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교회의 미래
이제 우리는 교회 현재의 구체적인 실태를 분석하면서 미래의 교회를 말해야 할때가 되었다. 미래를 말하면서 우리각자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시도는 불가피하게 어두움과 불확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많은 것들을 예견할 수 없고 따라서 그자체로 바람직한 촉진책 또는 방지책을 미리 구상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예견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때에 맞추어 대비해야 하겠다. 그저 종래에 해 오던 것이나 답습하면서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피곤에 쩔어 지쳐 있다. 거기에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앞으로의 교회를 전망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과도기, 옛날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동질적인 그리스도교 사회난으로 동화되었는데 지금은 자기 결단에 의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의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이렇게 천년을 관류해온 서방세계의 동질적인 그리스도교성은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의 효과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오늘날 신학적 반성.(정치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요소의 혼합) 지난날의 동질적인 그리스도교성은 세속적 성격의 문화와 사회가 지니고 있던 동질성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실상 가톨릭 교회내의 기본 방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통에 대한 옹호이지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과거 잘나가던 때의 교회에 대한 향수) 이제는 더이상 세속적으로나 그리스도교적으로나 동질적인 사회의 잔재 요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수한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비그리스도교적인 환경으로부터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얻고자 하는 공세적 태도에 중점을 두어야지 교회의 전통적 요소만을 옹호하기에 급급한 수세적 태도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되겠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가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느님 체험을 통해 밑받침이 되는 동시에 인간의 일상생활 안에서 경험적으로 파악될 수 있고 참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비동시대적인 집단이나 개인들이 동시에 교회안에 존재한다는 것도 고려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옛날에는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사실상 동질성의 범주 안에 존재했다. 현대는 구식과 신식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렇게 시대적으로도 천차만별한 생각들의 충돌 속에서 실질적인 일치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타협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극단적인 배척은 분열만 조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집단과 개인은 원칙적으로 저마다의 생존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1) 이러한 시대적인 편차가 주는 다원성과 함께 서로 다른 견해의 대립화를 우리는 매일 체험하고 있다. 학파와 노선들, 개인적인 성향이나 확실에따라 실질적으로 대립이 존재한다. 때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무자비하게 백안시하는 원시적인 대립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멍들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동지 보다도 적을 더 관대하게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편보다도 저쪽편을 관대하게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2)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하고 있듯이 죄인들이다. 따라서 언제나 자만과 아집에 빠지고 있으며 이기적으로 자신을 과신하는 경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사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로 기우러 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편 사람들에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편 사람들에게만 이 명백한 사실을 적용하려는 습성에 젖어 있다. 저쪽만 죄인들이고 나쁘다는 것이다.
사실 미래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 교회의 직무 담당자들은 역시 구체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너무나 보수적인 사람들 편을 들고 있고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공세적인 시도들에 용기를 주고 부추겨 주기는커녕 뒷전에서 맴돌며 탄식이나 하고 있다. 교회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이다.(예컨대 혼인 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인생 경험을 쌓은 남자들 가운데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는 주장,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제직을 맡길 수 있다는 주장.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 K.Rahner는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만일 아무래도 사제독신제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사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사제독신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더이상 신학적으로 토론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 나라에서 누가 할 수 있는가. 맞아죽을려고)
또한 우리는 은연중에 양자택일 이라는 말에 감염되어 있다.
많은 경우 흑백 논리, 예컨대 교회편 아니면 반대편, 내편 아니면 저쪽편. 과거에는 교회에 소속되는 근거가 되는 신앙이 비교적 쉽게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즉 세례 받고 교회에 반대하지 않으면 교회에 속한 사람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사람이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고 분명히 고백하지 않는 한 교회에의 소속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사실 신학적으로 분명한 교회의 경계선을 긋기란 쉽지 않고 매우 유동적인 되어 버렸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볼때 교회의 범위는 결코 정확하게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이 그렇거니와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교회에 대해 긍정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교회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겠다. 사실 어느 누구라도 최종적인 의미에서 적으로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이웃사랑의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면, 교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로 바라보는 태도야말로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당연히 요청되는 계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런 선의의 사람들이야말로 아오스딩성인 말마따나 마음으로 교회에 속한 사람들인 것이고 몸으로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구원에 가까운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본 사실을 정직하게 공감한다면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오늘날 분명한 것은 불가지론적이고도 무신론적인 사회에서 교회는 신앙에서만이 그 유일한 존재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인 요소가 오늘날 더이상 신앙을 근본적으로 지탱해 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의 미래는 오늘날 신앙의 원천 이라는 깊은 뿌리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미래 교회를 다음 세 가지의 범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