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민첸티 [원] Mindszenty, Jozsef
Mindszenty, Jozsef(1892-1975). 헝가리의 추기경. 솜보트헤이(Szombathely) 부근에서 태어나 빈에서 죽었다. 헝가리에서 20세기 초부터 50여년간이나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항거한 가톨릭 성직자였다. 1915년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정치활동을 시작, 1919년 전체주의 베라쿤왕 정권의 적(敵)으로 낙인찍혀 투옥되었다. 1944년 베스프렘(Veszprem)의 주교로 임명된 직후에 국가사회주의당 정권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다. 1945년 헝가리의 수좌 대주교로 지명되는 동시에 에시터르곰(Esztergom)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946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헝가리의 가톨릭계 학교의 국유화를 거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8년 공산주의정권에 의해 체포, 1949년 반역죄가 적용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반공봉기 때 출옥하였다. 공산주의 정권이 다시 지배하게 되자, 그는 부다페스트의 미국 대사관에 망명할 것을 모색하였다.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헝가리를 떠나라는 제의를 받고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탄원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었다. 교황청의 빈객자격으로 빈에 거주하면서 그는 바오로 6세 교황의 헝가리 공산정권과 외교관계를 가지려는 시도를 비난했으며, 1974년에는 대주교 및 수좌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에 그의 ≪회고록≫이 발간되었다.
민주주의 [한] 民主主義 [영] democracy [독] Demokratie [프] democratie
민주주의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에서 생겼다. 즉 그것은 ‘민중의 지배’(Demos+Kratia)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권력이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서 장악되고 행사되는 군주제와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해서 행사되는 귀족제와 구별되어 사용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원리 또는 정치형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목적 또는 내용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의미는 다른 것이 된다. 링컨은 민주주의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라고 말하였는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정치라는 말은 민주주의의 수단성 또는 과정성을 말하는 것이고, 인민을 위한 정치라는 점은 민주주의의 목적과 내용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켈젠(H. Kelsen)은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단이고 과정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잘 설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인민을 위한다는 목적만을 강조할 때 인민의 정치적 참여가 없이 지배자의 자의적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인민을 위한 정치도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의 참여없는 정치는 아무리 인민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대로 인민에게 당장에 큰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책결정 과정이 인민의 참정권을 바탕으로 인민의 다수의사를 공정하게 반영하였을 때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실천원리로서 민주주의를 파악할 때 민주주의는 이론적 개념이라기보다 역사적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순수한 사유(思惟)의 작용으로 추상적으로 구성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생긴 것으로 영국의 청교도(淸敎徒) 혁명과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등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서 성장한 것이지 어떤 이념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민주주의는 특수적 개념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고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원리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민주주의는 인간이 그 창조주인 하느님에 의해서 부여받은 본성에 따라 자유를 누리고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창출된 이념이며 제도로서 어떠한 나라에서나 공통으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민주주의는 자기 결정의 원리, 자기 각성, 자기 완성의 원리인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자율적인 의사결정, 행위에 있어서의 자기결정성, 행위결과에 대한 자기책임성을 가지는 사회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권력의 신화화는 민주주의와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대주의 세계관이다. 모든 사람은 창조주에 의해서 각각 다른 은총 또는 재능을 부여받았다. 비록 성별이나 능력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召命)의 가치는 똑같은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인격이나 존엄성 못지않게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타인의 의사나 행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가장 비(非)민주적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존 로크가 모든 사람의 의사는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등수학만 알면 민주주의는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정치원리는 원래 어떠한 특정한 정치체제를 지지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단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치체제라면 그것을 찬양하고 그렇지 않은 체제는 그것을 배격할 뿐이다. 즉 교회는 인간 인격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체제라면 모두 지지하고 찬양한다.
교회의 문헌들(비오 12세, J. 마리탱, J H. 하로웰)은 민주주의는 인민을 신뢰하는 정치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야만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인민을 강제한다는 것은 위선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평등 및 정의와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감각을 자기 안에서 계속 성숙시켜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지와 의지를 갖춘 인간상호간의 기본적 합의를 내포하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그 자신 속에 공동의 인간적 신조 즉 자유의 신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부르즈와 민주주의의 과오는 민주주의 사회를 하나의 경기장 또는 투기장처럼 생각하는 데 있었다.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기본 요소는 정부의 권력과 기능을 피지배의 합의에서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설득과 토의에 의한 정치다. 그러나 피지배의 합의를 얻은 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합의라는 것은 하나의 계속적인 과정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합의란 소극적인 승복,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적극적인 찬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성실한 반대가 인정되고 용인되어야 한다. 합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합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타협은 진정한 합의가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타협을 위한 타협이라면 이것은 인간을 보다 인격화하는데 있어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자유로운 토론은 가장 본질적 요소다. 입법과정에서 토론은 때로는 어리석고 비능률적으로 진행되고 과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토론의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에서 토론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수결의 원리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다수결의 원리를 채택하는 이유는 아무리 무지하고 전문가가 아닌 대중이라 하더라고 그들이 많이 참여하는 결정이 한 사람이나 소수자에 의한 결정보다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신념 위에 서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哲人政治)는 그 결과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정신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이 지적이며 도덕적인 성격을 함양해야 하며 민주적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다수결의 원리를 보다 잘 적응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정치론은 어떠한 특정한 정부 형태를 고집하지는 않지만, 가급적 국가권력이 분립되어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반대한다. 권력이 한 기관이나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권력이 남용되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권력의 강대화는 인민의 기본권분만 아니라 중간 단체들의 고유한 영역까지를 간섭하거나 독점하기 쉽기 때문에 ‘약한 정부’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권력의 악용과 노예화는 권력의 본질을 전도시킨다. 국가권력은 때때로 현세적 문제뿐만 아니라 영적 문체, 지성의 문제, 양심까지도 침범하게 되기 때문에 그 고유의 한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자유는 그만큼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만큼 문제점이 많은 제도도 없다. 민주주의는 자주 무질서하게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인민의 책임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이념자체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인민의 잘못이다. 민주주의를 분석해 보면, 민주주의는 자유를 가진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가능성을 얻는 신앙적 모험인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대표 또는 대리의 관념에서 나온다. 권력자는 인민의 대표자 또는 대리자로서 어떤 특정범위 안에서 인민의 권위에 참여하고 인민의 모상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권력자 또는 통치자는 인민의 살아있는 모상으로서 이성, 자유의지 및 책임을 가지는 인격적 모상이다. 권력자는 양심의 명령과 덕의 판단 또는 공동선(共同善)의 요청에 따라 일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며, 인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인민에 의해서 감시되어야 한다. 참다운 권력자는 봉사자로서 인민의 종이 될 때 참다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예언자적 선구자적 소수파의 문제다. 흔히 예언자적 소수파는 인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으나 사실은 인민을 경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분이 전체의 이름으로 말할 때 언제나 그 부분은 자기가 전체라는 것을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 결과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려고 하거나 자기들의 생각대로 전체를 만들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인민을 기만하기 쉽다. 예언자적 소수파는 반드시 인민으로부터 선출된 대표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그것을 구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민주주의에서 예언자의 출현은 때로는 필요하면서 동시에 위험하다. 왜냐하면 영감이나 예언이 있는 곳에는 가짜 예언자로 보이나 진짜 예언자가 있다. 인민을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야심가와 인민을 해방하려는 봉사자가 있으며 어두운 본능에서 나오는 영감과 참다운 사랑에서 나오는 영감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성(靈性) 식별의 어려움이 있다.
민주주의에서 여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론은 올바른 동의와 토의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하여 절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비오 12세는 여론이 드러나지 못하고 여론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는 반드시 어떠한 사회적 병폐가 있다고 말하였다. 국민의 의견을 질식시키고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천부적 인권의 박탈이고 하느님이 세운 세계질서의 유린이다.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야말로 참된 민주주의다. 비록 정부가 민주주의를 표방할망정 그것이 자연법적 원리에 서있지 않는 한 그것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인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생활의 유일한 합리화 즉 윤리적 합리화의 길에 들어온 것이다. 즉 이성적 동물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현재적 희망을 깨지기 쉬운 그릇에 넣어서 운반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다루기 힘들고 결점이 많으며 폭력에 의해서 패배하기 쉽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가 진보적으로 발전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약점이나 결점에 대해서 관용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민주주의는 무서운 시련에 부딪치고 결정적 기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민주주의에 위기를 극복할 희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 감정과 철학은 복음 속에 그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단순한 기술만능주의로 환원하고 복음의 정신을 민주주의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마치 민주주의에서 그 피를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가 그 무서운 시련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복음의 정신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는 정의를 실현하도록 노력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만이 인간 사회의 조직에 훌륭한 조화를 이루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개개인의 선과 공동의 선을 위하여 공헌시키는 것이다. (韓庸熙)
[참고문헌] J. Maritain, 한용희 역, 인간과 국가, 가톨릭출판사, 1953 / J.H. Hallowell, 김창수 역, 민주주의의 철학.
민족주의 [한] 民族主義 [영] nationalism [관련]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혈연, 문화, 전통, 언어를 같이하는 민족공동체가 민족의 통일, 독립 및 발전을 지향하여 추진하는 사상 또는 운동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주의는 중세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서로 다른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한 민족으로서의 통일보다 봉건영주가 중심이 된 계급사회가 인간공동체의 핵심이었다. 그 뒤 십자군으로 중세 영주의 권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문예부흥으로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민족주의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침략 이후 타국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외국의 침략이나 지배로부터 독립과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민족적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이것이 절대군주를 등장시키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고 여기에서 민족주의와 군주정치는 밀착하기 시작하였다. 서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와는 달리 후진국 또는 식민지에 있어서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 운동과 결합하였다. 강대국에 의하여 지배되었던 많은 식민지들은 민족적 독립과 함께 인민의 자유와 입헌정치(立憲政治)를 요구하면서 투쟁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는 역시 신흥 시민계급이었다. 이들은 민족적 감정, 애국심을 고취하면서 자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하여 타국을 배격하거나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많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와의 상관성이 생긴다. 이렇게 민족주의는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한쪽으로는 자유와 독립,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과 침략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교회적 입장에서 민족주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다양하게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종, 언어, 습관, 전통도 다양하게 발전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다양한 민족이 서로 다른 은총 속에서 인류 공동체로서 결합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보다 발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배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민족상호간의 대립이나 투쟁을 원하지 않으며 모든 인류가 하나의 백성으로서 형제애를 드러내기를 바라고 있다. 즉 사랑과 일치를 위하여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지, 다양성 때문에 분열과 시기와 투쟁이 합리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에 대해서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은 강대 민족에 의한 소수 민족의 억압, 식민주의 문제 및 민족간의 상호협조다. 오늘날 인간 사회를 보다 공평하게 하고 인류의 상호유대를 보다 완전하고 튼튼하게 하려는 데에 몇 가지 장애가 있다. 보수적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그것이다. 최근에 정치적으로 독립한 민족들이 자주성을 보호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 민족들이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자랑하는 것도 극히 자연스럽기는 하나, 이러한 감정도 전 인류를 감싸주는 보편적 사랑으로 더욱 완전해져야 할 것이다. 과격한 민족주의는 민족들을 고립시키므로 민족의 참된 이익을 잃게 한다. 특히 발전 계획을 실천하려거나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증진하고 강화하려면 모든 민족들의 노력과 지식과 자금을 집결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인종차별주의는 강대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새로 독립한 국가에 있어서 부족이나 정당의 대립 속에 숨어 있는 인종차별주의는 정의를 크게 해칠 뿐 아니라 시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는 인종차별주의가 식민자들과 원주민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고 건설적인 상호이해를 방해하였으며, 실제로 약소민족은 강대국의 억압에 대해서 심한 원한을 품었다. 인종차별주의는 또한 후진국들 사이의 상호협력을 방해하고 국내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가족이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억울하게도 다른 시민들로부터 소외되고 인권마저 무시당하여 불화와 미움의 씨가 되었다.
불의(不義)한 환경 때문에 차별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족, 국적, 피부색, 문화, 성별 등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도 포함한다. 특히 개탄해야 할 일은 무수한 피난민들과 그리고 인종, 민족,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조직화된 박해를 받고 있는 집단이나 백성의 처참한 생활조건이다. 이런 인종차별과 박해는 가끔 대량학살의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에는 새로운 형태의 신식민주의(新植民主義)가 출현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감쪽같이 가면을 쓴 것일지라도 과거에 많은 민족들이 당한 식민주의보다 절대로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제 관계의 불안과 세계평화에 위험을 가져왔다. 국제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인권선언과 그 실현을 위한 국제조약이 많이 체결되었다. 그래도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인 차별대우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인권은 비록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해도 너무나 자주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즉 현실적 상황에 비해서 입법조치가 너무 불완전하다. 입법조치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정의와 평등의 인간관계를 수립하기는 극히 불충분하다. 복음은 이들을 특별히 존중하라고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사회 안에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의 인류는 국제 분야에 있어서 보다 광범한 국제협력의 확립을 요구한다. 거의 모든 민족이 독립은 하였다 하지만 과도한 불평등과 온갖 형태의 종속상태에서 해방되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
선진민족과 후진민족 사이의 대립은 날로 더욱 커지고 있으며 그것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인류는 스스로의 장래운명과 현재 진행되는 각종 변화의 과정과 그 뜻에 대하여 자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경제, 문화, 정치발전의 명백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민족은 최고도로 기계화된 반면에, 다른 민족은 아직도 후진된 경제 속에 살고 있다. 어떤 민족은 재화의 풍요함을 마음껏 누리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굶주림에 신음하고 있다. 어떤 민족은 고도의 문화를 누리고 있는데, 다른 민족은 이제야 겨우 근대화를 착수했을 뿐이다.
현대인은 보다 나은 정의를 희구하고 있으며,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사이의 상호존경에 바탕을 둔 보다 튼튼한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민족들이 기아와 빈곤과 질병에 허덕이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치열한 군비 경쟁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에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오늘날 여러 민족에서 무수한 남녀가 굶주리고 무수한 소년 소녀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숨져가고 있다. 기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육체성장과 정신계발이 늦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지역의 주민들은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 비록 고도의 경제발전이 이룩되었다 하더라도 당면한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기에 절대로 충분하지 못하다.
오늘날 부강한 민족이 급속도의 경제 성장을 하는 반면에 가난한 민족들은 아주 느린 발전밖에 기대할 수 없다. 이런 민족간의 불균형은 날로 더욱 심해진다, 어떤 민족에게서는 인구에 비해 남아돌아가도록 식량을 풍부히 생산하는가 하면, 다른 민족에서는 결핍을 느끼고 있다. 특히 경제적 선진민족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치의 순위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고 사멸되고 혼돈되고 있다. 그들은 영적 가치를 무시하고 망각하고 부정하면서 기술과학의 진보, 경제적 발전. 물질적 안일을 생의 목적의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적 선진민족이 후진민족에게 줄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한 독소의 하나이다. 후진민족들은 기나긴 전통으로 말미암아 가장 중요한 인간가치의 일부를 아직도 생명있게 인식하고 보존하고 있다.
도덕적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는 다른 민족들의 자유, 안전, 영토보존을 해치는 것은 절대로 금지한다. 따라서 강대한 민족들이 다른 약소 민족들과 경제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경우에 그들간에 몇 가지 규준들을 제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경우에 약소 민족들에게 다른 민족들과 다름없이 정치적 독립을 수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치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자연적인 민족들의 권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 약소 민족들에게도 경제발전을 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들이 완전하게 보호되어야만 약소 민족들도 물질적 생산에 있어서나 혹은 문화발전에 관한 문제들에 있어서 자기 시민들의 공동선과 번영을 적절하게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앞선 민족들이 저개발 민족들에게 여러 가지형식으로 원조를 하되 각 민족의 고유한 도덕적 가치들과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승되는 특성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으며 어떠한 정치적 지배욕도 삼가야 한다. 모든 국가의 위정자들이 소수 민족들의 언어, 문화, 전통적 풍습, 경제적 자원 및 기업들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확실히 정의에 합치된다. 때로는 소수 국민들이 그들에게 지워진 고통스러운 상태나 혹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인해서 자기 민족의 특수한 요소들의 중대성을 과장하는 나머지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가치들을 소홀히 하고 마치 인류가정의 선익은 자국 민족의 선익을 위하여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이러한 소수 민족들이 자기들이 처해 있는 특수한 환경에서 편익(便益)을 도모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들이 다른 문화적 전통을 지닌 민족들과 접촉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 총명과 마음의 완성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며,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민족에 속하는 가치들이 자기 자신들의 살과 피로 변화될 것이다. 이것은 소수 민족들이 다른 국민들과 유대를 지속하고, 이들의 전통과 문화에 참여하기로 노력하고, 민족들의 문화발전에 지장이 되는 불화를 제거할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피지배 민족들로 하여금 자신의 독립을 성취시킬 권리를 평화롭게 행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 대하여 가하여지는 모든 종류의 무력행동이나 강압적 조치는 중지되어야 한다. 유럽의 식민지 통치를 그리스도교적 원리에서 돌이켜 볼 때 식민주의는 그 본질적 성격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용납될 수 없다.
교회는 제민족과 제문화의 가치와 그 고유성을 이해하고 있다. 교회가 아직도 얼마나 오랜 역사의 길을 걷게 될 지는 모른다. 주님의 재림(再臨)까지는 아직도 아마 수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서 지난날은 겨우 교회사의 일부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회는 그 사명과 본성에서 인간문화의 특수형태나 특수한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인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보편적인 부(富)와 발전을 바라고 있다. (⇒) 국가주의 (韓庸熙)
[참고문헌]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촉진에 관한 회칙, 1967 / 사목헌장, 79 / 바오로 6세, 평화를 위한 정의의 활동 1972 / 바오로 6세, 세계안의 정의, 1971 / C.J.H. Hayes, Essays on Nationalism, 1926 / H.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1944.
민수기 [한] 民數記 [라] Liber Numeri [영] Book of Numbers
1. 이름 : 히브리의 이름은 Bemidebbar[광야에서]이다. 70인역은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숫자 때문에 arithmoi로 칭하였고 민수기란 이에 따른 것이다. 혹자에 의하면,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책제목은 숫자 자체보다 세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1:20-46, 3:14-51, 26장에 나오는 병적(兵籍) 조사 또는 인구 조사에서 이 책명이 유래했을 수도 있다.
2. 내용과 구성 : 민수기의 구성이 뚜렷하지 못하고 사건의 나열과 법에 대한 언급이 복잡하게 얽히어 있다. 별로 많지 않은 시대적 또는 지리적 내용을 근거로 구분한다면 ① 1:1-10:10, 시나이 광야에서의 체류, ② 10:11-22:7, 카데슈와 그 부근의 지역을 향하여 광야를 건너 감, ③ 22:2-36:13, 모압 지방의 체류로 나눌 수 있다.
다른 한편 ① 1:1-10:10, 행진을 준비, ② l0:11-20:13, 실패, ③ 20:14-36:13, 요르단을 향한 행진 등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구분들은 유익하긴 하지만 역사적 사건의 나열만으로는 민수기에서 언급되는 법과 규정을 파악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못된다. 분명한 것은 민수기가 모세오경 중 먼저 취급된 대목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시나이에 도착한 사실과 거기에 있었던 계시는 민수기가 전제하는 사항이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민수기가 모세오경 중 다른 부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1:1-10:10은 주로 경신례에 관한 규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규정들은 출애급기와 레위기의 글들과 상관관계가 있다. 민수 5:5-10은 레위기 5:20-26을 보완하고, 민수 8:1-4은 간략한 형식으로 출애 25:31-40을 반복하고 민수 8:5-22은 3:5-13에서 서술된 레위들의 축성을 정화의 견지에서 다시 취급하고 민수 9:1-14은 출애 12장에 나오는 빠스카 규정을 보충한다.
민수 1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어 한 진지에 모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런데 5:1-4에 의하면 이 진지는 야훼가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서 부정한 사람은 다 밖으로 내 보내므로 그는 안전케 될 수 있다. 이에 준하여 5:11-31, 6장, 8:5-22, 9:1-14는 각각 다른 경우에 있어 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진지의 거룩함과 야훼의 현존은 사제의 강복(6:22-27), 야훼의 말씀(7:89), 그리고 성소를 덮고 있는 구름 때문에(9:15 이하)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이 끝에 취급된 테마는 출애 40:2·34-38에 나오는 것을 다시 다룬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름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주할 때 이들을 이끌기도 한다. 출애 40:34-38에서 다루어진 구름의 이 둘째 기능이 민수 9:15-23에 나온다.
민수 10:11-20:13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체류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출애 15:22-18:27의 내용과 흡사하다. 특히 민수 20:1-13과 출애 17:1-7은 이스라엘이 모세와 야훼를 거스려 도전하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민수 10,11-20:13에서 유난히 드러나는 야훼에 대한 그리고 모세를 거스려 일어나는 도전 및 원망은 굶주림과 갈증 때문이 아니고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이 위험하다든지(14:2 이하) 모세의 특수한 위치(16:1-11, 17:6) 때문이다. 야훼를 거스리는 내용을 제시하는 데에는 그의 거룩함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11:18, 16:3 · 5 · 7, 17:2 이하, 20:12 이하). 이런 견지에서 경신례적 규정들이 이 부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민수 15장은 제사에 대한 보충규정인데 40절에서 야훼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을 위해 거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눈에 띈다. 15:26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용서는 13장 이하에서 취급된 정탐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죄지은 대목과 연결되고 18장은 16장에 나오는 코라의 무리의 반란과 관계가 있다. 18장에서 ‘거룩함’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장은 붉은 암소의 재로 깨끗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20:1-13에는 모세와 아론이 불신 때문에 약속된 땅에 못 들어갈 것을 기록하고 있다.
20:14-36:13도 이야기와 경신례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야기들은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에서 겪는 위험을 다루고 있다. 이중 5왕과 충돌하는 내용이 눈에 뛴다. 즉 에돔왕들(20:14-21), 아랏(21:1-3), 아모릿왕 시혼(21:21-30), 바산왕 옥(21:33-35), 모압왕 발락크(22-24)이다. 22-24장은 발락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나 사실은 빌레암의 활약이 크게 부각되어 있기 때문에 빌레암 이야기로 이해되고 있고 22-24장은 독립적으로 오랜 전승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수록되었다고 본다. 특별히 24:3-9및 15-19절은 본래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존재했던 찬미의 노래로 보고 23:7-10, 그리고 18-24절은 빌레암 이야기를 완성해가면서 가미된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은 다른 위험은 불뱀(21:4-9 참고)을 통한 벌과 모압족 출신의 부인들 때문에 이스라엘의 바알신을 공경할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25장). 26장에서는 인구조사가 다시 실시되었는데 시나이에서의 조사 대상자(1장)는 다 죽었음을 확인한다(14:29 참고), 27:12-23에서는 요수아가 후계자로 지목됨으로 이 시대가 끝났음을 알린다. 31장에 미디안족을 정벌하는 기록 외에는 나머지 본문에서 이야기의 요소는 줄어든다. 27:1-11, 28-29장, 30:2-17, 36장에서는 여러 가지 규정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32장에서 동요르단 부족에게 관한 지역 안배를 취급하나 여기서는 후대에 이루어진 지역 확장을 고대에 투영하여 설명했다고 본다. 서(西)요르단 지역 분배는 33:50-34:29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35장은 레위인의 거주지와 살인자의 도피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33장에 나오는 광야에서의 거처지에 대한 언급은 후대에 시도한 재구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3:50-56에 신명기 학파의 특성이 엿보이는 것을 보면 신명기는 모세오경 중 이미 언급된 것 외에 신명기 역사서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고 그렇다면 모세오경과 신명기 역사서를 연결하는 집성사적 요소 및 모세오경의 집성사적 요소가 다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수기는 모세오경을 집성하며 전체의 끝맺음을 시도한 듯하다. 아론의 죽음(20:22이하) 미리암의 죽음(20:1), 모세의 죽음에 대한 예고(27:12), 엘레아잘과 요수아에게 전권을 이양함(27:15-23) 등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민수기를 쓰는데 사용된 사료(史料)는 야휘스트, 엘로히스트, 제관기 및 많은 전승이라고 볼 수 있다. 5:1-9:14에는 제관기의 작업을 엿볼 수 있고 33장을 제외한 민수기의 끝부분 그리고 15장에는 제관기가 사료로 사용됐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11-14장에는 야휘스트, 그리고 20:14-21, 21:12 이하에서는 엘로히스트의 자취를 볼 수 있다. 빌레암의 이야기는(22-24)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다.
3. 신학 : 민수기에 특별한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고유한 주제와 관점을 보여주므로 일정한 개별성(個別性)은 있다고 생각된다.
출애 25장부터 레위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규정이 성소(聖所)와 경신례에 대한 것이고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 규정에 의거하여 단체를 형성한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모세오경은 이스라엘이 미래의 이상적인 공동체상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광야에서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이룩했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민수기의 레위족에 대한 관점도 독특하다. 12부족을 셀 때 레위족은 거론되지 않는다. 레위는 성소에서의 봉사를 위해 특별히 선별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후예인 사제들을 돕게 되어 있었다(3:6이하, 4:19-28, 4:33, 8:22, 18:2). 사제보다 낮다고 하는 것은 에제 44:10-14에서와 같이 일종의 벌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레위족에게 고유한 신학을 반영한다. 즉 레위는 봉헌돼야 할 처음 태어나는 모든 맏아들의 대신으로 야훼께 소속된다(3:12이하, 3:40-50, 8:16).
이스라엘이 시나이를 떠나자 또 잘못을 저지르고 야훼와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불평을 하고 반항한다(11:4, 4:3, 16:13, 20:3, 21:5). 야훼는 놀랍게도 벌을 내리신다(12:12-15, 16:21·35, 25:5).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오래 머물러야 했던 것도 불신에 대한 벌과 보속이라고 본다(14:11·33). 모세와 아론이 약속된 땅에 못들어가는 것도 그들의 불순명 때문이다(20:12-24). 그러나 이들의 전구로 야훼는 당신의 화를 진정시키신다(14:11-20, 17:11-15).
이로써 모세와 아론, 그 후계자들의 종교적 권위가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난다. 모세가 예언자 및 아론보다 뛰어난다(12:7). 아론의 아들들은 사제로서 기능, 권위, 수입 등에 있어서 레위족과 구별된다(3장, 8장 이하). 모세는 요수아에게 지팡이를 주어(20:25-29), 그리고 엘레아자르에게 사제권을 주어서(20:25-29) 각각 지도자와 사제가 되도록 하며 이로써 그들의 직분이 계승되게 한다. (沈勇燮)
[참고문헌] H. Gressmann, Mose und seine Zeit, 1913 / W. Rudolph, Zum Texte des Buches Numeri ZAW 52, 1934 / M. Noth, uberl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 Tubingen 1973 / S. Wagner, Die Kundschaftergeschichten im A. T, ZAW 76, 1964 / G. W. Coats, Rebellion in the Wilderness, 1968 / V. Fritz, Israel in der Wuste, 1970 / W. Gross. Bileam, Literarund formkritische Untersuchungen der Prosa in Numeri 22-24, Munchen 1974. 주해서로 P. Heinisch(Bonn 1936), H. Cazelles(Paris 1952), B. Baentsch(Gottingen 1903), J. Gray(Edirburgh3 1956), M. Noth(Gottingen 19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