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 은총과 자유-바울로의 영향: 인간의 의존성

 

7.4. 바울로의 영향: 인간의 의존성


        그와같이 아우구스티노는 플로티노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도 바울로에게도 의존하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의존성은 이미 성서에 대한 라틴 교부들의 해설 안에서 강조되었다. 예컨대 힐라리오, 암브로시오, 예로니모가 그렇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 다시 설명된 번역 Enneads의 수사학자요 번역자인 아프리카의 Marius Vicotrinus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는 인격적인 면모를 잘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이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상을 잘 형식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사상은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그렇게 진전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초기 신학이 심리적 언어로 그 진술을 번역하려고 노력하였을 때, 그것은 세미펠라지아니즘을 반향하는 설명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구원을 향한 첫발걸음과 회개의 시작은 인간에 남겨진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준 첫 번째 사상가이다. 그와같이 사도 바울로를 해설하는데서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믿는 것이나 의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믿거나 의지하는 그것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다. 성령을 통하여 선한 행위의 힘에 대하여 믿거나 의지를 보이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다”. 그 때까지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보낸 편진 379에서 그는 사도 바울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자료 연구에 고심한 후 그날 승리한 것은 은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설교나 좋은 의지가 우리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내적 부르심을 필요로 한다. “부름받은 우리 존재는 우리에게 그 공을 돌릴 수 없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부르심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훗날 얀세니스트들은 그가 412년경까지 세미펠라지아니즘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증언은 이율배반적이다. 그러나 여기엔 역사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는 적어도 그 시기까지 아우구스티노가 의지의 내용으로부터 내적 부르심을 분리하는 것을 보존하려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비록 아우구스티노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사이의 심리학적 수준에서 구별을 원했다 하더라도 인간이 행한 모든 선을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돌리려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의지와 믿음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하느님은 외적 설득을 통하여 행위하신다. 설교로 우리의 영혼을 외적으로 작용하거나…. 혹은 우리의 영혼을 내적으로 감동시키거나 하신다. 그의 마음에 다가온 것을 넘어서는 힘을 그 누구도 지니지 않는다. 그 만족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은 그 의지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인간 안에 효과를 가져오신다. 비록 그 의지가 믿으려 한다해도. 그분의 자비는 항상 우리를 앞선다. 어떻든 하느님의 부르심에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거나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의지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몰리나 신학의 요지를 발견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그러한 자료들은 의화의 과정 안에서 인간적 자유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애썼던 신학자들에게 호의적이다. 일치주의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의 힘있는 은총을 우리의 기질이나 우리의 심리적 반응에 적용함으로써 내적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아우구스티노를 이용하고 있다. 어떻든 아우구스티노의 후기 작품들은 이러한 해석에 전혀 호의적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공인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사상 안에서 그 태도의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는 단순하게 우리의 의지 깊은 곳에 하느님의 행위의 신비를 단순하게 표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승리적인 은총을 강조하는 순간이 있었으며 또 다른 순간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두가지 요소는 인간의 인식 안에서 서로 연결될 수 없었다 할지라도. 혹은 아마도 아우구스티노는 한번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내재화하였으며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세미펠라지아니즘의 진전을 거부하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통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은총이 어떻게 우리에게 매력적인가를 만족스럽게 보여주려 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잘 해석할 것일가?


        지금으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목적은 아우구스티노의 작품 안에서 미구에 논의가 되는 신학적 문제의 씨앗들을 어떻게 보느냐는 데 있다. 첫째로 그렇게 고정되지 않은 문제들은 해결되어야 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은총의 신학이 펠라지오와 그의 학파의 자연주의성향을 거슬러서 보다 분명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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