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대교구 관구의 신학교. 원 명칭은 대건 신학 대학이였으나 1985년 3월 1일부로 광주 가톨릭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대건신학대학
광야 [한] 廣野 [라] desertum [영] desert
일반적으로 너른 벌판을 가리키는 광야는 구약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야훼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야훼는 만나와 구리뱀으로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광야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개선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의 시기에는, 광야가 내림할 메시아를 고대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백성처럼 광야에서 여러가지 시험을 당했으나 그들과는 달리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성부께 충실하였다(마태 4:1-11). 그의 지상 생활 중에 예수는 군중을 피하기 위하여 광야로 갔고 한적한 기도의 장소로서 광야를 택하였다. 그러나 광야의 상징을 직접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에 있지 않고 일찍이 광야에서 있었을 놀라운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된다는데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광야라 할 수 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친교를 가진다. 이처럼 광야라는 장소와 광야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광야의 상징은 교회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까지 광야에서 살고 있다. 시련을 이겨낸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성사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또 수도자들은 광야에 은둔하여 기도하고 수덕에 전심함으로써 광야는 오늘날의 수도원 발생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광신주의 [한] 狂信主義 [영] fanaticism
자기의 신념을 지나치게 믿어 이성과 관용을 잃은 태도나 주장을 광신주의라 부른다. 이는 종교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대부분 어느 특정한 주의나 주장에 심취하여 그것이 내세우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열의를 가질 때 나타나며,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모든 사람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에서 광신주의적 요소는 2세기경의 몬타누스파, 3세기경의 도나투스파, 중세 발두스파와 카타리파, 16세기의 위그노운동, 17세기의 얀센파등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광신주의는 대체로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경우가 많은데 성령론, 종말론, 순결, 청빈 등 어느 특정 교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 구원의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광적인 몸짓과 자세를 노출하기도 하고,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치거나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고, 큰 소리로 마구 떠들어대기도 한다.
광성학교 [한] 光星學校
경기도 화성군 왕심리 왕림본당 구내에서 있었고, 한국 천주교가 설립한 가장 오래된 학교. 이 곳은 기해박해(1833년)를 피해온 교우들이 옹기를 구우며 삶을 꾸려 가던 곳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2명의 교우가 순교한 바있는 독실한 신자들의 교우촌이다. 이 곳에 학교가 들어선 때는 1892년 5월 1일 우리나라의 본당으로서는 두 번째 본당인 왕림본당이 설정된 4년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이곳에 한문서당을 설립하면서 이 학교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듬해인 1893년 4월 1일 한문서당은 삼덕학교(三德學校)란 교명을 내걸고 1개반 60여명의 학생을 모아 정식 학교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6.25동란으로 여러 차례 폐교를 당하면서도 교우주민들의 끈질긴 집념과 노력에 힘입어 학교명을 신명의숙, 왕림학원, 개량서당, 봉담고등공민학교, 광성국민학교 등으로 바꾸면서 존속해 왔다. 1949년 국민학교의 인가를 받은 후부터 1980년 2월 28일 재정난으로 폐교할 때까지 배출한 학생수는 총 1,308명.
광동학교 [한] 光東學校
원주교구 풍수원본당이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1896년 성심서원(聖心書院)이란 이름으로 개설되었고, 삼위학당, 광동학교라는 이름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이후 광동국민학교로 개편되었으나 그후 공립학교로 흡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