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수도회 [한] ∼修道會 [라] Pia Societas Sancti Pauli(S.S.P.)

약칭 S.S.P. 1914년 8월 20일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하여 이탈리아 알바(Alba)시에 창설된 수도회. 주보로 사도 바울로를 모시는 이 수도회는 사회 홍보수단을 통하여 포교에 종사한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영화, 라디오, 텔레비젼, 출판물 등 각종 홍보수단에서 흘러 넘치는 비도덕과 오류와 악의 소리를 눌러 이기기 위하여 이 수도회는 바로 그 홍보수단을 이용해서 잃은 양을 되찾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것이다.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 2회기를 끝맺을 즈음 교황 바오로 6세와 공의회 교부들은 매스컴의 도구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이 회의 사도직이 세계 가톨릭 포교의 실천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재차 증명하였다. 이와 같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창설된 이 수도회의 특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령을 위해 효과적이고 신속한 홍보수단을 이용하여 가톨릭 전교에 힘을 다하는 데 있다. 로마에 본부가 있는 이 수도회는 1983년 현재 22개국에 1,600명의 회원들이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다.

바오로 여자수도회 : 이 수도회 역시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하여 1915년 6월 15일 이탈리아 알바시에서 창설되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그가 아직 신학생이던 1900년말 자정미사 때 성체로부터 특별한 빛을 받았으며 그 후 새로 발명되기 시작한 문명의 이기들이 대중에게 퍼뜨릴 갖가지 오류에 대항하기 위하여 교회는 같은 수단으로 복음을 침투시켜야 한다는 당시의 교황 레오 13세의 호소에 깊이 공감하여 이런 목적의 수도회를 창립한 것이다. 그는 1911년 ‘사제의 열의에 참여하는 여성’이라는 책을 저술하는 한편, 이 수도회를 창립하기 위한 준비를 해 가던 중 데레사 메를로라는 훌륭한 협력자를 얻어 마침내 결실을 얻었다. 창립 당시의 회원은 데레사 메를로를 포함한 세 동정녀뿐이었는데 1918년부터는 신문발행 등 수녀회 목적에 따라 복음전파에 새로운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새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1953년 3월 15일에는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교회에 봉사하는 바오로 여자수도회는 로마에 총본부를 두고 세계 33개국에 가지를 뻗은 큰 나무로 성장하여 1983년 현재 3,000여 명에 달하는 사도 바울로의 딸들이 오늘도 세상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한국진출 : 1961년 12월 2일 마르첼리노(Marcelline) 신부가 한국에 성 바오로 수도회 지부를 설치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에서 왔다. 3주일 후에 갈리아노(Galliano) 신부가, 그리고 한국인 김시억 수사가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이들 3인은 서울 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상의한 뒤 서울 성북동 한국 순교복자 수도원을 임시로 빌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초대 지부장에는 마르첼리노 바오로 신부가 취임했다. 그 뒤 1962년 도봉구 미아4동 103의 6번지 현 위치에 180평의 수도원 건물을 신축하고 인쇄시설을 갖추는 한편 한국의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보다 1년 전인 1961년에 진출한 자매수도회인 성 바오로 여자수도회와 더불어 본연의 사도직인 도서출판을 시작한 것이다.

1964년 10월 15일 출판사(성 바오로 출판사) 등록을 마치고, 4대 한국 지부장 반프레디 신부 재임 때에는 1명의 한국인 신부를 냈다. 1978년에는 첫번째 종신 서원자(이영춘, 벨라도 수사)를 배출하고, 이어 유기 서원자들도 탄생되었다. 1980년 5월 빈첸시오(Vincenzo Fraterrigo, 하승진) 신부가 5대 한국 지부장으로 부임, 지금은 그를 중심으로 서원자 및 지원자 전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도직인 홍보수단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수도회는 관구, 위임구, 지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은 총장이 직접 관할하는 지부에 속해 있고, 현 회원수는 18명(서원자 10명, 지원자 8명)이다.

한편 바오로 여자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60년 12월, 당시 로마를 방문한 명수대(明水臺) 본당 주임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드로) 신부(현 라자로 마을 원장)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이 신부는 바오로 여자수도회가 펴고 있는 사회 홍보수단을 통한 복음 전파라는 새 선교방법이 한국에서도 필요하다고 느껴 한국지부 설치를 메를로 총장수녀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1960년 12월에 곧 일본 관구로부터 이탈리아 선교사 에울라리아 수녀와 재일교포인 크리스티나 수녀, 필리핀의 베로니카 수녀가 파견되어 왔다. 이들은 명수대 본당에 딸린 작은 집을 빌어 임시 거처를 정하고, 얼마 후 2명의 일본인 수녀 등이 또 입국하여 이 여자수도회의 기초를 닦았다. 그 뒤 1962년에 초대 총장인 데레사 메를로 수녀가 한국을 찾아주었고, 이듬해에는 창립자인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가 한국지부를 방문, 남녀 성 바오로 수도회에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 여자수도회는 1962년 2월 지금의 미아리 본원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성 바오로출판사의 첫 간행물인 ≪가정의 복음서≫, 현 ≪합본복음서≫가 출판되었다. 1964년에는 일본에서 제본(製本) 기술자 수녀가 임시로 파견되어 출판 사도직이 차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68년 수련소가 설치되어 초대 원장이던 에울라리아 수녀를 첫 수련장으로 모시고 8명의 수련자들이 바울로적 고유한 수도생활의 신심, 정신, 면학, 기도의 생활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 6월 30일에는 한국 성 바오로 여자 수도회의 첫 서원자들이 탄생되었다. 1975년 사라스케나 수녀가 2대 수련장의 직무를 이어받아 오늘까지 회원 양성의 중책을 수행하고 있다.

1969년 전주에 첫 번째 분원이 설치되고 1970년 9월 부산교구에 진출하였으며 1971년에는 초창기 사도직의 추억이 깃든 충무로 성 바오로 서원이 명동 2가로 옮겨져 정식 분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2년 5월 회원이 늘어나고 사도직의 분야가 확장됨에 따라 일본관구로부터 분리되어 로마 직할 위임구로 승격되었다. 초대 위임구장에는 에울라리아 수녀가 임명되었으며 1978년 도토 도로테아 수녀가 뒤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판분야에서는 현재까지 성서, 영성, 교리, 전례, 문학, 청소년, 아동용 등 400종에 달하는 서적들이 출판되었으며, 사회 홍보수단을 통한 사도직 수행에 있어 주목할 만한 시도는 1974년 3월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의 개설이었다. 소리와 영상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 전체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된다는 사명에 따라, 시청자 교리교재 연구소에서는 교회의 전례생활과 영성에 도움을 주는 레코드, 카세트(그레고리오 성가, 미사곡, 캐롤, 영가, 복음의 말씀, 강론 등)도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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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라] Paulus

바오로 3세(1468-1549). 교황(재위 : 1534-1549). 본명 Alessandro Farnese.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출생. 여러 주교직을 역임한 후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물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대표적인 르네상스기(期)의 교황이었지만, 가톨릭 교회의 내면적 개혁에 공헌이 컸다. 종교개혁에 대해서 처음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후에 점차 이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왕 헨리 8세를 파문하여(1538년) 프로테스탄트를 적극 배격하고, 예수회 설립을 승인(1540년) 이탈리아에 이단 심문소를 설치하여(1542년)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려고 하였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1545년), 이단을 배격하고 가톨릭 교회 신앙 수립에 힘썼다. 예술. 학문을 애호하고, 미켈란젤로를 옹호하여 그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임 건축사로 채용했으며, 유능한 학자들을 로마대학에 초빙하고, 바티칸 도서관을 충실(充實)하게 하였다. 독일 황제 칼 5세를 후원하여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諸侯)를 토벌하기 위해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노력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영국도 로마와 소원해지는 등 만년은 암담하였다.

바오로 6세(1897-1978). 교황(재위 : 1963-1978). 본명 Giovanni Batista Montini. 이탈리아 브레샤(Brescia) 부근의 콘체시오(Concesio) 태생. 선대의 두 진보적 교황 비오 12세와 요한 23세를 이은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교황의 한 사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종결짓고 그 개혁정신을 대대적으로 실행, 파급시켰다, 이탈리아 북부 콘체시오의 부유한 인텔리 지주 가정에서 출생. 1920년 서품 뒤 30여년을 교황의 외교관 및 바티칸 사절로서 근무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 산업의 심장부인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공산당의 비난하는 표적이 되었지만, 기업주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경제적인 복지 향상에 노력, ‘노동자의 대주교’로 호칭되었다. 1958년 요한 2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 1회기에 사무관으로 참석하였고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즉시 선임자의 과업을 이어 공의회를 속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의 사상은 첫 회칙 (1964. 1. 4)에 집약되어 있는데 ‘평화의 사도’, ‘교회일치의 주역’으로 불렸던 이 교황의 치적은 대내적으로는 교회내의 개혁과 성청(聖廳)의 개혁, 대외적으로는 사회정의의 추구와 외교활동 및 교회일치의 노력 등으로 대별된다.

대내적으로는 모든 인공피임을 금지한 최후의 교황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 1968. 7. 29)을 발표하였고, 사제독신제를 고수(1967. 6. 24)하자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2,414조에 달하는 교회법에 대한 전면 개정작업에 착수, 혼인취소승인을 자유화하고 사순절 단식이나 금요일 금육을 어긴 자에 대한 대죄의 벌을 교회법전에서 제외시켰으며 교회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신자들이 읽을 수 없었던 금서목록(禁書目錄)도 제거하였다. 또한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내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여성을 성청의 관련 부서에 근무하게 하였으며 주교 시노드를 열어 교황청의 자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맡겼다. 그밖에 정의와 인권의 보호를 위한 정의평화위원회, 그리스도교 일치국, 비(非)그리스도국(局) 등을 신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0년 동안 교황청 외교인단에서 활약한 경험을 살려 재위기간 중 한국을 위시하여 40개국 이상에 걸쳐 새로 외교관계를 수립, 그 중 반수 이상이 아프리카 국가였다. 세계의 현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제20차 유엔 총회에서의 전쟁 종식과 군비 축소를 위한 연설(1965. 10. 4),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노동기구에서의 연설(1969. 6. 1) 등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우간다를 방문(1969. 7. 31),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문제에 직접 개입하였는가 하면 아프리카의 참상을 목격하고 세계기아기금 창설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8개국을 순방(1970. 11. 26-12. 15)했고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의 메이어 수상 외에 공산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소위 ‘동방정책’을 끈기 있게 추구, 유고의 티토 대통령, 루마니아의 초세스쿠 수상 등과 개별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및 정교회와의 대화를 진전시켜 성지를 방문(1964. 1), 그리스 정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회담하고, 1054년의 동서방교회의 분쟁에 대해 서로 화해하였다(1967. 10).

루터교. 칼빈교, 재림교와의 대화도 추진하였는데. 그러나 대화를 통한 변화가 가능한 곳에서는 그 변화를 허락하고 장려하였지만, 그것이 교회일치의 본래의 목적에 적합한 것인가를 숙고, 필요에 따른 제재를 가하였다. 후자는 급진적 교회 일치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교파간의 상호 영성체가 완전한 교리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을 경우에 해당한다. 1978년 8월 6일 “굶주리고 병들고 일자리가 없는 자들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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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양식 [한] ∼樣式 [라] basilica [영] basilica

초기의 교회양식.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공인(313년) 직후에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장방형 성당 건축 형태이다. 같은 이름의 직사각형 로마건물을 모방하는 한편, 카타콤바의 예배 장소를 본 딴 흔적도 보인다. 보통 원주(圓柱)가 늘어선 회랑(回廊)이 달린 안마당이 있으며 3개 이상의 출입구를 통해 본 건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중앙에는 큰 회중석(會衆席)이 하나 있으며, 양쪽으로 2개, 혹은 4개의 회랑이 열주(列柱)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초기에는 원주로 수평의 처마도리를 지탱하였으나 후기에는 아치를 사용하였다. 회중석의 지붕은 양옆 회랑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 있으며, 채광층(採光層)에는 창문이 달려 있다. 동쪽으로 복도가, 맞은편의 아치나 반원의 후진(後陣)부분에는 제단이 놓이는데 제단은 후진의 한가운데 벽으로부터 돌출해 있다. 제단 바로 아래에는 부분적으로 바닥 높이 아래로 내려가서 수호성인의 유해를 담고 있는 순교자의 묘 혹은 지하 성당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바실리카란 교황에 의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특별한 성당들만을 일컫는 말이며, 대 · 소로 나뉜다. 로마 교회에는 4개의 대 바실리카가 있는데, 라테란(교황을 위한 바실리카),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 바오로, 그리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 등이다. 로마와 전 세계에는 수많은 소 바실리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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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회칙 [한] ∼會則 [영] The Rule of St. Basil

성 바실리오(St. Basilius)가 폰투스(Pontus)에 있는 자기가 세운 수도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쓴 수도계율로, 문답체(問答體)로 되어 있다. 이것은 55조(條)로 된 ‘대계율’(大戒律)과 313조로 된 ‘소계율’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덕(德)과 악덕을 논하고, 수도정신, 순종, 청빈, 세속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계율은 법규적(法規的)인 것이 아니고, 바실리오 수도원에서 현재 영위하고 있는 생활양식을 보충하는 것이며, 수도생활의 구체적 조직의 여러 문제에는 언급하지 않고, 수도자의 영적(靈的) 도야에 대한 이상(理想)의 확립이 주안점(主眼點)이다. 계율의 텍스트에는 성서의 말씀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계율은 동방(東方)의 수도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그리스, 트라키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남이탈리아에 유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교회에서의 계율 중의 주류(主流)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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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 [라] Basilius

Basilius(330?-379). 성인. 축일은 1월 2일. 주교. 교회학자. ‘대(大)바실리오’로 잘 알려져 있다. 소아시아 카파도치아(Cappadocia)의 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났다. 양친, 부계(父系)의 조부모, 두 형제, 누이도 모두 성인, 성녀이다. 그는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이다. 누이 마크리나(Macrina)는 신앙심이 깊어, 그와 동생인 뉴사의 그레고리오에게 좋은 감화를 주었다. 카이사리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아 이교적 교양과 그리스도적 교양을 함께 터득하였다. 고향에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다가 누이의 권유로 수도생활에 들어가,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티나를 편력, 후에 358년 체사레아 부근의 이리스 강변에 은수자(隱修者)로 정주하였다. 이곳에서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와 구교(舊交)를 두텁게 하면서 함께 선교에 종사하였다. 그는 아테네 시대의 학우(學友)인 로마황제 율리아누스의 궁정으로의 초빙을 거절했으나, 당시의 교회정세가 그에게 조용한 생활을 허락치 않아, 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의 요청에 따라 아리우스파의 황제 발젠스에 대해 정통신앙 옹호를 위해 체사레아로 갔다. 수년 후 370년 에우세비오의 후계자로 주교가 되어 그 직위로 생애를 마쳤다. 체사레아에서 교회분쟁의 와중에 뛰어든 그는 에우노미오스가 거느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성령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멜레시오(Meletius)를 안티오키아의 감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로마의 감독 다마소(Damasus) 1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 등과 혹은 격렬히 논쟁하고, 혹은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박학하고 웅변·정치적 수완이 뛰어났으며, 인격도 고결하였다. 성격은 섬세하면서도 전투적이었으며, 비범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어 동방의 수도원 조직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체사레아 교회에 건설한 성당, 병원, 빈민보호시설 등 건물은 치밀한 계획하에 운영되었다.

저서 중에서 중요한 것은 서한집과 ≪성령론≫(De Spiritu Sancto), ≪에우노미스 반박론≫(Adversus Eunomium, 3권),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와의 협력에 의한 오리제네스(Origenes) 저작으로부터의 발췌 ≪Philocalia≫ 등이다. 교리면에서는 반(半)아리우스주의자와 니체아 신경을 화해시키기 위해 힘쓰고, 그들이 말하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란 말은 니체아 신경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와 같은 뜻을 지녔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서거한 2년 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아리우스 논쟁이 사실상 종료된 것은 그의 공적으로 돌려도 될 것이다. 그는 아폴리나리오(Apolinarius)와 서신교환이 있었다는 것, 저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양성(兩性)의 구별보다는 일치를 강조한 것 때문에 일부 지역으로부터 아폴리나리오설을 신봉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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