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자유롭게 하는 은총
아우구스티노는 전통적인 자료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교의의발전과 은총 신학에 그의 특별한 공헌에 앞서서 반복하는 가치이다. 그는 신화의 이론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약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펠라지오와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종료적 체험이 그를 또 다른 주제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즉 자유롭게 하는 은총 체험 때문이다. 은총은 우리 안에 고상한 삶의 원리로서 존재한다. 신적 본성을 나누게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원초적 초라함에 대한 배려이다. 인간은 죄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총의 자유의 원리이다. 그것은 그를 그가 본성적으로 지닌 격정의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노는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도 사도 바울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빛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육의 옷을 끌어당기는” 그의 “옛 친구”에 의해 붙잡혀 뒤돌아간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무릅써야 하는 것인지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사도 바울로를 “학교와 교회의 길을 잘 알았던 훌륭한 젊은 사람들” 오리게네스, 크리소스토모, 가빠도치아 교부들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까닭에 아우구스티노는 이 주제에 대해 매우 힘들게 작업하였다. 어떻게 은총이 우리를 이끌고 우리의 영혼에 상이한 능력으로서 작용하는지 묘사하고자 힘썼다. 우리가 처음에 거절하였던 것을 원하도록 우리의 의지를 젊잖게 힘으로 이끄시는지 묘사하느라 힘을 다했다.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에 매료된다. 양에게 푸른 초원을 보여라 그러면 너는 그를 네 뒤로 따라오도록 할 수 있다. 아이에게 한줌의 열매를 부여주어라 그러면 그는 너를 따른다…. 그는 스스로 달린다. 그러나 그는 매료되어 있다. 그것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랑으로, 그의 마음의 결속으로 이끌려지고 있는 것이다… 성부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끄시는지 보아라. 그분은 우리를 힘으로서가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으로 매료되게 하신다.”
17세기에 얀세니우스는 이 자료를 이용한다. 그러나 얀세니즘의 delectatio victrix라는 이론은 단지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의 스케치적 묘사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하는 것을 한다”. 그리고 그는 의로운 사람에게 선한 행위는 어떤 점에서 자발적이거나 혹은 공본성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공동협력하는 인간의 필요성을 옹호한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영적 삶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에 있다”. 끊임없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요구하는 전쟁이다. “죽어라. 그러면 너는 살게될 것이다. 묻혀라. 그러면 너는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죄인 안에 죄로 인하여 상처입은 본성은 그 자신을 거슬러서 나누어져 있다. 의로운 자 안에 완전하게 일치된 본성은 없다. 사도 바울로조차도 마찬가지이다. ‘ipse spiritalis et carnalis’.
자유롭게 하는 은총은 그와같이 일치의 원리로 나타난다. 죄인들의 영혼 안에 상이한 성향 가운데 조화를 회복하는 원리로 나타난다. 은총과 사랑을 통하여 영혼은 다시 한번 그가 상실한 것을 일치시킨다는 것을 발견한다. 진정으로 선한 것에 대한 사랑 안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당신이 죄를 지었을 때 당신은 당신의 죄들 안에서 기쁘게 된다… 정의는 달콤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정의를 떠나서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서 liberty가 liberation의 결실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a liberation은 항상 불완전한 것이다. 하느님만이 온전히 자유롭다. 죄를 짓는 것이 그분에게는 불가능하시다. 자유는 인간이 이미 죄없음 안에서 무엇인가를 나눌 때 시작된다. “성자께서 너를 자유롭게 하면 너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이것이 성 아우구스티노가 죄인은 자유를 지니지 못한다고 외친 의미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의로움을 위해서 아직 노예생활을 배척하지 않는다. 사람이 현명하게 은총에 순종하게 하면 그는 더욱 더 자유롭게 될 것이다. “자유는 더 자유롭게 될 것이다. 마치 더 건강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더욱 건강하게 된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더욱 주체적이 되는 것처럼”. 이 마지막 개념은 아우구스티노의 다른 주제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다. 만일 은총이 죄의 노예를 자유롭게 하면 그것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만일 노예가 되면”. 자기 거부는 사랑에 있어서 성장의 법이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입은 본성은 이러한 사랑인 새로운 상처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다. ‘이러한 상처로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진정하게 건강한 자가 될 수 없다.’ 은총과 자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은 그와같이 역동적이다. 마치 그의 사랑과 의화의 개념처럼. 이러한 그의 개념이 나중에 바유스와 얀세니우스에 의해서 뒤틀어진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이 대학자들은 더욱 더 고정된 개념을 지니고, 마치 그들이 은총의 신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에 얽매여 있었다. 그 모든 세대는 그처럼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신화와 구원의 일부 면모와 빛을 비추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항상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의 박사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