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사리오 성월 [한] ∼聖月 [라] mensis sanctus rosarii [영] holy month of the rosary [관련] 로사리

로사리오를 바치며 거룩하게 지내는 달, 이는 교황 레오 13세(재위 : 1878~1903)가 10월을 로사리오 성월로 정하고 성모 호칭기도에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라는 호칭을 추가하여 로사리오에 의한 신심을 장려한 데서 비롯한다. (⇒) 로사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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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기도 [한] ∼祈禱 [관련] 로사리오

⇒ 로사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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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라] rosarium [영] rosary

‘장미화관’, ‘장미 꽃다발’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이며 묵주(默珠), 혹은 묵주의 기도를 가리키는 말. 묵주란 구슬이나 나무알을 열 개씩 구분하여 여섯 마디로 엮은 염주형식의 것으로 십자가가 달려있는 물건이며, 이를 사용하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묵주의 기도라 한다. 로사리오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도미니코 성인(St. Dominicus, 1170~1221)이 선교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여 성모께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던 중, 성모님이 나타나서 묵주를 주시고 묵주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고 하셨다는 전설(Alan de la Roche의 Apologia에서), 도미니코회원이 신앙의 진리를 연속하여 설교할 때 작은 주제가 끝날 때마다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합송하였던 설교방식에 유래한다는 설, 12세기 문맹자들이 전례에서 시편의 구절을 읽는 대신 주의 기도 150회를 3부분으로 나누어 암송하던 관습에서 발전되었다는 설 등이다. 그 뒤로 여러 교황은 로사리오의 역사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심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칙서를 통하여 로사리오를 널리 권장하였다.

로사리오의 방식은 여러 가지이며, 교황 성 비오 5세의 칙서(1569년)는 그 방식을 표준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표준에 따르면 로사리오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성모송 열 번과 주의 기도 및 영광송 각 한 번이 모여 한 단을 이루고 그 한 단이 모여 5단 또는 15단이 된다. 묵상기도의 내용은 구원의 역사이며 이를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구분하였는데, 각 신비는 5개의 묵상주제로 이루어졌으므로 모두 15개의 주제가 되어, 염경기도 15단을 드릴 때 각 단마다 각 주제를 묵상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로사리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염경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가장 먼저, 가장 깊은 체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신 성모를 통하여 그분의 신비를 접근하고 친밀해지며 구원의 신비와 일치하면서 성모처럼 인류 구원의 협조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성모는 1858년 루르드(Lourdes)에서, 1917년 파티마(Fatima)에서 각각 발현하여 로사리오를 열심히 바치라고 당부하였다. 교회는 로사리오 축일을 지내고 로사리오 성월을 정하여 로사리오에 의한 신심을 장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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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원] Roma, de Lima

Rosa, de Lima(1586~1617). 성녀. 축일 8월 23일. 페루의 보호성녀. 리마 태생. 부친은 푸에르토리코에서 들어온 식민정부 관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의 생애를 동경하여 신앙생활의 귀감으로 삼았다. 20세 때 도미니코회 제3회원이 되어 자기 집에 살면서 꽃을 가꾸어 팔아 가계를 도왔다. 성녀 카타리나처럼 하느님의 특별한 신비적 은총을 받았다. 로사가 예언한 날에 세상을 떠나자 애도하러 모여든 군중 때문에 며칠 동안 장례식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유해는 리마의 도미니코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1668년 교황 글레멘스 9세에 의해 시복(諡福), 1671년 4월 12일 글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남미 사람으로 최초의 성녀이며, 남미 · 필리핀의 보호성인으로 숭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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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원] Robert, Achille Paul

Robert, Achille Paul(1863~1922). 파리 외방전교회원. 대구교구 선교사. 한국명 김보록(金保祿). 그는 프랑스의 시골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두세(Doucet) 신부와 뮈텔(Mutel, 閔)신부를 만나 함께 공부하고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게 되었다.

즉 187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77년 1월 25일 두세 신부와 함께 한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만주에서 리델(Ridel, 李) 주교와 만나 셋이서 함께 배를 타고 서울 근해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는 서울로 갔고, 두세 신부와 그는 함께 황해도로 상륙하여 산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로부터 강원도 이천(伊川)의 고메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878년 음력 정월 초에 리델 주교의 투옥사실을 전해 듣고 곡산(谷山)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흥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선교사와 교우들을 모욕하고 신부댁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정부당국이 로베르 신부를 대구로 호송함으로써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대구(大邱) 시외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 후 30년간 이곳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갖은 고난을 겪어가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느라 몸이 쇠약해져, 급기야는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사업에 종사하였으나 1919년에 다시 발병함에 따라 도저히 더 이상 전교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교관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정리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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