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지오와 펠라지아니즘: 스토이즘과 그리스도교-뻴라지오적 관점의 죄와 은총

 

8.2 뻴라지오적 관점의 죄와 은총


이러한 본보기는 펠라지오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 충고의 종류들을 조명해준다. 펠라지오는 사실상 영적 지도자로 요청받았다. 그는 그의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20년간 작업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짧은 경탄의 순간이 지난 다음 그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과도함을 발견해야 했다. 그는 마치 스토아 학파의 학자처럼 죄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었다. 모든 죄는 그의 본성에 의해 치명적인 것이다. Diospolis의 시노드에서 동방 교부들은 모든 죄인들은 영원한 벌에서 처벌된다는 것을 듣고 경악하였다. 연옥의 이론은 그 때까지만해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 주교들은 자비의 학파에 속한 자들이었으리라 본다. 그들은 영원한 단죄란 오직 배교자와 불충한자들에게 제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펠라지오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한번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더욱 합리적이고 더욱 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죽음을 가져다 주는 죄와 가벼운 상처를 주는 죄 사이에 구별이 있으며 그 때문에 날마다 하느님의 용서를 청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주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한다‘. 심각한 결점들은 그를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단절시킨다. 혹은 그들은 교회를 절대적으로 무죄함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한다. 비록 그것이 거룩하고 성화된 것일지라도. 교회가 자신의 죄스러운 구성원들을 배려하기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은 의로운 자의 기도를 넘어선다.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소서”.  이러한 생각은 죄없는 교회라는 도나티스타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펠라지오에게 낯선 것이다. 그러나 펠라지오의 입장은 모순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더 이상 교회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그가 위선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와같이 펠라지아니즘의 실제적 결과들은 파괴적인 것이다. 신앙에 대한 다른 기초적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이 행하고 있는 바는 동일하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죄들의 사함”으로서의 아이들의 세례는 펠라지안 주장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세례의 필요성은 하늘 나라와 영원한 삶 사이의 불합리한 구별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


        무엇보다도 은총의 관해서 펠라지안의 이론들은 끊임없이 애매함으로 관철되어 있다. 은총이라는 이름은 본성이나 자유 의지, 윤리적 법, 그리스도의 모범이나 그의 가르침, 죄의 용서, 달리 말해서 은총 자체를 제외한 어떤 것에 주어지고 있다. 만일 이것이 유일한 어휘라면 펠라지오의 반대자들은 그 차이점을 극복하고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잇슈는 긴급하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와같이 그들의 반대적 의문으로부터 억압받는 가운데 펠라지오와 그의 추종자들은 어떤 경우 은총과 자연적 선물들을 구별하고, 오직 죄의 용서에만 은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비록 펠라지오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론을 알고 있는 잇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해도 그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균형잡힌 척도를 지키시기를 원하고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에게 공동적이다. 사악하거나 착하거나 성실하거나 불성실하거나 공통적이다”. 펠라지안들이 조명의 내적 은총들을 인식하려는 점에 도달할 때 이러한 은총들은 법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처럼 펠라지안들의 해석의 방법에서 은총은 궁극적으로 그 잇점을 가져오는 인간의 노력에 기인하게 된다. 펠라지안들이 은총이 무상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을 때 그들은 창조와 자유의 선물이 무상적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기서 제기되는 예민한 논의를 얻어낼 포인트가 없다. 펠라지아니즘은 예정을 건드리는 어떤 영역(en bloc)도 없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니즘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바, 인간이 믿게 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 펠라지아니즘은 사도 바울로의 글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언급들을 오직 애매함과 모순의 가치에서만 규정할 수 있다. 그처럼 펠라지오는 그가 은총이라는 것은 자유 의지의 훈련을 쉽게할 수 있다는 것을 허락할 때 그 체계의 벽에 구멍을 낼 뿐이다. 세미펠라지안들은 후에 더욱 더 무의미한 이론을 제기한다.


        우리는 펠라지오와 아우구스티노 사이의 논쟁이 신학적인만큼 철학적이라는 점을 거듭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유라는 것이 의지에 내재적 도움이라는 사상을 가져오지 않고서 이해할 수 있는가? 영적 창조물들은 반-신적이고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 만들어졌는가? 혹은 인간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도움을 그의 장엄한 종말을 얻기 위하여 구결하는 것이 의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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