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잊어버리기에,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에 눈을 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일에 간섭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방향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셋. 평화를 빌어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10,5-6)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구원)입니다. 이 평화가 그 집에 머물면 그 집의 모든 이들은 주님을 믿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평화를 거부하는 이들은 주님을 거부하는 이들이며, 이들은 구원을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평화를 전해 주십니다. 구원을 전해주십니다. 나를 통해서도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구원을 전해주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어 형제자매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평화속에 머물며 구원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넷. 같은 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파견받은 제자들이 같은 집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루카10,7)
이 집의 잠자리가 불편하고, 이 집에서 해 주는 음식이 맛이 없고, 집 주인이 불편하다는 것들은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세상 것들을 생각하는 이들은 이집 저집을 옮겨 다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온 것이지,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을 찾아서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오로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다섯.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예수님께서는 음식이나 잠자리 때문에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10,8)
주는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그들의 환대를 거부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며, 그들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음식이 정결한 음식인지 부정한 음식인지를 가리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나환자촌에 봉사를 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밥 먹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나병에 걸린 손으로 밥을 퍼서 주는데 그걸 먹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그들과 더욱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음식은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초대받았을 때 ‘음식이 간이 안 맞는다든지, 나는 야채를 좋아하는데 왜 고기를 주느냐느니, 나는 이런 음식은 안 먹는다느니’, 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초대할 생각도 안 들고, 나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안 본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느님의 선물을 돈 받고 팔아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생활을 당연히 돌보아야 합니다.
여섯. 병자를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에 머물며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10,9)하고 선포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병자의 치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때를 준비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병자의 치유는 이 구원의 때가 힘차게 도래하였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서 사랑을 이야기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눔이 없으면서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해서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내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당연히 입으로만 선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거룩하고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은 비신자들에게 기쁨과 확신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예수님께서 내 가슴에 담아주신 평화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봅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기쁘게 복음을 선포해 봅시다.
3. 함께 복음을 선포하기(마르9,38-41)
같은 일을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일을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고, 잘하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고, 본받으려 하고, 후원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중심이 되려고 할 때는 공동체가 분열될 수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9,38)
요한이 어떤 이의 구마예식을 막으려는 이유는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예식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요한은 자기 행위가 잘못이 아니었나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마르9,39)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켜 마귀를 쫓아냈는데 예수님을 나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의 권능을 직접 체험하면 예수님을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오히려 원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쁘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서로가 드러나지 않고, 서로를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신자였구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신자였구나!’ 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역시 신자는 다르구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
성당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모두 한 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봉사할 때는 한 팀이 되어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들의 단체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교회 공동체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교회의 봉사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들은 공동체의 일치를 도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해 준 만큼 나 또한 받을 것이고,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기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싫어하거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손이 나가질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가 나의 하느님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셋째, 주님의 제자들끼리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봉사하면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해야만 된다고, 내가 중심이 되어서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넷째, 주님의 제자들끼리 시기와 질투와 비방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 형제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시기나 질투 때문에 그 일을 함께하지 않거나,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 성향이 맞지 않는다 하여 “너랑은 더 이상 일 못하겠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부족하다하여 소외시켜서도 안 됩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모두 한 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을 지지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자매들을 지지해 주며, 그를 격려해 주어야 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9,41)
겨우 물 한 잔의 배려가 큰 상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팔레스티나에서는, 특히 쨍쨍 내리쪼이는 햇빛을 받으며 오랫동안 광야를 걸은 후에 만나게 되는 시원한 물 한 잔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입니다. 나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그는 그 물 한잔을 통해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그것이 중요하게 쓰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남이 나 같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물은 그렇게 큰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사막을 건너온 사람에게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물 한 잔 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잘해 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작은 양보와 너그러움, 다가감일 것입니다. 용서를 청함과 화해의 악수일 것입니다.
또한 비신자와의 관계는 좋으면서도 신자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비신자와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신앙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또한 물 한 잔 주기를 꺼리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작은 것 하나 내어줌을 통해, 하늘의 큰 축복을 얻게 됨을 반드시 명심합시다. 내가 동료 봉사자들인 형제자매들에게 내밀어야 하는 물 한잔은 칭찬과 격려, 존경과 감사, 사랑과 따름, 이해와 용서, 기도와 청원, 망각과 여유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예언자로 대하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고, 주님의 제자를 주님의 제자라서 주님의 제자로 대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주님의 자녀라 하여 주님의 자녀로 대할 때는 주님의 자녀가 받게 되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제를 사제라 하여 사제로 대할 때, 사제가 받게 되는 상을 받게 될 것이고, 수도자를 수도자라 하여 수도자로 대할 때, 수도자가 받게 되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상은 참 많습니다.
①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주님의 제자들
첫째,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갑니다..
둘째, 주님을 대하듯 그렇게 형제자매들을 대합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답게 베풀며 살아갑니다.
넷째, 판단하거나 심판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다섯째, 형제자매들을 구원에로 유혹하며, 주님의 말씀 안에 빠져들게 합니다.
여섯째, 만나면 기도하고,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일곱째, 내가 가진 분노의 무기들, 판단의 도구들, 편협함의 저울들은 언제나 집의 골방에 두고 다닙니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마음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냉담까지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 때문에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나 때문에 공동체가 활기를 띠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만이 가정이나 공동체가 서로 기쁨을 나누며 활기찬 생활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서로가 만나고 싶고, 서로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고민하고 그 고민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함께 고민해 봅시다④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며 사방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고,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하는데 함께 하시며 제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일으키는 기적들을 보고 더욱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면서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복음을 전해 받았고, 예수님을 믿으며 구원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나는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며 전해받은 복음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기쁨(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까요?
첫째, 천주교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천주교를 내가 다니고 있음을 다른 이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매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의 역할이었고, 열심한 신앙인들의 역할이고, 내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천주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 줄 수 있어야 하고, 천주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관심 있는 이들이 와서 보니 “아! 그랬구나. 오길 잘했어. 나도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내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내 변화된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변화된 신앙인은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기뻐하며 변화된 삶을 살고, 그 변화된 삶으로 다른 이들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을 통하여 다른 이들을 신앙 안에로 초대합니다.
위의 것들이 반복될 때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로 전파될 수 있습니다. “와서 보니 별것 아니더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나랑 다를 것이 없더라.” 이렇게 보여 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통해서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들을 통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쉬는 교우들을 열정적으로 만들며, 함께 봉사하는 이들이 서로 기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제자들의 복음선포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훈련 5
첫째, 내가 복음을 선포할 사람 다섯 명 정하기
| 이름 | 나와의 관계 | 그의 종교관 | 내가 그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이유 |
둘째, 내가 복음을 선포할 사람 다섯을 위해 기도할 내용들을 적어보고 기도하기
| 이름 | 그가 희망하고 있는 것 |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노력들 | 그를 위한 나의 간절한 기도 |
셋째, 내가 선포할 복음
① 내가 그대에게 천주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② 내가 천주교를 얼만큼 다녀봤는데, 그 동안 내가 경험하고, 내 삶이 바뀐 것은
③ 천주교는 이런 종교입니다.
④ 천주교에서 믿는 것은 이것입니다.
⑤ 천주교의 장점은
⑥ 하느님은 이렇게 존재하십니다. 저는 하느님을 이렇게 체험했습니다.
⑦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⑧ 성령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⑨ 하느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폭력과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⑩ 타종교 사람들은 천주교를 성모님 믿는 종교라고 말하는데
⑪ 신앙생활의 기쁨은 이것입니다.
⑫ 그동안 나는 당신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와 함께 이 기쁨을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천주교에 대해서 궁금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봅시다.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여섯.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자녀들입니다. 하늘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의로운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역시! 신앙인인은 달라.”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둘째,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통치하시는 아버지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안에서 살아가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의 말씀에 언제나 “예”하고 순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에 “예”하고 순명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할 때,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순명으로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이 펼쳐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형제자매들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한 끼의 식사 앞에서도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식만을 청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의 양식도 청하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줍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 주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용서받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용서해 줍니다. 또한 용서해 주지 않으면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먼저 용서해줍니다.
여섯째, 유혹을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유혹과 싸우면 이길 확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피하는 것이 결국 유혹을 이기는 방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도망치듯 그렇게 유혹에서 도망칠 때,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악을 멀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는 악에서 나를 구할 수 없기에,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악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만 매달립니다.
여덟째,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자기 자신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늘 기도하는데, 그것을 빈말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고백한 믿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믿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내용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삶으로 살아가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들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내어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 주시니, 나 또한 주님께 그렇게 드리면서 살아갑니다. 당연히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은총을 청하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다 보면 마태오 복음이 주님의 기도 안에 쏙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일 몇 번이고 바치는 주님의 기도 안에서 마태오 복음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마태오 복음은 나의 기도서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마태오 복음을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고,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주님의 기도를 더욱 완전하고 아름답게 바칠 수 있습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으로 기도하려는 나에게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복음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1.1. 족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먼저 예수님의 족보를 보시면 우리는 이방인 여인이나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통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완전한 구원 역사를 펼치십니다. 나 또한 부족하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주님께 보여 드리고 주님께 매달릴 때, 주님의 작은 구원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부족한 인간의 모든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족보를 통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심을 알 수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1.2. 치유를 통해서 드러나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① 나병 환자의 치유(마태8,1-4)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
어떤 나병 환자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8,2)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8,4)라고 말씀하시며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녀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스런 모습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보여집니다.
② 백인 대장의 병든 종의 치유(마태8,5-13)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
한 백인대장이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8,6)하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8,7)하십니다. 그 이방인은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를 말씀드리고 한 말씀만 해 달라고 청하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마태8,8-9) 예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 “가거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8,13)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렇게 당신 백성이 큰 믿음을 보일 때는 칭찬해 주십니다. 그 청을 들어주신 분은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③ 보시고 측은하게 생각하시며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마태8,14-17;9,1-8)의 사랑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라고 말씀하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에 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다 들어주셨습니다.(마태14,34-36)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 발치에 데려다 놓자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마태15,29-30)
예수님께 자비를 청해서 외면당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8,17)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고통을 어떻게 외면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병고를 어떻게 외면하시겠습니까?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④ 마귀를 쫓아내시어 당신 자녀를 구원하시는 예수님(마태8,28-34;9,32-34)의 사랑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사로잡힌 당신 자녀들을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8,29)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당신의 자녀가 마귀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찌 상관이 없겠습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10,34)라고 모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녀의 구원을 생각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일을 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짧은 기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과 감사가 담겨야 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⑤ 청하는 이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마태9,18-34)의 사랑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간절한 청을 들어 주십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9,18)라고 간청하자 그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죽은 그의 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어 부모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간절히 청하는 이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사랑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9,21)하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라고 구원을 주십니다. 청하는 이를 물리치지 않으시는 분, 그분이 바로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 구원자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9,28)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예, 주님”(마태9,28)하고 응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하시며 그들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눈먼 사람 둘이 자비를 청하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태20,32)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태20,34)하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자비를 청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마귀가 들려 고생하고 있음을 알리며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15,22)하고 외친 이 여인의 굳은 믿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15,26)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녀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15,27)하며 굳은 신뢰와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하시며 그녀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는 기도
●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완전한 구원 역사를 펼쳐 가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부족한 제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주님께 보여드리며 청하오니 저 또한 주님의 작은 구원 도구가 되게 하소서.
◌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하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8,2)라는 고백에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8,4)라고 말씀하시며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종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백인대장의 진실한 믿음에 “가거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8,13)라고 말씀해 주시며 칭찬해 주시며 그의 청을 들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열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라고 말씀하시며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을 때, 기꺼이 그들의 청을 들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 발치에 데려다 놓았을 때,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마귀에 사로잡힌 당신 자녀들을 자유롭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회당장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시어 그의 죽은 딸을 살려 다시 부모의 품에 돌려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간절히 청하는 이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9,21)하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을 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라고 말씀하시며 구원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하고 외치며,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태20,34)하고 청한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시며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하시며 그녀의 딸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의 모든 병고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 사랑과 구원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영원히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2.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들이 의로운 삶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 줄 때,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빛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안에 머물며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의롭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를 통하여 거룩히 빛나게 되며, 영광 받으시게 됩니다.
① 의로움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기
마태오 복음 1장 18절부터 25절까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부분에서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잘 나타납니다. 그 의로움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니 요셉도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풀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이들은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② 빛과 소금의 삶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기
마태5,13-16절의 “세상의 소금과 빛”에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라는 말씀도 결국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방법입니다.
화해하여라(마태5,21-26), 극기하여라(마태5,27-30),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마태5,31-32), 정직하여라(마태5,33-37), 폭력을 포기하여라(마태5,38-42),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3-48)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듯이 그렇게 주님께 온 삶으로 영광을 드리며, 용서와 극기와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예물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빛낼 수 있는지를 늘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③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하는 기도
● 하느님 아버지! 저의 착한 행실로 영광을 받으소서.
○ 하느님 아버지! 제가 형제자매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줌을 통해서 영광 받으소서.
● 하느님 아버지! 저의 작은 인내와 절제를 통하여 찬미를 받으소서.
◌ 하느님 아버지! 제가 제 배우자를 사랑하며, 정직하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함을 통해서 찬미를 받으소서.
● 하느님 아버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누가 제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려는 저의 마음”을 굽어 보시고, 부족한 저 자신이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지극히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으려고 하는 저의 작은 행동을 통하여 찬미를 받으소서.
◎ 저희의 의로움의 빛과 자비의 빛이 세상을 비추어 세상이 저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찬양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부족한 저희의 의로움과 보잘 것 없는 저희의 자비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낼 수 있도록 하소서. 아멘.
3.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하여 교회는 힘차게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0,19-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온 세상에 확장시켜야 합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생명이 있는 나라이고, 하느님의 통치 방식인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넘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들은 모두 하느님의 통치방식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는 이들은 하느님을 섬기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마태6,19-31)
하느님을 섬기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마태7,31)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6,31)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세상에 보물을 쌓게 되면 “코라진과 벳사이다”(마태11,20-24)처럼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11,24)라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이들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입술로만 주님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태15,2)라는 지적에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들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태15,8-9)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②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들(마태7,1-5)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이들은 결코 심판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감히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옳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내 심판의 잣대로 나 또한 심판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18,10-11) 내가 나의 잣대로 하느님의 자녀들을 판단할 때, 그 죄가 고스란히 하늘에 쌓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마태12,1-8)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1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인은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줄 생각을 먼저 해야지 단죄할 생각을 먼저 해서는 안 됩니다.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4-56)하며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주는 사람, 칭찬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칭찬해 주는 사람,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께 맡겨 드리는 사람, 그렇게 하느님의 자리에 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③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갈망하며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버리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 안에 머물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라고 고백하며 주님 안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며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그렇게 믿음을 고백하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④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는 것이다.”(마태18,15)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사랑과 용서를 거부하면 구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는 이들은 언제나 생명의 길에 들어서려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실천하며, 다른 이들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삶이 바로 좁을 문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고,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들이 바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는 이들”입니다.
4.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예수님의 기도의 주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낮에는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돌보신 예수님께서는 밤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묻고,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늘 기도하신 예수님
세 차례에 걸쳐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26,38)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26,39)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주제는 “아버지의 뜻”을 물어 보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듯, 그렇게 내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피와 땀을 흘리셨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늘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것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를 때, 나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나를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②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예수님(마태21,28-32)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그대로 실현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생겨라”하시니 생겼습니다. 보시니 좋았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라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나 책임은 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하고 일렀습니다. 맏아들은 “싫습니다.”(마태21,29)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21,31)하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죄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이렇듯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 나가도록 마음을 움직여 줍니다.
③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아드님 예수님을 믿는 것(마태21,33-46)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성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세상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포도밭은 세상이고, 소작인들은 하느님 백성(유다인들)이고 종들은 예언자들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유다인들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비유에서처럼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21,37)하며 아드님을 보내셨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비유에서처럼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이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하며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하기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④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 것들에 희망을 두지 말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이들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그렇게 죄로 기울어지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슬퍼하는 이는 자신의 행동을 마침내 바꾸게 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형제자매들도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고, 그렇게 슬퍼하면서 노력할 때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5,5)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 모두가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유하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으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며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유한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확장시켜 나가며,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입을 수밖에 없으니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 예수님께서는 자비가 무엇인지를 온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 청하는 이의 청을 물리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용서해 주는 것,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자비를 베풀 때, 나를 통해서 당신 자비를 드러내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5,8)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죄를 용서받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모든 죄의 유혹을 끊어 버리고 살아가는 삶이며,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깨끗한 상태로 살아가기에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나를 통해서 하느님을 뵙게 되고, 형제자매들의 삶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내 눈에는 하느님만 보이고, 하느님 눈에는 나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예수님께서는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얻게 된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버릴 때 내 안에 주님이 머무시고,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실 때 나는 공동체에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그 평화를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를 간직하며, 공동체 안에서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놓고, 필요한 곳에서 기꺼이 봉사하며, 누군가 모욕을 준다하더라도 웃음으로 돌려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자녀의 삶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이 의로움은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모두 의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의로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5.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①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백성을 돌보십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자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치유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14,15)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14,17)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지만 나의 것만 챙기지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주고자 한다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마태14,19)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빵을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모를 때는 제자들처럼 말하게 됩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모르고 입으로만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형제자매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전해주지도 못합니다.
② 누구든지 청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만을 청할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이들의 양식도 청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③ 선한 포도밭 주인의 사랑을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마태20,1-16)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마태20,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은 아홉 시쯤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왔습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마태20,6)라고 질문했을 때 “아무도 우릴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20,7)라고 말한 사람들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 품삯을 받아야 만이 가족들과 함께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한 포도밭 주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늦게 온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습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마음을 그들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이들은 자신의 일용할 양식만을 청할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일용할 양식도 청해야 합니다.
6.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형제자매들을 끊임없이 용서한다면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용서는 용서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하고 용서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면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기쁜 소식입니다.
① 용서 받았으니 용서해 주기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18,23-35)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으면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가 울며 사정하여 만 탈렌트를 임금으로부터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빚지지 않은 이를 만나 그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임금에게 했듯이 이 사람도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라고 말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료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료들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이 일을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그 임금은 그 종을 불렀습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해 주었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둔 것을 매정한 종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판을 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2) 임금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할 때는 내가 늘 용서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나 또한 용서해 주어야 함을 다짐해야 합니다.
7.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① 유혹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예수님(마태4,1-12)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사십 일간 단식하시며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유혹과 싸워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확실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사십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4,3)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드실 계획이 있으셨다면 결코 단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 속에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 안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악마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4,6)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실 예수님이셨다면 결코 가난한 목수의 아드님이로 태어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 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기적을 하느님께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5,7)
악마는 한편의 영화를 보여주듯 그렇게 세상을 보여주며 유혹을 합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4,9)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 안에 머물고 계신 예수님께 사탄은 너무도 무모한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4,10) 확신이 있을 때 유혹은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유혹은 그저 유혹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확신이 있을 때 예수님처럼 “사탄아 물러라가.”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유혹과 싸워서 예수님처럼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유혹과 마주하면 백전 백패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다가오면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로부터 도망치듯이, 냅다 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신뢰 안에 머물 때 하느님의 사랑을 언제나 느끼며 살아가게 되고, 그 사랑안에 있을 때 죄의 유혹을 피하며, 자신의 힘으로 유혹을 막을 수 없을 때는 냅다 튀어서 그 유혹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비록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② 남을 죄 짓게 하지 말고, 죄 지을 기회를 단호하게 피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18,6)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가면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들이 참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한 일은 불행한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③ 유혹을 피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0-42) 신앙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자신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면 “생각과 말과 행위”가 달라집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과 이 일이 끝난 다음에 무엇을 하고 즐길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8. 악에서 구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셨습니다.(마태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 질 것이다.”(마태23,37-38)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런데 억지로 악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에는 “주님! 제가 제 마음을 돌려 회개하오니 저의 나약한 의지를 굳건하게 하소서.”라는 청원이 담긴 것이고, 결심이 담겨 있습니다.
① 선을 행하기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에서(마태24,45-51) 불충실한 종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을 생각하면서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마태24,49)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도 그가 잘못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모습을 주인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악을 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합리화시키고,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좀 더 있다가 회개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속담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지금 어떻게 해서든지 눈 앞의 이익을 챙기려고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무엇을 잡을 것인지는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늘 기도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성찰하는 이들은 선을 행할 것이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양심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은 악을 선택하여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 안에는 “주님! 제가 늘 기도하면서 제 양심을 돌보게 하시고, 언제나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라는 청원 또한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②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
탈렌트의 비유(마태25,14-30)에서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다른 종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불리는데 열정을 쏟을 때 그들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25,24-25)라고 말하며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함을 포장하고 모든 것을 주인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 불충실한 종은 분명 다른 종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것입니다. 악한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변명만 하고 더 나아가 주인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악한 선택에는 반드시 벌이 따라옵니다. 주인은 그 불충실한 종을 심판합니다. 그리고 벌을 내립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5,30)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 안에는 “주님! 제가 악을 선택하여 어둠 속에 던져지는 벌을 받지 않게 하소서.”라는 청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③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갖기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마태25,31-46)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25,35-36)
악은 분명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들을 모질게 외면하고, 목말라 물을 청하는 이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나그네들을 차갑게 대하며, 헐벗은 이들에게 무관심하고, 병자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이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에는 도“주님! 제가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게 하소서.”라는 결심이 담겨 있는 기도이고, 그러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④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기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는 악의 상황에 동조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과 백성의 지도자들의 음모로 빌라도 앞에 섰을 때, 군중들은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7,23)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히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며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마태27,28-30)
군중들은 선동자들의 말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군사들은 예수님께서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죄인으로 단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며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27,42)하며 죄악을 쌓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는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기본 권리인 인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형제자매들을 단죄하며 모욕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담긴 기도입니다.
⑤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선을 행하기 위해 바치는 기도
● 주님! 제가 제 마음을 돌려 회개하오니 저의 나약한 의지를 굳건하게 하소서.
○ 주님! 제가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게 하소서.
● 주님! 제가 늘 기도하면서 제 양심을 돌보게 하시고, 언제나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주님! 제가 악을 선택하여 어둠 속에 던져지는 벌을 받지 않게 하소서.
● 주님! 제가 악의 상황에 동조하지 않게 하소서.
○ 주님! 제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기본 권리인 인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형제자매들을 단죄하며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9. 아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똑같이 사랑하듯 그렇게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심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을 형제자매들에게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하고 응답했다는 것은 그것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으로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실 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하고 응답했다는 것은 나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겠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인 우리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이라고 응답했다는 것은 그렇게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베풀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물으셨고,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멘”하고 응답했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물어보는 기도를 하겠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멘”하고 응답함으로써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 되고, 성령의 작은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굶주림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멘”하고 응답함으로써 내 것만을 챙기지 않고, 내 이웃의 어려움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도와주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유혹과 싸워야 하는지를 잘 알려 주셨습니다. 유혹은 유혹일 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아멘”하고 응답한다는 것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남을 유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인지를 알고 있기에 악으로 빠져들지 않고 선을 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아멘”하고 응답했다는 것은 기도한 내용을 이제 내가 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아멘”이라고 응답하고 있는 나는 진심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작은 구원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형제자매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가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가장 완벽한 기도임을 복음을 묵상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완벽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내가 되고자 굳게 다짐을 하게 됩니다. 주님! 제 입에서 완벽한 주님의 기도가 나오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 제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면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형제자매들과 일치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하면서
저의 행동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면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삶으로 형제자매들과 평화롭게 살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어머니 마리아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저를 내어 놓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면서
나눔과 섬김을 기쁘게 행하며
저의 가정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가정도 생각하게 하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하면서
형제자매들이 저에게 해준 것들만 생각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면서
저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게 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유혹의 기회를 멀리하며 형제자매의 의로운 모습을 본받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악행을 되풀이 하지 않으며, 언제나 선행에 힘쓰게 하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할 때는
제가 이 모든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기도해야 함을 명심하게 하소서.
저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제자훈련 6
첫째, 하루 세 번 이상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깊이 있게 묵상하고, 이 묵상이 관상에로 진입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마음의 순수함과 열정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둘째,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는 하느님 자녀를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삼종기도를 왜 바쳐야 하고, 삼종기도의 은총은 무엇일까요?
셋째,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적어봅시다.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봅시다.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일곱. 고백성사를 보려고 하는 나.
고백성사를 보려고 하는 나를 주님께서는 이끌어 주십니다. 내가 고백성사를 보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총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시기에 내가 지금 고백성사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하느님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찔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하는 것, 이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고백성사를 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어느 순간 또 그 상황이 되면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뉘우치며 고백성사를 보려는 그 마음을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에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있고,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있고,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을 행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내가 좋아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느님께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위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을 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들을 하고 있습니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나의 버릇이 되어 나의 삶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깊이 성찰해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나
고백성사를 보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요.”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잘못했습니다.”라고 뉘우치며 통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개라고 합니다.
첫째,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둘째,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넷째, 나는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섯째, 나는 어떻게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섯째, 나는 어떻게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일곱째, 나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덟째, 나는 어떻게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홉째,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열째, 나는 어떻게 내 재능을 봉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있는 그대로 돌아본다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자랑스러운 면도 있지만 부끄러운 모습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내 모습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당연히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하느님을 섬깁니다. 언제나 하느님이 먼저입니다. 재물을 섬기지 않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을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니 나도 형제자매들로부터 심판받거나 단죄받지 않게 됩니다.
셋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주님 안에서 쉬는 날이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날입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힘을 얻게 됩니다.
넷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들로부터 공경을 받아야 함을 알고 있고, 그것을 삶으로 보여 줍니다. 또한 부모의 권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섯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존중받을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섯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배우자로부터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신뢰를 이어갈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일곱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내 것을 약탈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타인의 것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훔쳐가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세상 법 뿐만 아니라 하느님 법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덟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거짓증언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으로부터 진실을 들을 권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거짓증언은 상대방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것이기에 “생명의 기본권”을 하느님께로부터 보장받고 있는 인간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거짓증언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위증은 하느님 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홉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부부들은 마음까지도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고, 나의 배우자는 그 누구로부터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열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고, 자신의 소유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릴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그 재물의 관리자이기에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재물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는데 사용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처럼 계명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기본 권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권한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권한을 누리며 상대방의 권리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이들도 소중한 존재이고, 나만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이들도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 가득한 의로움의 법” 안에서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더 아름답고 행복해 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보시기 좋도록 창조하신 세상에서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 가득한 의로움의 법”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성찰해 봅시다.
첫째, 나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그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셋째, 내가 지키고 있는 계명 중에서 가장 잘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넷째, 내가 지켜야 하는 계명 중에서 지키기 어려운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주님! 제 마음을 비추어 주소서. 제가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며, 주님의 계명 안에서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주님! 저의 의지를 강하게 하소서. 제가 주님 영광을 위하여 하고자 하는 것들을 끝까지 해 나가도록 강복하여 주소서. 주님의 계명을 지킴을 큰 기쁨으로 삶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방법임을 확신하게 하소서.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만큼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고, 귀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 그렇게 나는 그렇게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충실한 관리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Stewardship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신 귀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을 잘 하기도 하고, 글을 잘 쓰기도 하고, 기도를 잘 하기도 합니다. 정리를 잘 하기도 하고, 조직을 잘 이끌기도 하며, 고치는 것을 잘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재능을 키우고, 그 재능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재능은 큰 것이라야만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은 아주 작은 것부터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 시간에 재능을 담아서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 재능을 봉헌하는 것은 특별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7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장애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을 주님 제자들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둘째, 자녀들에게 고해성사를 권면할 때, 성찰 항목을 만들어 준다면 어떤 기준을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셋째, 고해성사를 통해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고해성사를 봐야 할까요?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여덟. 임종자들을 돌보는 주님의 제자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된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주인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며 살아 있는 우리들도 공동체의 동일한 구성원입니다. 천상교회와 지상교회는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정성껏 장례를 치러 주고, 죽음으로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감으로 보고 있기에 다른 이들보다도 죽음과 친숙한 편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합니다. 부모님의 기일에는 미사를 봉헌하며 행복과 광명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며, 장례가 나면 연도를 바치며 영원한 행복을 빌어 줍니다. 또한 매 식사 후 기도를 바칠 때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하며 기도합니다. 또한 제일 많이 하는 기도인 묵주기도를 마치며 “연옥 영혼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이처럼 가톨릭 신앙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최후의 심판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6가지 말씀에 죽은 자를 묻는 일을 추가하여 7가지를 실천하는 자선사업(corporal works of mercy)을 행하고 있습니다.
첫째,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둘째,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
셋째,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
넷째, 집 없는 자에게 머무를 곳을 제공하는 일,
다섯째, 병든 자를 방문하는 일,
여섯째, 감옥에 있는 자를 방문하는 일,
일곱째, 죽은 자를 묻는 일 등
가톨릭 교회는 아무런 조건없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봉사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예식 중의 하나는 바로 장례식입니다. 신앙인들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 연도해 주고, 장례미사에 참례하며, 매장까지 함께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장례식을 통하여,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경축하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세례로 한 몸이 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옮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신자들의 영혼을 씻어주고, 성인 성녀들과 뽑힌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게 하며, 육신으로는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육신 부활을 기다리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파스카 제사인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와 전구를 바침으로써, 서로 통공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서로 영신적으로 도와주며 위로합니다. 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법규범에 따른 교회의 장례식으로 치러져야 합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영적 도움을 간청하고 그들의 몸에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산 이들에게는 희망의 위안을 주는 교회의 장례식은 전례법의 규범에 따라 거행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죽은 이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경건한 관습을 보존하기를 간곡히 권장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화장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대하는 이유들 때문에 선택하였으면 금지합니다. 교회 장례의 형상적 개념은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합니다. 장례예식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각각 다른 성직자에 의하여 집전될 수도 있습니다.
① 운구(運柩): 망자의 몸을 성당으로 운구한다는 것은 기도하면서 종교적인 분위기 안에서 운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전염병이나 전쟁 등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시신을 성당으로 운구하지 않아도 장례를 치를 수 있습니다.
② 장례(葬禮): 장례예식은 성당에서 망인의 몸을 모시고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이유로 망인을 성당에 운구하지 못할 때에는 시신 없이도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습니다.
③ 매장(埋葬): 매장은 교회 묘지에 망자를 안장하는 것입니다. 죽은 신자들의 매장을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본당들은 교회 묘지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 묘지가 없으면 일반 묘지에도 묻힐 수 있습니다. 이때에도 그 묘지를 축복하여 사용합니다.
교회는 장례식에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가난한 이들이 합당한 장례식이 박탈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전례에서는(장례식 거행 때에도) 합당한 존경의 표시 이외에는, 개인의 인격이나 신분 계급에 따라 예식 거행과 외적 장식의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매장이 끝나면, 개별법의 규범에 따라 사망자 대장에 기입하여야 합니다.
어느 죽은 신자의 장례식이든지 일반적으로 그의 소속 본당의 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신자든지 또는 죽은 신자의 장례식을 돌보는 이들은 다른 성당의 책임자의 동의를 얻고 또한 그 죽은 이의 소속 본당 사목구 주임에게 알리고서 다른 성당을 장례식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소속 본당 사목구 밖에서 사망하였고 망인을 소속 본당으로 옮겨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또한 합법적으로 다른 성당을 장례식장으로 선택하지 아니하였으면, 사망한 곳의 본당 사목구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죽으면 주소나 준주소를 둔 사목구인 소속 사목구의 성당에서 장례를 치르고 매장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이나 묘지의 선택은 본인이나 가족 혹은 장례의 주관자가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는 소속 사목구 주임에게 알려야 하고 또한 선택된 성당과 묘지의 책임자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소속 본당 사목구 밖에서 사망하였고 망자를 소속 본당으로 옮기기가 불편하면 사망한 곳에서 가까운 성당을 장례식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화장은 자연법이나 하느님의 실정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장과 화장은 시체의 변화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고, 물질 불멸의 원칙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매장은 시체가 천천히 소멸되는 것이고 화장은 빨리 소멸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매장이나 화장은 육신의 부활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화장은 가톨릭 교리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이유가 아니면, 매장이 불가능한 경우에 예를 들면 전염병이나 전쟁 중에는 교회가 화장하는 것을 허가하였습니다. 또한 자기의 시체를 화장해 달라고 누가 청했을 경우, 그것이 신자생활에 어긋나는 이유에서 청한 것이 아니라면 교회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장례식은 그 지방에서 사용되는 예식서에 따라 거행하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땅에 묻히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신자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화장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며, 신자들 편에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악한 표양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④ 대세(代洗)
세례성사는 주교와 사제와 부제가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득이한 경우는 누구나 교회의 지향과 양식에 따라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정한 양식은 세례받을 사람의 이마에 물을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하면 됩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첫째, 세례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천주존재, 강생구속, 삼위일체, 상선벌악).
셋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리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넷째, 지금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죽을 위험에 있는 비신자에게는 누구든지 베풀 수 있는 비상 세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임종 대세입니다. 대세를 받을 사람은 천주교의 네 가지 교리(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를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만일 그가 건강을 회복하였다면 교리교육을 받고 나머지 예절을 보충해야만(보례)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대세를 베풀기 위해서는 다음의 순서를 따릅니다.
첫째,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자연수를 준비합니다.
둘째, 철들지 않은 어린이를 제외하고 어른에게는 4가지 중요한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천주존재: 인간은 피조물이며,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삼위가 계신데 한분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부는 창조주시요, 성자는 구속자이시며, 성령은 구원의 협조자로서 은총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강생구속: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데 우리도 그분을 믿고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되고, 구원의 상속자가 됩니다.
상선벌악: 인간은 많은 죄를 짓고 살고 있으며, 그 죄는 반드시 벌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의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다음 내세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천국), 악한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지옥)을 주십니다.
셋째, 4대 교리를 설명한 다음 준비된 자연수를 세례받는 사람의 이마에 부으면서 손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000 바오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하고 말합니다.
넷째,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에는 전에 신앙을 갖기를 원했는지 가족의 의견을 들은 후 세례를 줍니다. 이때에는 4대교리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사전에 가족들의 동의를 반드시 얻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장례 때 분쟁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세를 주신 분은 반드시 연도와 장례미사에 참례하셔서 유족들을 이끌어 주셔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유족들을 가톨릭 신앙에로 이끌어주는 선교사의 역할까지 해 주십시오.
다섯째, 비상세례인 대세를 준 다음에는 소속 본당 사제에게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세례받은 이의 주소, 성명, 나이, 성별, 세례 준 사람, 세례 받은 장소, 병명 등을 기록하여 사무실에 보고하면, 사무장은 그 내용을 본당신부에게 보고합니다. 나중에 환자가 혹시 임종하게 되면 사망 일자까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제자훈련 8
첫째, 천주교의 4대교리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고, 삶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4대교리를 나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해 봅시다.
둘째, 임종대세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풀어 설명해 봅시다.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아홉.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대부모와 대자녀
가톨릭 교회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을 때 반드시 대부모를 선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회법은 대부모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례받을 이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대부모를 정해 주어야 한다. 대부모의 소임은 세례 받을 어른을 그리스도교 입문 때 도와주고, 세례받을 아기를 부모와 함께 세례에 데려가며 또한 세례받은 이가 세례에 맞 갖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을 하고, 이에 결부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돕는 것이다.(교회법 872조) 모든 영세자들은 “대부 한 명만 또는 대모 한 명만 또는 대부와 대모 한 명씩만 두어야 한다.”(교회법 873조)
①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를 받는 자와 하느님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관계를 맺어 신앙생활을 돕는 후견인으로서 이 가운데 남자 후견인을 대부, 여자 후견인을 대모라고 합니다.
② 교회에 처음으로 입문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는 신앙인들에게는 일찍이 성세(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오랜 신앙생활을 하여 신심이 깊은 신자의 자상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이 필요에 응하여 입문성사인 성세(세례)와 견진을 받는 입문자를 대자녀(代子女)로 삼고 지도자를 대부모로 하였던 교회의 오랜 관습을 교회법이 명문화하였습니다.
③ 세례성사나 견진성사를 받는 이는 대부나 대모 중 한 편만으로 충분하나 양자를 모두 가질 수도 있습니다(교회법 873조). 한국에는 세례성사나 견진성사를 받는 이가 남자인 경우는 대부만을, 여자인 경우는 대모만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견진을 받는 자는 성세의 대부모를 또한 견진의 대부모로 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교회법 893조 2항).
초대교회에서는 세례성사를 받고 즉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분리해서 베풀고 있습니다. 세례 대부모를 견진 대부모로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부모를 형식상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견진성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을 대부모로 세워야 합니다. 대부모는 인간관계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세웁니다. 또한 대자녀들은 대부모와의 관계를 영적 관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영적 도움을 받고, 서로 기도하고 존중하고 영적 권고를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 대부모에 대한 교회법의 규정
세례성사(성세성사)와 견진성사를 받는 신앙인들은 대부모를 두어야 합니다. 대부모의 임무는 성사예절에 참여하여 성사를 잘 받도록 돕고 길이 신자 본분을 다하도록 지도하는 일(교회법 872, 892조)입니다.
교회법 874조
1. 대부모의 임무를 맡도록 인가되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① 세례받을 본인이나 그의 부모 또는 그들을 대신하는 이, 또는 이들이 없으면, 본당 사목구 주임이나 집전자에 의하여 지정되고 이 임무를 수행할 적성과 의향을 가져야 한다.
② 16세를 채워야 한다. 다만 교구장이 나이를 달리 정하였거나 또는 본당 사목구 주임이나 집전자가 정당한 이유로 예외로 인가하여야 한다고 여기면 그러하지 아니하다.
③ 가톨릭 신자로서 견진과 지성한 성찬(성체)의 성사를 이미 받았고, 신앙과 맡을 임무에 맞갖은 생활을 하여야 한다.
④ 합법적으로 부과되거나 선언된 교회법적 형벌로 제재받지 아니하여야 한다.
⑤ 세례받을 이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어야 한다.
2. 비가톨릭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영세자는 오직 가톨릭 신자 대부모와 함께 그나마도 세례의 증인으로서만 인가된다.
① 개신교나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는 이가 천주교 신자들 대부모로 세워서 영세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때는 그저 세례의 증인으로서만 역할을 하게 된다.
교회법893조
① 대부모의 임무를 맡기 위하여는 제874조에 언급된 조건을 채워야 한다.
② 세례 때 대부모의 임무를 맡은 이를 (견진) 대부모로 정하는 것이 유리하다.
둘. 어떤 사람이 대부모가 되어야 하는가?
대부모는 “판공성사, 주일미사, 대축일미사, 기도생활, 영성생활 등”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축일 때마다 미사 봉헌을 해주며 “언제나 마음만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1. 신앙에 충실한 사람
2. 대자녀와 관계가 좋은 사람이거나 대자녀의 부모와 관계가 좋은 사람
3. 대자녀의 세례식이나 첫영성체, 견진성사 때 참례하여 대자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
4. 대자녀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관심 가지고 기도해 줄 사람으로 적어도 대자녀의 축일은 축하해 주고, 생미사를 넣어 주며 함께 미사참례 할 수 있는 사람
5. 가정이 화목한 사람
6.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7. 대자녀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거나 세속적으로 이끌지 않을 사람
8.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존경받는 사람
9.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대자녀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
10. 부활과 성탄에는 성탄카드나 부활카드를 보내줄 수 있는 사람
11. 대자녀를 냉담으로 이끌지 않는 사람
셋. 대부모의 권리
1. 대부모는 대자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2. 대부모는 대자녀들에게 신앙적인 모범을 보여줄 권리가 있습니다.
3. 대부모는 대자녀들에게 의롭고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권리가 있습니다.
4. 대부모는 대자녀들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그들을 신앙에로 초대하고, 권면하고, 더욱 기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권리가 있습니다.
5. 대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주님! 저 사람이 저의 대자녀입니다. 제가 참 자랑스럽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넷. 대자녀의 의무
1. 대자녀는 대자녀를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2. 대자녀는 대부모의 신앙적 권고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습니다.
3. 대자녀는 의롭고 바른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 드리며, 대부모를 기쁘게 해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다섯. 대자녀에 대한 생각들
① 대자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대자녀 한 명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여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할까요? 한두 사람의 대자녀라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그들의 신앙성숙을 위해 노력할 수 있고, 후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자녀가 많아지다 보면 관심갖고 기도해 주며 함께 해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 대자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선교활동을 많이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교회에서 존경받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자녀가 많이 있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기준은 아닙니다
② 대자녀를 부를 때 “대자” “대녀”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대자녀는 “대부님” “대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 물론 그렇게 호칭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 앞에서 “대녀! 대녀!”라고 부를 때 싫어하는 대자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형제가 내 대자녀인데, 그 형제를 볼 때마다 자랑스럽고, 또 대부모로서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는 말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형님! 언니!”라고 불릴 때도 행복한 대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 관계 안에서 대자녀를 명예롭게 해주고, 대부모에게 영적 기쁨을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③ 나의 모든 대자녀와는 친목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 대자녀가 나를 보고 신앙적인 관계를 만든 것이지, 나의 대자녀들을 보고 신앙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자녀들의 모임은 스트레스가 될 수 있고,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 대부모는 자신의 대자녀들을 모아서 모임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④ 대자녀와 금전거래를 하는 것이 가장 좋고 안전하다.
– 대부모와 대자녀는 금전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⑤ 대자녀를 통해서 사회적, 교회적 지위가 상승된다.
– 어림도 없는 소리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들은 인간관계에 충실하기 보다는 신앙관계에 충실해야 합니다.
⑥ 대자녀는 같은 레지오에 꼭 들어와야 한다.
– 대부모와 함께 같은 쁘레시디움에서 레지오를 하고 있는 대자녀는 기쁨 보다는 어려움이 클 수 있습니다. 레지오로 이끌어준 다음에는 다른 쁘레시디움으로 보내줘야 하고, 처음부터 다른 쁘레시디움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면 더 좋습니다.
– 처음에는 함께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함께 활동하는 일이 없는 것이 더 이익일 때가 많습니다.
⑦ 대자녀는 대부모의 말에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 신앙적으로 성숙시켜 주려고 신앙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대부모는 신앙의 멘토이지 인생의 멘토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대부모의 편견이 대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서는 안 됩니다.
⑧ 대부모와의 관계나 대자녀와의 관계를 끊거나 바꿀 수 있다.
– 대부모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대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싶어 하는 대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관계를 끊거나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관계가 멀어지며 신앙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 늘 좋은 대부모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의로운 신앙인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생각과 말과 행위를 조심해야 합니다. 모범을 보이는 대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⑨ 대부모의 신앙생활은 대자녀와 관계 형성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대부모는 대자녀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대축일이라면 대축일 전에 알려 주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하고, 축일이라면 축일을 축하해 주며 함께 미사 참례하고, 거리가 멀면 연락하여 같은 시간대에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 9
첫째.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대부모와 대자녀는 어떤 모습입니까? 나와 나의 대자녀들의 관계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둘째, 내가 대부모 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대자녀 앞에 설 수 있도록 교육하시겠습니까?
셋째, 예비신자 교육을 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고 있지만 부족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새영세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이 더 필요할까요?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열. 첫영성체
첫영성체는 최초로 영성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들은 주님의 몸인 성체를 영할 수 있지만, 영성체를 하기 위해서는 ‘성숙성’이 요구되어 유아들의 영성체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오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자연적인 양식을 영하는 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이성의 분별과 신심과 존경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첫영성체 교리를 통해서 믿음을 준비시키고, 첫 고백을 통해서 합당한 자세를 준비시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는 이성(理性)을 쓸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어린이가 고해성사(告解聖事)와 함께 첫 영성체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교회법 제913조는 다음과 같이 첫영성체를 규정합니다.“어린이들에게 지성한 성찬(성체)이 집전될 수 있기 위하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 능력대로 이해하고 주의 몸을 신앙과 신심으로 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식과 정성된 준비가 요구된다. 그러나 죽을 위험 중에 있는 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보통 음식을 분별할 줄 알고 성체를 경건하게 영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지성한 성찬(성체)이 집전될 수 있다.”
첫영성체는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영성체를 한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자라나고 있고, 성체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며, 주님의 성체를 모신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영성체에 대한 열망을 키워주고, 신앙적인 지식을 주기 위하여 체계적으로 교육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를 부모가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가정 안에서 함께 해야 하기에 부모 교육도 병행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첫영성체를 할 어린이들에게
첫째, 성체성사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당신의 몸을 빵의 형상으로 주셨습니다.
둘째, 성체성사의 삶은 나눔과 희생과 봉헌의 삶이기에 성체를 모신 주님의 자녀들은 나눔과 희생과 봉헌의 삶을 기쁘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셋째, 성체성사는 은총지위에서 받아 모셔야 하는 것이기에 은총 안에서의 삶을 가르치면서 주님의 말씀을 알려주고,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며,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넷째, 주님의 성체를 모시려하는 모든 이들은 은총지위에 있어야 하기에, 은총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 성사의 고백성사를 알려주고, 충실하게 고백성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첫영성체를 반드시 “이날 해야 한다.”라는 규정은 없지만 교회는 18세기부터 첫영성체를 부활 2주일에 행했습니다. 부활제 2주일은 사백주일이라고 했는데, 부활주일에 세례 받은 신자들이 그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었다가 부활 제 2주일에 벗었던 관습에서 사백주일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교회는 이날 첫영성체를 거행하는 축제의 날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성체신심이 강조되는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첫영성체를 거행하는 곳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첫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은 아름다운 흰 옷을 입고, 초를 들고 행렬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흰 옷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며, 주님을 향한 순결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초는 “세상의 빛”임을 드러내며, 빛으로서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며, 빛이신 주님과 함께 언제나 주님께로 나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당신부는 어린이들이 첫영성체에 대하여 충분히 준비하도록 배려할 의무를 지니며, 그 준비가 충분한가 아닌가의 판단은 고해신부 또는 양친, 후견인에 속합니다.(교회법 914조). 교회는 어린이들의 첫영성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본당신부에게 교육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교회법 777조는 본당신부가 교구장이 정한 규범에 유의하면서 특별히 힘써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① 성사 거행을 위하여 적합한 교리 교육이 실시되도록 할 것.
② 어린이들이 적절한 기간 실시되는 교리 교육을 통하여 참회성사와 성체성사의 첫 번 배령(첫고해와 첫영성체) 및 견진성사를 올바로 준비하도록 할 것.
③ 어린이들이 첫영성체 후 더 풍부하고 더 깊이 교리 교육을 받도록 할 것.
④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자들에게도 그들 조건이 허용하는 한도만큼 교리 교육을 실시하도록 할 것.
⑤ 젊은이들과 어른들의 신앙이 여러 가지 형식과 계획으로써 강화되고 개화되며 발전되도록 할 것.
또한 교회법 제914조는 부모와 대부모, 본당신부가 어린이들의 첫영성체에 대해서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우선 부모들 및 부모를 대신하는 이들과 본당 사목구 주임은 이성의 사용을 하게 된 어린이들이 합당하게 준비되고 되도록 빨리 먼저 고해성사를 받은 다음 이 천상 음식으로 양육되도록 보살필 의무가 있다. 또한 본당 사목구 주임은 아직 이성의 사용을 하지 못하거나 준비가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는 어린이들은 거룩한 잔치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감독할 소임도 있다.”
그러므로 가정안에서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생활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첫째, 가정 안에서 기도하게 해야 하고, 학교에서도 신앙인으로 살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둘째, 성체성사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눔과 희생과 봉헌의 삶을 보여줄 때, 자녀들은 신앙의 교사인 부모를 통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를 더욱 열망하게 됩니다.
셋째, 부모는 주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자주 자녀들이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성당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넷째, 부모는 자주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도 부모의 모범을 따라서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됩니다.
다섯째, 부모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부모가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녀는 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여섯째,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성경을 읽어야 하고, 자녀들에게 성경을 교육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일치할 수 있으며, 예수님께로 더욱 사랑을 불태울 수 있게 됩니다.
일곱째, 부모는 자녀가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음을 늘 기억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으로서 기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첫영성체는 영성체를 하는 자녀나 부모나 대부모, 본당의 모든 신자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첫영성체를 떠올리며 지금 내가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고, 부모는 자녀가 주님의 성체를 모심에 기뻐 뛰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서서히 주님과 하나가 되어갑니다. 공동체는 첫영성체를 축하해 주며, 우리 모두는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하게 해주고 기억합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 주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멋진 삶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삶입니다.
제자훈련 10.
첫째, 첫영성체를 준비할 때, 교회 공동체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요? 대부모들은 자신의 대자녀가 첫영성체 할 때, 어떻게 기도해주고, 이끌어주어야 할까요?
둘째, 첫영성체의 감동이 지속되기 위해서 첫영성체자들에게 주님 제자들은 어떻게 다가가야 하고, 어떤 영적 지원을 해야 할까요?
셋째, 교회는 간식을 주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인도하고, 주님 자녀들이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기도문을 외웠다고 보상을 주는 곳이 아니라 그 기도문을 기도로 바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첫영성체자들을 위해 교회가 하고 있는 것 중에서 더 역량을 강화해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요?
♡ 실천한 다음에는 함께 모여 실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