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rus Chrysologus(406-450). 성인. 축일 7월 3일. 주교. 교회학자. 이탈리아의 이몰라 태생. 명설교가로 알려져 있다. ‘chrysologus’는 ‘금언’(金言)이란 뜻의 그리스어인데, 이것은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ysostomus, 347?-407)의 ‘chrysostomos’ 즉 ‘황금의 입’이란 뜻에 견주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벤나의 주교가 된 후 최초의 설교를 서로마 여황제 갈라 플라키디아(GaIla Placidia) 앞에서 했는데, 그때부터 여황제의 끊임없는 지지를 얻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와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어서 아리우스주의, 펠라지우스주의, 마니교(敎)등을 논박하였다. 또한 로마 주교좌에 대한 신앙을 견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에우티케스(Eutyches)에게 보낸 편지(449년)에 의하면, 에우튀케스 논쟁문제의 처리에 있어서는 로마 주교측보다 오히려 에우튀케스에게 더 호의를 표시하였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이 오늘날 잔존하고 있지만 그밖의 문서는 거의 모두가 남아 있지 않다. 설교의 주요한 것은 빈첸티노(Agapitus Vincentinus)에 의해 볼로냐에서 출판되었다(1534년).
베드로 다미아노 [라] Petrus Damianus
Petrus Damianus(1007-1072). 성인. 축일은 2월 21일. 주교. 교회개혁자. 이탈리아의 베네딕토회 신학자. 라벤나(Ravenna)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파엔자(Faenza)에서 사망하였다. 파르마, 모덴자, 파엔자에서 교육을 받고 1035년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몇 개 수도원을 창설하고, 낡은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1057년 교황 스테파노 9세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이 무렵부터 교회개혁에 중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성직자로서 세속화와 성직매매를 하는 자에 대해서는 타협을 배제한 설교자로서 유명해 졌다. 특히 호노리오 2세와 같은 대립교황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1059년 밀라노 교회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몇 차례나 교황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프랑스 및 독일에 파견되었다. 1069년에도 교황사절로 독일에 가서,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황후 베르타에 대한 이혼문제에서 황제를 설득하여 무마시켰다. 1072년 고향 라벤나를 마지막 방문하고 돌아오다가 파엔자의 산 마리아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유해는 현재도 산 마리아 대성당에 묻혀 있다. 1828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추서되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저서를 간행하여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명령하였다. 교리적으로는 ‘정죄’(淨罪), ‘성찬’ 및 성직매매자에 의해 관리되는 ‘성전례’가 정당치 않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11세기 스콜라철학 부흥기에 있어서 스콜라에서의 인문학과 중에서 논리학이 최상위에 놓여야 한다는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신학자 입장에서 이에 반대하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요저서로 성직자의 결혼을 반대한 ≪Liber Gomorshianus≫와 성직매매를 반대한 ≪Liber Gratissimus≫가 있다.
베드로 [라] Petrus [영] Peter
첫번째 교황이며 십이 사도들의 지도자. 갈릴리에서 어부 요나의 아들로 태어나 아우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던 중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원 이름은 시몬이었으나 예수가 그에게 베드로 또는 아람어로 게파(Cepha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요한 1:42) 베드로나 게파는 둘 다 ‘바위’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그의 강한 성격에도 어울리지만 후에 그리스도가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하심으로써 그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서에서 그의 이름은 사도들의 명단 중 언제나 제일 처음에 기록되었으며(마르 3:11) 다른 어떤 사도들의 이름보다 빈번히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루가 5:10).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예수가 사도들에게 질문할 때마다 그들을 대신하여 답변하곤 하였다. 베드로는 또한 예수의 거룩한 변모(transfiguration)의 증인이며(마태 17:1-8)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살려냈을 때 그와 함께 있었고(루가 8:51) 게세마니에서 그리스도가 공포와 번민에 싸여 기도하고 있을 때도 그와 함께 있었다(마르 14:33). 예수는 자신과 베드로를 위하여 성전세를 바치셨으며(마태 17:24-27)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음을 알려주면서 천사는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마르 l6:7)고 말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베드로는 유다의 후계자를 뽑는 모임을 마련했으며(사도 1:15-26)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했던 예루살렘 회의를 주관하고 논쟁을 잠잠케 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사도 15:6-12). 4복음서에 기록된 그 밖의 많은 일화들이 베드로의 지도자적 역할을 명백히 해주고 있으며 그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신(요한 21:16-17)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하였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강점들을 지니고 있었으나 때로는, 인간적인 결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성급함은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동산에서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린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요한 18:10). 그는 메시아적 사명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고(마르 8:33) 예수와 자신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비겁함을 드러내고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였다(루가 22:54-62).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약점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예수가 그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고 말씀하심으로써 부여한 그의 역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베드로는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아그리파(Herod Agrippa) 1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서 잠깐 동안 그리스도 교단을 주재하였으나 네로의 폭정 아래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후에 로마 초대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참고문헌] J. Lebreton and J. Zeiller, The History of the Primitive Church, New York 1961 / D. Stanley, Etudes mat theennes: La confession de Pierre a Cesaree, science Ecclesiastiques 6, 1954 / O. Cullmann, Peter, Disciple, Apostle, Martyr: An Historical and Theological Study, Philadelphia 1962 / O. Karrer, Peter and the Church: An Examination of Cullmann’s Thesis, New York 19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