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본당 [한] 倭館本堂

왜관대리구 산하의 본당. 소재지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동(慶北 漆谷郡 倭館邑 倭館洞 281)이다. 1932년 낙산(落山)본당 관할의 공소로 출발, 당시의 교우수는 30명이었다. 1927년 정재문 회장 자비로 성당부지(왜관동 322번지) 1,700평을 매입, 1928년 본당으로 승격, 초대 본당주임으로 낙산 본당의 프랑스인 선교사 투르뇌(Tourneux, 呂東宣)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 해 11월 본당 신축공사가 준공되고(건평 90평), 1929년 2대 카다스(Cadars, 姜達淳) 신부 부임 후 사제관이 신축, 1931년 카다스 신부는 경주(慶州)본당으로 전임, 3대 리샤르(Richard, 李東憲) 신부 부임, 1933년 수녀원 및 학원이 건립되었다. 1936년 성 바오로회 수녀원 분원이 건립되고, 소화(小花)여자학원이 개원되었으며, 1938년 <경향잡지> 사설에서 왜관본당이 전 조선에서 최고의 교회유지비를 부담하는 모범본당으로 소개되었다.

1939년 를뢰(Leleu, 盧) 신부가 4대 본당주임으로 부임, 1943년 대구 비산동(飛山洞)본당으로 전임하였다. 이어서 5대 베르트랑(Bertrand, 韓) 신부가 부임, 1945년 4월 일제(日帝) 당국에 의해 대구 남산동(南山洞)본당에 연금, 6대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 7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가 부임, 1949년 낙산본당으로 전임하였다. 1949년 8대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가 부임, 4개월 만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본당을 떠났다. 1950년 2월 9대 이기수(李己守, 야고보) 신부의 부임 4개월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 전 읍민이 피란하였다. 이해 9월 전 본당주임 리샤르, 를뢰 두 신부가 대전교구에서 활동 중 공산군에게 납치, 순교하였다. 1951년 6월 이기수 신부 사제서품 25년 은경축 행사가 거행되었다.

1952년 3월 순심고등학교 설립이 인가되고, 6월 이기수 신부가 경산(慶山)본당으로 전임, 10대 본당주임으로 성 베네딕도회 소속 노규채(盧奎彩,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 이후부터 역대 본당주임은 성 베네딕토회 소속신부들이 부임하게 되었다. 1954년 6월 1일 교황사절 퀸란(具) 주교가 본당을 방문, 6월 20일에는 본당 최초의 성체 거동식이 거행되었다. 1955년 노규채 신부가 수도원 본원으로 전임, 11대 김영근(金永根, 베다) 신부가 부임해 왔다. 1956년 관할 구미(龜尾)공소와 군위(軍威)공소가, 1957년에는 관할 칠곡공소가 각각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59년 5월 람베르티니 주한 교황사절이 본당을 방문하였고, 10월에는 대구교구 한미합동 성체대회가 거행되었다. 1964년 김영근 신부가 평화동(平和洞)본당으로 전임되고, 랑(Lang, 張) 신부가 12대 본당주임으로 부임, 1966년 왜관동 281번지에 새 성당(193평)이 준공되었다. 1968년 서울 조계사(曹溪寺)의 이청담(李靑潭) 스님이 본당을 예방하여 주일미사를 참관하였고, 칠곡본당이 대구 대교구로 이관되었다. 이 해 11월 랑 신부가 교리신학원으로 전임, 13대 베르거(Berger, 白) 신부가 부임하였다. 1970년 14대 이덕근(李德根, 마르티노)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 1972년 부산 명상의 집으로 전임하고 15대 이석진(李錫震, 그레고리오) 신부가 새로 부임해왔다.

1973년 12월 교황대사 도세나 루이지 대주교가 본당을 방문, 1974년 2월에는 교회일치를 위한 신구교 공동예배가 거행되었다. 1976년 이석진 신부가 수도원 본원으로 전임되고 제 16대 서상우(徐相瑀, 요한)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8년 9월 왜관본당 50년사인 ≪왜관 반세기≫가 발간되었다. 같은 해 본당이 분할되어 제2의 본당(석전동본당) 설립이 결정되고, 초대 본당 주임으로 베네딕토 수도회의 조이페를링(Seuferling, 閔) 신부가 발령되었다. 왜관본당의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신자수는 3,168명(1984년 현재), 왜관읍에 베타니아원 공소가 있다.

[참고문헌] 倭館半世紀, 天主敎倭館敎會,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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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본당 [한] 汪淸本堂 [관련] 합마당본당

1924년 만주 간도성 왕청현(間島省 汪淸縣)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준본당. 주보는 성녀 엘리사벳. 합마당(蛤-塘)본당에서 분할, 창설되었다. 준본당으로서 합마당본당에서 관할했는데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합마당본당이 폐쇄될 때 함께 폐쇄되어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1936년의 교우수는 108명이었다. (⇒) 합마당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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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림본당 [한] 旺林本堂

주보로 ‘예수성심’을 모신 이 본당은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華城郡 峰潭面 旺林里)에 있는 유서깊은 성당이다. 속칭 ‘갓등이’로 알려진 이곳은 1866년 병인(丙寅)박해를 전후하여 복음이 전해졌으며, ≪치명일기≫에 수록된 최 야고보와 한 안드레아 등 2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수원에서 충청도로 가는 좋은 산길에 위치한 왕림리는 박해시대에 전교여행을 다니는 선교자들이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아니라 교우들이 사는 곳이기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곳 공소에 은신하고 있었다.

서울의 주교 · 신부들이 돌보던 이 갓등이공소는 1885년경부터 서울의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혼자 맡아보다가, 1888년 7월 앙드레(J. Andre, 安學古)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한수(漢水)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이듬해에 앙드레 신부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성당을 지었다. 관할지역은 수원군(현 화성군), 용인군, 안성군, 평택군 등 네 군에 공소는 24개, 신자총수 1,790명에 달하였다. 1889년 6월 앙드레 신부는 ‘덕곡(德谷) 김익제(金益濟) 사건’으로 고발당하여 서울 주교관에 소환되었다가 돌아와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2대 본당신부로는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부임하였다. 교세의 확장으로 1895년에는 미리내본당을 분할하고, 1901년에는 33간의 웅장한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 뒤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뒷날 광성초등학교(光星初等學校)로 발전하였다. 3대 본당신부인 르 각(C. Le Gac, 郭元良) 신부는 3년간 열심히 전교하다가 1914년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 초대 앙드레 신부와 같이 왕림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행주본당에서 왕림본당까지 겸임하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17년에 주임으로 부임하여 교세는 비약적으로 발전, 69개 공소에 신자는 2,700여명으로 늘었다. 3.1운동 때는 본당관내의 신자인 이순모(李淳模, 가브리엘) 등 6명이 우정면(雨汀面) 여술(현 화수리) 주재소 방화 및 순사(巡使) 타살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0년 봉담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였다가 몇 달만에 6.25로 폐교되고, 1957년 임응승(林應承, 요한) 신부 재임시에 발안본당을 분할 독립시키고, 1962년 임세빈(林世彬, 요셉) 신부 재임시에는 남양본당을 분할하였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수원교구로 편입되고, 1971년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 재임시에 연와조의 현대식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부임한 본당신부들은 모두 상수도, 전기시설, 양돈, 양계, 약초재배 등 갖가지 사업을 시도하여 지역사회 개발과 본당 및 학교운영의 자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현재 최재필(崔在弼, 안드레아)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는 이 본당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들이 파견되어 있고, 신자총수 1,495명, 공소는 3개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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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월동본당 [한] 玩月洞本堂 [관련] 마산본당

경남 마산본당(馬山本堂)의 후신. ⇒ 마산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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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덕 [한] 完德 [영] spiritual perfection

신자생활에 적용되는 완덕의 개념은 성서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권고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완전’의 용어를 고대에 바바리안들은 용기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은 완전을 인간속에 있는 신성(神性)의 자각으로 보는 신지학(神知學, theosophy)에서도 보여진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완덕을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용기로 보거나, 완덕의 본질이 참회와 고행에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는 완덕에 이르는 인간의 노력을 부인하고 완전한 수동성에 완덕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애덕(愛德)을 완덕의 형식적인 요소로 주장한다. 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안에 계신다”(1요한 4:16)는 성서에 근거한다. 성 바울로도 애덕이 완덕의 끈(골로 3:14)임을 확신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완덕을 두 차원에서 설명함으로써 완덕의 개념을 확실히 하였다. 즉, 첫 번째 완덕은, 전체에서 기인하여 모든 부분들로 완성되는 전체 형식으로서의 완덕이다. 세례를 통하여 회복된 성화은총(聖火恩寵)을 가졌을 때 신자로서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완덕은 작용으로 성취되는 것, 즉 목적으로서의 완덕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덕과 성령의 열매들을 필요로 한다. 애덕은 이 완덕의 근원이 된다. 신자생활의 완덕은 근본적으로 애덕,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인 애덕은 모든 성화수단을 지배하고 목적을 달성케 한다. 애덕은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친교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애덕은 단순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을 뜻한다. 현세에서 신자는 모든 활동을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행한다.

완덕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노력 정도에 따라 도달하는 단계에 차이가 난다. 즉, 인간이 완덕에 이르는 첫째 단계는 초보자로, 애덕을 직접적으로 거스리는 모든 것 즉, 대죄(大罪)를 피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진보자로, 완전히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인간애착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완덕자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단계이다. 완덕은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으로 마쳐지지만 이 마지막 단계에서도 완덕은 상대적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한계란 없다.

완덕은 신자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목표로서 명령되어진 것이며, 신자생활을 위한 모든 지침에 기본적으로 존재한다. 즉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행하지 않게 하는 계명의 준수로 가장 낮은 단계의 완덕에 나아간다. 그러나 두 번째는, 사랑의 실제적 실행에 근본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권고를 지킴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그리스도가 완덕의 길을 제시한 복음삼덕(福音三德) 즉 청빈 · 정결 · 순명의 권고이다.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덕의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없지만 권고는 명령과는 달리 자유롭다. 수도자들은 자유롭게 이 권고를 받아들여 이를 다 이루기 위해 서원(誓願)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자들이 어떤 생활조건이나 신분에 있든지 성부(聖父)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자기 신분에 고유한 완덕을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교회헌장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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